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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태파악
히브리서 2:1-3 사태 파악 ‘확증’이란 일이 이미 마감되었다는 뜻입니다. 새삼스레 손 댈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 4:37-37) 이는 곧 성도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세상 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타인이 성도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뜻과 같습니다. 구원의 상태는 바로 성도를 통해서 지상에 이런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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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14 구원을 이루라 ‘구원’이란 곧 ‘구출’을 의미합니다. 구출에는 필히 목표되는 방향이 있습니다. 대중없이 아무렇게나 모든 방향으로 내닫는 것이 아닙니다. 정해진 방향으로 가다보면 그것이 곧 ‘길’이 됩니다. 이 구원의 길을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범을 보이시기도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주님만이 아시는 길이기에 인간들 쪽으로 그 길을 찾아갈 수는 없습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갈 바를 알지 못했다’와 같습니다.(히 11:8) 그리고 어릴 때 꿈을 꾸게 된 요셉이 본인이 원치 않는 쪽으로 인생이 이끌리어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방향으로 치닫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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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에게 하는 교훈
디도서 2:9-10 종에게 하는 교훈 옛날에는 허드레한 일은 노예가 담당이었습니다. 주인 입장에서는 본인의 사업에 매진해야 하고 그 책임을 집니다. 따라서 주인은 종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요구하게 됩니다. ‘주인의 마음이 흡족하다’라는 말은 종이 자신의 처지와 입장의 한계를 명확하게 잘 알고 있는 경우를 뜻합니다. 즉 종은 사적인 이익이나 소원 달성을 위해 주인을 만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나의 것’을 늘 반복해서 삭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종 자체가 자기에게 주인이 되어, 정작 주인의 지시나 명령이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달리 말해서, 종의 명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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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
고린도전서 15:45-49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첫 째’는 ‘둘 째’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과 대비됩니다. 즉 ‘마지막’을 설명하기 위해 첫 발걸음을 뗐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을 제외 하고는 모든 전의 것들이 다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위치에 있던지 ‘마지막’을 그리워해야 할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이 없다면 첫 번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의미는 마지막에서 투입되어야 비로소 생겨납니다. 마지막과의 연결고리가 모든 첫 번째의 의미를 살려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있어 자기 자신을 시작점으로 하고 자기 자신을 마지막점으로 간주하면서 자체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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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하나
디모데전서 1:17 홀로 하나 인간들이 내심 추진하는 모든 일들은 각자 나름대로 ‘홀로 하나’을 추구합니다. 이 홀로 하나됨은 자신을 ‘신의 가치를 맛보려는 본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최고 상태를 향하여 인간들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염두에 둡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도를 일체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홀로 하나’는 오직 주님께만 허용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주님께서 접수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홀로 하나’의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지속가능한 추구를 잘라버리는 식으로 활동하십니다. ‘주님을 만났다’는 의미는‘나의 홀로 서기’가 이제는 좌절되어 버렸다는 바가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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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주의 기준
고린도전서 15:21-24 저주의 기준 기준이 엮어져서 현실 세계가 구성됩니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기준이 작렬하는 곳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자아란 그곳을 뜯어보면 기성 사회의 기준에 혼재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요청한 기준이 아닙니다. 원치않는 기준점으로 강요당한 겁니다. 인간이란 본인이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남이 요구한 것으로 그대로 수용했을 뿐이기에 실은 타인의 욕망이 만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에 적합한 기준을 새로이 정립하고 싶어합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양심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롭게 작성하려는 기준도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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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하다는 자
갈라디아서 2:6-10 유명하다 는 자 인간에게 있어 ‘자비’란 어울리지 않는 혜택입니다. 사람이 자비를 갖는 것은 사치다. 주어도 감당 못합니다. 그 가치를 모릅니다. 인간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자비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여깁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존감입니다. “누구든지 날 건드리지 마라. 신이라 할지라도!”입니다. 꽃으로도 자신을 때리지 말라고 항의합니다. 자존심은 곧 최고 존엄감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자신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출생하고부터 이 성격이 외부로 노골화되기까지 계속 키워집니다.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듯이 작은 악마가 큰 악마가 되는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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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의 말씀
디모데후서 2:14-15 진리의 말씀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은 자기에 대한 신변보호용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자꾸만 주변의 타인들의 도움을 찾고자 두리번거리는 이유는 이 신변보호에 차질이 있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법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해서 자기를 보호받고 싶은 겁니다. 이런 노력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일어납니다. 자연적으로 말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다툼에서 감히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까지 거론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정당함으로 알리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는 사람의 의로움이나 선함이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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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교제
빌레몬서 1:4-7 믿음의 교제갈라디아서 5:6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나옵니다. 믿음의 내용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사랑에 대해서 사도는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를 쉽게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즉 타인으로부터 도움받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기 위해 만나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 말씀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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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골로새서 2:16-17 그림자 ‘장래 일의 그림자’가 되려면 ‘장래 일’이미 확정나야 합니다. 미리 정해놓은 일이 시간과 역사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전개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그림자임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입장에서 아무 것도 확정난 것이 없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확정적인 것이 자신들에게 그냥 적용될 뿐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인간에게서 가장 신적인 기능, 절대 포기 못할 기능, 즉 절대적 자율권의 발휘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이 된다는 지경이 너무나 참혹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동안 ‘나였다’는 사실마저 의심해야 될 판입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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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s와 No의 차이
고린도후서 1:18-19 No와 와 Yes의 차이모든 사람들이 “O.K!”라고 외쳤다고 해서 실제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들의 예(yes)는 수상하고 의심해봐야 합니다. 인간들의 모든 yes는 실은 주님이 벌리신 일 전부에 대해서 No!라고 대들기 위한 바탕으로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받아들일 것만 받아들이는 것은 태생으로 장착된 성질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은 인간들이 단호하게 No!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끊어내어 버린 그 노선을 주워서 세상에 오시고 그 안에 일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에 인간은 협조가 불가합니다. 협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 효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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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들의 처지
히브리서 2:14-16 형제들의 처지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을 가지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가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압제해 오고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악마의 공격은 이미 인간 마음 깊숙한 곳까지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무서움’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실패를 두려움입니다. 무엇에 대한 실패입니까? 인간은 악마로부터 길들여진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살아남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본인이 소지하고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지식만 품고 살아 있으면 마치 ‘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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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세대
에베소서 2:7 여러 세대‘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작점과 마감점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인류라는 것도, 이 세상이라는 것도 모두 사라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시간’을 한시적으로 보는 겁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이라고 합니다. 본질을 실어나르는 환경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 본질을 오늘 본문에서 ‘자비’라고 말합니다. 자비란 어떤 분이 어떤 대상자를 향하여 무상으로 제공되어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제공된 행위로 말미암아 영원히 이별하지 않고 같이 하게 되는 상황을 이어가게 됩니다. 즉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 살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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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약속
디모데후서 1:1-2 생명의 약속사랑은 둘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말들임니다. 즉 사랑받은 자와 사랑주는 자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주장이지요. 사랑받은 자가 사랑 주는 사랑의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줄 때 비로소 사랑은 구현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한 분이 일방적으로 퍼부어주시고 이 사랑을 사랑 위인은 이 인간 세상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24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생명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두신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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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장로
디모데전서 5:17-25 바른 장로 초대교회에 장로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약 이스라엘에게서 조직의 어른으로서 자체적으로 질서를 담당하는 자들입니다. 질서란 율법 질서체를 말합니다. 율법에 합당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탐구하고 검색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이들의 관심사는 유다나라를 어떻게 율법으로 지탱해내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율법대로 바르게 살면 유다나라도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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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받은 상賞
히브리서 11:6-7 노아가 받은 상(賞)믿음에는 상(賞)이 따라옵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결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시작한 일로 인해 생긴 상입니다. 마태복음 10:41-42에 보면,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있어 상(賞)이란 ‘내가 한 것에 대한 내게 주어지는 상(賞)’입니다. 그런데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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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의 근심
고린도후서 2:1-4 사도의 근심 우리는 근심을 통해서 예수님의 흔적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다녀가신 예수님 고충과 본심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세상 상황이 뭔가 정상이 아니다 는 것을 감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비극을 통해서 그 전부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짐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에 각자 본인들이 관여되어 있음도 살펴야 합니다. 누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보고 근심한다면 그 쪽의 기준과 안목으로 자신을 다시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근심’을 통해서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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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적같이 오심
데살로니가전서 5:1-4 도적같이 오심왜 주님은 도적같이 오셔야 할까요? 이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악마가 무슨 생각을 해야하는지를 알고서 지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내가 나를 보전하는 것이 그동안 나의 주업무로 여기게 한 것이 악마의 생각이었습니다. 악마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먹혀들어가는 가르침은 악마가 유일합니다. 출생 자체가 이미 악마에게 길들여진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오실 때, ‘도적’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은 인간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신분으로서 지냈던 그 취지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인간들의 기대감에 부응하는 방식을 하나님쪽에서 거절하고 있다는 뜻이 분명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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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예수
고린도후서 11:4-6 다른 예수 이름이 같다면 서로 같은 대상을 두고 지칭한다고 쉽게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특별히 인간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권세가 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나타난 대상물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름을 짓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부여받은 대상에 대해서 지배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지배와 통제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시작이 됩니다. 아담이 각종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에 대한 지배권이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인간을 향하여 이름을 지어준 분이 누구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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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부
디모데전서 5:3-16 과부 출애굽기 22:22에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과부는 이스라엘 내에서 골칫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과부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생존하려고 기를 쓰는 대표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입니다.‘남편’이라는 보호자가 상실된 상태에서 그 남편의 빈 자리까지 마저 채우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과부는 타인들에게 짐이 되고 피해를 주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나오는 말씀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그 이유는 12절에 나옵니다.“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즉 코 앞에 생존에 급급한 자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