단번에

히브리서 7:26-28 단번에 레위기 9:7-11에 보면,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그 속죄제 희생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단 위에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고 그 고기와 가죽은 진 밖에서 불사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먼저 드리

악취와 향기

본문 : 고린도후서 2 : 12 - 16 제목: 향기와 악취 아무 것도 없다면 향기나 악취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사도는 뭔가 고요한 세상에다 던집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에 대해서 냉정한 중성적 입장을 취할 것같은 세상은 그 숨겨놓은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향기 아니면 악취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제대로 복음을 전달하지 않은 겁니다. 누가복음 2:34-3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

성령이라는 보배

고린도후서 4:7-9 성령이라는 보배 자아 자체가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겁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다치거나 그 무게를 줄이게 되면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무서워하며 떱니다. 평생을 짊어지고 가는 짐은 실은 ‘자아’라는 짐입니다. 날로 그것을 키워 나가기 위해 오늘날 열심히 삶을 살고자 합니다. 갈수록 버리기는 아깝고 자진해서 버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이런 짐을 다 벗어야 합니다. 여기에 성령님께서 투입하십니다. ‘능력이 심 큰 것’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동원해서라도 자기 백성들이 천국 입성에 하자 없게 하십니다. 철

예수님의 자랑거리

고린도후서 1:12-14 예수님의 자랑거리 지정된 날이 있습니다. 역사는 그 끝매듭을 향해 멈추지 않는 열차처럼 질주합니다. 그 지정된 나를 ‘주의 날’, 곧 ‘예수의 날’이라고 합니다. 사람 대 사람의 평가는 소용없습니다. ‘주님의 날’의 평가 앞에서 살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실체는 ‘주님의 날’에 발각될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소망이란 단순히 본인이 달랑 건짐 받는 것을 두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날’ 기준이 실제적 세상 운용체제였음이 공개되는 데 있습니다. “거 봐, 내 말 맞잖아!”라고 자랑하고 싶은 날이 바로 ‘주의 날’입니다. 성도와 성도

담의 철폐

에베소서 2:13-14 담의 철폐 인간 대 인간이 다시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이 지금도 예수님께서 활발하게 일하고 계심이 증거하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상호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가 특이한 이유로 인하여 하나됨을 시도하시는데 이 특이한 사유가 바로 예수님의 피흘리심입니다. 사람이 피를 흘린다는 것은 피부조직 안에 혈관을 통해서 흐르는 피가 피부를 뚫고 신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예수님이라는 개인에게 있어 이러한 피흘림이 어떻게 인류사를 관통하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에는 논리적으로 엄청나게 비약되어야 할 절차가 요구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

기도의 열매

고린도전서 14:14-17 기도의 열매 왜 방언이 사도들로부터 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왜 이런 점검을 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기이한 현상에만 집착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내용에 중점을 둡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미 인간들이 짐작하고 있거나 알고 있던 내용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않고 임의로 다루려고 듭니다. 만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계시 내용에 순종 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육의 열매’가 되어 버립니다. 익히 아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기 일

히브리서 4:7-11 하나님의 자기 일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일은 일단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범주 내에서 따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삶과 죽음 모두를 아우려는 일을 하십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 있는 커지고, 작아지고, 위대하고 보잘 것 없의 차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양으로는 변화가 있을 것 같지만 질적으로 아무런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겪었던 그 경로를 따라야만 가능합니다. 즉 자신에게 있어 ‘강퍅’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강퍅이나 교만이나 완악을 돌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

히브리서 10:10 거룩함 ‘거룩함’이란 특정 공간에 함께 있어 공동으로 누리게 되는 성질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개인적인 노력의 성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특수한 공간 속에서만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그 특별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될 게 아닌가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 공간은 불을 지닌 천사들에게 의해 단호하게 거부당하게 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천사들이 사는 공간에 참여될 수 없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은 처지입니다. 즉 인간들과 인간들의 ‘

용서

고린도후서 2:9-11 용서용서는, 용서하고자 하는 상대를 둘러싸고 상대의 자아를 억압한 그 강력한 어두운 힘을 깨트리지 아니하면 그저 이쪽에서 굴복하겠다는 의사표시가 될 뿐입니다. 즉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말은 기껏 “당신의 횡포에 제가 당할 수가 없어 이제는 당신의 위세에 항복하렵니다”는 비굴한 패배 선언일 뿐입니다. 따라서 용서를 하는 쪽은 반드시 그동안 상대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힘의 본체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즉 “당신의 모든 행위는 그동안 당신을 억압하고 있는 그 세력이 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고 구체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성소의 내부

히브리서 9:1-5 성소의 내부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기거하던 고래 뱃속과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안 죽고 살아있는 공간(삼상 30:12)으로서 하늘과 땅의 경계선으로 작용합니다. 죽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낯선 땅입니다. 물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듯이 하나님에 의해서 나뉘어진 땅과 땅의 경계입니다. (시 104:9/렘 5:22) 이 경계에 등장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자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자의 영입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십자가와 권세

골로새서 2:15 십자가와 권세요한복음 14:30에 보면,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므로서 그 여파가 세상 임금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내침을 당하는 겁니다.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펼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세상 임금이 그동안 인간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인간들이 자기 보호차원에서 그러한 권세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즉 “소중한 나만 지켜주신다면 무엇인들 시키는 대로 다 해드리겠습니다”고 어쩔

비밀

에베소서 1:9-10 비밀 비밀의 내용은 통일입니다. 즉 세상 모든 것은 이미 통일된 채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그 다음의 관심사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통일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가족 통일, 교회 통일, 국가 통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족 단일체를 추구하며, 혹은 사업체에 목숨 걸고, 혹은 교회 부흥에 사력을 다하고, 혹은 ‘나라 사랑’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목숨을 거는 영웅적인 포부를 생각합니다. 이 모든 통일의 공통점은 그 안에 ‘나’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죽음 이후’까지 통일체 속에 담기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까지 하나로 통일되어야 진정한 통일이라고

사랑에 미친자

고린도후서 5:13-14 사랑에 미친 자사람에게 있어 타인의 시선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또 없을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의 마음가짐과 공공장소에 있어서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은 자기에 대한 예의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정서를 생각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미친 사람들은 마땅히 별개의 장소에 수용되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할 줄 모르는 인간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일반 사람들의 정상적인 생활을 공포로 몰아넣는 잠재적 가해자가 됩니다. 이렇듯 ‘미친 자’란 나쁜 대상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미친 자’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자랑스럽게 씁니다. 이는

사도의 우려

고린도후서 12:19-21 사도의 우려사람이 초라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아무리 비참한 모습이라도 마음의 상처가 깊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비참하게 되면, 그들에게 해야 될 일이 일이 무시당하고 오해받을까봐 염려되기 마련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순수한 복음을 위한 기능들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무시당할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그들의 태도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다툼과 미움과 분노와 파당과 중상모략과 음모를 짜는 것과 건방떨면서 행세하기를 좋아하고 문란함이 파급되어 있는 분위기를 사도는 미리 싫어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보인다는 것

온전치 못한 레위지파

히브리서 7:11-15 온전치 못한 레위지파멜기세덱을 통해서 주어지는 언약이 그 완전함을 지상에 펼치기 위해 ‘전쟁’이라는 방식을 사용한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전쟁을 벌리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언약 자손의 존속을 위한 전쟁으로 간주하십니다. 즉 하늘나라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거룩한 가족을 생성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겁니다. 이 전쟁에서 나타난 원칙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주도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바깥의 이방민족을 상대로 한 전쟁의 실체가 실은 이스라엘 내부를 조정하기 위한 전쟁이 됩니다. 율법은 어

동역자 디도

고린도후서 8:16-24 동역자 디도 사도 바울이 인정하는 전도자 디도는 전 3차에 걸친 세계 전도 여행을 하던 바울과 동행하여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초대 교회들이 겪고 있었던 바 교회 조직의 미비 및 이단의 공격 등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레데(Crete) 교회를 비롯하여 안디옥,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 하였습니다. 그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고린도 교회에 몇 차례나 파송될 만큼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헌신적이었습니다. 특히 고린도후서 7:5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

사도에 대한 오해

고린도후서 11:16-21 사도에 대한 오해오해를 거쳐서 이해로 나아갑니다. 오해 없이 바로 이해했다고 한다면 자신의 선입견을 돌아봐야 합니다. 너무 ‘나’ 위주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도의 등장은 사람들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메시야와 인간은 원수지간이었다”고 말입니다. 사도는 본인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할 도리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린도교인들과 협상하려고 편지하면서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자신은 고린도교인들과 그 어떤 협상이나 의논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일반 사회에서 만약에 이런 태도로 밀어붙인다면 ‘사회성 결여’라고 낙인찍힐

우리는 죽었다

골로새서 3:2-3 우리는 죽었다산 사람의 입장에서 ‘죽은 자’와 ‘산 자’를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이런 장담이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 티를 내는 판정입니다. 이미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감각이 나름대로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의 티를 내고 있는 바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안목을 인간들은 못 받아들이고 있다는 겁니다. 한사코 자신을 ‘안 죽은 자’라고 우깁니다. 인간들은 말합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나를 왜 자꾸 죽었다고 규정하느냐?”라고 하면서 불평이 심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 있는 증거를

새언약

히브리서 8:12-13 새 언약하나를 없애고 전혀 다른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는 ‘해산하는 고통’이 따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 16:20-21) 옛 언약의 대상은 인간들이지만 새 언약의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 없어지려 합니다. 사라지려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라짐과 그리고 나타남이 다 성사됩니다. 창세기 3

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1:7-8 피로 말미암아 ‘피'가 역사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역사를 절단 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역사에 의존합니다. 이는 곧 과거 기억 속에서 꿈틀거리는 인생을 산다는 겁니다. 자기 기억을 벗어날 위인이 없듯이 역사 의식에서 잊고 살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즉 내가 있으니 시간도 있고 공간도 느낍니다. 만약에 내가 죽는다는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도 같이 나에게는 의미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빛낼 수 있어야 좋은 세상입니다. 좋은 집에 이사했지만 그날로부터 계속 가족끼리 싸우게 된다면 좋은 집이 무의미해지는 것과 같

The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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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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