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303년 디오클리테안(Diocletian)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이 역시 처음에는 우호적이어서 기독교가 매우 급속히 성장하였으나 추측이지만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선동하여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시벨레(Cyele)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 303년 2월 23일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디어클리티안의 수도 니코메디아(Nicomedia)에 들어가 성경을 불태워버리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디오클리티안의 박해는 제 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무시한 박해였다. 303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면서 디오클레티안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까지도 기독교인들이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살해하고 박를 더 강화시켰다. 디오클레티안이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 까지인 313년 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안 사위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박해를 시작한지 8년이 되던 해부터 박해를 완화해 10년 되는 해에는 완전히 박해를 종식했다. 이유는 그의 중병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그는 박해를 중지하라는 칙령을 발효했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책령을 발표하고 5일 후 고통에서 해당되어 일생을 마쳤다.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Constantine)은 A. D. 28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막센티우스와전쟁에서 승리하여 약관 24세에 명실상부한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다.
정치적 변화는 서방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포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물론 “관용의 칙령”으로 특정되는 밀란의 칙령이 종교의 자유를 기독교에만 국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합법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식 선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경비가지도 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재정을 넘어 교리적 문제 까지도 확대되었다.
313년 밀란의 칙령이후 한 차례의 고비를 만나기는 했지만 기독교이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식된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틴은 점점 더 뚜렷이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 이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는 로마에서 가장 우대를 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터툴리안이 말한 것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되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 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고, 그 결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확산되었다. 자연이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면서 교회는 세속화 현상이 예배는 형식 위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의 등장은 교회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만큼 교회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를 미쳤던 것이다.
그의 등장으로 일련의 회의, 특별히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정통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종교회의가 동서방교회의 분리를 촉진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교회의 통일을 원하였던 콘스탄틴 황제가, 오히려 수도를 이전함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동서방교회의 분리는 촉진시켰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제 4 장
속사도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노라, 이제야 나는 제자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 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인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한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찢고 사지를 부러뜨리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 겠노라 Ignatius
속사도들은 열두 제사 이후로는 초기 기독교 저자들로서 속사도 시대 라고 불리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약성경과 2세기 후반 저작활동을 했던 변증가들 사이에 교량역할을 함으로 사도들의 사상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 로마의 클레멘트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The Letterof the Church of Rome to the Church of Corinth)은 제 1세기 말엽 로마의 3대 감독이었던 클레멘트가 기록한 것이다.
클레멘트의 서신의 특징은 첫째 장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상호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헬라적 요소와 스토아적 요소이다. 하지만 클레멘트를 무분별하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융합시키려 한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비록 클레멘트의 사상에 헬라주의적 요소가 나타나지만 그의 신관은 삼위일체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복음주의신학자들은 클레멘트가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고등 성경관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클레멘트에 있어서 칭의론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다. 32장 4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클레멘트에게 믿음은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때때로 순종을 믿음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레멘트는 교회를 유기체적인 관계로 이해했다. 강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해야할 사랑의 윤리적 차원이 있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와 동 시대인인 이스나티우스는 시리아 안디옥의 제 3대 감독이라고 전해진다. 안디옥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이 곳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곳이다. 우리가 잘 아는데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운 것은 이 안디옥에서 였다. 또 “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 역시 안디옥 출신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얀 황제(A. D. 98-117)의 재위 기간에 체포당하였다. 이 때는 기독교가 모든 사회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는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송되어 가는 도중 일곱 개의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는 로마에 도악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맹수의 이빨에 “밀”처럼 갈아지기 원하였던 이그나티우스의 열렬한 소원은 마침내 로마에서 실현된다.
이그나티우스는 신약성경과 부흥도상에 있던 “보편교회”(Catholic Church)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그는 가현설자들의 그리스도관에 맞서 싸웠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데 있어서 감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그 하나됨의 구체적인 실현을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감독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에 대한 예찬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열렬히 갈망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제창한 감족의 주추적 역할은 베드로를 잇는다는 “사도적 계승”의 토대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생각하는 신비적 신학에 입각한 이론이었다. 그는 하늘나라의 지상 모형이라는 사실에서 교회직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였다.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만찬 해석에도 나탄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의 하나됨이 진실된 성만찬에 있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작품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관심은 분열을 약시키는 이단적인 운동을 폭로하는데 있다. 그는 이단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아그나티우스는 이단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선생에 대해 심지어 야수(wild beasts)또는 미친개 (mad dog), 혹은 허울좋은 이리들이라고 혹평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볼 때 이단적인 요소는 첫째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이고 둘째는 가현설이다. 그가 이 두 이단을 강하게 반대한 것은 이들이 성육신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무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3. 폴리갑
젊었을 때 사도 요하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직설적이고 정열적인 사람, 서머나 감독 폴리갑은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
폴리갑은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온 인물이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였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 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모으로 보존하였다.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는 폴리갑에게 상당한 도전과 용기를 주었다.
폴리갑은 아우렐루우스때인 165년 경에 아시아에 큰 박해가 발생했을때 순교했다.
폴리갑은 교회사적으로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폴리갑은 로마에서 말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인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키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둘째는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 보다 폴리갑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성서적 칭의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보다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사실은 무엇보다도 폴리갑이 실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앞에서 언급한 속사도 외에 무게있는 문헌들로는 바나바 서신과 디다케를 들 수 있다.
바나바 서신은 교리적 부분(1-17)과 실천적인 부분(18-21)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교리적 부분은 우화적 해석이 특징이고 실천적인 부분은 두길문서가 핵심부분이다.
속사도 문헌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은 헐마스의 목자이다. 헐마스의 목자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죄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과 10개의 비유를 수집했다.
1873년 필로데오스 바이레니오스(Philotheos Byrennios)가 발견한 디다케(The Didache)는 3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차이이다. 둘째는 세례 예식에 과한 당대의 동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훈련지침이다.
5. 요약
속사도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소아시아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똰 폴리갑, 요한, 이그나티우스, 파피아스 등이 소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속사도의 작품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는 인물과 기록장소, 그리고 문장스타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순교자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다. 둘째, 신앙의 표준으로 성경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통의 형성이다. 속 사도에 오면서 정통주의는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통성의 표준은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성경이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속 사도들의 작품들은 비평은 요한다. 아무래도 가장 두드러진 비판은 속 사도들의 작품 속에 성격에서 떠난 전통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비판적 요소는 세례 후에 짓는 용서문제이다.
제 5 장
기독교 변증가
이고로스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웠을 지라도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 소크라테스, 헤라클리투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이나 아나니아, 아지리아나 미사엘, 엘리야 및 이제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자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Justin Martyr.
2세기 들어서 당대의 이단들과 정부 지도자들 및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이며 어떤 철학체계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진정할 철학임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저술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가리켜 변증가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130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변증가들은 속사도들과 당대의 정통주의 조류를 대표하는 이들로서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변증가들이 유대인을 공격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은 공격한 것은 이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질화 시켰기 때문이다. 변증가들이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은 소위 “공개적인 편지”들을 통해서였다.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최초의 변증가로서 약 125년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그는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있게 변증하였다.
2. 아리스티데스
변증가 아리스티데스는 로마의 황제 피우스(138-161)에게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유세비우스 증언에 의하면, “신앙에 신실하게 헌신한 아리스티데스는 하드리안에게도 신앙의 변론을 써서 후손에게 남겼다.
변증서에서 그는 참된 신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신화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성품을 들어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아리스테스가 결론적으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우월성과 건선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윤리적 삶, 그리고 신행의 일치에 의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이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c. 100-c.165)
2, 3세기의 기독교 대변자들로서 변증서를 내어 놓은 변증가들 가운데 최초의 한 사람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심지어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상용한 학식 있는 최초의 이방인이었다. 무수한 저스틴의 저술 가운데 현존하는 저술로는 제일 변증서, 트리포(Trypho)와의 대화등이 있다.
장문의 제 1변증서(Tirst Apology)에게서 저스틴은 최초로 이교도의 여러 가지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가 어떤 새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들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구약성경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160년경에 기록된 트리포와의 대화는 바르쿠스 폼페이우스라는 어떤 인물에게 헌사된 책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글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줄 목적으로 유대교에 동정적인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스틴은 자신의 변증을 순교로 확증했다.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저스티의 순교를 언급하고 있다. “이무렵 저스틴은 앞서 언급된 통치자들에게 우리 신앙을 두 번째로 변론한 뒤 견유학파 철학자인 크레센스의 교활한 선종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저스틴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변증가였다. 그러나 저스틴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가 항상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스틴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다. 프렌드는 부정적으로 보는데, 저스틴은 연속성이 없는 인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리스도의 양성과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로고스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저스틴이 어떤 신약의 저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바나드에 따르면 저스틴은 “기독교 안의 보편주의적 요소를 파악하고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의 사상가였다.” 성경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어느 변증가보다 우수하다.
저스틴은 기독교가 무식한 종교라는 당대의 기독교 비판에 맞서 기독교야 말로 진정으로 지성적이라는 종교라 변호하고 있다. 저스틴의 헬라사상과 기독교 사상과의 연속성 추구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헬라화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저스틴이 영지주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서도 어느정도 입증된다.
4. 타티안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은 앗시리아 출신으로 저스틴이 순교한 후 165년경에 로마에 자신의 교육관을 설립하였다.
타티안의 “헬라인들에게 고함”은 타티안의 사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냉소적인 타티안은 희랍인들의 종교적인 자긍에 일침을 가하면서 희랍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결국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문에 흐랍의 종교가 야만인들의 종교보다 우월할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티안이 저스티의 뒤를 이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구나 초대교회 교부들의 눈에 비친 타티안은 상당히 부벙적이다. 특히 로마를 떠나 이단 엔크라티테스를 세움ㄴ서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에서 이탕하고 말았다.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아테나고라스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변호한 훌륭한 변증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태초에 하나님의 마음안에 로고스가 존재했으며 이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들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이 로고스가 성부와 일체인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않에, 아버지가 아들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테나고라스의 삼위일체 이해는 속사도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체계화 되고 발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나고라스는 삼위일체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아테나고라스 보다도 더 구체저인 삼위칠체 개념을 제시한 변증가는 안디옥 감독 데오필루스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 아우툴리쿠스에게 헌정한 3권의 책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럼 사용했으며 상당히 발전된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변증가들의 작품 강누데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은 저자와 연대로 미상이다. 문장의 스타일이 다른 변증가들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변증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유대적 예언과 헬라 철학을 모두 경시하는 점이다. 이 서한의 대부분은 사회내의 기독교인이 감당한 특이한 역할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변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디오그네투스에 나타난 사상은 신적인 출발이 역사에 결정적이라는 “역사신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디오그네투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이나 희랍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며 그 분되는 분명한 증거는 그들의 삶이라고 단정한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의 저자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본질적인 다른 미신숭배자들이라고 보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반면 사르디스의 멜리토는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대단히 강조하며 이 둘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연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상당히 많은 사건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들이라고 본다.
6. 요 약
속사도들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학의 통일성이 헬라 변증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변증가들의 신학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헬라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 사이에는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고 본 저스틴적 사고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이런 헬라사상과 기독교의 연계성은 로고스를 통하여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로고스 이론은 플라톤의 창조사상과 맥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냐 하는 문제는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의 논제가 되었다. 그러나 변증가들은 성육신과 부활신앙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조직적으로 제시하여 이를 후대 교부들이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체계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기독교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는다.
제 6 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나 이후에는 예언이 없을 것이요 다만 종말이 있을 뿐이다. Maximila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우리는 이단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수많은 이단들이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현재까지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계속 번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도 시대마다 달리하여 왔다. 사도요한은 당시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을 표준 교리에서 벗어나는 자, 어거스틴은 신앙 자체를 해치는 하나님에 과한 잘못된 신앙, 그리고 저스틴은 “사탄의 교리”라고 정의 하였다. 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터툴리안은 “이단들이 철학에 의하여 고취되고 있다(Heresies are instigated by philosophy)고 봄으로써 철학과 이단을 상호 연계시켰다.
이단의 역사는 사도시대부터 시작된다. 2세기 정통신학의 대변자 가운데 한 사라이라고 평가 받는 헤게시푸스에 따르면 당시 유대백성들 가운데 여러 이단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시므온에게서 시작된 시몬파, 클레오비우스에게서 시작된 클레오비우스파, 도시테우스가 창시한 도시테우스파, 다시 여기서 파생되어 고르테우스가 세운 고르테우스파, 마세보테우스가 세운 마스보테우스파, 그리고 역시 시므온에서 생겨난 메난드리안파, 바시리디안파, 말시온파, 카로포크라티아파, 발렌티아파, 사투르실리아파가 드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태동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벌써 이단은 역사에 등장하여 정통신앙을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단세력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집단이라고 이해하였다.
2. 영지주의
2세기 중엽은 영지주의의 시대이다. 135년 예루살렘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인 헬라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운동이다.
영지주의가 2세기 동안 만만찮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면서 영지주의에 대한 헬라 지식인들의 관심이 점증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구세주에 관한 문제, 우주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문제등은 그들이 해명하고자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신약성경에는 영지주의적 특징을 반영하는 성경 귀절들이 여러 곳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골로새서 2장 22-23절,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는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가 바로 그것이다.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켈리(J.N.D. Kelly)가 지산의 「초대기독교교리」("Early Christian Doctrine")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지주의는 유대교, 헬라철학 및 동양철학의 혼합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헬라의 철학 그리고 동양의 특별히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론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결합한 혼합 종교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지 주의 사상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과 기독교와의 혼합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관심사였다. 하나님, 인간, 죄인, 그리고 구속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영지주의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그들의 신념으로 수용한다. 그것이 영지(gnosis; knowledge)인데 이 영지는 영계로부터 온 계시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a secret oral tradition)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비밀 구전은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 비밀의 구전을 소유한 이들이 곧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또 하나 공통적인 특징은 영육의 분리에 근거한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의 삶은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으로 흘렀다. 만일 구원이 물질로 부터의 영혼 해방이라면 윤리적 이상은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영지주의 자료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교부들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왔다. 이집트 상부에서 농부에 의해 1946년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본문(Nag Hamma야 texts)은 주후 400년경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본들은 약 50개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새롭게 재조명해 준다.
3) 영지주의의 기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을 모든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시몬의 사상은 그의 제자 메난더에게 계승되었다. 1세기 말경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영지주의를 가르쳤던 메난더는 시몬의 추종자로서 시몬과 같이 사마리아 출신이다. 메난더는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죽음으로 ‘시몬 못지않게 사악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이들 외에도 2세기초에 영지주의자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지만 육체를 입으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요한 당시 당시 영지주의자 케린투스(Cerinthus)가 소아시아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4) 영지주의의 종류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크게 이집트계, 시리아계, 폰틱계 그리고 유대주의계로 대별할 수 있다.
(1) 이집트계
이집트계의 대표적인 사람은 120년에서 130년 경에 로마에서 활약을 하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이다. 유세비우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두 가지 상이한 이단지도자들, 즉 안디옥 사람 새투르니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이 바실리데스는 “시몬의 후계자 메산더에게서 나온 모리가 둘이고 혀가 둘인 뱀같은 세력”이다. 세투르니누스는 시리아에, 그리고 바실리데스는 이집트에 불경한 이단학파를 세웠다.
이집트계에 속하는 영지주의자들로는 바실리데스 외에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같은 “영지주의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이단의 창시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집트계를 대표하는 영지주의자는 135-160년까지 활동을 하였던 발렌티누스(Valentinus)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히기누스가 감독으로 있을 때 로마에 온 발렌티누스는 피우스 황제 시대에 장년기에 들어서 있었고 아니세투스(Anicetus)시대까지 살았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인물인 발렌티누스(104-165)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하게 오해되어진 영지주의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143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교황 안티세투스(Pope Anticetus; 154-68)아래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인 플톨레미, 헤라클레온, 마르무스는 1세기 말에 각각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와 고을에서 영지주의를 퍼뜨리고 그 가르침을 그곳에 확산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발렌티누스는 바실리데스처럼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그리고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보았다.
(2) 시리안계
120년경에 활동하던 안디옥 출신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시리안 형태를 대표하는 영지주의 자들이다. 시리안 형태의 영지주의는 다음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자유방임주의 삶을 대표하며, 둘째,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셋째,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3) 폰틱계
대표적인 인물은 말시온이다. 세르돈의 지위를 계승한 폰투스의 말시온이 세르돈의가르침을 확대하여 율법과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까지 행하였다.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심지어 전쟁을 즐기는 악마의 협잡이(a worker of evils)며, 일관성 없이 심판을 일삼는 자기 모순적 존재라고 힐난하였다. 반면에 세상을 만든 하나님 보다 우월한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찬하였다. 이레니우스가 남긴 말시온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말시온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생략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둘째, 반유대주의, 신구약의 구분,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이 땅에서 취한 육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영적인 영혼의 구원만으로 한정시켰다.
(4) 유대주의계
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 가운데 대표적인 분파로는 에비온파(Ebionites)와 키린투스파(Cerinthus)가 있다. 에비온주의는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라는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의 신자들에 대한 경칭이었다. 이들의 큰 특징은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의 사상속에 혼합”시킨 점이다. 그리고 마태복음만 사용했다.
이들이 갖고 잇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자설이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그리고 지혜 등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보통 인간들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한다. 또한 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에게 임하여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하다가 예수 생애의 말년,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고 하였다.
유대주의계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더 위험했던 것은 케린투스였다. 에비온파와 비교한다면 키린투스(Cerinthus)는 좀 더 원색적인 이단 지도자였다. 카이우스는 자신의 논쟁(The Disputation)에서 케린투스는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꾸민 계시록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교리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있다. 그는 축제와 희생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유형을 요약한다면, 현대 이단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이단들도역사에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교리를 도출하거나 역사적인 가르침을 일대 수정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산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리의 창출은 기성교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와 정통주의 신학은 신학 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성의 교리를 발전 개혁하기는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단들은 항상 새로운 교리를 고안한다. 이런 교리적 혁신 때문에 이단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5) 영지주의 평가
이들이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자들은 그들만이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는 점이고 이것이 일부 불안정한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악의 기원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낀 근본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교리나 가르침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는 점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로부터 특정의 요소를 빌어가지고 이를 자신들의 일반적인 구원론으로 변형시켰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계시관, 신론과 구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 외에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믿으며 성육신도 부인한다. 기독교의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 영육의 구원인데 반하여 이들은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며 구원의 개념도 영혼의 복귀 또는 영혼의 육체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3.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발렌티누스는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주후 16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교회의 일원이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으며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사상 및 동양사상과 결합시켰다. 발렌티누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그는 홀로 있기를 원치 않아 마음(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애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그들은 네 개의 애온인 세계-생명(world-life)과 인간-교회(man-church)를 낳았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과정은 계속되어 애온들은 총 30이 되었다. 인간-교회 사이에서 태어난 마지막 애온은 지혜라는 여자 애온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알기 원했지만 알 길이 없자 그녀의 슬픔은 결국 남자 없이 “불확실함”을 의미하는 아카모스(Achamoth)라는 자녀를 낳았고 이 때문에 플레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혜는 더욱 슬퍼했고 애온 마음과 진리에게 그녀를 도와 줄 것을 청했다. 마음과 진리는 지혜를 슬픔에서 건져내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이라 이름 하는 두 개의 다른 애온들을 낳았다. 그들의 행위가 플레로마 사이에 조화를 회복시켰고 그 사실에 감사해서 30개의 애온들 모두는 또 다른 애온을 낳아(put forth)예수라 이름 했다.
발렌티누스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이 악과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발렌티누스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과 헬라의 세계관을 연합시켰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 때문에 영지주의를 거부했다.
a. 지고의 하나님(the Supreme God)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b.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무 inferior deity)의 작품이다. c. 물질계는 악하다. d.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고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아니다. (이점은 Docetism의 가르침과 비슷). e.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f. 부활이 없다.
2) 말시온 주의
영지주의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혼합시킨 종교적 잡록집(Potpourri)인 데 반해 말시온은 사도바울에게서 나온 특정의 사상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급진적 재편과, 아울러 모든 유대주의 요소들의 제거를 시도했다.
말시온이란 그리스도이이 소아시아 북부 해안 도시 시노페에서 감도의 아들로 태어나 주후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해왔다. 로마에서 그는 세르돈(Cerdon)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세르돈의 영향을 받아 말시온도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전자는 알려진 분이고 후자는 알려지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의로운 분이고 후자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말시온은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말시온이 영지주의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말시온은 반유대적인 기독교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에 기록된 하나님은 세르돈이 말하는 열등한 하나님(the inferior God)이다. 반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알려지지 않은 선한 아버지(the good unknown father)를 계시하신 분이다. 때문에 말시온은 구약보다 신약을 선호했지만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두 하나님의 구별이 말시온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자연히 그에게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며 상호간에는 연속성이 없다. 구약과 율법과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반면 신약과 복음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2) 말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말시온의 기독론은 전형적인 영지주의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말시온은 육체 부활의 사상을 거부하였다.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대문에 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악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3) 말시온의 영향
말시온의 사상은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헬라철학 사상과 혼합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 영육의 분리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 내려 타세적인 신앙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시온 이단을 그의 섭리 역사를 위하여 선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 첫째가 정경의 형성이다. 둘째 사도신경의 발달이다. 또한 말시온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와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성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론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을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았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창조주-구속주 하나님(the Creator-Redeemer God)이시다.
말시온의 영향력은 2세기경에 절정에 달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말시온을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했다. 천지창조부인,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 구분, 가현설적 기독론,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부인, 영혼만의 구원, 물질계와 영계의 구분 등 이원론적 사고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또한 서방에서 말시온의 영향은 그들이 마니교와 연계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글이 영지주의를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집단은 그 후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7세기까지 역사 속에 존재하였다.
4. 몬타니즘
몬타니즘은 본질적인 성격상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점에서 몬타니즘은 말시온과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에서 거부당했던 종교운동이었다.
1) 배경
몬타니즘은 몬타누스에게서 출발한 운동이며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아(Phtrigia)에서 172년부터 일어났다. 몬타니즘의 발흥에 관하여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을 대적하는 큰 적수이며, 악을 조장하는 자이며, 또 인간들을 대적하여 온갖 음모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케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단들은 독사처럼 아시아와 브리기아 지방에 기어들어왔다.
원래 이교 제사장(a pagan Phrgian priest)이었던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그들의 자만한 것이 기성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악령 때문이라고 보았다.
2) 가르침
몬타누스는 그를 통해 성령(Paraclete)시대가 왔다고 가르쳤다. 유세바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몬타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성령과 예언의 은사”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일관된 주관은 성령께서(Paraclete)께서 예언자 몬타누스와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해 새 예언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몬타니즘의 세력이 커지면서 다른 관습들이 추가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신과 순교에 대한 강조다 단지 한번만 결혼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순교가 권장되었고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이다. 또한 여인이 교회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3) 몬타니즘과 교회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세 예언자와 뚜렷하게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감독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고 가르쳤다.
공식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즈은 종말에 대한 강조 때문에 핍박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4) 영향 및 쇠퇴
영지주의, 말시온주의와 같이 몬타니즘은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성령께서 사도시대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교회가 민감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다. 또한 몬타니즘의 등장으로 교회의 권위의 형태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부차적으로는 교회에 평신도 운종을 촉진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몬타니즘의 극단적인 성령운동은 교회에 무질서를 가져다주었다. 몬타니즘의 출현으로 교회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때,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몬타니즘은 교리적인 기준이 없는 신앙이 교회에 얼마나 유해한 것이가를 보여준 역사적 건이다.
5. 요약
영지주의는 정통주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단들의 도전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단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 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단의 판단기준들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니케아 회의 이후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약성경 이외에 정통 신앙의 보편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케아 회의 이후 니케아 신조가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성경과 신앙율,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영지주의가 많은 기독교적인 용어들을 차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성육신, 구원, 삼위일체, 성령과 같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초대교회사[3]로 이어짐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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