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 베드로의 정황(Context)에서 본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연구 ​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도 베드로의 정황(Context)에서 본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연구 

 [목 차]

Ⅰ. 서 론

Ⅱ. 베드로전서의 개론적 내용

1. 저자와 기록연대

2. 저작 목적과 장소

3. 수신자와 메시지

4. 주요내용과 내용분해

Ⅲ. 베드로와 베드로공동체의 정황 이해

1. 베드로의 정황이해

2. 베드로공동체의 정황이해

Ⅳ.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1. 교리적 서신

2. 그리스도인과 십자가신앙 강조 서신

Ⅰ. 서 론

Ⅱ. 베드로전서의 개론적 내용

1. 저자와 기록연대

2. 저작 목적과 장소

3. 수신자와 메시지

4. 주요내용과 내용분해

Ⅲ. 베드로와 베드로공동체의 정황 이해

1. 베드로의 정황이해

2. 베드로공동체의 정황이해

Ⅳ.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1. 교리적 서신

2. 그리스도인과 십자가신앙 강조 서신

 

Ⅰ. 서 론

 

신약성서에서 복음서와 바울서신, 그리고 계시록을 제외한 서신서들을 공동서신(The Catholic Epistles)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일반 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이 서신서들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서신서의 수신 대상이 어느 특정한 개(個)교회가 아니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독자를 상대로 기록된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외에 바울서신과 구분키 위해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공통된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만일 바울서신에서 제외할 경우),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에 의해 기록된 서신서들은 그 주제와 내용이 각각 다르다. 그리고 각각 40여년 간의 기간 사이에 기록됐다. 초대교회는 제 4세기경 베드로전서와 요한 1서를 정경으로 공인했다. 기타의 서신들은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모든 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정했다. 개인적으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가 히브리서를 제외한 현재의 7권의 서신을 공동서신으로 인정했으며, 그 후 15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인한 것이다.

보수주의에서는 공동서신이 그 편지의 발신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람들은 비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훨씬 후대 교회 사람들이 유명했던 사도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서신도 베드로전서, 유다서도 또 야고보서도 실제 그 사도들의 기록물이 아니라 익명의 성도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서신의 집필 시기도 주후 64-200년까지 보고 있다.

바울서신이 기독교와 그 복음 진리를 해석하고 적용하고 확립시킨 ‘골격’의 가치를 지녔다면, 공동서신은 ‘힘줄과 살’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동서신은 심오한 신학론이나 신비스러운 경험보다는 대중적이요, 윤리적이요, 교훈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다. 실제적인 신앙 훈계와 권면으로 당시 핍박과 이단의 유혹과 신앙적 시험에 둘러 쌓였던 모든 교회에게 힘과 지혜를 주고자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서신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보편적인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바울 이외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신앙 사상과 생각과 인품들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공동서신이 깊고 높은 신학적인 내용은 바울서신과 비교해 볼 때 가볍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바울이 말한 신학과 진리가 공동서신 속에서는 ‘육화’되어 나타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만이 신약성서의 기자로 세우시지 않고 다양한 공동서신의 기자들을 따로 세우신 뜻은 이 세상의 성도들과 그 삶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논리와 공동서신의 풍성한 교훈은 서로 상호 보완하여 성도의 신앙을 깊고, 넓고, 높은 자리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처럼 공동서신의 가치는 신약의 감동된 정경으로서, 또 그 시대의 역사적 기록물로서 그리고 문학적인 가치로서 바울서신 못지 않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베드로의 정황에서 본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연구를 다루었는데, 먼저 베드로전서의 개론적 내용을 살펴본 후, 베드로와 베드로공동체의 정황을 이해하고,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및 연구의 의의를 고찰하여, 베드로의 정황(context)에서 본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특징 연구의 종합적인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Ⅱ. 베드로전서의 개론적 내용

 

1. 저자와 기록연대

 

1) 저자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벧전 1:1)라고 밝혀 주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아람어 별명인 게바를 헬라어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다(참조, 마 16:18). 예수께서 붙여 주신 별명인 베드로로 더 널리 알려진(마 4:18; 8:14; 16:18; 막 3:16; 요 1:42) 시몬(막 1:16; 마 16:17; 벧후 1:1)에 대해 마태복음에는 바요나의 아들로(마 16:17),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아들로(요 1:42; 21:15-17) 기록되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베드로가 이 서신의 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이 베드로라고 밝힌 점(벧전 1:1)과 실루아노에게 대필시킨 것이라고 한 점(5:12)과 이 서신 마지막 문안 부분(5:13)에 언급된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바벨론이 로마를 가리키는 것이고, 또 저자 곁에 ‘내 아들 마가’가 있다고 한 점 등으로 인해 쉽사리 받아들여졌다. 발(C. S. Ball)은 “베드로가 저자라는 사실은 1세기말부터 현대까지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인정하는 권위 있는 경전(Muratorian Canon)에 그 명단이 빠졌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한 하르낙(A. von Harnack)은 여러 가지 가설을 주장하였다. 베드로전서는 제 1세기와 제 2세기 사이에 흔히 유포된 떠돌이 문헌이 아닐까? 그렇다면 서두와 결말에 인사말이 없어야 하며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본래는 인사도 이름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후대의 어떤 사람이 거기에 베드로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여 경전으로 입적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서신의 내용으로 보아 어떤 개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낸 임기웅변의 편지는 아니다. 그리스도인 전반에게 보내는 보편적인 권고와 교훈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한 ‘증거’(1:12)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거가 참으로 베드로에게서 온 것인지 아닌지 단정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볼 만한 재료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처음 부분에 얼마쯤 있는데 그나마도 충분한 재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베드로서의 저자 문제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이 내 세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펠트(L. Goppelt)는 “이 서신의 권위 있는 권면과 증거(5:12)의 특성을 보아, 소아시아 교회들과 개인적 관계가 없는 베드로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슈라게(W. Schrage)는 “무엇보다도 이 서신이 바울의 신학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베드로의 저작 설을 반대하는 결정적인 논거가 된다. 비록 베드로가 유대교의 시조는 아니라 하더라도, 유대계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는 그가 이처럼 바울로와 유사한 신학을 대변하고 있을 리가 없다”라고 하였다. 반대자들 대다수가 내세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서신이 바울서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교적 희망의 근거로 삼은 점(1:3, 20), 십자가의 수난의 의미를 강조한 점(1:2, 19; 2:24; 3:18), ‘믿음’과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점(1:5, 10, 13; 5:9, 10) 등을 들고 있다. 특히, 로마서 및 에베소서와 병행되는 구절이 많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서신의 저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서신을 잘 아는 후대의 어떤 사람이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튀빙겐 학파에서는 본서를 바울파와 베드로파의 조화를 위해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베드로는 교양이 없고 배운 것이 없는(행 4:13) 갈릴리의 어부이다(막 1:16; 눅 5:3). 따라서, 여러 가지 문학적이고 수사학적인 문제들을 사용하고, 매우 세련되고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한 이 서신의 저자일 리가 없다. 이 서신의 대상자들이 거주하는 여러 지역(1:1후반)은, 대부분 바울의 선교지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인데, 베드로가 이처럼 자명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설이다. 이 서신의 저자는 구약성서를 잘 알고 인용하였는데, 히브리 성서가 아니라 헬라어 성서인 70인역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헬라어를 잘 모르는 베드로가 쓴 것일 리가 없다(W. Schrage, F. W. Beare). 특히, 슈라게(W. Schrage)는 “2:1이하에는 70인역의 인용문들이 시가선(詩歌選)의 형태로 편찬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베어레(E. P. Beare)는 “아마도 베드로의 헬라어 실력은,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개화한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한 정도와 시장에서 외국인들과 장사할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슈라게(W. Schrage)는 “이 서신은 헬레니즘적인 정신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이 서신에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따라서, 예수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베드로가 썼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예수를 직접 보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1:8), 예수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 당했다는 증언을 하기는 했으나(5:1), 충분한 것이 못 된다. 저자 자신이 자기 소개에서 ‘나는 함께 장로 된 자’(5:1)라고 하였는데, 장로와 사도가 엄밀히 구별되는 시대에 그렇게 소개한 것을 미루어 사도 베드로가 아닌 어떤 장로로 이해해야 한다. 이 서신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을 고찰해 보면, 로마 판도 안에 대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시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도미시안(Domitian) 시대이다(92-96년). 따라서, 네로 황제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다(64년 혹은 67년)고 전해지는 베드로가 썼을 리가 없다(L. Goppelt). 같은 주장을 하는 베어레(F. W. Beare)는 베드로전서에 언급되어 있는 박해를 트라얀 황제(Trajan, 98-117)의 통치 기간 중에 있었던 박해라고 한다.

그리고 외적 증거로, 이 서신이 정경으로 채택되는 데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베드로의 저작 설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에 정말 베드로가 대필시킨 것이라면, 초대 교부들이 그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여 우선적으로 정경으로 채택했을 것이다. 특히, 슈라게(W. Schrage)는 “몇몇 주석가들은 5:12을 실마리로 삼아 소위 ‘대필가설’을 내세워 위에 열거된 난점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이들은 베드로가 실루아노에게 서신 내용의 주제와 근본 원칙만을 일러주고 자필로 쓰여진 서신의 말미(5:12 이하)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독자적으로 쓰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실루아노는 많은 재량권을 가지고 이 과제를 수행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이 서신이 훌륭한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과 이 서신이 바울로 서신과 유사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하며 이 서신의 배후에는 결국 사도의 권위가 있다는 주장을 고집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서 모든 난점들은 만족스럽게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루아노에 대해서 알려진 사실은 그가 사도 칙령의 전달자였으리라는 것(행 15:22, 27, 32)과 이른바 제 2차 선교여행 때 그가 바울과 디모데와 함께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행 15:40, 고후 1:19)과 그리고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가 예루살렘 원(原)공동체 출신인 듯하다는 점뿐이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살펴볼 때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실루아노도 이 서신의 저자로서는 적당하지 않다. 베드로와 실루아노가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또한 ‘…의 손을 빌어 보내다’(5:12)라는 말은 단지 말을 받아쓰는 서기나 서신의 전달자만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제 1세대에 속하는 어떤 사람을 이 서신의 저자로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이 서신이 바울 이후시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처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내적(장로 제도와 5:1 참조), 외적 상황(교회가 소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 확산되었다는 것과 전체 제국 안에 만연되어 있었던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참조하라)은 이러한 추측에 배치된 다. 따라서, 실루아노가 이처럼 서신에 대해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 서신의 저자 문제에 대한 많은 난점들이 그렇게 충분히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있어서도 대필 서신과 위조 서신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베드로의 저작설을 반대하는 견해 중에 색다른 견해가 있다. 이 점에 대해 레익크(B. Reicke)는 “어떤 학자들은 실루아노가 베드로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쓴 다음에 신망을 얻기 위해 베드로의 이름을 빌렸다고 주장한다.”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베드로의 저작설(실루아노에게 대필시킴)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베드로도 가이사랴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10:24-48; 11:2-17; 15:7-11), 또 안디옥에서는 이방인교인들을 위해 일하기도 하였다(갈 2:11-14).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소아시아교회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또한 존경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베드로의 대중 연설의 내용과 십자가의 도에 관한 변증(행 14-36, 4:5-13)은, 베드로와 바울이 근본적인 면에서 신학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이 편지의 신학이 초기의 초대교회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셀윈은(E. G. Selwyn) 이 점에 대해 상세하게 연구하여 베드로전서의 신학 사상과 사도행전 앞 부분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들에서 나타나는 신학 사상과 똑같다는 것을 의문의 여지없이 증명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바울신학이나 바울 서신의 발췌, 또는 요약은 아니다.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와 교인간의 신비적인 연합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또 “바울의 중심사상인 신앙의인사상(信仰義認思想), 하나님의 자유의지사상(自由意志思想), 반율법사상(反律法思想) 등이 결여되어 있다.” 그 반면에 카핀(B. C. Caffin)이 지적하는바 “영의 세계에 있어서 주의 설교와 같은 것들이 있다. 즉, 요한계시록의 특징이기도 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제사직, 노아의 대홍수를 세례에 비유하는 것, 사라를 그리스도인 아내의 본으로 언급하는 것, 옛 예언의 제시, 구속 행위에 대한 천사들의 관심(이 점은 바울 서신에도 나옴), 이교도를 확신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거룩의 시행 등”의 독특한 사상이 들어 있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를 바울신학, 또는 바울서신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헌터(A. M. Hunter)처럼, 근본적인 면에서 바울 신학과 일치하는 베드로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와 에베소서 그리고 데살로니가전․후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지만, 그것이 베드로가 아닌 후대 사람의 저작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 까닭은 베드로가 그 서신들을 알았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참조, 벧후 3:15-16). 더욱이,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서는 소아시아 교회들이 돌려보도록 한 회람 서신이다. 또, 베드로와 바울의 신앙 및 신학이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게다가 대필자로 알려진 실루아노는 여러 해 동안 바울의 동반자였다. 그밖에도 두 사도가 같은 구두 전승에 근거하여 기록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베드로 자신은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글을 대필한 실루아노는 달랐을 것이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행 16:37) 실루아노는, 본래 예루살렘 모(母)교회의 교인으로서 사도 회의가 끝난 뒤에, 안디옥교회로 공문을 전달하는 일에 공동대표로 파송된 적이 있었다. 그때에 동행한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바사바라 하는 유다였다(행 15:22). 그 뒤에 그는 바울의 동역자로 활동하면서, 디모데와 함께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기록하는 데 보조 역할도 하였다(살전 1:1, 살후 1:1). 그러므로 언제 그가 베드로와 동행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바울 서신과 비슷한 필치를 나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두 나라말을 사용하던 갈릴리 어부였고, 사도가 된 뒤에 여러 지방을 순회하였으며, 말년에는 로마에서 순교를 당한 사람이라 헬라어와 문학에 약간의 재능은 있었을 것이다. 그를 소박하고 무지한 갈릴리 어부로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오순절 경험을 치르고 난 뒤에 한 대중 연설(행 2:14-36)의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서신의 문체와 표현 방법이 어느 정도 이 연설과 유사점이 있다. 또, 그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 그리고 관원과 서기관들 앞에서,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변증했을 때, 그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행 4:5-13). 그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바울의 변증은 서신의 문체와 표현 방법에도 나타나고 있다. 레익크(B. Reicke)는 “원칙적으로 그 묘사로부터 베드로를 제외시킬 수는 없다. 베드로와의 관계가 없었더라면, 실루아노는 자기의 이름이나 스승인 바울의 이름으로 썼을 것이다. 이 서신이 베드로가 죽기 전에 구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대사도의 인정과 동의, 또는 직접적인 요청으로 쓰여졌을 것이라고 믿는 게 자연스럽다”라고 주목할 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70인역을 알고 인용했다는 사실은, 실루아노가 대필한 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 저작설을 반대할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블럼(E. A. Blum)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유창하게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가를 결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헬라어는 중동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던 사람은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베드로전서에는 헬레니즘적 정신의 영향보다는 유대교적 정신의 영향이 더 많다. 그러나, 서신 전체에 흐르는 내용은, 박해 아래 있는 교인들에 대한 십자가의 도에 근거한 교훈과 권면 그리고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주석할 때에 더욱 자세하게 드러날 것이다.

예수의 행적과 교훈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는 지적은 서신의 동기와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내용이 빈약하다고는 하나, 저자 자신이 예수를 만나 보았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고(1:8), 변화산의 신령한 경험을 시사하는 내용(5:1)도 있다. 그리고 교훈 가운데 겸손의 덕(5:5) 및 고난과 인내(2:21-24)는, 예수의 교훈에서 비롯되었거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근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본문 중에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하는 구절과 낱말이 많이 나타난다.

저자 자신이 장로라고 소개한 것은 베드로 저작설을 반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당시에는 장로라는 말의 개념이 교회 안에서는 연장자라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박해를 꼭 도미시안 황제시대나 트라얀 황제시대로 못박을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예루살렘교회이든 이방교회이든 간에 초대교회는 대체로 곳곳에서 박해를 받고 있었 다. 더욱이, 카핀(B. G. Caffin)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서신은 로마의 행정 장관들이 기독교를 뿌리뽑기 위해 어떤 조직적인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마샬(I. H. Marshall)은 “후대에 쓴 것이라는 표가 없다. 즉, 초기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의 위험과 악의 있는 짐승과 같은 특성을 가진 국가와 베드로의 죽음 후의 공포에 대한 흔적에 관한 언급이 없다”라고 하였다.

베드로의 저작설(대필자는 실루아노)을 주장하는 렌스키(R. C. H. Lenski)는, 위작자가 대부분 바울에 의해 설립된 이방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왜 베드로의 이름을 사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또, 그는 위작자가 베드로를 바울의 조수들인 실루아노와 마가에게 관련지을 생각을 해야만 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한다. 렌스키(R. C. H. Lenski)는 위조 편지에서 언급된 다섯 지역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모든 교회가 후대의 위작자에게 기만당해야만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한편 정경화의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 반드시 베드로 저작 설을 부인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정경화의 작업이 신중했다는 이유도 될 수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편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재림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과 감독(딤전 3:1, 2; 딛 1:7)이나 집사(롬 16:1; 빌 1:1; 딤전 3:8, 10, 12, 13)의 직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로의 직분만 언급되었다는 점을 들어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특히, 저자가 삽입한 성서 구절 중에 로마서는 52-59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이고, 빌립보서는 60-64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이며,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61-66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전서는 비교적 상당히 이른 시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모든 교부들과 모든 문서들이 다 이 서신을 소홀히 여기거나 생략해 버린 것은 아니다. “폴리캅(Policarp, 69?-155년)은 빌립보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처음으로 베드로전서를 인용하였다.” 파이네(S. W. Paine)는 “신약성서 학자들은 베드로전서와 바나바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 약 80년경) 사이에 병행되는 표현을 발견하였다”라고 한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의 글(95년경)에는 이미 이 서신에 대해 15회 이상을 언급하고 있다. … 헤르마스의 세퍼드(Shepherd of Hermas),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안디옥의 테오필루스(Theophilus of Antioch) 등의 글에도 이 서신에 대한 뚜렷한 흔적이 있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자신의 편지에서 본서 1:8을 인용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는 본서의 매 장에서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또한 본서의 주해를 썼다. 터틀리안(Tertullian)도 본서 2:8, 20, 22; 3:3; 4:12 등을 인용하였다. “오리겐은 베드로전서는 결코 논박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책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서를 분류하기를 수락된 책, 문제된 책 및 위작으로 하였고, 그 중에 본서는 요한일서와 함께 첫째로 규정하였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이 서신을 히에라폴리스(골로새 가까운 소아시아의 도시)의 감독인 파피아스(Papias)가 사용했다고 한다. 또, 그는 베드로전서를 초기 교부들에 의해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받아들인다(Eccl. Hist. 3. 3). 특히, 바클레이(W. Barclay)는 교부들이 이 서신에서 인용했거나 영향받은 내용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파이네(S. W. Paine)는 “베드로전서는 페시토(Peshito)라는 시리아역, 콥트역, 에티피아역, 아르메니아역, 아랍역에서도 발견된다”라고 하였다. 훼아톤(D. H. Wheaton)은 베드로의 저작설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들 가운데 어느 것도 전통적인 베드로 저작설을 거절할 결정적이며 압도적인 내․외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레난(Renan)까지, 본서를 신약에서 가장 오래고도 가장 이의 없이 그 권위를 입증 받은 책 중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발(C. S. Ball)은 “베드로가 저자라는 사실은 1세기말부터 현대까지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헌터(A. M. Hunter)는 “정말로 신약성경 중에서 이 서신보다 이르고 보다 나은 증거를 가진 책은 없다. 그리고 그 증거의 힘을 흔들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스팁스(A. M. Stibbs)와 헌터(A. M. Hunter)는 베드로 저작설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주된 근거들을 면밀하게 고찰한 다음에,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작품이라고 결론지었다.

지금까지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저작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바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저작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논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저작설이 훨씬 더 유력한 내․외적 증거가 있고, 또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로(1:1) 실루아노(실라)의 도움을 받아 이 서신을 기록했다(5:12). 베드로의 본명은 유대인에게 흔한 이름인 시몬이며, 벳새다 출신이었다(요 1:41, 44). 그는 동생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를 만났으며(요 1:40-42), 나중에는 예수의 수제자가 되었다.

 

2) 저작 연대

본서의 저작 연대를 측정하려면 먼저 본서에 나타난 박해가 어느 시대에 있었던 박해인지를 알아야 한다. ① 네로 시대설(54-68년), ② 도미티안 시대설(81-96년), ③ 트라얀 시대설(98-117년)이다. 이상의 세 가지 학설 중에서 ‘네로 시대설’이 가장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바울의 1차 투옥(주후 62-64년경) 후에 로마에 도착하였다고 보는 견해(Lightfoot, Chase 등)가 가장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의 기록 시기에 대해 반즈(A. Barnes)는, “이 서신이 기록된 시기를 확실하게 결정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신 자체는 물론, 그밖에 어떤 자료도 없다. 라드너(Ladner)는 63년이나 64년, 또는 늦어도 65년으로 추측하고, 미카엘리스(Michaelis)는 60년경으로 추측한다. 만일 바벨론에서 쓴 것이라면, 아마도 58년과 61년 사이의 어느 시기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밖에 헌터(A. M. Hunter)는 62년경, 파이네(S. W. Paine)와 켈리(J. N. D. Kelly)는 64년경, 블럼(E. A. Blum)은 62-64년경, 훼아톤(D. H. Wheaton)은 63-64년경, 카핀(B. C. Caffin)과 로벗슨(A. T. Robertson)은 65년경, 고펠트(L. Goppelt)는 65년과 80년 사이의 어느 시기로 추측하고 있다.

특히, 켈리(J. N. D. Kelly)는 64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본서의 수신인들(또는 그들 중 대다수)이 최근에 개종한 자들인 것 같다. 곧 제 2세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암시는 전혀 없다. 아나톨리아(Anatolia, 옛날의 소아시아이자 현재의 아시아 터어키)의 숱한 공동체들에 공존하던 이러한 상황은 십중팔구 1세기 말경보다는 이른 시기에 전개되었던 것 같다. 둘째로 그들이 준수한 교회 질서의 유형은 특히 우리가 성직자의 정확한 계급 제도가 소아시아에서 얼마나 급속하게 발전되었던가를 기억할 때(이그나티우스의 서신 참조), 비교적 미발달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본서의 기록 시기를 늦게 잡으면 잡을수록, ‘함께 장로 된 자’(5:1)라는 베드로의 겸손한 자아 묘사는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 된다. … ‘미래의 소망과 현재의 실현을 긴밀히 투시하는 사상의 종말론적인 구조’(F. L. Cross), 윤리의 종말론적인 규정, 그리고 곧 나타날 영광에 대한 환희적 기대는 모두 초기의 표정들이다. 셋째로 본서의 신학은 명백하게 원시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런데 발(C. S. Ball)은 62-64년보다 더 이른 시기로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고 있다. 첫째로 서신의 언어는 박해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박두하고 있다는 것과 여전히 가능한 한 정부에 대해 충성하도록 충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둘째로 초대 교회에서 아주 확고하게 믿었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1:5, 7, 13; 2:13; 4:13; 5:1, 4). 셋째로 교회 임원들로는 장로들만 언급된 것으로 보아 조직이 아직도 매우 단순한 때이다. 넷째로 아마도 가장 강력한 논증은 ‘베드로전서의 신학이 교회의 초기 신학’이라는 점이다.

서신의 언어가 실제적인 박해를 암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박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하는 첫째 견해 외에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더욱이, 나머지 견해들의 요지는 켈리(J. N. D. Kelly)의 것들과 같다.

 

2. 저작 목적과 장소

 

1) 저작 목적

베드로전서의 내용 및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시대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 민중들의 박해를 받고 있었다(행 8:1-3). 또한,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에,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들 역시 그 지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판도, 특히 로마에서는 대대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을 잘 아는 베드로는 박해 아래 있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강하게 할”(A. T. Robertson) 목적으로 이 서신을 썼다. 즉, 신자의 고난이란 말세의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복이요, 주의 고난을 본받는 길이요, 영원한 영광을 위한 고난인 줄 알고 잘 견디라는 것이다. 더욱이, 주의 재림이 멀지 않은 점을 강조해 주고 있다.

이 서신을 쓴 둘째 목적은, 교인들의 내적 성결을 위한 것이 다. 즉, 박해자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할지도 모를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를 믿어 구원받은 거룩한 자답게 복음을 좇아 사랑을 힘쓰고, 복음 선교를 위해 박해자들을 선대하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목적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를 믿는 자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즉, 신자의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그리고 교회 생활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 교훈의 요지는 선교를 위한 위정자들에 대한 순복과, 복음을 따른 거룩과 사랑 그리고 소망의 인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베드로전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택하심을 입은) 나그네’(1:1, 2)들에게 보냈다. 당시 이 지방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유대인보다는 이방인이 더 많았음)은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박해를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2) 저작 장소

이 편지를 기록한 장소는 ‘함께 택하심을 입은 바벨론의 교회’(5:13)이다. 바벨론 교회가 어디 있느냐의 견해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앗수르의 바벨론설이다. 바벨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로서, 이는 주로 종교개혁자들(칼빈, 에라스무스)의 주장이다. 이 설은 팔레스틴의 동북쪽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번영했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인 바벨론에서 썼다고 하는 것이다. 고대의 바벨론은 주전 605년이래 느브갓네살 2세 때부터 유대인들을 납치해 간 사실이 있고, 또한 “포로기(주전586년) 이후 유대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므로(Agrippa's letter to Emperor Caius in Philo), 베드로가 여기에 와서 전도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윌리암즈(N. M. Williams)는 바벨론 칼대아(Chaldea)에서 기록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에는 두 가지의 약점이 있다. 첫째로 요세푸스(F. Josephus)의 고대사에 의하면 주후 40년경에 카리큐라 황제가 바벨론 지방의 유대인들을 엄청나게 학살하는 바람에 그 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5년 후에는 대역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둘째로 이 지방에 도마가 갔다고 하는 믿을 만한 전설은 있으나, 베드로가 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설령, 베드로가 간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 그 이유는 이 서신을 대필한 실루아노와 마무리 인사말에 언급된 마가까지 함께 간 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애굽의 바벨론설로 애굽의 수도 카이로 부근에 바벨론이란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설은 현재의 카이로의 북동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애굽의 바벨론, 또는 카이로의 옛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이곳에 유대인들이 이주했다는 점과 애굽에 고대 교회(Coptic Church)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가가 애굽에 가서 전도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는 점과 현재 그의 무덤이 그 항구 가까운 곳에 있는 대바우칼리스교회에 있다는 점 등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 학설에 대해 비그(C. Bigg)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교의 Clementine Homilies(i. 8)에는 애굽 교회는 마가가 아니라, 바나바가 세운 것이라는 옛 견해가 있다”라고 하였고, 파이네(S. W. Paine)는 “베드로가 그 곳에 갔다고 하는 전통적인 지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셋째로 예루살렘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이 서신의 바벨론을 바벨론의 사악성을 닮은 예루살렘을 상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학설에 대해 반즈(A. Barnes)는 네 가지의 타당한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 첫째로 바벨론이란 이름이 일찍이 예루살렘에 적용된 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고, 또 예루살렘이 바벨론이란 용어가 의미하는바 사악한 곳으로 이해된 적도 없다. 둘째, 사도가 쓴 장소를 언급할 것이었다면, 실제의 지명을 썼을 것이다. 셋째, 바벨론이란 사도가 예루살렘에 적용하고 싶어할 만한 명칭이 아니다. 넷째, 만일 서신이 예루살렘에서 쓰여졌다면, 그 지명을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

넷째로 로마설이다. 이는 바벨론이 로마의 상징적인 이름이라고 하는 견해이다. 이 설은 바벨론을 로마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학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파피아스(Papias), 유세비우스(Eusebius), 제롬(Jerome) 등이 그렇게 증거하였다는 점, 그 당시에는 바벨론이 붕괴되었다는 점, 베드로가 만년을 로마에서 보냈다는 수많은 전설과 부합된다는 점 등이다. 비그(C. Bigg)는 하르낙(Harnack)이 베드로가 클라디우스의 통치 때까지는, 말하자면 54년 이전에는 로마를 방문했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확실히 이 견해는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54년 이전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었으리라는 추측은 받아들일 만 하다. 그밖에도 비그(C. Bigg)는 “로마서는 사실상 변증서이고, 베드로전서에서 발견되는 교리 형태의 선재를 의미하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또, 이 서신을 대필한 실루아노와 곁에 있는 마가(5:12-13)가 다같이 바울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전자는 바울과 선교여행에 동행하였고(행 15:22, 40, 16:19, 17:4), 후자는 바울의 만년에 로마에서 같이 있었다(골 4:10, 몬 24).

종교 개혁이 있기 전까지는 이 네 가지 견해 중에서 ‘로마설’이 지배적이었다. 그 후 종교개혁시대에 와서 ‘앗수르의 바벨론설’이 크게 대두되었다. 근대에서는 다시 ‘로마설’을 지지한다.

 

3. 수신자와 메시지

 

1) 수신자

이 서신은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한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 라,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를 제외한 소아시아 여러 주인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1:1 후반), 즉 주로 이방인 교인들에게(1:14, 18; 2:9, 10; 3:5; 4:3) 보낸 일반 서신이다. 이 지역들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들 지명의 대부분은 옛 왕국들의 국명들과 그 명칭을 그대로 붙인 로마의 주들이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도 옛 왕국과 로마의 주들이 항상 같은 지역에 걸치는 것은 아니었다. 본도는 결코 로마의 주가 된 적이 없었다. 원래는 미트라테스 왕의 왕국이었는데 일부는 비두니아에, 일부는 갈라디아에 편입되었다. 갈라디아는 원래 안키라와 페씨누스 그리고 타비움 등 세 도시가 포함된 골인들(Gauls)의 왕국이었으나, 로마인들이 브루기아, 비시디아, 루카오니아, 그리고 이사우리아 등을 포함하여 훨씬 더 넓은 행정구역으로 확장하였다. 갑바도기아 왕국은 주후 17년에 원래의 형태 그대로 로마의 주가 되었다. 아시아는 현재의 아시아 대륙은 아니었다. 아시아는 독립된 왕국이었는데, 마지막 왕인 아탈루스(Attalus) 3세가 주전 133년에 로마에 선물로 유증하였다.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북쪽은 비두니아, 남쪽은 리기아, 동쪽으로는 브루기아 및 갈라디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쉬운 말로 하면, 에게해 연안에 있는 소아시아의 일부였다. 로마의 행정 구역에 속한 그 주들은 “소아시아 북부와 중부 그리고 서부 지역에 위치했으며, 타우루스(Taurus)산맥 북쪽 반도의 광대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초대교회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소아시아 거의 전역 에 전파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놀라운 결과 는 주로 바울 사도의 선교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본도와 비두니아가 이미 오래 전에 로마의 행정 구역상 하나의 주로 통합되어 ‘비두니아․본도’라고 불렸는데, 저자가 두 주로 나누어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가 함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로마의 속주인 지명들을 이상하게 열거한 의미가 무엇인가 함이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다만 소아시아의 지리적인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한 것이라는 설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고대의 왕국이었을 때의 명칭을 따른 것 같다는 설(Zahn)이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후자가 보다 그럴 듯 한 것 같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지리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이라는 설, ② 베드로가 이 지방을 순회한 순서대로 한 것 같다는 설(Harnack), ③ 율동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라는 설(W. L. Knox), ④ 본서를 보낸 로마에서의 길 순서를 따른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이 서신은 에베소서와 같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돌려가며 보도록 한 회람 서신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 중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④번설이 가장 그럴 듯하다. 상세한 여정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이 서신을 가지고 온 사자는 해로로 해서 먼저 본도의 항구에 상륙하고, 북부 갈라디아를 통과하여 갑바도기아에 이르고, 그 다음에 서쪽으로 향하여 아시아 주로 갔다가 북전하여 비두니아로 돌아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W. Barclay)는 여로를 약간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지도를 힐끗 보아도, 실루아노로 짐작되는, 본서의 전달자가 이태리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 북동쪽의 시노페 항에 상륙하여 그 지역들을 통과하는 여행을 한다면, 다시금 시노페 항에 돌아오게 되는 순회 여행이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두니아(본도)에 있는 시노페 항에서 그는 남행하여 갈라디아로 가고, 더 남행하여 갑바도기아로 가고, 서행하여 아시아로 가고, 북행하여 다시 비두니아로 간 다음에, 동행하여 다시금 시노페 항에 도착할 것이다.”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다양한 계층에 속해 있었다.

 

2) 메시지

본서는 극심한 박해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므로 ‘위로’와 ‘격려’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이 격려의 주제를 ‘산 소망’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본서를 ‘소망의 서신’이라고도 부른다. 본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힘입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근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사실을 상기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박해를 이기라고 말한다.

 

4. 주요내용과 내용분해

 

1) 주요내용

베드로전서의 핵심어는 ‘고통’과 ‘영광’과 ‘기쁨’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했기 때문에 신자들이 겪게되는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그들에게 영적인 영광스러움을 안겨다 주는 축복의 기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단과 세상이 우리 신자들을 해치려 할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다.

2) 내용분해

베드로전서는 그 교훈적 성격 때문에 명백한 개요가 제시될 수 없다. 단락을 구분시켜 주는 어떤 것도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1:1-12), ② 산 소망을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권면(1:13-2:10), ③ 산 소망이 나타나야 되는 생활영역(2:11-3:12), ④ 고난과 시련에 대한 권면(3:13-22), ⑤ 고난의 영적 의미(4:1-19), ⑥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5:1-11), ⑦) 문안과 축도(5:12-14)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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