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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
에베소서 2:11-12 이방인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을 ‘밖에 있는 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기준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안에 있다’는 자들의 자부심이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에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준이기에 사람을 함부로(?) 둘로 나눈다는 겁니까? 셋으로 나누는 것도 아니요 넷으로 나누는 기준도 아닙니다. 단지 둘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여기서 ‘안에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결코 훌륭하거나 대단한 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도리어 ‘안에 있다’고 자부하므로서 그들을 안에 두게 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소홀이하고 무관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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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하는 인성
갈라디아서 4:12-15 변하는 인성사람은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본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변해가는 그 사람이 ‘변하는 인식’을 가지고 변하지 않으려는 찾으려는 것은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움직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면을 신앙세계 속에서도 찾아냅니다. ‘복음을 사랑합니다. 사도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도 눈이라도 빼내어 줄 것 같은 자들이 어느 새 사도를 멀리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 사도의 소식이 자신들에게 기쁨을 추가적으로 주지 못한다는 느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보기에 그들은, 변함없는 복음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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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를 먹고 사는 자
고린도전서 11:27-29 죄를 먹고 사는 자죄란 하나님께 대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신지 명확하지 않는 상태에서 과연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호응하는 행위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개개인마다 일방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자를 사냥해서 사형에 처하는 것이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 되는 일인지 알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같은 편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죄인 중의 괴수’가 하는 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 변화를 통해서 죄에 대한 인식도 덩달아 변하게 마련입니다. 즉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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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에 참여자
에베소서 3:4-6 약속에 참여자 현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죄의식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은 신을 요청하게 되는데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신에게 처벌과 심판을 받기 전에 미리 손 써 놓으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의 비밀’이 빠져 있는 이방민족들의 신의 특징입니다. 비록 현대에 와서 종교제도 속에 정형화된 신은 안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 내부에 늘 자신의 생각도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양심에 대해서 는 없는 것으로 처리할 방안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신 관념에 눌러 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은 놀랍게도 신이 만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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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몸
에베소서 4:4 하나의 몸 몸이란 ‘없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없었던 몸이 새로 생겨나오고 오늘날도 쉴새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새내기들이 지구상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땅의 선조나 선배들이 살았던 그 길을 대략 그대로 밟아나갑니다. 그리고 다시 ‘없음’으로 되돌아갑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인간의 몸’. 도대체 왜 인간의 몸은 현 상태로 영원히 불멸이 되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몸이 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연관 지어서 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미리 결과를 갖고 말씀드려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을 구현하기 위해 먼저 피조물인 인간이 몸을 지니고 이 땅에 나타난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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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로 말씀하심
히브리서 1:1-2 아들로 말씀하심구약 이스라엘이 폭력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폭력성입니다. 이 폭력이 터지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사금처럼 발견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따라서 위로부터 쏟아지는 저주의 우박을 다 맞아야 합니다. 후려치는 심판의 채찍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이 폭력성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 폭력성은 가짜 하나님상, 곧 우상을 부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받아들이는 신은 오직 우상 밖에 없습니다. 우상 이외에는 사람들은 하나님 아니라고 믿는 이유는 배후에 마귀가 인간의 정신을 그런 식으로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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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19-22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성령’, 그리고 ‘예언’, 특히 ‘악’의 개념은 필히 이 십자가 사건, 곧 ‘하나님 살해사건’과 연관되어 규명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게 되면 필히 잠잠했던 국가 권력들이 일어나고 핍박을 합니다. 국가권력이란 인간의 뜻의 극대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뜻이 하늘을 향해 한 곳에 집결한 것이 국가의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모아놓은 힘을 집대성하고 숭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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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를 기억지 않음
히브리서 10:15-18 죄를 기억지 않음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자기 죄를 기억하는 것조차 문제 삼으십니다. 쉽게 말해서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악이라고 겁니다.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한다고 해서 악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악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회개를 하는 것은 인간이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인간이 하겠다고 나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호응할 하등의 책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오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의 권한은 어디까지 우리 주님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일체 거래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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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인관계
디모데전서 5:1-2 대인 관계같은 교인들 간의 관계에 국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루시면서 옛날 이스라엘을 대하듯이 하십니다. 개개인은 타인들과 각종 관련성이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관계성으로 인하여 교인은 ‘잊어버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즉 주님을 모르기 전에 알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벗어나면서 애굽에서 알던 자들을 집단적으로 다 잊어버려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과 알던 사람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죽기 전에는 자신의 기억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잠재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도 우연히 튀어나와서 전에 관계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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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취하지 말라
에베소서 5:18-19 술 취하지 말라술은 악마적 요소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잠언 20:1에,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으며, 이사야 5:11에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고 되어 있습니다. 술의 문제점은, ‘자기가 아닌 자기’로 행세하고 싶을 때 동원되는 겁니다. 허세를 부리든 아니면 자신의 비참함을 애써 감추고 싶든 어쨌든 자신의 수치를 애써 감추고 싶은 겁니다. 좋을 때는 좋다고 술을 먹는데 이는 자신을 대단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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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언약 작용
고린도후서 3:4-6 새 언약 작용사람을 죽이는 문장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심 자체가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보려는 시도는 항상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사무엘상 6:19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섬긴다는 것은 늘 인간들의 ‘자기 죽음’을 전제로 해서 성립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멀쩡하게 계속 생존할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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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붙는 은사
디모데후서 1:6-8 불붙은 은사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 자신의 일입니다. 여기에 인간을 집어넣고 돌리십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성도는 쉴새없이 걱정과 번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즉 “이 일을 내가 책임져야 하나 내가 제대로 해서 하나님께 바쳐야 될 일인가? 만약에 일을 제대로 못하게 되면 그로 인해 내가 지옥 가지는 않을까?”라는 염려 말입니다. 사람은 본인이 계획을 세우고, 그 세워놓은 목적이 본인이 달성할 때, 인생 제대로 산다고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거론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벌리기 마련입니다. 그래놓고서는“제발 제가 하나님을 위하여 벌려놓은 일에 좀 도와주세요!”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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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망한 것
에베소서 4:17-20 허망한 것사람의 평가하면서 사도는 ‘허망한 마음으로서 이방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허망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평할 때만 사귀어보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닐까요? 사도의 평은 곧 주님의 평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을 만들면서 ‘허망한 마음’의 소지자로 만드신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인간들만큼은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를 알지 못합니다. 특정 집단에 대해서 ‘허망하다’는 것은 곧 ‘허망하지 않는 집단’이 따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전에서는 허망함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 허망함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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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를 위하여
빌립보서 1:22-24 성도를 위하여개인의 구원욕구의 문제점은 본인들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항상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만을 고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희생물’이 되는 예수님의 사랑의 취지가 담겨있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의 세상살기는 창세기 3장에 의해서 고생이며 그리고 그 끝은 비참한 죽음으로 마감됩니다. 개인적인 야심으로 평생을 산다면 살아도 허무하고 죽어도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본인들의 고생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타인에게 편리와 유익과 도움이 되도록 조치하십니다. 비록 본인들은 그 감추어진 숱한 경로에 대해서 알지를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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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와 사랑
골로새서 3:13-14 용서와 사랑 범죄자가 있어야 용서가 있고, 범죄는 피해자가 발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만이 용서와 사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들은 ‘있음’과 ‘변함’에 대해서 관심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죄’와 거기에 상응한‘처벌’입니다. 이 ‘처벌하심’이 ‘의(義)’입니다. 마치 소풍 가는 아동들 속에 서 그들로 인해 상처받을 아동을 섞어 넣어서 결국에는 그 아동이 피해 보는 식으로 소풍을 마감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인생의 즐거움을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소풍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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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의 수건
고린도후서 3:12-18 모세의 수건‘가린다는 것’은 마주한 대상체 앞에 자신의 참된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 백성들에게 있어 모세는 하나님의 대변자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시내산 밑에서 모세가 나타나지를 기다렸던 백성들은 나름대로 ‘신앙인’으로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엉터리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영광이었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자신만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얼마나 추한 지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모세가 대비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 모세는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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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보다 못한 것
히브리서 2:5-9 천사보다 못한 것사람과 인자(人子)가 다릅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사람다운 제대로 된 사람의 원형을 말합니다. 이로서 인자(人子)는 기존의 사람과 차별되는 새롭게 등장한 사람입니다. 이 인자(人子)는 하나님의 최종 약속의 품고 나타난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21:33-41에 보면,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포도원 상속자의 자격으로 포도원에 보내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포도원 농부들은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최종적 상황’입니다. 최종적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결코 최종적으로 구원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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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형제에 대한 태도
고린도전서 16:10-12 낯선 형제에 대한 태도 익숙해지는 관계가 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친근의 위험성은 단호히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미련덩어리가 되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기존의 끊어져야 될 자를 제대로 끊어내지 못하면 낯선 형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힘들어집니다. 교회 내에서 형제들 같의 결속은 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만 교제와 교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 안에서의 교제의 필수 조건은 바로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본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경우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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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의 운동력
히브리서 4:12-13 말씀의 운동력 보통‘살아 있다’라는 표현은 사람이나 동식물에게 사용합니다. 해와 달이나 별에게도 ‘살아 있다’는 말을 하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이 ‘살아 있다’를 확장시켜‘죽음’과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사용합니다. ‘죽어 있다’가 어떤 뜻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을 ‘죽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자연은 인간들이 뭐라든 살아 있는 게 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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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의 경험
히브리서 5:11- 14 의의 경험 모든 인간들의 출생지는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능력 안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입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단점은 인간에게 대해서 궁극적인 저주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데’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를 헛되이하지 않는 것에 모든 역량을 다 쏟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없이도 스스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챙기려고 합니다. 이는 결국 십자가 중심으로 모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의(義)의 경험을 하지 못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