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롬 9:30-10:4에 나타난 바울과 구속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율법에 도래한 믿음(갈 3:25-29)25절에서 새 언약을 믿는 믿음이 작용하기 때문에 모세 율법은 더 이상 제한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새 언약 아래에서는 율법이 삶을 이끌어가는 동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항상 근본적인 것이며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브라함 언약을 상호보충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모세 언약은 항상 일시적이며, 한시적이고 아브라함 언약을 수행하도록 참여하는 것이었다(하나님의 지시를 반영할 때를 제외하고).그 결과(26절), 유대 민족에서부터 이방인에 이르는 모든 갈라디아의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또는 윤리적 관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들이 되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 양자로 입양되어 이스라엘의 신분(출 4:22-23, 신 14:1-2, 호 11:1)을 양자로 입양되어 얻게 되었고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 신분이 주어진다.35) 따라서 28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말은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상대적인 가치의 차이나 태생, 민족(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사회적 경제적인 것(노예인가? 자유인인가?)이나 성(남자인가? 여자인가?)과 같은 불평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바울은 우리 현재 사회에서 이러한 차이점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장에서의 주장은 29절에 나와 있는데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논점은 정말로 그리스도의 속하게 된다면 이러한 구분들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신앙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아브라함의 약속을 공유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사람들은 유대인의 자손이 아니라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의 완벽한 신분을 논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옮겨졌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시내산 언약 아래서 율법은 은혜를 이기지 못했고 율법은 최선을 다해봐야 생명에는 은혜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줄 뿐이다. 율법은 언약에 들어가는 조건이 될 수 없으며 구약에서도(신약에서처럼)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다. 신약에 있는 “율법으로”라는 구절은 위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자기 노력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십자가 후의 조건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내산 언약 관계와 그로 얻은 신분이36) 한정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오직 하나의 법, 모세 율법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에게(다른 사람들에게도37)) 노모스(nomos)라는 말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율법”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말(바울에게는 일반적인 말이지만)로 나타날 때는 모세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의 법’(6:2)이다. 음식법과 환경, 안식일과 준수와 같은 것들이 유대인 됨의 분명한 표식이었던 시대에는 유대 지도자들이 율법 준수를 가르쳤지만, 더 이상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세 율법이 요구되지 않았다.유대의 율법 조항들은 아무리 잘못된 율법 조항들이라고 해도, 신약 시대에도 분명 유대인의 토라 규정들은 합법화되고 있었고 이 율법 조항들은 언약을 지켜 은혜에 반응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의롭다 함을 지탱해 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구 언약에서 뿐 아니라(‘[모세의] 율법이 작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 언약 아래에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 언약과 새 언약 둘 다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순종을 촉진시키는 것은 율법이었고 신, 구약에서는 성령이 순종을 촉진시킨다.바울은 구속사에서의 변화를 예리하게 알고 있었고 십자가의 결과가 유대주의에 어떻게 침투할지 알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인들이 세상을 하나님의 진정한 나라로 대하게 되는, 종의 역할을 하는 민족으로서 성경적인 위임을 이행하게 된다고 이해했다. 처음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이러한 놀라운 기회는 할 수 있는 한 유대의 제도가 인정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 새로운 유대 그리스도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예루살렘에 있는 소수의 중요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환영을 받았다. 이 유대인들의 시도들이 사도행전에서 정치적으로 많이 묘사되어 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운동으로 과거를 관통하려는 이 새로운 시도의 결과들이 바울의 서신들에서 보여진다는 점이다.율법의 저주(갈 3:10)바울의 논리에서 강조되는 구속사의 원리는 모세 율법과 모세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들을 거의 다룬 갈라디아서 3장의 정황에서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으며 나중에 로마서 9장 30-33절에서도 이 원리가 보여진다. 갈 3:10에서 더욱 분명하게 보이는 바울의 논리는 바울의 설교38) 근간에 깔려 있는 구속사의 변화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헬라어 gar, 10절)으로 3장 10-14절 부분이 시작되고 있으며 이 장의 목적인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요건에 대해서 6-9절에서 믿음과 토라로 양분되어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으로(대적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일 수도 있는)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여하튼, 10절의 두 부분에 있는 말은 논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이것은 원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던(신 27:26) 율법의 저주 때문에 발생하는데, 바울은 율법의 저주(3:10절 상)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린다고 말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바울이 언급하지 않은 ‘사실은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소전제를 이 절 안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절 중간에 배치해 두었다. 이 구절은 율법은 전부 다 지켜질 수 없기 때문에(신 27:26) 율법의 저주가 율법을 범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신 27:26은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가 임한다고 한다.바울은 지금 10절에서 신명기 27장을 율법의 작용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면서 신명기 27장에 일반론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바울은 갈 3:21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결코 구원의 길일 수 없다고 덧붙인다(설사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해도). 왜냐하면 구원은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율법은 언약의 선구자가 아니라 언약을 지킬 책무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여하튼,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3:10 상반절의 표현은 시내산 언약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며 이 표현은 이 구절의 핵심이기도 하다. 헬라어 ek 소유격은 어떤 부류나 당의 회원을39) 나타내는 데 쓰이는 말로, 여기서 이들은 그들의 행동으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오리엔테이션에 의해서 시내산 언약 회원이라는 자신이 신분을 확인한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사는 것이 율법을 이행하거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아니며 따라서 신 27:26은 자신들을 언약 회원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율법 책에 쓰여져 있는 모든 것들에 순종하지 않고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받는다.”는 구절을 추가시킨 것일 수도 있다.저주를 받는 것은(문자적으로는 구약에서 ‘파멸에 바쳐지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잘려나가는 것이며, 은혜의 언약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갈 3:10은 ‘지금’ 새 언약의 시대에는 율법 언약 아래 머물면서 율법에 순종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제물로 속죄받았던 모세 언약이 십자가로 그쳐졌기 때문이다. 정말로, 모세 율법은 완전하게 지켜질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전례 없는 구원 행위를 통해서 새 언약을 수립하고 새로운 종류의 용서를 수립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으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모세 언약으로부터 사람들이 잘려져 나온 것 처럼 보인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진실하고 흠 없는 죄의 속죄물로 드리는 죽음으로,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려 율법을 이행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저주받았다고 선언한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켰다.이것은 십자가 사건 후에도 시내산 언약의 회원들은 항상 그들 자신이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셨던 모든 말씀대로 하고 말씀에 순종한다고 진지하게 맹세했기 때문이다. 물론 구속은 성경적으로 볼 때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바울은 유대인들의 신분이 가지고 있는 비논리적인 면을 끄집어 내려고 했을 뿐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모세 언약이 강요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안디옥의 베드로와 같이 신분의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 다른 것들과는 별도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정말 잘 짜여진 구조로 유대인들이 심각한 신학적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함으로 이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을 모세 율법과 시내산 구조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특별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할례, 음식법, 안식일 준수와 같은 것들을 지키도록 요구하여 도덕 원리의 관점으로 모세 언약 율법을 받아들이라고만 단순히 요구하고 있지 않다. 이들은 모세 언약이 계속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모세 율법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십자가로 인해서 쓸모 없게 되어 버린 속죄 제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전제하는 심각한 범주 상의 실수였다.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의미를 이해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바울이 그렇게 날카롭게 설명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일반 역사의 관점으로 서술하지 않으며, 갈 3:10(그리고 갈 2:14-21 등)에서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한다. 바울은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지 않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직,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로서 했던 행위들이 시내산 언약을 확증시키고 새 언약 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고 묘사한다. 정말, 이들은 시내산 언약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시내산 언약에 예수를 끼워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바울은 지금 “(모세)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사람들, 십자가 사건 후에도 시내산의 언약 아래 있는 회원들이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갈 3:10에서 ‘이 율법’을 “율법책”, 즉 맛소라와 칠십인경, 신 27:26의 적용을 구약 전체의 율법으로 확대 적용시킨다. 구 언약의 일반적 적용 아래 있는 한 희생 제물로 인한 속죄, 죄를 지은 후 개인적인 죄 고백들을 신중하게 한 것이 속죄 시스템에서는 유용했지만 저주는 거두어 들일 수 없다. 어쨌든, 시내산 언약을 고수하는 사람들 누구나, 율법을 지키는 자든지, 율법을 깨뜨리는 자든지 누구에게나 저주가 임하기 때문에, 그 어떤 속죄도 일어나지 않고 용서받을 수 없다는 바울의 견해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율법의 저주를 없애주고 범법자를 용서해주는 희생제물 시스템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이다.40) 간략하게 말하면, 바울은 시내산 언약 시대가 끝났지만 이 언약을 다시 되돌리려는 사람들은 그들이 불가피하게 지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제도가 사해줄 수는 없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갈 2:14-21과 갈 3:10-14와 같은 비판적인 정황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일반 역사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현재 이스라엘의 구조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 관점은 예수의 사역이 예수가 시내산 언약의 메시아 인 것을 검증해주고 새 언약 관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아직도 시내산 언약의 모세 율법 아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신 27:26의 언약의 저주 아래 있는데 그것은 희생 제사 구조와 언약 조항들을 이들이 불완전하게 이행하고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새 언약 아래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 다른 속죄 형식으로41)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 과거, 현재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해서 충분한 속죄를 했다는 사실을 지금 받아들여야만 한다. 속죄 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자체가 위대한 속죄의 시대를 포함하고 있었다(롬 3:25).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모독을 받았다(막 15:38).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제의적인 구조가 결론적으로 끝났고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유대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인식될 때까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주후 70년 9월까지 이 성전의 역할이 계속되었다.롬 9:30-10:4의 적용구속사적 관점으로 롬 9:30-10:4를 옮긴다면, (어떤) 이방인들은 ‘의를 구하지도 않았고’42) 의를 믿음으로 찾지도 않았다고43) 이스라엘 선지자는 예언했고 예수는 설교를 통해서 이런 내용을 말했다. 이것은 9:6 하-29절에서 바울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이르게 되는 불가피한 결론이다. 바울이 9장에서 펼치고 있는 개론은 분명히 새 언약 아래서 이방인들의 회심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랑을 입은 사람들의 숫자를 확신하는 바울의 현재의 선교적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다.롬 9:30에서 사실상 획득되어진 의는 새 언약의 자격이다. 구약에서 명사에서 유래된 동사 SDQ는 변론학상으로나 언약의 측면에서 볼 때, ‘의롭다’(Qal)를 의미하거나 ‘의를 선포하는 것’(Hipil)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을 말하는 의나, 언약에서 말하는 의는 소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관계를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규범에 순응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구약에서 순응해야만 하는 규범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다. 우리는 사람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로44) 다시 되짚어볼 수 있다. 여하튼 사람이 그런 창조질서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구속사에서 이스라엘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부흥을 세상에 가져오게 하는 여호와의 복음전도자의 일관된 책무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경의 언약을 통해서 실행되고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성경의 기초언약으로 창세기 1-2장을 확증한다.45) 구약에서 하나님은 각 상황에서 언약 약속에 근거해서 복을 주거나 심판을 내리거나 개입하신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이 주요한 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겼다는 부분이다(창 15:6). 아브라함의 행동은 계속 언약 관계 안에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다. 언약은 창 15:18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재확약되었지만 이 언약의 구조는 창 12:1-3에 있는 아브라함의 부름과 사명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성경 언약은 확정되었고 법률에 준하는 효과를 미치고 있었으며 이미 그 관계가 수립되었다.46)신약에서 사용하는 동사 dikaioo(‘의로 여기다.’)는 성령의 역사로 다시 태어나 신분의 변확 생기는 상태를 서술하기 위해서 쓰인다. 단어의 용례로 볼 때 의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다시 태어난다는 선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그저 다시 태어나 신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믿는 이들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구약이나 신약 언약 관계 안에서 출발하고 계속 그 안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에 기초를 두고 행동으로 표출하는 언약회원이 된다는 것은 신, 구약에 나오는 ‘의’나 ‘의롭게 됨’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약에서 도출되어진 이 신학용어는 하나님의 용서의 결과 믿는 이들을 새 언약 아래 두게 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얻게 되는 신분을 말하는 것이다.바울이 9:30-33에서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이방인들의 회심이 분명해졌다는 선교적 상황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어디서 십자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남겼는가? 어떤 이방인들은 안에 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깥에 있다. 바로 이 차이는 (이스라엘의 경우에) 그리스도를 유대의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바울은 롬 9:31에서 언약 회원인 것을 나타내 주는 율법을 따랐지만47) 새 언약의 회원이 되지 못했다고 이야기 한다. 바울이 32절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구약 시대에 의와 언약 회원이 되는 자격에 대한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 토라를 진정으로 추구한 사람은 일반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정말로 신실한 남은 자들이었다.3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따라 언약 관계를 맺는 이스라엘의 자세를 고찰한다.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32절에서 바울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이 하는 행동들은 잘못되었고 자기 패배라는 사실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토라를 지켜야 한다는 관점으로 언약 논쟁을 벌이고 토라에 기초한 행위를 주장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토라의 역할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시내산 언약 아래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시내산 언약이 있는 한 강요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임 이후에 언약 관계를 맺는 이스라엘의 자세를 생각하고 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의 관점은 계속 언약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러나 바울에게 그러한 시도는 분명 믿음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 9:33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표현한 것은 31절의 난해 구절 nomon dikaiosunes가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율법을 좇고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의의 율법(31절)은 언약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49)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율법에 올바른 동기가 부가된다면50) 이스라엘에게는 합법적인 목표이지만, 이러한 일은 모세 언약 아래에서만 추구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후의 상황에서 바울이 9:30-10:4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스라엘이 영적인 걸려 넘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며(33절) 이러한 내용을 9:30-10:4에서 주장한다.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배가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는 시내산 언약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새언약으로 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움직이지 않고 시내산 언약에 근거를 둔 행동을 계속 추구하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잘못된 동기로 움직이는 바울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과감히 잘못된 언약을 부수어야 한다! 모세 율법을 근거로 한 이들의 잘못된 시도들은 이들의 종교적 상징이었던 AD 70년의 파괴와 신적인 배척을 의미한다. 새로운 현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꼭 같은 방식으로, 믿음이라는 꼭 같은 방식으로 언약을 맺고 언약 안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태어나면서 언약을 맺는 이스라엘의 태생적 특권을 없애버렸다.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를 포기해 버린 끔찍한 말, “우리는 시이저 외에는 왕이 없다!”(요 19:15)고 말해 선택받은 민족의 특권을 십자가에서 버려버린 이들은 정말로 전체 세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롬 9:30-33에 대한 나의 연구는 롬 10:1-4를 주석한 N.T. Wright의 주석과 약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내 연구가 옳다. 바울은 롬 9:1과 10:1에서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 유대인들은 그릇된 지식에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식은 진리라고 인식하지만 바울은 이들은 하나님의 의에는 무지하며 하나님의 새 언약 계획에는 무지하다고 쓴다. 3절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의가 아니며, 의가 부가되었지만(참조 NRSV 10:3)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의를 변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유대인들은 시내산 언약 계획을 이행한 예수를 통해 유대 민족에게 던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배척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한 사역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바울은 10:4에서 이와 유사한 결론을 계속 말하지만 신약 구절과는 크게 대립되지 않는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telos가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특수 부분에 대한 해석학적 차이는 별도로 하더라도 이 구절의 주제가 무엇인지 영어 동사 구문 ‘to be’의51) 형식과 위치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쨌건 이스라엘이 새 언약 개시자인 그리스도를 배척한 상황과 관련된 이 구절을 N.T. Wright가52) 잘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의와 관련하여’ 율법의 마침이 (언약 회원 등) 되셨고 (지금) 믿는 사람 모두를 위하고 계신다.” 이 구절의 첫 번째 부분은 유대인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준다. 시내산 언약에 순응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모세 언약 시대를 완전히 끝내도록 완전한 속죄 제물로 드려(10:4), 이스라엘이 요구했던 모세 언약을 완전히 지켰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대표했던 세상을 위해서 죽었다. 즉, 시내산 언약 시대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났고 이스라엘 민족의 제도들도 끝났다는 말이다. 어쨌든 특별한 이스라엘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 의의 언약으로 드러난 십자가 희생으로 모든 용서를 요청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 구조를 완성시키는 새 언약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으면 세상의 구원자,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지금 모든 것들의 주로 왕좌에 앉아 있다.결론간략하게 말해서 이 논문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속사의 큰 운동이고 새 언약을 열게된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울 신학을 접근하는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약에서 구분되지 않은 이스라엘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입증하는 것은 성경 신학이 신,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행동을 훨씬 더 깊이 있게 일관성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신약의 기독론으로 입증하는 것은 구약의 대의와 본문을 초월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구약과 신약이 펼치고 있는 성경의 성경 신학이다. 하나의 신적 계획과 하나의 구속 방법과, 각각의 성경이 펼치고 있는 새 피조물을 완벽하게 빚어가기 위한 하나의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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