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롬 9:30-10:4에 나타난 바울과 구속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롬 9:30-10:4에 나타난 바울과 구속사

서론: 목적과 방법(Introduction : Purpose and Method)

십자가와 예루살렘 멸망의 정해진 날짜 사이에, 초대 기독교 교회의 출현을 초래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간의 숱한 갈등이 발생한다. 앞으로 이 글에서 다루어질 논제는 십자가와 민족 이스라엘 시대의 종말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구속사적 차원이 바울 서신,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이 본문들만 다루지는 않겠지만)에 나타난 논쟁적 이슈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구속사적 접근은 문제가 된 바울과 유대인 기독교간의 계속적인 충돌에 대한 이해를 마련해 준다. 이러한 이슈는 에베소서와 목회서신과 같은 바울 서신에서도 계속 반영될 것이다.성경 계시가 역사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구속사적 성경 접근, 예를 들면, 성경 신학의 구성에 대한 통시적 접근은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 구속사는 성경 계시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 집중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구약 본문은 신약을 통해 최종 신학적 형태를 갖게 되며, 구약에 제기된 이슈를 다루는 정경적 방식은 신약을 통한 접근방식에 의존할 것이다. 영감의 교리에 입각한 이 같은 접근방식은 처음의 접근 방식들에 부합될 것이나, 더 넓은 구약의 의미와 의의를 제공해 줄 것이다. 나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이스라엘’, ‘율법’ ‘언약’과 같은 용어들을 다루면서 이러한 논점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성경 신학은 통시적 서술 작업이며, 성경의 주제적 발전은 이런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성경 신학은 단지 서술적일 뿐, 규범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학의 구성은 인간의 작업이며 그로 인해 오류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완성된 성경 신학은 창 1의 첫 창조와 창 2장에1)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진술로부터 시작해서 계 21-22장의 최종적인 새 창조의 도래까지 나아가는 성경의 전 발전과정을 살펴보아야만 한다.의심할 나위 없이, 십자가로 인해 이스라엘에게 초래된 근본적인 변화들은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변화들은 거의 탐구되지 않는다.2) 이 논문에 제기된 이슈들, 즉 예수에 의해 수립된 새 언약의 시행; 민족적 이스라엘과 신앙적 이스라엘 간의 구분이 신약 본문에 의해서가 아닌, 구약으로부터 반드시 기인한다는 점; 바울의 신학과 사역에 나타난, 종종 간과되는 십자가 이후의 관심사와 같은 이슈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 서신의 주요 맥락에서처럼 이러한 이슈들이 상호 연관될 때, 롬 9:30-10:4에 나타나듯이 매우 다른 해석학적 관점을 제공해 준다.구속사와 언약(Salvation-History and Covenant)9:30에 나타난 바울의 첫 질문은 9:24-29을 회고하며, 이 구절에 묘사된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가 에 대한 이유들을 제시한다. 바울은 30절에서3) 일반적인 이방인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9:24-29에 전반적으로 논의되었던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구원받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에 가입되는 이방인들의 연합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이와 같은 목적에 따라 이스라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신앙의 남은 자에 의해 수립될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언제나 인종에 의해서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이 롬 9:6-13에서 명백히 제시한 논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는 그리스도 왕국의 시작에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가져다 주었다.첫 번째 사실은, 예수의 죽음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으로 인도해 주었다는 점이다. 9:30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았던, 즉 의를 추구하지 않았던 어떤 이방인들이 이제 믿음을 통해 새 언약의 회원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은 신약의 주요 요점을 반영해 준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과 세계 역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요인을 가져다 주었다. 예수의 죽음 이후 즉시 발생한 성전 휘장의 찢어짐과 함께(막 15:38), 이스라엘과 그들의 제도들은 버림 받았으며, 이제 성전과 상관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다. 열방의 빛, 즉 세상의 전도자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의 소명은 오순절에 등장한 새로운 조직체, 즉 교회 혹은 회복된 남은 자 이스라엘로 옮겨졌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원대한 구속사적 변화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커다란 어려움들과 그로 인한 갈등을 의미했다. 새 언약의 도래와 그로 인해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새로운 조직체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주요 요소들은 이러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둘째,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및 에베소서와 목회서신과 같은 본문 속에 반영된 초대 기독교회를 둘러싼 대부분의 문제들은 주후 70년 까지 예루살렘이 존재 했던, 무의미한 유대인들의 제도들이 지속되었고, 그것이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데 이것은 분명해 보인다.셋째, 바울 서신의 대부분은 최근의 이슈들과 관련된 일상의 선교적 관심사들을 다루고 있다. 이 점은 분명한 듯 하다. 그러나 바울의 주요 단락들 가운데 롬 9:30-10:4과 같은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 이후의 상황에서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발생한 민족 이스라엘의 위치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나는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은 필수적인 해석학적 접근을 통해 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들을 조사할 것이며, 그것들을 논쟁적인 바울 서신의 맥락, 즉 롬 9:30-10:4에 적용해 볼 것이다.신약의 새 언약( The New Covenant in the New Testament)신약의 언약 신학에 대한 커다란 윤곽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적 연관성과 관점이 주축을 이루었던 초대 교회의 철저한 유대교적 특성을 염두에 둔 신약 신학을 고찰해 보는 것은 가치가 있다. 막스 터너는4) 신약(그리고 구약)의 언약 개념의 중요성은 그 단어의 언급 회수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복음서에 유일하게 언급되는 눅 22:20과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실로 중요하며, 수난 기사의 주요한 해석을 제공해 준다. 바울서신의 교회는 누가의 공식을 사용했다(예를 들면, 고전 11:25; 눅 22:20). 터너는 눅 22: 29의 언약적 표현 용법, 즉 디아디데미라는 동사 용법과 아울러, “내가 너에게 왕국을 맡긴다”는 표현에 주목한다. 그는 “언약”과 “왕국”이 잘 제시되면서 이 단어들이 상호 연관된 개념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눅 1:72-75)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위해 시행되었으며, 만약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으로 깨달았다면, 그 목적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포에스터는5) 구원, 하나님 나라, 메시아적 희년, 새 언약과 같은 개념들이 단지 약간의 다른 뉘앙스를 지닌 체 서로 중첩되어 묘사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예수가 스스로 죽음을 통해 종말의 날과 연관된 렘 31:31-34의 새 언약을 세우셨고 주의 만찬을 그 죽음의 기념식으로 규정하셨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수의 죽음으로 시행된 새 언약이 신약의 중대한 교리임을 예상하기에 충분하다. 실로 새 창조로 인도하는 새 언약의 시행은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말미암은 중요한 축복이 된다만약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예수가 토대를 놓은 “새 언약”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암시되고 있다.누가복음에서 그의 피로 새 언약을 소개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출 24:8을 연상시킨다. 이 구절에서 모세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시내산 언약 재가를 위한 행위 서약을 피로서 확증한다. 탈굼(Pseudo-Jonathan and Onkelos)에서 언약의 피는 대속하는 것으로6) 이해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 사함을 위해”라는 표현을 첨가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26:28은 “언약의 피”라는 표현에 이미 암시된 것을 명백히 해준다. “죄 사함”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는 렘 31:31-34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의 희생의 효과를 가리키고 있다. 예수는 종으로 소개되기 때문에,7) 만찬 때 그의 행동은 이사야 53:12에 나타난, 만인의 죄를 짊어진 자기 희생적인 종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또한 사 42:6, 49:6-8을 연상케 된다. 여기서 종은 언약 백성(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언약에 근거하여 이방인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의 끝까지 전하도록 하기 위해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죽음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인의 빛이 되어 그 언약을 성취함으로써 그 임무를 완성케 해주는 희생과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했다(cf. 막 10:45; 고전 15:3; 고후 5:21).“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을 마시지 않겠노라”(눅 22:18)는 표현은 마치 유월절이 이스라엘이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할 그 날을 고대했던 것처럼 주의 만찬도 그러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실로 바울(그리고 그의 교회들)은 예수의 죽음을 기독교 유월절 희생으로 해석하며(고전 5:7), 주의 마지막 만찬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이사야의 새 출애굽에 대한 강조점과8) 조화를 이룬다. 이 새 출애굽의 강조점은 누가복음을 특징지어주고 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비극이나 실수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피를 단숨에 흘려 모든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 준 그의 죽음을 자신의 사역의 승리적 행위로 보았다.예수는 이 새 언약의 차원들을 어떻게 이해했겠는가? 누가에 따르면, 예수는 렘 31:31-34(눅 22:20)을 암시하면서 포로기의 분열과 임박한 심판 이후의 시내산 언약의 갱신과 관련된,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의 약속에 관하여 말했을 것이다. “새로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다쉬의 의미론적 용법(70인경에는 카이네 디아데케로 번역됨) 뿐만 아니라, 렘 31:32과 시내산 언약과의 연관성에 근거해 볼 때, 이 예수의 표현이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의 대체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 약속의 연속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가능케 해 주는 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이제 오순절의 새 성령으로 충만한 이스라엘에게 위임될 것이다.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바울의 강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그의 언약을 버리셨음을 결코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부활하신 예수를 유대인의 메시아로서 거절했으며 모든 이스라엘이 계속 존속될 이스라엘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롬 11:1-10, 9:6 cf 갈 6:16). 9) 그러므로 바울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새 언약”이 버림 받은 민족 이스라엘과 더불어 시행될 것인가(cf. 마 21:43; 요 19:15)? 아마도 새 언약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금지되었던 시내산 언약이 완전히 실행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새 언약은 회복된 순종의 이스라엘이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여된 그 임무를 성취하도록 촉진시킬 것이다(ex. 출 19:5-6). 그 임무는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새 언약이 십자가 이후 새 시대에 회복될 순종의 이스라엘을 위해 의도하는 바는 세계 선교이다. 왜냐하면 세계 중심지가 될 이 약속의 땅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제 명백히10) 새 창조의 최종 표상으로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요소를 다룬다..예수는 단지 이방인과의 몇몇 만남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그의 사역을 이스라엘에게로 제한시켰다. 그렇지만, 예수는 여러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그의 죽음으로11) 말미암아 이방인의 사역이 생겨날 것이라고 이해했다. 예수는 새 언약을 세움으로써 세상을 향한 이스라엘의 역할을 분명히 염두에 두셨다. 예수는 성실한 유대인으로 살았으며 죽으셨다. 그의 사역의 짐은 이스라엘에게 있었고 또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민족을 향한 그의 사역을 통해서가 아닌,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성취될 것임을 깨달았다.제물과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옛 질서를 완성하고 새 질서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출 24:1-11), 불순종의 대가는 사망이었다.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절정일 뿐만 아니라 그 불순종을 처리하였다. 그 구약 언약이 예수와 같은 그러한 죄의 희생제물을12) 통해 완성된 후, 이제 새 언약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새 언약은 그의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최종 계약이다. 최후 만찬은 새 언약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로 인도하기 위해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식사였다(cf. 출 12:2-27; 13:8-9). 이스라엘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유월절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한 나라의 설립으로 인도해 주었다. 최후 만찬에 암시된 유월절의 의미는 그러한 새 언약의 도래를, 출애굽의 구원과 한층 더 연결시켜 주었다. 최후의 만찬은 그 유월절의 유사성을 통해 언약 체결이 수반될 ‘새 출애굽’을 암시해 주었다. 게다가 바울은 고전 5:7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월절의 관점에서 이해하였으며, 고전 11:25에서 이 유월절의 제정은 뒤 따르는 새 언약을 수반한다. 주의 만찬은 기념적 행위 일뿐만 아니라 예수의 의도와 기대를 선포하는 행위이기도 했다(cf. 고전 11:26). 이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새 언약에 참여함을 경축하면서 새 언약에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바울서신에 나타난 언약 (Covenant in Paul)바울은 율법에 관해서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고, 예루살렘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다(행 23:6). 그는 베냐민 지파의 일원으로서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빌 3:5). 우리는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항상 존속된다고 보았을 것이라고 정당하게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언약’을, 유대교의 넓은 의미에서는 ‘은혜’와 ‘언약’을 포괄하는 율법 준수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규범으로 이해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언약적 상태를13) 나타내 주었다. 언약 공동체는 율법을 수용하여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자들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율법은 ‘언약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표지’였기 때문이다. 언약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이었다.샌더스(E. P. Sanders)는14) Tannaitic period에서 유대인의 기본적인 신학 개념들은 공식적으로 진술되기보다는 추론된다고 주장한다. 비록 기독교적 관점에서 디아데케가 바울서신에서15) 8회 등장하지만, 바울이 일반적으로 추론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기본적인 개념들로서 공식적으로 진술될 필요가 없었다. 갈 4:24은 두 가지 언약을 언급한다. 고전 11:25에 언급된 전통적인 주의 만찬을 제외하고는, 바울서신에서 ‘새 언약’은 고후 3:6에 유일하게 등장한다.바울의 언약 사상의 증거( Evidence of Pauline Covenant Thinking)고후 3장고후 3:1-6은 바울의 새 언약 사상의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이 구절의 맥락은 바울의 첫 사역 후 고린도에 방문한 유대인 순회 설교자의 무리들이 바울의 권위에 도전했고 그의 처신과 설교를 무시하였음을 말해준다. 바울은 그들이 스스로 “의의 사역자들”로 기만하는 거짓 사도들이라고 선언한다(11;15). 즉 그들의 사역은 유대인의 언약 관계성의 실체들을 설명하는데 주력하였다(cf. 3:1-11). 바울이 3:6에 언급한 대로, 율법과 모세 언약을 더욱 협소하게 연결시키는 태도는 그들을 유대교 주의자들로16)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출 34장에 나오는 모세의 사역과 유비시키면서 자신을 렘 31:31-34에 나오는 새 언약의 사역자로 소개한다. 반대로 그의 대적자들은 추론컨대 옛 언약의 사역자들이 된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을 모세와 비교하면서도, 자신과 모세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시내산 언약과 그 언약으로부터 기인하는 유대교의 의무들은 고린도에 온 거짓 유대교 사도들의 사역의 요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기독교 시대를, 유대교 시대의 연속으로 그러나 그것의 성취로 보았던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 언약은 지속되는 언약으로 이해되었으며, 예수는 이 언약의 성취로서 구체화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영적인 의미가 없이 돌판 위에 새겨진 글과,18) 신자의 마음에 새겨진 법을 대조시키면서 그의 사역과 거짓 유대교 사도들의17) 현 사역을 대조시킨다. 이 마음의 법은 새 언약의 시행의 결과이며19), 언약이 여전히 경험되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20) 모세의 율법을 “돌판”으로 묘사하는 표현(7절)은 구약에서 시내산 언약과 관련된 민족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반면21), 바울은 이전의3:3b에서 이것을, 영적인 의의를 결여한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의 사역과 연결시킨다. 왜냐하면 모세의 언약은 이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바울이 “의문”과 “영”을 계속 대조시키는 바, 이러한 대조는 자신과 모세의 사역 간의 대조가 아닌, 자신과 거짓 사도 사이의 대조인 것이다.22)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 언약적 사역은 주목할만한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이제 바울 시대에 기독교의 복음은 형식적 율법적 요구에 의해 보충되었다. 이런 요구들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바, 그것은 내적인 자유와 구별되지 않는 지속적인 모세 언약의구조로 간주되었다. 3:6에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러한 대조의 본질은 모세 시대와 바울 시대 간의 대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대조의 본질은 고린도의 기독교 시대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모세 시대와 바울에 의한 새 언약의 사역 간의 대조에 있다.예수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재생시키고 다시 적용시키고자 했던 모세 언약은 그것이 시행되는 때에는 그것이 죽음의 사역도 정죄의 사역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시내산 언약 그 자체는 그것에 순종해야 하는 인간의 영역 속에서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원과 민족의 축복의 수단으로 의도되었고 또한 그러했다. 실로, 구약과 신약의 언약에서 이와 같은 “의문/영” 사이의 경험적인 대조는 가능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구약에서는 시편에서 풍부한 증거가 있고 다른 의인화된 증거들도 나타난다. 즉, 구약의 언약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유효하게 시행되었다. 바울이 영과 의문 사이의 대조에 관하여 6절에서 말하는 것은 주로 3:1-3에 나타난 두 사역의 차이점을 가리키고 있는 듯 하다. 이 대조는 6절의 현재형(“죽이다”)을 통해 암시되고 있다. ‘거짓 사도’들의 사역과 반대되는 바울의 복음은 성령을 통한 갱신을 통해 변화된 삶을 창출하였다.히브리서에 나타난 언약( Covenant in Hebrews)히브리서 역시 주후 70년까지 유대 기독교인들이 직면했던 그 언약의 딜레마를 증거하고 있다. 성전과 그에 따른 모든 제의적 요소들; 희생, 제사장직, 제사 구조물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히브리서는 새 언약 시대의 제도들을 가리키면서 이러한 요소들과 맞선다. 이 새 언약 시대의 제도들은 구약 언약의 제도(제사장직, 성소, 속죄일, 희생, 제단)를 본 따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체하였다. 심지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대면과 같은 놀라운 사건들이 있었어도, 우리는 기독교 교리가 하룻밤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내 판단으로 아마도 디아스포라의 가정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된 히브리서는 주후 70년 이전에 구성된 듯 한데, 이 서신은 예루살렘 성전의 영속성이 유대인의 사고 속에 계속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브리서가 제기하는 문제는 앞서 언급된 새 언약의 동등한 제의적 가치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해결되어야만 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도 행전과 바울 서신은 주전 70년 이전의 많은 갈등들이 유대교의 제도들을 지키려는 노력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데 동의하는 듯 하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아닌, 십자가는 유대교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유대교의 시대는 주전 70년까지 점점 몰락해 가면서도 계속 존속했었다. 이 때에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불가피한 분열은 명백했으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타협을 고려하게 되었다. 23)민족적 이스라엘과 신앙의 이스라엘( National and Believing Israel)의문과 영간의 전적인 대조 혹은 율법과 영간의 대조를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데 적용시키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성경의 통일된 구원 개념과 신약에 나타난 이 대조들을 오해한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민족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 민족의 경험이 언제나 단지 의문에 따른 외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구약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지도층이 출애굽에서 시내산 언약에 이르기까지 불순종한 자들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민족의 결말은 그 시기 동안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던 온전한 경건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구약의 강조점은 특히 민족 이스라엘을 실패한 집단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즉, 열방의 빛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그 사명에 결코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에 언약에 순종하는, 핵심적인 신실한 자들이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이들은 주로 시편과 잠언과 같은 본문들이나 경건한 인물들(갈렘, 룻, 한나)의 이야기들 속에만 나타난다. 이사야(혹은 아마도 아모스)와 같은 선지자들에 의해 사용된 ‘남은 자’라는 용어는 보다 더 정치적인 용어로서 중첩되고 있는 듯 하다. 세례 요한과 함께 시작되어 민족의 갱신을 추구했던 예수의 예언적 사역은 그 목적 달성의 불가능에 직면케 되었다. 막 3:31-35(마 12:46-50, 눅 8:19-21)에서 예수는 민족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와의 관계성은 개인화시키고 있다. 아마도 ‘씨 뿌리는 자’ 비유의 핵심은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부정적인 반응 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를 걸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민족 이스라엘의 반응도 반영해 주고 있는 듯 하다. 예수는 ‘예언적 남은 자’(prophetic-remnant)로 예수의 주변에 이스라엘 안의 이스라엘을 불러모은다. 예수가 세울 에클레시아는 사실상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교체된 측면으로 이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면 관계 상 이 문제를 충분히 논의할 수 없다. 변치 않는 사실은 교회가 오순절에 부름 받은 신앙의 이스라엘과 함께 시작했다는 것이다.이스라엘에 대한 구약 언약의 기능은 주목할만한 민족의 변화를 창출해 내지 못했다. 이제 바울 시대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적인 순종을 필요로 하는 형식주의와 율법적 요구에 의해 보충되어 졌으며, 그것은 모세의 언약적 구조가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수가 죽을 때, 유대교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유대교의 제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 비록 바울은 이 같은 점을 결코 공식적으로 결론 내리지는 않지만, 특별히 갈라디아서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해가 바울의 사상을 이끌고 있음이 분명하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시대 사이의 공식적인 단절은 상당한 시간과 중첩의 과정이 필요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맞서고 있는 언약 공동체 간의 차이가 분명해 지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에 그 단절은 분명해지게 된다. 간략히 말하면, 이 두 공동체간의 공식적인 단절은 후대의 성전 파괴와 성전 제사, 제사장 직 및 기타 제의적 제도들의 중단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등장과 그 조직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 분리되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 두 공동체는 각각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시키는 차이점을 숙고하게 되었다.십자가에 비추어 본 바울과 율법갈 3:19-24롬 9:30-10:4은 율법에 대한 다른 태도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모세 율법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태도는 갈 3장에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7장 사이에서 바울의 율법을 적용한 방식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갈 3:19-24의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모세 율법의 관계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 논쟁의 절정에 이른다. 19-20절에서 바울은 지금 모세 율법의 기능과 모세 언약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19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고 묻고 19-25절에서 제기된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율법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바울이 주장하는대로), 그러면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바울은 처음에 율법은 “추가되었다”(하나님에 의해서 이전 아브라함 약속에)고 우리에게 말한다. ‘추가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율법은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항상 조악하다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율법은 “죄를 위해서” 추가되었고 헬라어 문법으로 살펴보면 그 결과나 목적을 뜻하는데, 즉, 죄를 짓거나 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뜻한다. 로마서 7장, 특히 7절에서 율법을 보면 여기서의 논쟁은 구속 역사에서의 율법의 위치는 죄를 입증시킬 뿐 아니라 죄를 가중시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죄는 믿음으로 약속에 참여하는 모든 다른 기초적인 것들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의 약속은 영원하지만 시내산 언약으로 만들어진 율법 조항들은 일시적이다. 모세 언약과 관련되어서, 모세 율법은 일시적이었지만 율법이 신적인 원리들을 나타내는 한, 율법은 바울이 나중에 명백하게 밝힐 것이지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롬 7:12, 즉, 신적인 계시와 적절한 계시의 정황으로서).바울은 모세의 중재로 율법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출애굽기 20장의 첫 언약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24) 바울은 여기서 출 34: 1-18절의 언약의 두 번째 결론의 기초가 되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효과적인 언약을 가장 적절하게 생각하고 있다. 신의 현현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너무 직접적이어서 19-20장에 있는 언약의 중재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 처럼 보인다. 이스라엘 민족이 황금 송아지 우상을 섬긴 죄(출 32:19, 계약 파기의 아카드어 tuppam hepu를 참조하라.)는 모세가 두 개의 언약판을 깨뜨리게 만들었고, 깨어진 돌판은 출애굽기 20-24장 언약의 파기를 상징한다.약속의 땅으로 직접 안내하던 하나님의 인도가 사라지고 난 후 천사가 대신해서 지도한다(출 32:34). 이 사실은 바울이 출애굽기 34:1-28에 있는 두 번째 언약이 천사가 율법을 수여하는 정황을 더 잘 고안해낼 수 있게 한다(34:10의 karat berit는 그대로 있지 않은 새로 갱신된 언약을 말한다.)25) 천사가 나타나 율법의 수여자가 된다는 인식은 바울 시대에 널리 퍼진 것이었다(참조 신 33:2, 칠십인경, 요세푸스 ant . 15.136 Test XII Pat T. Dan 6, jub 1:29-2:1, 행 7:38, 53, 히 2:2). 바울의 견해는 어쩌면 하나님의 자비를 천사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수종든 것으로 이해한 시편 68장 18절(맛소라 17절)에서 어떤 성경적인 지지를 이끌어 낸 것처럼 보인다. 뒤이어 나오는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들 간의 차이는(출 34:29-35) 갈라디아서 3장에 계속해서 나오는 구절들에서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증명하는 테두리로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칼란(Terence Callan)은26) 갈라디아서 3장 20절의 어렵고도 함축된 말을 가장 명료하고 훌륭하게 해석하는데, 중개자는 복수로 보아야 하며, 중개자가 관여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고 있는 일들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로 본다면, 시내산 언약에서 모세가 중개자가 되어 최종적으로 주어진 율법은 훨씬 더 열등하다. 모세의 그런 행동은(출 34) 출 32-34장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불순종하는 상황 속에서 발생했고 모세의 중재 후 더 심오한 언약이 부과되었지만, 이번에는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았고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27) 그 결과 언약이 최종적으로 주어졌을 때 중개자에게 한 여호와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죄를 압박하게 되었다. 시내산 언약 후, 이스라엘은 예수가 오기까지 중개자의 인도 하에 계속 남아 있었다.바울은 21-22절에서 논의를 진전시킨다. 약속과 달리 율법은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없다. 바울은 바울이 제기한 이러한 사랑들을 의식하면서 율법과 약속이 서로 모순이 되는 지 묻는다. 하나님이 율법과 약속을 다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약속을 보충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은 약속과 결코 모순되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수가 되었다(참조 23-25절). 이스라엘 민족과 반대되는 믿음의 이스라엘은 구약에서 율법을 그 마음에28) 새겼고 율법은 그들의 존재였으며29) 율법 수행은 이들에게 항상 기쁨이었다.30)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민족적으로 불순종했다는 것을 이야기 할 때만 롬 7장과 갈 3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며 바울이 모세 율법을 이야기할 때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31)신앙인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를 말하는 의는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약속을 통해서, 약속 구조, 언약 관계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새 언약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 메시아 예수라는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21절 첫 시작부터 강력한 주장을 펼쳤던 바울은 실제 신분을 나타낸다. 그래서 생명을 전해주지 않고 성경이 율법을 전체 유대 민족들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했다(바울은 22절의 논쟁에서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구약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하다.).23-24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 언약을 경험한 것을 말한다. 이 믿음(22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믿음32))이 발휘되기 전에 23절은 모세 율법이 ‘우리’(일반적인 이스라엘33))를 감금하는 데 힘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에 반하는 심판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과 불순종하는 지도자들 아래서 고통받으면서 언약에 묵묵히 서 있으며 개인적으로 얽매여 있지 않았던 믿음의 남은 자들의 차이를 알고 있었지만(참조 롬 9:6)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바울의 논쟁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장에서(그리고 4장 1-7절에서) 갈라디아서 저술 당시에 그들이 여전히 모세 언약 아래 있다고 확신하고 있던 유대 민족들과 직접 논쟁하고 하고 있다. 모세 율법의 엄격한 통제는 율법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때 마침내 새 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이 도래하여(참조. 23절에 있는 헬라어 조항) 이스라엘 민족이 소멸되고 모세 율법은 더 이상 새 언약 시대에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24절의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는 가족 노예, 가족의 종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은 23절 문장을 더 갈고 다듬은 것이다. 가족 노예의 역할은 이 갈라디아서가 쓰여지던 시대에는 불안정하게 평가되고 있었고 엄격하게 감독의 억압을 받는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34) “그리스도가 오셔야” 바울은 구속사가 성공적으로 열리게 된다고 연대기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시대는 항상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의 역할을 깨닫게 된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에서 율법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멈추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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