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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하신 예수님
고린도후서 13:3-4 약하신 예수님이 세상에 강해진다는 것은 이 세상이 폭을 더 넓히는 데는 도움이 될지언정 이 세상을 나가는데는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힘의 넓이만큼 늘어지는 공간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나가는 경우는 이 세상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조성하는 성질과 전혀 다른 성질일 경우뿐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을 그 대상을 붙잡거나 붙잡아 놓을 가치가 전혀 없이 보여야 합니다. 달라야 합니다. 위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의 초반에 힘으로 위대해지려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창세기 6:4에 보면,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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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법 성취
갈라디아서 6:2-6 그리스도의 법 성취‘그리스도’라는 단어 뒤에 ‘법’을 붙이는 것이 어색해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이 지킬 모든 법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법이 곧 율법 완성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모든 율법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신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표현 대시 ‘그리스도 법’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그리스도 법’이라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 갖는다는 점이 강조되지 않고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점이 더욱 강조됩니다. 즉 너희들 사이에 너희 자신들의 솜씨나 행함이나 자랑거리를 집어넣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도들 사이를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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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움과 빛
고린도후서 4:6 어두움과 빛인간의 혈통은 저주를 실어 나르는 객차 같은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고생 끝의 죽음’입니다. 이 세상은 저주를 알려주는 것들로 차고 넘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고상한 도덕으로 무장해도 입에 집어넣는 곡물들은 야성을 바탕으로 해서 얻어진 겁니다. 즉 인간의 육체 자체가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전쟁이 이를 말해줍니다. 자원의 결핍, 예고없이 찾아오는 기근과 가뭄과 홍수 및 자연재해는 인간이 생존하는데 여유가 없음을 말해줍니다. 애굽 나라에서의 요셉의 위상은 풍년 때가 아니라 7년 대가뭄 때에 빛이 났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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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드신 피조물
에베소서 2:10 만드신 피조물‘피조물’ 앞에 구태여 ‘만드신’ 말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두 종류의 ‘피조물’이 출현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에는 관련되는 대상들로 상호 연결됩니다. 홀로 존재하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 창조될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형편에서 ‘홀로 산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드신 분’을 쳐다보면서 ‘만들어진 자’는 살아야 될 이유가 나옵니다. 인간들에게 문제는 자신이 살 이유는 자신이 고른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자들만 머리에 집어넣고 세상을 살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만 머리에 집어넣고 오직 자식만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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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
고린도후서 1:1-2 평강 ‘은혜와 평강’의 수여자는 오로지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만 생긴 자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기대하는 ‘평화로운 삶’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평은 땅에 사는 입장에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입장이 상호 다릅니다. ‘누구를 위한 순조로움’인지를 새삼 확인해야 봐야 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에게는 이 물음을 성립하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히(?) 복음이 전달되면서 분쟁이 일어나게 된 환경입니다. 그냥 곱게 시대에 순응해서 살면 고요한 삶이 보장받는데,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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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복음
히브리서 4:4-8 오늘날의 복음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그리고 훗날이나 인간의 마음은 모두 동일합니다.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에 대해서 범죄했다면 이미 모든 인간들도 하나님에 대한 범죄 중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 나무 과실을 따먹을 잠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아시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미리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중에 인간과 무관한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취지입니다. 당연히 제 7일 안식일 법도 인간의 범죄와 관련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법에 모든 인간이 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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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자녀
에베소서 5:8 빛의 자녀 빛의 자녀의 특징은 스스로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분에 맡기는 삶을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量(양)에 입각해서 인생을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質(질)에 입각해서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많은 양의 포도주를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훌륭한 포도주를 자랑할 것인가를 따져 보면 알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質(질)이란 하나님과의 관련성입니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대단하고 우수한 존재인가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증거하는 삶이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시장 가판대에서 물건을 고를 때에도, 나 좋아라고 고를 것인가 아니면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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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제
빌립보서 2:17-18 관제 ‘관제’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사분 일을 예비할 것이요”(민 15:5) 제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칠 것은 다 바치는 심정으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이 사도 바울에게 기쁘다는 겁니다. 이 자신의 기쁨에 함께 하자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과 일체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사 정신입니다. 제사 제물이나 받으시는 하나님이나 드리는 백성이나 모두 일체감을 형성하는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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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것
히브리서 10:8-9 둘째 것 인간이 살아 있는 겁니까 말씀이 살아 있는 겁니까? 우선 ‘인간이 살아 있다’로부터 시작해 봅시다. 인간이 살아 있다면 이 살아 있는 인간을 향하여 들어붙는 것이 필히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첫째 것, 곧 율법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와 법도와 예물과 제사와 번제함과 속죄제입니다. 만약에 인간쪽에서 이 요구를 일방적으로 물리치고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문제는 인간쪽에서 율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둘째 것이 첫째 것을 거부하므로서 첫째 것(=율법)과 결속되어 있는 인간 자체를 하나님께서 거부할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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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로 죽은 자
에베소서 2:1 죄로 죽은 자 우리들의 인생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포기가 되어야 합니다. 독사가 이슬을 먹고 독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모든 뱀을 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독사답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주신 은혜를 입고서 허물과 죄를 생산해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날마다 자기 가치를 포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죽었다’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죄가 허물이 단순히 인간에게 붙어있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그 자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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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는 십자가
갈라디아서 3:1 보이는 십자가복음을 무산시키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그림 위에 철저하게 먹물을 뒤집어 씌우면 먹물 밑에 뭐가 있는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만 보는 세상입니다. 밑에 뭐가 있든지 상관없이 겉에 드러난 것으로 판단내리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조립하여 세상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디까지나 과거지사입니다. 흘러간 지난날의 이슈일 뿐입니다. 지금은 십자가 사건 그 이후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 시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마저 십자가는 한물갔고 이제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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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반포자
디모데후서 1:11-14 복음의 반포자불안하고 두려운 세상, 조그만 틈만 보여도 남들은 나를 뜯어먹으려고 하기에 본인이 본인을 지키지 아니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기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복음은 힘이요 돈입니다. 즉 혼자서도 너끈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나만의 것’을 따로 갖는 것을 사람들은 ‘기쁜 소식’이라고 불러줍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기쁜 소식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쁜 소식은 바로 기존의 ‘자기를 지키는 삶 자체’가 저주를 제촉하고 저주를 빨아당기는 삶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0:7-10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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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형제들
히브리서 2: 12-13 내 형제들‘형제’라는 단어는 시편 22:21에서는 회중에서나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회중이란 주의 이름이 친히 만드신 단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형제 중에 포함시키지 않고 ‘주의 이름’을 믿는 같은 동급의 인간들끼리를 ‘형제’라고 부르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회중은 하나님 빼고 ‘형제들’ 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이 회중에 교회가 되면, 이번에서 주의 이름 되시는 예수님과 합류가 되시고 중심이 되시면서 ‘형제의 집단’이 새로 생겨납니다. 로마서 8:29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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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래의 성
히브리서 11:9-10 장래의 성집은 나를 보호하는 거처입니다. 자연의 변덕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집은 작고 자연은 크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욥기 1:19에 보면,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욥의 가정에 그동안 하나님의 보호가 깨어졌습니다.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모든 보호가 사라졌을 때, 욥은 다른 보호를 요청합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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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함의 본성
빌립보서 3:13-14 교만함의 본성지옥 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교만한 자들이다”고 평하십니다. 남들보다 더 악랄하게 살아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적으로 악한 일에 뛰어들었다고 지옥가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엉뚱한 데 정신을 팔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 같은 관심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따로 보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교만을 더욱 부추기는 곳입니다. 그것이 아무도 자신을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최고의 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는 그 지점입니다. 즉 인간의 최고의 희망은 홀로 최고 존재가 되고 싶은 겁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대로 세상이 흘러가고 움직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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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가 보고 싶다
데살로니가후서 3:6-8 성도가 보고 싶다사람은 남 없이 못삽니다. 알게 모르게 남들이 도와줘서 삽니다. 셀 수없이 많은 아쉬운 경우들이 계속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짐이 되지않고 도리어 도움이 되는 사람이 곁에 있기를 고대합니다. 사도에게는 성도가 그립습니다. 성도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떨어져 나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타인을 필요로하는 것이 이 세상 삶인데 타인이 자신을 밀어내기 전에 자진해서 그들의 곁을 떠난다는 스스로 죽음을 자처할 정도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어쩔 수 없이 홀로되는 것과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귀찮아서 외톨이 생활을 자청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도는 주님께서 성도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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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양식
데살로니가후서 3:9-12 자기 양식 인간의 육신은 이 땅에서 척박한 환경과 관련해서 버텨야합니다. 인간이라는 개체는 조상의 조건에 철저하게 매여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원래 아담의 육신에 부합되지 않는 거친 삶의 환경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비극적 운명 안에 이미 갇혀 있는 운명입니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호락호락 목숨 부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애초부터 농사하는 일부터 생계를 유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재배와 목축 위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노력만큼 소산물을 제공할 줄 알았던 땅은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기후와 날씨의 변덕들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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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입맞춤
데살로니가전서 5:25-28 거룩한 입맞춤 입맞춤이란 사회적 신분이 같음을 상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사가 담겨 있는 그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거나 위협하거나 공격하거나 상대를 이용할 뜻이 없음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입맞춤’이란 무식하거나 무모할 정도로 자기 방어선을 낮추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의 처사나 처분에 맡기는 겁니다. 상대를 만나고 난 뒤에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흔쾌히 수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입니다. 이는 인생이란, 자신이 사전에 관리하고 계산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 겁니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변수가 상호 교차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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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의 매임
빌립보서 1:12-14 사도 바울의 매임사도의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도는 지금 로마 옥에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가 만족스러우면 사도 바울의 갇힘에 대해서 별 감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몸의 컨디션+ 자기 영광으로 버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몸 안 아프고 스스로 만족스러운 평을 주변에서 듣는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누가 옥에 갇히던 말든 말이지요. 그러나 사도가 세상을 보는 평가는 다릅니다. 모든 인간이 이 ‘세상’이라는 곳에 갇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갇혀 있게 하신 이유로 알려줍니다. 그것은 “너를 평가하는 그 기준 자체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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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의 넘침
고린도후서 7:2-4 기쁨의 넘침 기쁨이란 평온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생겨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쁨을 내다보면서 환란이 일어 난다’는 원칙이 수립됩니다. 이는 ‘환란’ 그 자체만으로 낙담하거나 절망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평소의 마음 같으면 아예 환란이 없이 줄곧 기쁨과 기쁨만 연속되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즐거움에 기뻐할 수는 있지만 얼마 안가서 처음의 기쁨이 시들해지고 식상해져버립니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외부에 의해서 수시로 감정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즐겁고 즐거울거리만 찾으면서 하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