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 있는 세상-오용익 목사님의 글

갇혀 있는 세상-오용익 목사님의 글

5월 광주강의(2012년 4월 27일 에스겔서 29장 30장)를 듣고



제 1강



에스겔서 29장 30장은 하나님의 애굽나라 공습입니다. 공습의 빌미는 29장 3절입니다. “애굽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8장 3절에서 두로왕이 “나는 신이라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시에 앉았다.” 라고 한 것과 같은 발언이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 오지랖 넓은 이방나라 심판에 대한 예고, 계시는 왜일까요? 여기에 배제되어야 할 선입관이 도사립니다. ‘심판의 예고라? 그건 그 심판의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서 회개를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 즉 지옥 간다고 엄포 때리면 돌아올 것이라는 취지는 에스겔예언과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왜죠? 이스라엘 때문이죠. 엥? 그것은 또 왜죠? 들은풍월로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있어요. 이스라엘이 위기 때마다 습관처럼 애굽을 의지했단 사실(29:7).



추상, 허구, 관념에 불과한 하나님 보다는 아무래도 실감나기는 부대끼면서 정 나눌 수 있고 듬직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게 당연하겠는데 내가 의지한 그 사람에게 저주의 폭탄이 떨어져 망한다면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한, 곧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킨 적과의 동침의 당사자인 나의 불신앙을 각성시킨다, 이 정도면 하나님의 애굽심판의 최종취지가 이스라엘을 겨냥했다는 충분한 해석일까요?(아니랍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이야기고요, 라는 언급이 주어질 때까지 이 상식적인 이야기에 아, 그럴만해, 그럴듯해 하고 있던 차인데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 더 깊은 내 막의 소개를 위하여 구약역사에 빈번한 이와 유사한 사건들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과연 그것이 사랑인가, 또 사랑이 폭력으로 성립될까요?’ 조폭출신의 사내가 예쁜 여자 얻고자 함이 과연 사랑일까요, 소유욕에 불과할까요, 하는 질문의 속성과 같은 거죠. 하나님 사랑- 하나님의 말씀 사랑- 말씀대로 선악과 안 따먹음,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심정적으로는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탐스러우니 따먹고 싶은 맘을 어찌할 도리가 없고 그건 당연 사랑 아닌 소유죠. 소유를 건드리거나 소유하려는 기도가 훼방을 받는다든지, 이 일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편한 심기가 되는 이유가 뭘까요? 존재가 소유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존재란 없고 그 알맹이를 소유로 가득 채워놓고 나중에 그 표현을 존재라고 합니다.(존재 있고 그 존재가 소유하고 소유하려는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러면 무소유도 말 되고 욕심 줄이기도 다 말 되는데 존재가 곧 소유라? 존재가 아예 소유로 구성되었다? 소유 말고는 존재의 존립 그 자체가 없다? 그럼 예를 들어 무 소유 같은 것을 주장하고 실천해도 또 다른 형태의 소유고 그 소유를 통한 맨 같은 존재의 표현이고? 헐! 만원 권, 5만원 권 다발, 그런 돈다발과 다름없는 가족, 또 무엇 무엇들이 뭉쳐져서 형성된 것이 ‘나’라는 존재랍니다.)



문제는 천국이고 천국은 소유가 아닌 언약의 나라고 이스라엘은 그래서 언약의 나라에 들어가야 되고 천국은 소유로 만들어진 존재의 입성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소유덩어리고 그래서 소유 아니면 그 존재의 파악도 불가능하기에 세월 따라 소유로 말미암은 상처로깊어만 가고 늘어만 가면서 하나의 인격으로 굳어지게 되니 인간들 세상에서나 이고지고 살아갈 수 있을 뿐 주님 계신 언약의 나라, 그 나라의 기준에 아예 합당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기준에 부합되어야만 하고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계시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은 이 지상에 대해서 시비 걸고 치고 전쟁 걸고,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치는 거죠. 에스겔 29장 30장은 천국 기준으로 이스라엘 멸망을 이야기하면서 그 기준으로 애굽도 치는데 과연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뽑아내면 그것이 같은 심판과 멸망 속에서도 구원을 받는 과정, 절차에 포함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죠. 다만 불신자는 맞으면서 왜 맞는지도 모르면서 두들겨 맞고 신자는 같이 맞으면서도 그 때림 속에 염연히 갈라지는 차이점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그 차이점은 하나님이 치시면 예상 밖의 낯선 것이 돌출되는 식으로 나타나면 그것이 구원의 과정에 포함된 절차로서의 하나님의 침이 되는 겁니다. 호박을 치냐, 호두를 치냐의 차이와 같아요. 호박은 때리면 바서지고 끝나지만 호두는 깨부수면 그 속에서 열매 튀어나오는 것과 같은. 소유의 덩어리라는 존재의 껍질을 부수어서 진짜 존재, 하나님이 사랑했기에 만들어놓은 새 피조물로서의 존재를 튀어나오도록 하는 과정인 겁니다.(사탕 주면 껍질 채 먹는 개도 있고 껍질을 까먹는 개가 있다는데요?) 즉 소유, 좋은 것은 다 장바구니에 담아서 그걸 가지고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것으로 삼는 자기인식이 깨져야 되는 거죠. 매일같이 내 소유에 의해서 보는 구조는 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구조에 의해서 전체 말씀가운데서의 내 위치, 그 말씀의 연결고리로서 오늘도 나를 살게 했는가, 말씀과 엮인 내 모습을 깨어지면서 발견하는 것. 안 깨지면 안 되나요? 그럴 수는 없고 안 깨진다면 큐티, 종교 같은 것의 지식소유로 전락할 뿐이라고요.



소유구조, 그 나에로의 회수의 경로를 끊어서 말씀의 구조, 세계로 돌리는 작업을 하십니다. 수술은 전적으로 의사담당이죠. 내 몸의, 그리고 내 몸에서 난 것을 내 것으로 돌리는 경로의 차단, 그리고 말씀구조에 엮이도록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성도는 이때 내 것이라고 평소에 여긴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되면서 새로운 말씀구조,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한꺼번에 깨닫게 되고요. 소매치기를 해놓고도 안했다고 우기는 방어본능, 뭘 해도 교만으로만 빠지는 이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촘촘하게 엮여서 가족 친지 이웃이 한통속으로 짜인 소유구조의 그물망 때문입니다. 내것으로 회수하는 그것으로 내 존재의 가치를 삼아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내놓을 만한 화투패로 삼겠다는 이것 외에 인간이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라도 포기할 수 없는 채 튀어나오는 비겁한 변명의 근원을 겨냥해서 인자의 공격이 계시로 공습처럼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교만하구나!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겔 29:3)



나를 둘러싼 환경은 나를 위해서 있다는 인간의 평소버릇, 번창하고 번창된 것은 필히 사수해야 된다는 이 버릇, 이 버릇에서 나오는 변명과 핑계로 점철된 일상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멸망당해야 될 이유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의지했다는 내용이란 애굽의 이 삶의 구조, 방식에 친밀감을 느껴서 수월하게 결속했다는 뜻이 되면서 선지자와 하나님의 언약에서 겉돌면서 멀어져만 갔다는 뜻이 됩니다. 천국에 관심도 없으면서 천국가고 싶은 척 하며 교회 나오는 오늘날 우리 모습의 판박이로서,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 밀침과 깨짐을 당하면서 왜 소유구조는 철거되어야 하는지와 아울러 말씀구조(언약구조)에 엮여서만 구원되는 그 절차를 숨은 그림처럼 보여주는 일에 이스라엘과 주변 이방국가들(본문에서는 애굽)은 동원되고 있습니다.



(늘 상 반복되는 오류, 저쪽은 매 맞고 나는 안 맞으니 이게 구원 맞다는 식. 우리가 늘상 원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니 늘 안 망하기 위해서 내가 뭐 할까요, 라는 식으로 하나님도 찾고 교회도 찾는거죠. 그런데 속 시원히 말해주고 있네요. 다 매 맞는데요, 신자든 불신자든 다 고생하고 다 매 맞는답니다. 우리는 그저 매일 매일 깨지는 존재라서 편하데요. )



말씀구조, 언약의 구조는 이 지상에 번개 치듯 등장합니다. 여기에 싸움이 유발됩니다. 언약에 실린 이스라엘존재자체가 싸움꾼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bc카드배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백홍석이라는 국수가 그랬다고. ‘싸울 때는 싸워야지 안 싸우고 이기는 식으로 가면 바둑이 늘지 않는다.’ 보통 승리가 목표고 싸우는 것은 과정이기 마련인 것이 승부의 세계인데 바둑을 둘 때 승리는 뒷전이고 싸우는 그 자체가 승리라는 의미로 한 말. 언약은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 편이라고 여기면서 천국 간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나를 곱게 관리하겠다는 그 자체가 깨지면서 비언약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구원받고자하는 이기주의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사랑의 일환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쳐야 되는데 도리어 애굽을 이스라엘이 의지하니 결국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서서 바벨론가지고 애굽을 치고 그 와중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 눈떠야 되겠지요. 이로써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는 그 일에 이스라엘은 연관됩니다. 이스라엘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이기적인 구원에 목적이 있지 않고 주를 주로 드러내기 위해서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호두깨기입니다.



뭘 깨는데요? ‘내가 호두를 담고 있기에 누구보다도 내가 보기에도 참 훌륭하다.’ 내 존재를 위한 구조, 내 소유를 지키기 위한 구조는 천국에 합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예수님만 영광 받아야 되고요, 그 재주는 우리에게서 나올 수가 없고요, 그래서 도무지 우리는 잠잠하지도 입을 다물지도 가만있지도 못하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신세계를 심판함으로써 우리가 좋아하고 의지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싸움과 파괴의 대상에 불과함을 보게 하십니다. 결국 너 나 없이 다 지옥가야 마땅한 마당에 천국이란 주님의 개입으로만 말미암는 말씀의 구조 안에 놓여있을 경우뿐임을 아울러 보게 하는 계기로서 말입니다.



제 2강



하나님의 심판이 개입되는 시점부터 그 개입된 공간은 황무지로 변합니다(겔 29장 12절). 새로운 시간상의 변화도 아울러 일어납니다. 원래 있던 시간이 에스겔이 계시 받는 그 시점부터 갈라집니다(겔 29장 17절). 호남선과 경부선이 갈리는 대전의 분기점처럼 본래 있던 시간에서 특수한 시간이 분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심판이 이루어질 때 특수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성도의 몸을 통해서 특수한 시간개념과 특수한 공간개념이 튀어나옵니다. 내가 사는 그 현장이 광야가 되는 현상입니다. 광야란 껍데기를 벗기는 공간입니다. 내가 나에게 노력을 가해서 기대한 결과를 나에게 회수해서 그것으로 뒤집어 쓴 껍데기. 반창고를 뜯어내 보면 치열한 싸움의 흔적인 백혈구의 시체들이 보이듯 나만을 위해서 싸워온 내 모습을 방치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인간의 천국은 인간보기에 화려해도 선지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손길에 황무지로 변할 뿐입니다. 애굽인들은 이 사실을 접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언자의 외침은 단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이 계시를 수용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시간의 구조 속에 놓인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천국 백성에게 황무지는 이용할 뿐 믿음의 대상이거나 의지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세상살이 터무니없는 일들, 엮인 인간들, 곤란한 지경에 나를 빠뜨리는 터무니없는 경우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를 사랑하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구조가 덮친 상태에서 그런 면면들이란 황무지에서 피어난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 점을 눈치 채는 특수한 시간을 가지고 40년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 너무 많지요. 속수무책이고요. 저 존재에 의해서 내 존재가 찌그러지다 못해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운데 피할 길은 없고 이래저래 사면초가입니다. 부부마저 상대를 정복 - 내가 만든 공간과 시간의 영역 속에 집어넣는 작업 - 하기 위한 시간벌기로 ‘호시탐탐’ 일관한다고 하네요. 사랑한다, 이 말의 실상인즉 빨리 내 세계 안으로 들어오라, 혹은 언젠가는 너를 내 세계 속에 편입시켜서 지배하고 말리라, 라는 노림수로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거라고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멈추지 않는 거래요. 사각의 링 위에 올라서서 끊임없이 잽을 날리면서 필살기를 날릴 궁리뿐인 거래요(동영상 참조). 가훈은 이제부터 ‘호시탐탐’이에요. 한 몸? ‘안 돼! 안 돼!’ 이게 가정이라니 세상은 말해 뭣하겠어요. 살기 위해서는 방어해야 되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생존의 묘안을 본능적으로 짜내는 이 구조가 기계적으로 작동합니다. 꿈자리마저 사납습니다. 평생을 나를 위해 웃고 나를 위해 울면서 살면 살수록 연기의 달인이 되어갑니다. 내가 누군지는 한 번도 제대로 아는 적도 없으면서 나는 여전히 나라고 찌질하게 우겨왔던 겁니다. 나는 절대 황무지가 아니라고 우겨댄 증거가, 내 존재위주로 세계의 질서를 편성해놓고 그 중심에 나라는 존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린 그 증거가, 바로 황무지에 불과한 존재의 존재감으로 인해서 살 이유를 찾았거나 혹은 살 이유를 잃는다고 여기거나, 였던 것이지요.)



구체적인 역사적인 정황. 때는 BC 605년경, 애굽의 느고왕과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갈그미스전투에서 애굽은 속절없이 패배하죠. 그 전에 바벨론이 모압과 암몬을 공격해 접수하고 연이어 두로를 치기 위해 세 차례를 공격합니다. 그 와중에 애굽을 공격하니 애굽을 40년 동안 황무지로 만들게 됩니다. 하애굽은 상애굽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나온다는 예언이 에스겔 29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때 이 애굽을 위시한 반 바벨론 동맹국들(30장 4절),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 해당되는 구스, 독재자 카다피로 유명한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되는 붓, 현재 터키에 해당되는 룻등의 나라들이 같이 공격당하게 됩니다.(동영상을 보시면 지도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그 주변 나라들의 정세적인 위치나 상황들이 잘 나옵니다. 2강 8분정도에). 이때 역사적인 차원에 눈앞에 보이는 애굽의 적은 역시 바벨론과 그나라왕인 느부갓네살이 되지요. 그런데 선지자 에스겔은 애굽의 적은 바벨론이 아니라 바벨론을 사용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이유란 역사적인 안목뿐인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는 하나님의 개입의 숨은 뜻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소위 은혜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한 모든 은혜를 뒤엎는다는 뜻이 됩니다. 내가 예상한 천국의 현실이 차려진 상 뒤엎어지듯이 다 날라 가고 그 날라 간 자리에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현실이 주어질 때 비로소 진짜 천국과 접촉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내용을 아는 것은 오직 한 사람, 선지자 에스겔뿐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원리, 곧 말씀의 구조에 부합니다. 말씀을 누구나 알아듣고 깨달아서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는 구조자체가 말씀 구조에는 애초부터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동원시킨 모양으로 에스겔을 동원시켰습니다. 자기 존재와 그 존재의 확장이 전부인 바벨론(비언약적)에 비해 에스겔은 말씀구조로 인하여 사명(장차 오실 주님이 하실 일을 고스란히 미리 나타내는)이 존재보다 우선하는(언약적) 새로운 몸으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내가 죽는다는 계시가 주어지고 게다가 그 아내의 죽음에 눈물조차 흘리지 말라는 것마저 사적인 가정사가 아니라 말씀구조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라는 차원이랍니다. 사명이 존재보다 우선한다는 인자의 몸에 새겨진, 그리고 장차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여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옮기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었던, 그리고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어든 그대로 행하소서.’ 했던 그 차원, 그리고 그 뜻대로 자기존재보다 사명에 우선하여 살 수밖에 없도록 사명의 영, 십자가의 영에 사로잡힌 새로운(완성된) 말씀구조에 엮인 성도들에게까지 쭉 이어지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사명위주로 주께서 자기 몸 자기 맘대로 다루시는 결과로서 신약의 교회 곧 성도의 삶이 있습니다. 내가 주인공 되는 해석, 내 위주로 좋다, 싫다, 그것을 되풀이해서 뒤집어엎는 가운데.



내 사랑에 확고한 보편적인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속에 계시가 떨어지면 이 똑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새로운 시간개념이 주어집니다. 메시아 위주의 때입니다. 성경에 숱하게 나오죠. 아직 내 때가 아니다, 때가 되니, 등의 표현들. 갈라디아서 4장 4절 “때가 차매(시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공간)” 인간의 이성으로 정리되거나 증명될 수 없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 즉 메시아 위주의 때입니다. 이 특수한 때와 공간이 느껴지는 순간이란 내 때, 내 중심의 때(우리의 기대와 소망)만 고집하는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얻어맞아 마땅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때입니다. 그 ‘후다닥’이라고밖에 표현 못하는 그 짧은 순간의 기적 같은 순간의 느낌, 예수님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되는 것이 이 세대임을 알게 되는 때입니다.(무대장치, 이 표현에 담긴 깊은 의미는 누가복음 설교 127강, 십자가마을자유게시판3972번, ‘~까지’의 때에 대한 인간 몸의 시간이해와 주님의 때와의 충돌에 관한 이해는 누가복음 설교 129강, 십자가마을자유게시판3996번)



내 몸 중심에서 예수님 몸 중심으로. 빙의한다고요? 헐! 바벨론의 이스라엘 침공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이 애굽과의 동맹을 통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헛짓이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려는 애굽도 역시 바벨론에게 망하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라는 천상회의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들과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모욕을 당했습니다. 자기 몸 구원중심의 그릇된 언약으로 말미암아 참된 언약이 도리어 바서지는 양상입니다. 그 바서진 선지자의 몸처럼 같은 원리로서 부서지도록 예정된 한 준비된 몸에 의해서 새로운 진짜 이스라엘은 출산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출산된 이스라엘만이 부서진 몸의 비밀, 그 몸에서만 나오는 시간과 공간의 특수한 의미, 언약이 그 한 몸의 부서짐으로서, 그리고 그 부서짐 안에서 우리는 마땅히 부서져야 할 몸임도 파악하는 그 언약의 다 이루어졌음을 알아채게 됩니다. 이미 출산할 때부터 이 지상의 시간이해나 공간이해로는 해석이 불가한, 인자로서의 몸의 특수한 시간성과 공간성에 휘감긴 채로, 즉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딸린 완성체로서 출현하기 때문이랍니다. (말씀대로 다 이루었으니, 그래서 매사가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말씀의 작용에 빈틈없으니) 범사에 감사하라, 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도 때도 없이 작용하는 공간, 피어나는 몸의 지체로서 말입니다.



(주님에게 업어치기 한판을 매일 당할 때 천국 가는 백성에게 주어지는 특이한 시간과 공간이 된다고 하지요. 내가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소유당해서 아예 우리 몸이 주님의 특수한 시간과 공간이 넘실대면서 출몰하는 희한한 몸이 되는 거래요.)



이렇게 출현된 몸은 극심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전쟁터가 되어서 끊임없는 방향성의 충돌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 몸이 선점되어 있는 채로 예수님을 그 자리에 심게 되면 나부터 출발해서 예수님 경유하고 나로 회귀하는 회로(방향)를 그리게 됩니다. 종교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쉼표가 어디에 찍혔는지 잘 봐야 돼요.)으로 창조되었다는데서 모든 신학과 모든 종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특정한 인물인 예수님이고, 즉 인간은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겁니다. <십자가마을 질문답변코너 426번, ‘하나님의 형상대로’를 ‘하나님 계획대로’로 이해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립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위하여'라고 되어있습니다.(골 1:16)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따라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곧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전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인간존재론으로 출발하면 그냥 종교놀이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나에게서 출발해서 내가 나가는 방향이라면 성경은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내미는 방향입니다. 나를 내 밀 때 나는 내 시간개념 내 공간개념을 밀어붙이는 반면(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 보리라, 약 4장 14절) 예수님은 따로 자기의 때를 몰고 오고 예수님의 몰고 오는 공간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은 심판의 공간, 황무지로 변합니다.(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약 4:14)



애굽을 40년 광야로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광야 40년 생활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 아닌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데 황무지에 오고 보니 애굽타령 뿐이었습니다. 그 황무지 40년 이미지를 하나님께서 애굽에 집어넣으니 결국 이스라엘은 출애굽전과 같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여기서 현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신 이스라엘과의 방향성의 마주침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숨은 면이 여기에 보입니다. 갖다 바치는 종교성의 발휘, 얼마나 바쳤느냐가 신앙의 가늠자가 일체 될 수 없고 방향성의 문제, 내 몸에서 나왔는지, 어디서 나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방향성의 문제가 신앙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게 되는 겁니다.



나와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주께서 찾아오심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방향성의 헛됨과 찾아든 방향성에 새롭게 눈뜨는 주님의 그때, 그 자리가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상태(천국)로서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조건’ 내가 원하는 바의 미래만 구상하면서 ‘무조건’ 기어이 이익을 보겠다는 터무니없는 방향성만 나오는 우리 몸이 예수님의 몸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방향성은 사그리 철폐되면서 말씀구조에 엮이면서 예수님의 몸에서 다 이루어진 내용물이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우리는 안 되는 것 들고 나오고 주님은 그 손을 털게 만들면서 이미 된 것 들이미시는 이 고마운 현실, 제가 헌금 이것 밖에 못했다고 하면서 들고 나올 때 그 돈을 도로 우리 낯짝에다 되돌려 던져버리고 거기에 자기 피를 뿌려 주신다는 이 할 말이 없게 만드시는 이 현실만이 말씀구조 안의 현실입니다. 이 말씀의 구조에 엮인 안에서 천년을 살아도 대체 못할 죽어야만 할 존재로서의 내 몸의 참상마저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이 선지자 에스겔이 되는 순간이랍니다.



(그래서 사적인 자기존재감 형성을 위하여 매기는 모든 시간, 공간, 즉 나의 때,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 때와 공간은 계시가 떨어지는 거기서부터 뒤집힘이 일어나면서 만 계시의 내용만 이루어지는 무대장치로서의 때, 성취된 약속만 남기기 위한 무대장치로서의 공간이 황무지로서 작동하게 된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터벅터벅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던 그 40년의 황무지, 애굽이 차라리 좋았다, 한 그 본색, 강도는 놓아주되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한 그 본색, 떡도 챙기고 말씀도 챙기고 결코 손해 보는 일 없이 곱게 살다가 천국 가겠다는 더러운 속내마저 나도 복음 다 안다, 나도 할 만큼은 했다, 하는 식으로 슬쩍 감추려는 이 파렴치한 본색, 이 두꺼운 우리의 껍데기를 사정없이 벗기시는 손길의 때요, 그런 작용으로서의 공간이니 바로 구원받을만한 때요 은혜의 때입니다. 성도의 몸에서 제대로 언약대로 예수님 몸의 구원이 이 지상에 나타나는 때라고요. 그래서 내 생일 - 결혼, 출산, 취업, 승진, 영전, 곗돈 타는 날, 우리가 고대하는 모든 날들, 만난 지 백일 되었다고 커플 티 맞춰 입는 날, 심지어 우리 쪽에서 천국 가는 날이든지 주님 만나는 날이라고 한들, 내 생일이 한 달 쯤 남았다는 별스런 의미가 기분 좋게 주저앉는 기적이 일어난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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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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