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도 베드로의 정황(Context)에서 본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연구 ​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Ⅲ. 베드로와 베드로공동체의 정황 이해

 

1. 베드로의 정황이해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벧전 1:1)라고 밝혀 주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아람어 별명인 게바를 헬라어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다(참조, 마 16:18). 예수께서 붙여 주신 별명인 베드로로 더 널리 알려진(마 4:18; 8:14; 16:18; 막 3:16; 요 1:42) 시몬(막 1:16; 마 16:17; 벧후 1:1)에 대해 마태복음에는 바요나의 아들로(마 16:17),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아들로(요 1:42; 21:15-17) 기록되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베드로는 기혼자였고(마 8:14; 막 1:30; 눅 4:38; 고전 9:5), 동생 안드레와 함께 가버나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어부였다(막 1:16, 21, 29). 그의 성격은 솔직하고 열정적이고(마 14:28-33; 막 8:32; 14:29-31, 47; 요 18:10), 충동적이며(마 14:28; 16:22; 17:4; 막 8:32; 10:28; 요 13:8; 18:10), 약간 변덕스러운 데(마 26:33-35, 69-73)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름을 받은 12제자 중 으뜸이요 대변자가 되었고, 모든 사도의 목록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 행 1:13). 그는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에 예수를 부인한 적이 있고, 또 여러 번에 걸쳐 실수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교회의 세 기둥 가운데 한 사람’(갈 2:9)이라고 하였다.

한편 네로 황제에 의한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기 얼마 전,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었던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곧 붓을 들었다. 그리고 곧 닥쳐올 핍박이 어떠할지라도 그들이 소유한 복스런 믿음과 소망을 포기하는 나약함을 보이지 않도록 격려에 격려를 더하는 이 소중한 서신의 지면을 채워 나갔다.

곧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구약의 내용들과 예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새로운 의미로 부각시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하는 한편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참된 소망과 위로를 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교회의 반석인 그는 64년(혹은 67년경이라는 설도 있다)에 네로 황제의 박해로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2. 베드로공동체의 정황이해

 

베드로전서는 62-64년경에 기록이 되었다. 이때는 신앙공동체 외부와 내부적으로 베드로공동체는 박해와 고난이라는 힘겨운 싸움을 해 나가야했다.

먼저 외부적 박해로는 네로가 황제가 되어 기독인들을 심하게 박해를 할 때였다. 그러므로 미리 닥쳐올 시련과 핍박에 대하여 언급을 하면서 성도들을 준비시키려고 베드로는 수고하였고 서신을 쓰기도 하였다.

예루살렘교회는 오순절 이후 급성장했으나 미처 그 시야를 예루살렘밖으로 향하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스데반의 순교와 뒤따른 박해는 예루살렘교회에는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 확산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기독교운동이 일찍부터 시작된 듯 하다. 이후 주후 64년 네로가 로마의 대화재와 관련시켜 기독교를 박해할 때에는 로마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 이들 중 다수가 순교했던 것이다. 이시기 초대교회의 박해 원인을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오해와 편견 등으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정치적 원인이다. 로마제국은 이방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기독교가 로마 정부 당국에 의하여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되는 한 멸시와 미움을 받을지언정 고유한 민족 종교로서 합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정부가 기독교의 실상을 분별할 수 있기 전에 제국의 주요 도시에 이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라는 사실을 밝혀지고 또 급속히 제국내에 퍼지게 되자 불법 종교로 진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특별히 로마정부는 기독교 박해 전에도 몇 가지 이유를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비(非)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여 호의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편에 서지 않는 것은 악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아 기독교인과 로마제국내의 이교도와 큰 간격이 생기게 된 것이다. 또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하여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유대적 요소가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기독교교인들은 황제숭배를 단호히 거절하였는데 이는 로마정부로부터 반역 행위의 혐의를 받았으며 기독교도는 국가 모반의 음모를 꾀하는 무리들로 간주되었다.

둘째로 사회적 원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당시 영향력있는 상층 귀족 계급의 무시와 증오를 받았다. 켈수스(Celsus)는 기독교인들을 무식한 대중들로 보았는데 오리겐(Origen)은 ‘켈수스에 대항하여’(Against Celsus)라는 작품속에서 이 문제에 관하에 켈수스를 반박하지 못한 점은 실제로 초대 기독교신자들이 비천한 계층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 처음 3세기 동안 기독교 신자들의 다수가 사회 하류층 출신이었다는 증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에 등장하는 신자들은 그것을 증거한다. 당시 이교 사회에서는 소수의 특권층이 다수의 하층계급의 사람들이나 노예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귀족적인 사회구조의 지속을 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이교사원이나 극장, 오락장소 등에서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당시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관습들을 따르지 않아 미움을 받게 되었다.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고 로마인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셋째로 종교적 원인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이 섬기는 신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에 이교도의 미움을 받았다. 즉 이교도의 분노를 산 것은 그들의 제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또 세신들을 숭배함으로 이교도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부정한 점이다. 그것은 곧 전통적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전반기 박해의 자극이 되었다. 또한 로마인들의 미신적 사상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방의 신들을 노엽게 한 연고로 자신들에게 재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넷째로 오해와 편견이다.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과 오해는 그리스도인의 관습과 신앙에 대한 풍문에서 나왔다. 기독교가 퍼지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새벽이나 저녁에 자주 모임을 갖게 되자 그 모임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이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그들의 상상에서 나온 헛소문이 떠돌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하면서 새벽이나 저녁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행했던 성만찬 의식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밤중에 동굴에 모여 폭음, 폭식하고 자식을 죽여 인육을 먹고 교회지도자들의 성기를 경배하고 평화의 키스도 왜곡되어 건전한 사회 습속을 해치는 근친상간을 하는 저속한 무리들로 비추어져 일반인들의 왜곡된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이것의 박해의 명분을 찾던 로마제국에게 박해의 한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다른 한편 베드로공동체는 내부적 고난으로 힘겨웠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을 가리킨다(참조, 요 15:19). 유대사회로부터 동향인인 이방인 친구들편에서의 중상이(2:12, 15; 3:14; 4:3, 14) 법정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부당한 고소로까지 이르게 하고, 또 이것은 기독교인들을 놀라게 했다(1:6; 4:12)는 것으로 제안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어떠한 국가적 박해도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국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2:13)를 보아서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향인인 이방 친구들 편에서의 개인적 적개심이 기독교인들에 대해 그렇게 반대하는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것도 사실인 반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법정에 서게 되었고(4:16), 도덕적 과실에 대한 책임 때문에 선 것이 아니라는 것도(2:20; 4:15) 역시 분명하다. 더욱이 이러한 고소들은 지방적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전체에 대한 것이며(5:9), 따라서 최후의 심판의 시작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4:7, 17). 배교의 위험을 묵과할 수 없는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류의 고난은 곧 일어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이전에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으로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하였다(1:6; 4:12, 19). 그래서 이러한 권고와 복종에 대한 전통적 권고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없는 것이다(2:20).

 

Ⅳ.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1. 교리적 서신

 

베드로전서는 교리적 성격이 강하다. 삼위일체론(1:2, 3, 12), 창조론(4:19), 그리스도론(1:20; 3:18), 속죄론(2:8, 24; 3:18, 19), 교회론(2:5, 9, 17; 5:1-11), 종말론(1:13; 4:7, 13; 5:1, 10) 등이 나타난다.

첫째로 삼위일체론이다(벧전 1:2, 3, 12).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성부의 예정과 성자의 구속, 성령의 인치시는 사역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데 이는 초대교회 당시부터 이미 삼위일체적 신앙이 확립되어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단서이다(엡 1:3-14). 특히 벧전 1:2에서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앞절에 ‘흩어진 나그네’로 지칭된 수신자들을 삼위일체적인 신앙과 사역에 입각하여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목적, 선택, 부르심, 섭리와 연관된 것으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개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1:20; 암 3:2; 행 2:23; 롬 8:29, 30; 11:2). 이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가리킨다.

둘째로 창조론이다. 벧전 4:19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조물주’(헬, 크티스테)라는 표현은 외경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신약성서에는 이곳에만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능히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사한다.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박해하는 핍박자들에게 악으로 갚을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도리어 선을 행하므로 갚아야 하며, 확신을 가지고 고난 가운데에도 자신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것을 부탁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부탁할지어다’의 헬라어 ‘파라티데스도산’은 ‘예금하다’, ‘맡기다’의 ‘파라티데미’에서 유래된 말로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의탁하는 것’을 뜻한다. ‘파라티데스도산’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과(눅 23:46) 스데반의 의탁이다(행 7:59).

셋째로 그리스도론이다(벧전 1:20; 2:24; 3:18). 베드로전서에는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모범이요 영적으로 매우 악한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고난 당하는 중에 소망이 되심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산 소망’이요 ‘기업’(1:3-4)의 근원이 되신다. 믿음을 통해 주님과 갖는 사랑의 교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원천이다(1:8). 주님께서는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2:24).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목자이며 감독이시며(2:25; 5:4), 다시 오실 때에는 그 분을 아는 모든 자들이 영광을 받을 것이다.

넷째로 속죄론이다(벧전 2:8, 24; 3:18, 19). 먼저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의 헬라어 ‘호스 아우토스…엔 토 소마티’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와 강조적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가 연결되어 자발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담당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넹켄’은 ‘제단에 희생 제물을 두다’는 의미를 가진 ‘아나페로’의 부정과거로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에 대하여는 제물을 대신하였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공의를 만족시켰다(사 53:12; 골 2:14; 히 9:28). 이어 3:18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로서,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드린 대속적인 죽음이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의인이시지만 죄를 지은 불의한 인간을 위하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사 53:5, 6, 11, 12)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셨다. ‘대신하셨으니’의 헬라어 ‘휘페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목적을 나타낸다. ‘인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사가게’는 본래 법관 앞으로 데려오거나 궁전 앞으로 데려올 때 사용된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깊이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다섯째로 교회론이다(벧전 2:5, 9, 17; 5:1-11). 먼저 2:5에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신령한 집’은 저자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사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시 69:9; 사 56:7; 막 11:17). 한편 ‘세워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스데’는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돌이 되며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됨을 강조한다(롬 12:1; 15:16; 고전 3:16: 엡 2:21-22; 3:6). 이어 5:1-11에서 베드로전서 저자는 본서를 끝맺기에 앞서 당시의 혹독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지역교회 회중을 위해 수고하던 장로들의 노고를 치하,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1-4절). 그리고 회중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한 장로들에게 순복할 것을 권면함으로써(5절) 서로간의 믿음을 굳게 할 것을 당부한다(6-11절). 이처럼 교역자와 회중은 서로 존중하며 봉사하기를 잊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교회가 온전히 하나되는 근본요인이기도 하다(고전 12:12-27).

여섯째로 종말론이다(벧전 1:13; 4:7, 13; 5:1, 10). 먼저 1:13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하면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고 한다. ‘동이고’의 헬라어 ‘아나조사메노이’는 ‘급한 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게으른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눅 12:35)를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는데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3:10). ‘가까 왔으니’의 헬라어 ‘엥기켄’은 ‘가까이 잡아 당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엥귀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어 5:10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였는데 베드로전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권면을 마치고 위로의 힘을 얻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행하시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소망의 위로가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도우심으로 은혜를 베푸심을 암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는 사역에서 시작된다. 그 부르심의 목적은 영원한 영광 즉 궁극적인 구원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잠깐 고난’은 장차 온전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영원한 영광’과 대조를 이룬다.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겪는 고난은 그것을 참고 견디어 소유하게 되는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4개의 동사를 나열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확실한 개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인과 십자가신앙 강조 서신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벧전 4:16).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이다. 그들은 흩어진 자들이며(1:1), 피택자들이다(1:2).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은 구속받은 자이다(1:3-2:10). 그에게는 삼위 하나님에 의하여 구속이 확립되어 있다(1:3-12). 성부께서 거듭나게 하심과 성자께서 다시 오심과 성령께서 미리 증거하심으로 확립된 구속이다. 이 구속의 수단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이다(1:13-25). 구속된 성도에게는 놀라운 신분이 주어진다(2:1-10). 그는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2:2). 그는 산돌(living stone)로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2:5).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두움가운데서 부름받아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데 힘써야 한다(2:9-10).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 시기를 두려움을 가지고(1:17) 살아야 한다(2:11-5:11).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와 가정과 교회가 주어져 있는데 모든 영역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라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에 대한 세 가지 이류를 살펴보면, 첫째로 베드로는 예수와 가까웠던 핵심적 제자 세 명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도 예수와 보다 밀접한 교재를 가졌던 삼총사였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신 것과 가르치신 것을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베드로전서에서 그가 자신의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몇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로 베드로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그가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극구 말렸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나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을 거부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46)라고 하셨을 때에야 비로소 시몬 베드로는 이해가 되어 믿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그는 진리를 굳게 믿고 성전행각에서 군중들을 향하여 이렇게 연설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그의 첫번 서신인 베드로전서에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언급이 수 차례 나온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할 필요성을 시인하기가 꺼려지고 십자가의 의미도 빨리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설득시키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시몬 베드로이다. 셋째로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십자가에 대한 언급은 비의도적인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셔야 할 필연성을 의도적으로 주장했다면 우리는 그가 의도적이었다는 의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백한 윤리적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거룩할 것과 인내로 고난을 견딜 것을 촉구하고 나서, 그들을 격려하고 본을 보이는 방편으로 십자가를 언급한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가장 긴 부분은 2장으로 18절에서 끝 절까지 계속된다.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는 첫째는 본으로서 죽으셨고, 둘째는 ‘죄를 담당한자’로 죽으셨다는 것을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고난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성도의 고난은 다양하다. 첫째로 시험으로서의 고난이 있다(벧전 1:6-7; 4:12-19). 이것은 믿음의 연단을 위한 것으로 불시련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그 영혼을 조물주께 부탁할 것이다(벧전 4:19). 이런 사람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다. 둘째로 애매한 고난이 있다(벧전 2:19-20). 이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 셋째로 의를 위한 고난이 있다(벧전 3:13-17). 선행으로 인한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이때 신자는 요동하지 말고 의에 관하여 대답할 것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러면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한다. 넷째로 정욕을 제어하기 위한 고난이 있다(벧전 4:1-2). 육체의 고난을 받으면 죄를 그친다. 이렇게 하여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게 된다. 다섯째로 마귀의 고난이 있다(벧전 5:8-11).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형제들이 당하는 동일한 고난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동안의 고난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자는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모범인 예수 강조 서신

 

베드로전서의 배경이 되는 상황은 박해이다. 네로 황제는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따라서 많은 신자들은 두려움으로 낙심하고 있었다. 이미 발작적인 폭력사건이 있었고, 다가올 일들은 더욱 심각할 것같이 보였다. 베드로가 제시한 충고는 단도 직입적이다. 기독교도들이 이교통치자들에게 핍박받고 있지만 자신의 잘못에 의해 마땅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킨다.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못되므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을 감수하라고 한다. 그들은 복수는 물론 저항해서도 안 된다. 복종해야 한다. 억울한 고난을 인내로 참는 것이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베드로의 마음에 십자가가 떠오른다. 억울한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부름받은 내용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21).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간사함도 없으셨다. 그런데도 그는 모욕을 당하셨을 때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가 여기서 사용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것으로서 선생의 습자책, 즉 학생이 쓰기를 배울 때 선생의 필체를 그대로 흉내내어 쓰는 완전한 글씨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단순히 본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구주도 필요한 것이다. 본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고 우리의 이상을 불타게 하며 또 결심을 굳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씻어 우리의 상한 양심에 평화를 가져오거나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도록 하지는 못한다.

 

4. 그리스도인의 덕목 권면 서신

 

베드로전서는 거룩한 행실을 하나의 큰 주제로 삼고 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베드로전서가 거룩한 행실을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이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그 이유이다(벧전 1:17). 신자는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벧전 1:15-16). 신자는 하나님과 동급적인 위치에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선행의 내용은 무엇인가(벧전 3:11). 베드로전서는 윤리적인 권면을 준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함, 형제사랑, 불쌍히 여김, 겸손함, 보복하지 않음, 복을 빎,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침,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않음, 악에서 떠남, 화평을 구하고 좇음이 선행의 내용들이다.

선행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함을 침묵시키며(벧전 2:15), 욕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벧전 3:16). 둘째로 아내의 선행은 남편에게 구원을 얻을 기회를 줄 수 있다(벧전 3:1). 셋째로 선행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벧전 2:12). 그러나 선행을 해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다.

 

5. 구약인용 및 바울서신과의 유사성

베드로전서는 구약성서와 연관성이 많다. 구약의 역사와 예언 강조(1:10-12; 3:5, 6, 20), 주의 말씀(사 40:8=1:25), 모퉁이 돌(사 28:16; 시 118:22=2:6),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사 8:14=2:8), 고난 받는 종(사 53;=2:22-25) 등이 인용되었다. .

베드로전서에서 인용된 구약을 책별로 구분할 때 오경(벧전 1:16; 2:9), 시편(벧전 2:3, 7; 3:10-12), 잠언(벧전 4:8, 18; 5:5) 그리고 이사야(벧전 1:24-25; 2:6, 8, 25; 3:14-15; 4:14) 선지서로 그 인용 목적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한 설명적 역할과 저자의 논지 또는 교훈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베드로전서와 바울서신사이의 문학적인 관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베아레(F. W. 베아레)는 아주 타당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모든 비평가들이 베드로전서가 바울서신에 의거한다고 동의하고 있다”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이들 관계는 베드로전서가 바울서신을 의존한다거나 바울서신이 베드로전서를 의존하는 문학적인 의존이 아니라, 기독교 교사나 설교자들을 위해서 문서화된 소책자로 배포된 예배와 교리문답의 형식에 대한 두 저자의 독립적인 사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했다. 셀윈(Selwyn)의 주석서의 두드러진 특징들 중의 하나인 이 접근법을 로세(Lohse)나 나욱(Nauck)이 따랐고, 그들의 중요한 기사에서, 이 접근법의 결론을 더욱 진척시켰다. 비록 그것의 결과를 가져오는 어떤 사상이 어떤 의미에서 신빙성의 증거로 진척됨이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로세(Lohse)는 특별히 일반자료의 조사와 신빙성의 문제를 따로 떼어놓고 셀윈(Selwyn)이 작품에서 그들이 연결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셀윈(Selwyn)은 1세기 중엽, 교회에 널리 퍼진 자료를 네 가지의 주요 형태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근원(sources)들이라고 묘사하여 제목을 붙인 것이다. 셀윈(Selwyn)의 네 번째 형태는 verba Christi로서, 이것의 사용은 누구에 의해서도 부인되지 않았다.

쉘윈(Selwyns)은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예배식 형태는 바울서신과 유사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벧전 2:4이하와 롬 9:32이하에는 공통되는 구약성서 인용문에 대한 결합을 설명하는데, 주의를 끄는 것은 두 구절이 히브리어역에서가 아닌 70인역에서 인용한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벧전 3:18-22은 딤전 3:16에 인용된 찬송가에 의거한다고 셀윈(Selwyn)은 주장한다. 그러나 디모데전서가 1세기 말 이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많은 저명한 학자들은 그것을 마리키온(Marcion)시대의 작품으로 보았다. 따라서 디모데전서에 있는 ‘신앙찬송가’(credal hymn)가 40년 혹은 그 이전에 저술되었다고 입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두 서신 사이의 그와 같은 관계가 인정된다면, 이것은 베드로전서의 기록연대가 약 주후 100년쯤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베드로전서와 바울서신사이에 박해형식의 단편적 유사성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베드로전서 사이의 유사함은 유아기 기독교공동체들의 신앙을 강화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에서 복음전도자들과 교사들이 사용하도록 편집된 설교와 충고문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가정함으로 쉽게 설명된다고 셀윈(Selwyn)은 제안했다.

 

6. 박해시대 특수문학으로 소망과 격려의 서신

 

베드로전서에는 네로의 치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할 무렵 핍박은 로마반도 바깥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음을 언급한다(벧전 1:7; 3:9, 16). 때문에 그들은 영광 중에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리스도가 한때 죄 없이 고난받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1:3, 11; 2:21-24; 3:18).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그의 고난에 참여할 필요가 있으며(4:13) 고난은 성도들의 성화와 성도의 연합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했고(4:1, 8) 베드로는 그것에 대해 기록한다.

이처럼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기록할 당시 정치적인 박해를 극복하고 불원에 전개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토록 하였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 시대의 특수한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대적인 문헌’(Gelegenheitsschrift)이다. 신약의 다른 서신과 같이 서신의 형식을 갖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베드로전서는 이러한 외부의 박해에 대비한 성도들에게 참된 소망과 위로를 주는 서신으로 ‘소망의 서신’(The Epistle of Hope) 또는 ‘격려의 서신’(The Epistle of Courage)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러한 소망의 서신을 통하여 우리는 시련이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특권이요, 한 연단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김성봉 박사는 ‘일생에 걸친 고난 학습’이란 주제의 논문발표를 통해 “처음에 고난에 대해 낯설어하던 베드로가 성도로서 사도로서 한 생애를 산 후에 고난에 대해 일가견을 갖게 된 것을 봤다며 우리 또한 성도로서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흐르는 세월 속에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있어서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뿐 아니라 심지어 고난을 즐거워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7. 그리스도의 지옥강하(Descent into Hell)

 

예수의 지옥강하(Descent into Hell) 본문(시 16:10; 엡 4:8-10; 딤전 3:16; 벧전 3:18-19; 4:4-6)은 난제중에 하나이다. 몇몇 신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는 묻혔으며 그것도 빌린 무덤(이것은 그의 가난을 나타낸다)에 묻혔다. 또한 사도신경에는 지옥(hell), 혹은 음부(hades)로 내려갔다는 언급이 있다. 시 16:10; 엡 4:8-10; 딤전 3:16; 벧전 3:18-19; 4:4-6 등의 확실한 성서본문과 사도신경의 진술에 기초하여 금요일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일요일 아침의 무덤에서의 부활사이에 예수가 지옥, 혹은 음부에 실제로 내려감이 예수의 비하에 포함된다고 주장된다. 이것은 무시 못할 논쟁점이다.

사도신경에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시며’(라틴어 descendit ad inferna의 번역)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도신경이 근거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고대 로마 신조나 다른 4세기 이전의 신조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명사 inferna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이는 그것이 ‘죽은 영의 처소’로도 또는 ‘지옥’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가 이에 대하여 일치된 의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또한 그들의 근거로서 들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도 그리 적합하지 못하다(마 27:52이하; 롬 10:6-8; 엡 4:8-10; 벧전 3:18-20). 그리하여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였다. 그리스도의 하강에 대한 가르침이 신조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1, 2세기의 속사도, 그리고 교부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이 기독론은 적어도 고대성 (antiquity)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어떤 로마 카톨릭 신학자는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의 사이에 예수 강림 이전에 죽은 의로운 영혼들이 있는 지옥의 가장 상층부(limbus patrum)에 내려가서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갔다고 해석한다. 어떤 학자들은 그의 지옥강하의 혜택을 연옥(purgatory)에 까지 확장시킨다. 동방정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죽은 영들의 거소인 하데스(Hades)에 내려가서 그들 중 몇을 데려갔다고 가르친다. 루터(M. Luther)는 그의 일생에 견해를 여러 번 바꾸었는데, 때때로 설교 도중에 청중들의 수준에 맞추어 그리스도가 사탄의 아성에 내려가서 그와 그의 왕국을 점령한 것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칼빈(J. Calvin)은 전통적인 해석을 떠나서, 그 구절이 그리스도의 ‘영혼이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려져, 정죄된 사람의 가공할 고통을 겪으신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개신교 신앙고백서들은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확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논쟁의 이유들 중 하나는 지옥에 내려감이라는 교리를 완벽하게 다루거나 혹은 이 쟁점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단일한 성서 본문이 없다는 사실과 구속의 역사에 있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짧은 기간동안의 음부로의 강하설에 대하여 고대의 서방교회에서 사용한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장사를 진술한 다음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을 넣고 있음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특정한 때에 특정한 교회회의에서 작성되고 승인된 것이 아니라 주후 200년경부터 750년까지 점차적으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구절이 로마와 이태리와 아프리카에서 사용되었던 초기 신경에는 발견되지 않다가 390년 루피누스(Rufinus)의 두 버전(versions) 중 하나에서 발견된다. 그 후 그것이 650년까지 어느 버전(version)애도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650년 이전에 그것을 사도신경에 포함한 유일한 사람은 루피누스인데, 루피누스도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께서 매장되셨다(“그가 무덤에 내려가셨다”, 헬라어 하데스는 지옥을 의미하는 게헨나와 달리 무덤을 의미할 수 있음)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다.

한편 김정훈 교수는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벧전 3:18-22)란 제목의 논문 발표를 통해 “지옥강하는 그가 형벌을 받아 지옥에 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악한 영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탄의 세력에 대한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신 행위”라고 설명했다. 또한 현대교회는 지옥의 실존에 대해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교회가 세속주의의 높은 파도 앞에 본유적 역할을 상실한 채 신실해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현대교회가 지옥강하 내용을 사도신경 본래의 위치에 되돌려 놓고 그 의미를 반복적으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Ⅴ.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신학적 특징연구의 의의

 

1. 신학적, 교리적 의의

 

베드로전서는 ‘삼위일체론’(벧전 1:2, 3, 12; 2:23), ‘창조론’(4:19), ‘그리스도론’(1:20; 3:18), ‘속죄론’(2:18. 24; 3:18, 19), ‘종말론’(1:13; 5:1, 10) 등 여러 교리들을 다루고 있는 일종의 교리서이다.

또한 베드로전서는 구약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구약의 역사와 예언이 강조되어 있으며(벧전 1:10-12; 3:5, 6, 20) 구약의 진리들이 예수의 교훈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1:15, 16; 2:6, 23, 24).

또한 베드로전서의 가장 큰 신학적 특징은 다른 말씀과의 유사성으로 특히 로마서, 에베소서, 야고보서의 문체 및 내용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공동부분을 종합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표1>베드로전서와 로마서, 에베소서, 야고보서의 문체 및 내용과 공통점

 

베드로전서의 문체를 보면 바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베드로가 바울과 그의 서신서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몇 가지 유사성이 곧 베드로가 바울을 의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둘 다 공통적으로 사도적 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는 신약의 욥기 같은 성격이 짙은데, 이는 부당한 고난과 하나님의 주권에 흔들리지 않고 복종하는 것을 베드로전서가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처럼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구약과 그 내용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잇다. 여러 곳에서 베드로는 개별적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한 일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가질 미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몇몇 구절들은 신약신학에 매우 귀중한 기여를 하고 있다(1:2-12, 18-20; 2:21-25; 3:18-22; 4:12-19).

 

2. 윤리적, 역사적 의의

 

공동서신의 가치는 그 구성과 내용의 특성에서 기인된다. 우선 특정 지역이나 교회가 아닌 모든 교회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정황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실제적이며 대중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이론적이며 예방적인 성질보다 당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의 삶의 애로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이나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그 내용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대중적인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 다양한 주제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서는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베드로후서는 참 희망과 참 지식을, 요한서신은 사랑의 가치를, 유다서는 이단자들에 대한 경계를 주제로 한다면 베드로전서는 유대 묵시문학의 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신학적 토대를 통해 박해시대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와 행동 윤리를 보여준다.

윤리란 한 사회의 내면적 도덕 성향을 규정하는 것으로 법처럼 강제력은 없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다수의 묵시적 동의에 의해 형성된 사회 규범이다. 그래서 윤리를 사회나 가정이 평온할 때는 잘 지켜지지만 사회나 가정이 어지러울 때는 강제력이 없기에 흔들리고 혼탁해 질 수 있다. 베드로전서의 배경은 박해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고 지향점이 흐려지는 시기였기에 신앙의 탈(脫)윤리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시기에 베드로전서 저자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행동윤리를 구제적으로 제시한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첫째로 서로 열심히 사랑하는 것(벧전 4L8), 둘째로 서로 원망없이 대접하는 것(4:9), 셋째로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는 것(4:10) 등이다.

한편 베드로전서는 신약성서중에서 비교적 후대의 서신으로 복음서와 바울서신시대 이후의 정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서신이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로 알려진 베드로의 성격이 어떠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사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다(마 14:28; 눅 22:23). 이 같은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 15년 동안 예루살렘교회와 그 인근 지역에서 뛰어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는 회의에 있어서 친히 의장역을 맡았다(행 1:15-16). 그리고 예루살렘과 룻다, 욥바 등지를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며 각종 이적을 행하였다(행 2:14-42; 9:32-43). 그렇지만 이 당시까지만 하여도 베드로는 유대주의적 사고 방식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배타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행 1:18의 말씀과 욥바에서 본 환상(행 10:9-48)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선교에 대하여 옹호하였다(행 11:1-18; 15:6-11). 그런데 성서는 이 일 이후의 베드로행적에 관하여선 침묵하고 잇다. 하지만 베드로가 수리아 인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바울이 그를 책망하였었다는 언급(갈 2:11)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이 1, 2차 선교여행을 하고 있던 당시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활동한 것 같다. 한편 베드로가 최후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 것에 대한 증거는 베드로전․후서의 기록시기와 그 기록장소를 통해 논의가 가능해 졌다. 베드로는 말년에 로마로 가 거기서 네로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시 순교당한 듯 하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