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요한-누가의 성령이해에 있어서 일치점과 차이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바울-요한-누가의 성령이해에 있어서 일치점과 차이점

강대훈

  바울과 누가, 요한의 성령 이해를 보면 저마다 독특한 관점에서 성령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님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해가 발생하는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동일한’ 성령님에 대해서 ‘다른 이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글에서는 이해의 차이점을 ‘전망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으로 본다. 바울-누가-요한이 처한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달랐기 때문에 성령을 이해하는 관점이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성령에 대해서 더 풍성하고 다양한 이해를 가져다 준다. 전망의 차이점이 이러한 유익을 주면서, 동시에 바울-누가-요한의 성령 이해는 심층구조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 저자들이 가진 전망의 차이점과 이해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 우선 각 저자들의 성령 이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1. 바울-누가-요한의 성령 이해   1.1. 바울의 성령 이해   ⑴ “신분변화의 주체, 윤리적 열매를 창출”   바울 서신 중에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성령은 언약 백성을 출생시키는 능력이 되면서 동시에 “윤리적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을 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을 듣고 성령을 경험했고(갈 3:2-5)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3:26-4:7).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3:14)이요 “성령을 따라 자들”(4:29)이다.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앞으로도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avlla. pi,stij diV avga,phj evnergoume,nh)이라고 하면서 ‘사랑’(avga,ph)은 성령의 열매, 삶으로 나타난 윤리적인 열매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이라는 행위로 일하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난 “사랑이라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요 “성령의 열매”(5:22)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제는 할례와 같은 표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5:6). 이 사랑의 행위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된다. 성령의 뜻을 따르고 있는 여부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증명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구원론적, 카리스마적, ‘윤리적’인 영이 되신다. 종말론적인 인식의 새로움을 주는 성령은 사람들에게 구원하는 지혜를 제공하는 영이시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 선포는 죄인들을 변화시켜 새 사람으로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 카리스마적인 성령의 사역은 여기서 구원을 창출하는 지향성을 가지며 신자들의 새로운 윤리적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갖는다.   ⑵ “새 언약의 영”(The Spirit of the New Covenant)   유대주의적 영향을 반대하기 위해 바울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약속한 새 언약의 주제들을 발전시켜 복음 속에서 어떻게 새 언약의 목표가 성취되고 있는가 밝힌다(고후 3:6-18).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는 “새 언약의 영”으로 묘사한다. 옛 언약의 중심은 율법이었지만 새 언약의 핵심은 성령이다. 새 언약의 영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1) 새 언약의 영은 ‘구원론적인’ 영이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사람들 속에 두어 새로운 인식과 순종을 가능케 하는 ‘새 마음’을 창조하실 것이다. 새 언약의 영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새 창조, 새 마음, 새 영, 생명은 없다.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의문과 영, 성령과 율법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는데, 이런 대조를 통해 새 언약의 우월성을 논증한다. 돌판에 쓰여진 문자에 불과한 율법은 인간 내면의 죄악성을 치유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성령은 이러한 삶과 순종을 가능케 할 수 있다. 2) 고후 3장의 성령론은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유대교를 눈멀게 하는 오해의 ‘수건’(veil)을 제거하고 종말론적인 인식의 새로움을 제공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출 34:34; 고후 2:12-18). 구약과 유대교에서 예언의 영은 참된 지혜와 계시를 제공하는 원천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성령은 바울에게 있어 말씀 선포를 참되게 이해하게 하는 원천이시요(고전 2:10-16; 엡 1:7-19). 그리스도 사건의 계시자요 조명자로 활동하신다.   ⑶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는 “새창조의 영”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실존을 결정하는 기준은 “육체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음식법(갈 2:14-14), 월력준수(갈 4:10), 할례(갈 6:12f), 즉 “율법의 행위”(ta. e'rga tou/ no,mou)와 같이 “유대인의 신분표지의 행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evk pi,stewj Cristou/ kai. ouvk evx e;rgwn no,mou) 열린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언약 백성이 태어난다고 본다(갈 2:20). 이러한 변화는 성령에 의해 되어진다.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축복들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참 후손은 혈통, 할례, 율법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신분 표지들이 아니라 믿음과 성령으로 특징화되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은 약속의 자녀, ‘성령을 따라 난 자녀’(갈 4:2)였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복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해석한다(갈 3:34). 이 성령의 약속을 성취한 것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약속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신 새 언약의 성령이요 새 창조의 영이시다. 예수 안에서 오신 성령을 바울 사도는 예수의 영’(롬 8:9), ‘하나님의 아들의 영’(롬 8:35; 갈 4:6)과 동일시한다. 성령을 통해 새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옷입을 때 새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새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능력”: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면서 새 언약을 출애굽 전승에 비유하여 우월성을 강조하면서도(고후 3:6-11) 동시에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창조하신 창조 전승에 비견하기도 한다(고후 4:4-6). 과거에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 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6절). 복음 속에서 비취는 이 창조의 빛이 사람들의 마음에 비취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새 피조물이 된다(고후 3:38; 5:17). 사람들을 새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새 피조물로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구원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인식의 새로움을 주어 참 이해와 지혜를 얻게 한다는 점에서 ‘카리스마적’이다.   ⑷ 성령의 종말론적인 목표와 긴장에서 갖는 성령의 역할   사도 바울은 성령의 종말론적인 목표는 ‘신령한 몸’,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이라고 증거한다(고전 15:42-49). 육의 몸은 혈과 육으로 구성된 자연 질서에 속한 몸이지만, 신령한 몸은 성령으로 특정화되는 종말론적인 부활의 질서에 속하는 봄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성령의 모든 사역이 지향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신자는 새로운 실존이 된(롬 8:38-44) 신자들은 종말에 신령한 새 몸을 입게 될 것이다(골 3:4).   그런데 신자들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가운데서 살아간다. 성령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구원 과정에서 ‘이미’(already) 이루어진 것과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는 것 사이의 종말론적인 긴장을 다리 놓는 주체이시다. 바울은, 이미 새 사람을 입었으나(골 3:1) 여전히 새 사람을 입어야 하고(엡 4:24)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으라고 명령한다. 새 창조를 시작하신 성령은 마지막 부활시에 신자를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고전 15:49; 롬 8:39; 빌 3:21). 이러한 변화의 확신은 ‘성령’께서 하신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역동적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성령께서 이끄신다(고후 3:37). 이 변화를 위해서 성령을 좇아 육체와 싸우고 악의 세력들과 전투하는 영적인 전쟁이 신자의 마음속에서 벌어진다(갈5:16-18; 롬8:32-34).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지 악한 세력에 대해 이미 승리하셨고(골 2:12-15) 신자를 악의 통치권에서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을 뿐만 아니라(롬 8:1-2) 그의 안에서 오신 성령은 신자에게 새로운 인식 새로운 순종을 가능케 하시는 종말론적인 영으로 활동하고 계시다(롬 8:4-5; 갈 5:16-24).   1.2. 누가는 성령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⑴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을 지속하고 확대하는 능력   누가는 예수의 사역과 그 결과로 생긴 교회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그들을 열방의 빛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자신이 시작 한 이러한 구원 사역을 넘겨받아 땅 끝까지 지속하고 확대하게 하셨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담당하는 구원 사역을 집행하시는 능력이시다. 그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예수에게 먼저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구원하는 메시야 사역을 담당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오순절 날에 그의 제자들에게도 임하셔서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을 지속하고 확대하게 하셨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은 이 점에서 ‘예언의 영’이시다. 예언의 영의 선물은 은사적 계시와 지혜를 제공해 주고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시는 카리스마적 성격의 선물이지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구원론 지향적인 성격도 갖는 다. 그러므로 예수와 성령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누가의 구원론과 성령론의 본질을 파악하는 핵심이다. 요단강에서 예수는 성령을 받으심으로써 이사야가 내다본 모세와 같은 해방자가 되셨다. 예수께서는 ‘복음’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구원한 종말론적인 해방자이시다. 이런 ‘해방자’의 이미지 때문에 누가행전에는 모세와 예수의 유비 이미지들이 많이 함축되어 나타난다.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이 지속/심화/확대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었다. 시 110편의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리셔서 그의 오른편에 앉게 하셨다. 영광을 받으신 예수께서 부어 주신 오순절 성령의 선물은 요엘 선지자가 약속 했던 바로 그 ‘예언의 영’이었다(욜 2:28-31). 예수는 성령을 받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이제 성령을 땅 위의 제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주체가 되셨다. 이 점에서 성령은 예수의 우주적 통치권을 집행하시는 능력이며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을 땅 위 에서 지속, 심화, 확대하시는 능력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통치 능력인 성령의 선물을 받아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을 지속하고 심화하며 확대시키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다.   ⑵ 성령은 구원받은 공동체에 주어진 선물이며 축복   제자들은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사역으로 이미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오순절 날에 영광을 받으신 예수께서 부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사역을 통해 이미 구원을 경험한 자들이었지만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을 땅 끝까지 확장하기 위해 오순절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행 1:8).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은 어떻게 받는가? 누가는 행 2:38-39의 말씀을 성령 경험의 규범으로 삼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 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성령은 제2의 축복이 아니라 구원 얻은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와 같은 극히 비정상적인 패턴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누가는 이것을 곧바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은 불신자들을 구원하는 증거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교회 구성원들에게는 생명력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어 강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기도 하다. 성령의 능력 없이 선교 사역을 수행할 사람은 없다.   1.3. 요한은 성령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⑴ 예언의 영: 교회의 (성경)선생이신 진리의 영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보냄을 받은 메시야다. 독생자 로고스가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의 계시 사역을 힘 있게 하기 위해 한량없이 성령을 부어 주셨다(3:34). 성령을 힘입어 전하는 그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선포하는 말씀이다. 성령은 바로 예수의 계시 사역을 능력있게 하기 위해 주어진 예언의 영인 셈이다. 예수에게 부어진 성령은 그의 계시 사역을 능력 있게 하여 사람들에게 영생 얻는 믿음을 창출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성령은 교회를 인도하시고 가르치는 진리의 영으로서의 역할을 하신다. 예수께서는 떠나시게 될 때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다. 파라클레이토스가 법률적 배경을 고려하여 ‘변호자’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요한복음에서 보혜사 성령이 담당하는 일차적인 기능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이다. 요 14:26, 16:12-15을 보면, 보혜사 성령의 첫 과제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교훈들을 ‘생각나게’ 만들고 그것들을 ‘해석해’ 주는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주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기억하고’ ‘이해하게’ 되었다(2:22). 요한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기 이전에는 참되고 온전한 믿음의 이해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설명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하면서 그를 떠나기까지 하였다(6:60). 보혜사 성령은 제자들에게 역사적인 계시의 진리를 밝히시고 과거에 계시된 진리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해를 심화시킨다   이러한 이해는 몇몇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사역이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영적 엘리트들만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요한일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결과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요일 2:20). 소수 그룹의 사람들만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선동하던 이단자와는 달리, 참 신자라면 모두 성령을 통해서 참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를 증거하여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므로, 성령의 세례와 은사는 교회를 세우시는 보혜사의 전망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속에 있는 교회에 대해 성령은 예수의 역사적 계시를 기계적으로 전수하지 않고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역동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며 가르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승천 이후 시대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단순히 기억나게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그 실천적 함축들을 역동적으로 끌어 내는 위대한 선생이시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은, 기본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에서 대망되었던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 사상에 기초해 있다. 요단강 세례 때 예수의 위에 임한 성령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카리스마적 성격의 ‘예언의 영’이었다. 예수께서는 계시적 지혜를 주시는 성령을 힘 입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요 1:38) 생명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다(요 3:34-36).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보내실 보혜사 성령도 기본적으로 카리스마적 예언의 영의 성격을 지닌다. 성령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임재를 중개하고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며 계시해 주는 영이실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세상에서 예수의 사역을 넘겨 받은 제자들의 증거 사역을 지원하고 효과적이도록 만드신다. 제자들은 성령에 힘입어 예수께서 시작한 증거 사역과 구원 사역을 승천 이후의 시기에 지속하고 심화하고 확대할 수 있었다(3:34-36; 20:21-23). 보혜사 성령은 새 언약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능력 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구원하는 증거자들이 되게 하신다(요 20:22).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으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되고 온전하고 참된 믿음의 이해에 도달하게 될 때(요 16:12-15) 변화된 생활이 가능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가 가능해진다(요 4:23-24). 특히 요한 1서에서 성령은 참된 믿음의 고백과 참된 사랑의 실천을 가능케 하는 능력으로 묘사된다(요일 3:23-34). 이로써 성령은 바른 신앙(orthodoxy)과 바른 실천(orthopraxy)을 통합시키는 능력의 원천이시다.      ⑵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는 성령   요한의 성령론은 전체적으로 조명해 볼 때 ‘기독론적 지향의 성령론’(a highly christologically oriented one)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성령의 사역은 ‘로고스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요단강 세례시에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야로서 활동하시기 위해 성령을 받으신 분이셨지만(요 1:32-33)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되셨다(요 15:20). 자신의 구원자적 주권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범세계적인 새 언약 백성을 형성하실 것이다(요 12:23-24, 31-33).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지상 사역 동안 시작한 구원 사역을 지속, 심화, 확대하게 하시는(요 20:21-23), ‘영광을 받으신 아들의 영’이 되셨다(요 20:22). 이 보혜사는 임의대로 계시를 전달하지 않으시고 예수의 역사적 계시를 해석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새 언약 공동체가 그리스도 중심의 한 몸, 곧 유기체(organism)를 이루게 하신다.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나타나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한 형태로 교회에 나타나는데 이는 봉사케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⑶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증거의 영   제자들은 성령을 힘입은 예수의 계시 사역을 통해 구원과 영생을 이미 경험한 자들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승천 이후에 그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6:7). 역사적인 예수의 제자들의 경우에 구원 경험과 성령 경험이 분리되는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제2의 축복 이론과 달리 현대 기독교인들이 역사적인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 사역을 되풀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의 승천 이후의 시기에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그들의 임재를 제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 얻은 ‘영생’(요 17:3)은, 승천 이후에는 ‘예언의 영’으로 활동하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성령은 계시적 지혜의 영으로서 십자가에 들린 예수께서 인류를 살리는 영생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영적인 참된 이해와 지식에 이르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재창조하신다. 보혜사는 예수의 성육신, 세례, 십자가 등과 같은 예수의 역사적 사건들의 참 의미들을 증거하는 증거의 영이시다(요일 5:6-10). 보혜사 성령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되신다는 참 믿음의 이해에 도달하게 만들고(요일 4:1-6)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게 만든다(요 13:2-13; 3:56). 또한 그들 속에 내주하여 세상과 죄를 이길 능력을 제공하시며(3:9)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로서 계명을 순종하고 의를 행하며 참 사랑을 실천하게 만든다(요일 2:29; 3:10,24). 이와 같이 성령은 새 언약 백성의 존재와 고백, 예배, 증거, 생활을 지탱하는 유일한 원천이 되신다.2. 성령이해의 차이: “삶의 정황과 저작 목적에서 오는 차이”   바울-누가-요한은 그들이 처한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차이 때문에 저작 목적이 달랐고, 따라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졌다.   2.1. 바울-누가-요한의 목적의 차이   “바울의 저작 목적”: 바울과 누가, 요한의 성령 이해를 살펴 보면, 세 저자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저술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술 목적의 차이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그들의 전망의 차이를 가져 올 수 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요 선교사였으면서도 자신이 세웠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이방교회들을 말씀으로 굳게 하고 격려하던 목회자였다. 대부분의 바울서신들은 개 교회가 지닌 특별한 문제들이나 위기 상황을 해결하고 자신의 독자들을 믿음 안에서 굳게 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누가의 저작 목적”: 바울과 달리  누가는 주후 60년대 후반에 기독교 교훈을 어느 정도 배워 알고 있지만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혼란을 겪던 사람들에게 복음의 구원사적 성격을 다시 한 번 확증하려고 누가-행전을 저술하였다(눅 1:1-4). 누가의 저술은 식탁 교제와 관련된 논쟁, 이방인의 유입 문제, 초대교회가 당면한 거절과 핍박 등, 윤리적 권면에 대해 관심은 갖는다. 누가는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이방 독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지닌 구원사적 성격을 다시 한번 확증하고자 한다.   “요한의 저작 목적”: 요한은 주후 90년대, 즉 예수의 승천으로 “예수 부재론”이 대두되된 시대에 글을 썼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상당한 세월이 흘렀고 재림에 대한 소망은 식어가며 영지주의적인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교회 상황에서 요한은 보혜사 성령이 역사적 예수를 대신하여 그의 활동과 임재를 계속한다는 확신 속에서 교회의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저술하였다. 요한의 교회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교회로서 성령의 가르침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를 찾고자 했다. 따라서 요한은 역사적 예수의 사역과 그 교훈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의 사역도 이러한 역사적 예수의 사역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2.2. “바울서신과 요한서신”과 “누가행전과 요한복음”의 차이   바울서신과 요한서신은 신자들의 구원 경험, 윤리적 변화, 은사적 활동에 연관된 성령의 다양한 활동을 “목회적 관점”에서 균형있게 다룬다. 반면, 누가행전과 요한복음은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을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연관시켜 “구원사적 맥락”에서 다룬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께서 예수의 구원 사역들을 어떻게 개별신자들 에게 적용하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누가와 요한은 예수와 성령, 제자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역들의 관계를 구원사적으로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처음부터 성령의 구원론적 사역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성령은 믿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재창조 하실 뿐만 아니라(고후 3:38; 4:5-6) 성령을 쫓아 행하는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존재들로 변화시키며(갈 53644; 635)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게 하신다(고전 15:42-46). 반면, 누가와 요한은 개인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기보다는 성령을 구원사를 이끌어 가는 능력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자신의 교훈과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계시하였으며,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만유를 다스리는 왕적 주권자의 신분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행 2:33) 보내셔서(요 15:26) 자신이 시작한 구원 사역을 지속하고 심화하고 확대하게 하셨다.   바울은 누가나 요한과 달리 성령의 활동들 중에서 승천 이후에 영광을 받으신 예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롬 8:11) 또는 ‘아들의 영’(롬 8:15; 갈 4:6)의 활동들을 목회적 적용 차원에서 이해한다. 세 저자들이 모두 승천 이후에 활동하는 성령을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누가와 요한은 구원사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사역에 초점을 둔 반면 이방인 선교사요 목회자인 바울은 교회와 신자들의 존재와 삶을 지탱하는 성령의 활동에 초점을 강조점을 둔다. ‘예수의 영’ 또는 아들의 영’이 누가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임재와 사역을 지속하고 확대하는 구원사의 능력인 반면에(행 1:8; 요 20:22), 바울에게 있어서는 신자들을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 재창조하는 구원의 능력이다(고후 3:18; 롬 8:29-30). 저술 목적의 차이로 인해 성령의 활동에 대한 전망과 강조점의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3. 성령이해의 공통점   3.1. 구원사적 전망에서 본 공통점: “새 언약 백성을 창조하는 성령”   누가와 요한은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해서 성령의 선물이 이방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근거를 논증하지는 않지만, 성령이 이방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일이 하나님의 작정된 섭리 가운데 포함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행 1:8; 11:37-18; 요 12:20-3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먼저 그들을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방의 빛을 삼아 땅 끝까지 구원하게”(행 13:47; 사 42:6; 49:6) 하려는 데 있었다.   바울은 성령이 어떻게 이방인에게 주어져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합류시키고 변화된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창조하는가를 언약사적으로 밝힌다. 성령이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였다(갈 3:6-14).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언약을 맺으실 때 처음부터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으며(갈 3:8; 창 12:3) 성 령의 선물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축복들 가운데 하나였다(갈 3:14). 그렇다면 이방 기독교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하여 믿음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재창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령의 사역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범세계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언약적 비전이 성취되었고, 이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구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었다(갈 3:13-14; 요 12:20-36; 행 2:23-36; 5:30-32; 11:17-18).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시고(요 12:31) 자신의 왕적 주권을 인정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며(행 2:33)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보편적인 새 언약 공동체를 세우실 것이다(요 12:32; 엡 2:11-16; 갈 3:8-14).   3.2. 카리스마적인 선물로서의 성령: “예언의 영”      “바울서신”: 세 저자는 공통적으로 성령은 예수께서 보내시는 카리스마적 선물로 이해하고 있는데, 바울은 시편 68:18을 인용하여 올리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들을 분배하는 주체가 되셨다는 사상을 강조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시편 68:18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게 된 근거들을 설명하는 사도행전 2장의 설명 배후에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13). 누가는 올리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하시다가 “위로 올라가신” 것은 시편 기자가 언급한 대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시기 위함이었다(엡 4:8).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올리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시다(엡 4:10).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선물’은 근접 문맥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11절 이하에 언급된 ‘교회의 사역자들’이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교사’와 같은 카리스마적 직책들은 올라가신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선물들이다. 고전 12장과 롬 12장에도, 올리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실현하고 교회를 온전한 그의 몸으로 세우시기 위해 교회에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주셨다.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실현하며 그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수단이다. 은사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권 실현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성령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서(엡 1:17-19) 예수의 역사적인 구원 사건들을 해석하고 계시하심으로써 믿는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게 한다(고전 1:21; 2:1-5). 성령은 참된 영적 이해와 지식을 가져다 주어 신자들을 재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생활을 인도하고 가르치며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변화시켜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신다.   “누가과 요한의 관점”: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은 카리스마적 ‘예언의 영’ 이었다(행 2:16-20).  요단강에서 예언의 영을 받으신 예수께서 계시적 지혜와 지식의 영을 힘입어(사 11:2) 사람들에게 생명을 계시하고 구원하신 것처럼, 오순절에 예언의 영을 받은 제자들은 카리스마적 지혜와 지식의 영을 힘입어 땅 끝까지 증인 역할을 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행 1:8). 요한도 승천하신 이후에 영광을 받으신 예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도 카리스마적 ‘예언의 영’으로 묘사한다(요 14:26; 15:16-27; 16:7-15). 성령은 영광을 받으신 아들의 영으로서 예수께서 시작한 구원 사역을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서 지속·심화·확대하신다. 이와같이 카리스마적 예언의 영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말씀을 깨닫게 함으로써 구원을 경험하게 만들고, 그들의 개인 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변화 시키며, 세상을 향하여 능력 있는 복음 증거자로 살게 만드신다.   3.3. 심층구조에서 나타나는 성령 이해의 공통점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차이 때문에 성령 활동을 다른 전망에 서 강조하고 있지만, 심층 구조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더 많다. 한 분이신 성령의 사역은 각 저자들이 다른 각도에서 언급했다고 해서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 독립적으로 구분하지만, 서로 통일성을 찾는 작업 역시 가능하다.   ⑴ 성령은 영광을 받으신 ‘아들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다(롬 8:9, 15; 갈 4:6; 요 7:37-39; 14:26; 행 2:33; 16:7): 성육신하신 예수는 요단 강에서 성령을 받으신 메시야가 되셨지만, 올리심을 받은 예수는 성령을 저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보내시는 주체가 되셨다. 예수께서는 만유를 다스리는 임금과 구주의 신분에서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먼저 변화시키시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이 시작하신 구원 사역을 지속하게 하신다.   ⑵ 성령은 카리스마적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시다: 성령은 계시적 지혜의 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게 하고(엡 1:17-19; 요일 2:20) 십자가, 부활, 올리심 등과 같은 구원 사건들에 대한 참된 믿음의 이해에 이르게 하신다(고전 1:6-13; 요일 5:1-12). ‘예언의 영이신 성령’은 예수의 구원 사건들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만들고(요 132-13; 3:3-15; 롬 8:34-46; 갈 4:6)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로 재창조하시는(고후 3:14-18; 4:1-6) 새 언약/새 창조의 영이 되신다. 모세의 율법을 읽던 백성들과 달리 새 언약 백성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창조의 빛(고후 4:6) 또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고후 4:4)를 경험함으로써 새 피조물이 된다(고후 3:38). 요한도 성령께서 계시적 지혜의 영으로서 구원 사건들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에 이르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만든다(요 3:3-15; 6:31-63)고 강조한다. 누가는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해 역사하시는 예언의 영은 죄를 깨닫게 만들고(행 1:37), 복음에 복종하게 만든다(행 6:7; 9:31). 무엇보다도 성 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임재를 제지들에게 중개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구원론적으로 필수적인 선물이시다.   ⑶ 성령은 공동체의 생활과 예배, 증거에 활력을 불어넣는 영이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치와 성숙(엡 4:1-12), 성도들의 윤리적 변화(롬 8:13-14; 갈 5:16-24; 요일 3:9-10) 예배의 갱신(요 4:23-24), 그리고 효과적인 증거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시다(행 1:8; 요 16:7-11; 고전 2:1-5). 성령은 말씀 선포를 능력 있게 하여 감사와 찬양을 터뜨리게 만들어 예배를 새롭게 하며,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영적인 감회를 끼쳐 그들의 일상 생활을 변화시킨다(행 2:41-47). 성령은 참된 믿음의 고백과 참사랑의 실천을 가능케 하는 원천으로서 바른신앙(orthodoxy)과 바른 실천(orthopraxy)을 통합시키는 능력이다(요일 3:23-24). 성령의 기름 부음이 신자들 안에 거할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요일 2:20-27; 고전 2:15) 죄를 극복하고 의를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 가게 만든다(요일 2:29; 3:9-10; 갈 4:23-29; 5:16-24; 롬 8:12-14). 그러므로 구원, 예수의 왕적 통치, 올리심을 받은 그리스도와 교제, 교회의 일치와 성숙, 참된 예배,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경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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