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서양 교회와 한국 교회의 기도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43)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삼상 1:13의 “속으로 말하매”는 “그의 마음으로 말하매”이다. 따라서 가만히 침묵하고 있은 것이 아니라 속으로, 들리지 않게 기도한 것이다.

44) Gesenius, Hebrew-Chaldee Lexicon, s.v.45) Gesenius, Hebrew-Chaldee Lexicon, s.v.

 

2. 예수님의 기도

 

이처럼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일반적인 경우에는 소리 내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대개 ‘한적한 곳’에 가서 따로 기도 하셨는데(막 1:35; 눅 4:42; 5:16; 9:18 등), 이것은 방해 받지 않고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평소에 소리 내어 기도하셨다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특히 잡히시기 전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분명히 소리 내어 하신 기도였다. 소 리 내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졸고 있던 세 제자들이 이 기도를 들었으며 그래서 복음서에 기록된 것이다(마 26:36-46; 막 14:32-42; 눅 22:39-46). 마가는 예수님이 이때 하나님을 부를 때 아람어로 ‘아바’(Abba)라고 불렀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46) 그리고 누가는 이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다고 말하며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한다(눅 22:43-44).

히브리 서에서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한다(히 5:7).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전체에 대해 다 해당될 수도 있지만 특별히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예수님은 침묵기도로 하신 것이 아니라 또는 신음이나 탄식만 하신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아마도 큰 소리로 간절히 기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도 소리 내어 기도하신 것이지 침묵기도가 아니다. 1 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셨다(ei\pen).”고 한다. 그리고 18:1에서 도 “이것들을 말씀하시고서”(tau'ta eijpwvn)라고 한다. 따라서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소리 내어 서 분명한 문장으로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46) ‘아바 아버지’(!Abba oJ pathvr)는 아람어 ‘아바’는 곧 헬라어로 ‘아버지!’라는 뜻임을 말해 준다. 문법

적으로 ‘아바’와 ‘아버지’는 동격이며, 아람어 ‘압바’는 강세형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 호격(呼格)으로 사용되었다(주후 1세기에는 히브리어의 ‘압비’를 대체하여 사용되었음). ‘호 파테르’(oJ pathvr)도 호격 ‘파테르’(pavter)을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개역개정판의 ‘아빠 아버지’는 아람어 Abba를 잘못 음역한 것이다. 바로 음역하자면 ‘압바’가 될 것이다(cf. 랍비). 뿐만 아니라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잘못된 주 장이 배후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변종길, “아바 아버지인가? 아빠 아버지인가?”, 『선지동산』 63호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2012), 신약 난제 해설(5), 18-19를 참조하라.

 

3. 초대 교회의 기도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서 열흘 동안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행 1:12-14). 원문의 표현에 의하면 “이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ou|toi pavnte" h\san proskarterou'nte" oJmoqumado;n th'/ proseuch')/ 가 된다. 이들의 기도는 유대교 회당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자 동시에 소리 내어 기도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47) 유대인들의 기도는 대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었으며 조용히 기 도하는 것은 후에 들어온 것이다.48) 샌더스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 회당에서의 기도는 미리 적어 놓은 기도문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기도하였다고 한 다.49) 따라서 여기에 모인 120명쯤 되는 제자들도 정해진 기도문 없이 각자 자유롭게 그리고 소리 내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소리 내어 기도했다는 것은 사도행전 4장의 기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 갔다가 풀려났을 때 그들은 동료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서기 관들의 말을 다 알렸다. 그러자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oJmoqumado;n h\ran fwnh;n pro;" to;n qeovn) 기도하였다(행 4:24). ‘소리를 높였다’는 것은 목소리를 높여, 크게 소리 내어서 기도했다는 뜻이다. 흐로쉐이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Ai[rein fwnhvn(목소리를 높이 다)는 것은 “잘 알려진 셈족어적 표현인데(창 39:15 등), 말이 입에서 바깥으로 나와서 공중으 로 또는 하늘로 간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50)

사도 바울도 유대인으로서 초대 교회의 관습을 따라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 바울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하였다(롬 1:9; cf. 엡 1:16; 빌 1:4; 골 1:9; 살전 1:2; 딤후 1:3; 몬 1:4). 여기서 ‘너희를 말하다’(mneivan uJmw'n poiou'mai)란 표현은 ‘너희를 기억 하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언급하다’는 의미이다.51) 디모데에 대해서는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말한다(딤후 1:3). 여기 서 ‘너를 생각한다’(e[cw th;n peri; sou' mneivan)는 것은 직역하면 ‘너를 위한 기억/언급을 가진 다’인데, 이것은 기도 중에 디모데를 하나님께 말한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쉬 지 않고 중보기도한다는 뜻이다. 빌레몬에 대해서도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이라고 한다(4절). 여기서 ‘너를 말한다’(mneivan sou poiouvmeno")는 것도 ‘너 를 기억한다, 너를 언급한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그의 기도 중에 빌레몬을 하나님 앞에 언급하였다는 말이다. 곧, 중보기도 중에 빌레몬을 언급하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기도 중에 누구 를 생각하고 그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언급한 것은 바울의 기도의 큰 특징이다.52)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말한 다(딤전 2:1). 여기서 ‘도고(禱告)’(ejnteuvxei")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이에 서서 다른 사람 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곧 ‘중보기도’를 말한다(cf. 롬 8:26, 34; 히 7:25).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롬 16장), 그가 평소에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롬 1:9).

빌립보서 4:6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 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 여기서 ‘아뢰라’(gnwrizevsqw)는 것은 ‘알려지게 하 라’(make known)는 뜻이다. 우리에게 있는 근심과 걱정, 염려거리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말고 입을 열어 하나님께 알려 드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르 시기 때문이 아니라(cf. 마 6:8, 32), 우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 여야 한다는 뜻이다(cf. 벧전 5:7).53) 이런 뜻에서 ‘하나님께 알려 드리는 것’은 가만히 침묵하 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을 열어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하는 것이다(cf. 시 32:5; 62:8).

사도 바울이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빌립보에서 복 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는데, 그때 “죄수들이 들었다”고 한다(행 16:25). 이것은 그들이 소리 내어 기도하고 찬송했기 때문에 가 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주후 1세기 유대인들과 초대교회의 관습을 따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리 내어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47) J. van Eck, Handelingen (Kampen: Kok, 2003), 44.48) Van Eck, Handelingen, 44. Van Eck는 여기서 그 근거로 Van der Horst의 위 논문을 제시한다.

49)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220f.50) F. W. Grosheide, De handelingen der apostelen, 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2), 142.

51) Cf. Zerwick-Grosvenor, Grammatical Analysis, 458 (ad Rom. 1:9).

52) C. Bouma, De brieven van den apostel Paulus aan Timotheus en Titus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2), 241f. (딤후 1:3 주석 중): “그의 기도는 또한 항상 중보기도였다”(Zijn bidden is steeds ook voorbidden geweest).

53) P. T. O’Brien, The Epistle to the Philippi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493.

 

4. 결론

 

이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도 관습을 따라 소리 내 어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 큰 소리일 수도 있고 작은 소리일 수도 있 지만, 어쨌든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초대 교회의 기도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침묵기도 는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의 영향으로 후대에 들어온 이교적 관습이었다. 그 배후에는 영(靈)은 선하지만 육(肉)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헬라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부정한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낮고 천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도 창조하셨다(창 2:7). 사람이 타락했을 때 영혼만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함께 타락하였다(창 3:16-19; 롬 3:23; 5:12; 고 전 15:22; 갈 5:19-21; 롬 1:26-3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도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영과 육을 함께 곧 전인(全人)을 구원해 주셨다(롬 8:1-2; 히 2:14-18; 살전 5:23). 이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당장 우리의 죄가 실제로 다 없어지고 천사처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롬 3:24-25; 4:3-8). 그리고 우리는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롬 8:14-15; 요 1:12; 요일 3:1-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자신의 실제적 인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정결한 자가 되었다(법적으로).

 

그의 영혼만 정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다 정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성도들의 찬송을 기뻐 받으신다(계 14:1-5; 15:3-4; 엡 5:19; 골 3:16).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 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한다(13:15). 이와 마 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 으며 또 드려야 하는 것이다(롬 5:2; 엡 3:12; 히 4:14-16; 10:20).

 

 

IV. 몇 가지 오해

 

기도와 관련하여 서양의 개혁 교회와 한국 교회가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이 중 에서 중요한 세 가지를 여기서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기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알 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와 고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위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목적에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 한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고 얻고자 기 도하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가 인정함으로써 그에게 합당한 의가 주어질 것을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드리는 기도의 유익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54)

 

그리고 나서 칼빈은 우리가 꾸준히 기도함으로 얻는 유익에 대해 다음 다섯 가지로 말한다. 1)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타오르도록 하기 위해; 2) 하나님 앞에 알려지기에 부끄러운 어떤 욕구나 욕망도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3) 그가 주시는 은혜를 참된 감사로 받을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 4) 우리가 구 한 것을 받고 난 후에 우리가 더욱 그의 은혜를 사모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로 얻은 축복을 더 욱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 5)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도록 하 기 위해.55)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결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지만 우리가 게 으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구하고 간구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로 졸라대는 것은 헛되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은 어리석은 일이다.56) 칼빈은 또한, 주께서 즐겨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들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시시콜콜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의 기뻐하시는 바라고 답하였다.57)

예수님은 마태복음 6:8에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어서 7:7-9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 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심으로써 기도할 것을 촉구하셨다. 마태복음 6:33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 라(zhtei'te).”는 말씀은 우리의 일상적인 것들을 구하지(aijtevw) 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삶 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 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6:11). 구약의 에스겔서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래도 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 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6-37) 여기의 ‘구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잇다레쉬’(vreD;a)i인데, ‘다라 쉬’(vr'D);의 니팔(Niphal) 미완료형이다. 니팔은 대개 ‘재귀태’ 또는 ‘수동태’로 번역된다. “내가 구하여진다, 내가 구함을 받을 것이다”는 말이다. KJV에서는 “I will be ... inquired of by the house of Israel. ...”라고 직역하고 있다. ESV에서는 “I will let the house of Israel ask me ...”라고 번역하고 있다. 화란 자유대학의 구약학 교수였던 알더르스(Aalders) 는 이것을 ‘허용형’(tolerativum)이라고 말한다.58) 곧, 구하도록 허용한다, 이스라엘 족속이 구하도록 (하나님이) 허용한다, 구하도록 한다, 구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내가 ...”).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뜻대로 운행하시지만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 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기도는 의무이자 약속이며 또한 하 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만, 그래도 우리 는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은덕을 받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물론 우리는 기도를 복을 받는 마력적 수단으로 생 각하면 안 된다. 우리의 삶이 유리된, 그저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 우리가 기 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참된 믿음으로 구해야 하며(약 5:15; 1:6; 마 21:21-22; 막 11:22-24 등),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어야 하며(약 5:16; 요 15:7; 요일 3:22; 대하 7:14; 욘 3:10 등),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한다(요 14:13-14; 15:16; 요일 5:14 등).

 

 

54) Calvin, Inst. III,xx,3.

55) Calvin, Inst. III,xx,3.

56) Calvin, Inst. III,xx,3.

57) Calvin, Inst. III,xx,3.

 

 

 

2. 골방 기도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혼자서 조용히 기도하라 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키케로(Cicero) 주석가인 아더 스탠리 피스(Arthur Stanely Pease)는, 침묵기도가 기독교 안에서 많이 통용되게 된 것은 아마도 마태복음 6:6과 같은 본문의 영향일 것으로 보았다.59)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골방’60)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들에게 보이려고(1, 5절),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2절) 기도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칭찬만 기대하며 기도한다면 사람이 모인 곳에서 기 도하더라도 ‘골방기도’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다 같 이 모여서 기도하였다(행 1:12-14). 그 외에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개인기도뿐만 아니라 또한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썼다(행 2:42; 3:1; 4:24-31 등). 따라서 마태복음 6:6은 개인기도 또는 침묵기도에 대한 지지구절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판 데르 호르스트가 지적한 대로, 혼자 있는 장소로 물러가야 한다는 사실이 곧 그 사람의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 는 것을 시사한다. 곧, 그가 크게 소리 내어(spoken out loud) 기도했다는 것을 뜻한다.61)

 

58) G. Ch. Aalders, Ezechiël, II (Kampen: J. H. Kok, 1957), 192.59) A. S. Pease (ed.), M. Tulli Ciceronis de divitatione libri duo (Darmstadt, 1963), 326 (Van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0에서 재인용).

60) ‘골방’(tamei'on)은 원래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 곧 ‘보관실’(storeroom)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집의 내부에 있는 방 곧 ‘안 방’(inner room)을 가리킨다(Bauer, Lexicon, s.v.).

61)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1.

 

 

3. 중언부언

 

또 하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은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7). 어떤 사람은 이것을 우 리가 기도할 때에 같은 말을 반복하면 안 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언부언하다’는 말의 원어 ‘밧따로게오’(battalogevw)는 의성어(擬聲語)로서 ‘말을 더듬는 사람의 발성 양식과 같은 모습으로 말하는 것’(to speak in a way that images the kind of speech pattern one who stammers)을 의미한다.62) 리델-스코트(Liddell-Scott)는 이 단어에 대해 ‘더듬거리 며 말하다,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해서 말하다’(speak stammeringly, say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로 설명한다.63) 이것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하듯이 그들의 일 을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신들에게서 은혜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서 나온 것이 다. 그들의 잘못은 그들의 긴 기도문에 마력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데 있다.64) 따라서 이 것은 단지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인 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미신적으로, 주술적으로 기도한 것을 말한다. 곧,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한 것”이다(마 6:8). 그들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미리 다 알고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그들의 신에 게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바로 믿고 그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할 때에는 같은 내용을 반복 해서 말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다(마 26:39-44).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완전히 동일 한 말씀을 반복하신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화가 있다. 처음에는 인성(人性)적 차원에서 자신의 소원을 솔직히 하나님께 아뢰는 것에 초점이 있었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도에서는 더욱 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물론 첫 번째 기도에서도 “그러나 나의 뜻대 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같은 말씀’을 세 번 기도하셨는데, 이것은 ‘중언부언’과는 다르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마 5:45-6:26, 28-30; 10:29; 요 19:11) 를 굳게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 을 올리셨다(히 5:7; 눅 22:44). 이것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며 또한 우리 인간을 위한 교훈으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 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같은 내용의 기도를 몇 번 반복하는 것은 잘못이 아 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예수님의 기도는 한 문장을 하고 나서 또 다시 같은 문장을 반복하 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기도를 드린 후에 좀 쉬었다가 두 번째 기도와 세 번째 기도를 하셨 는데, 그때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mivan w{ran)도 이 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절)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의 한 번의 기도는 대략 한 시간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65) 따라서 한 번의 기도에 수많은 문장과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한 시간 동안의 기도들이 모여서 한 번의 기도가 되었으니 이방인들이 주문 외 우듯이 하는 중언부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使者)’가 떠나가도록 세 번 기도하였다(고후 12:8). 여기서 ‘세 번’ 기도한 것은 중언부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이다. 바울이 ‘한 번’ 기도한 것은 그냥 한 마 디 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특별히 기도한 것을 가리킨다. 아마도 밤에 몇 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 기도를 바울은 세 번이나 했는데, 주께서 말씀하시 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다(고후 12:9). 여기서 우리는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기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응답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66) 어쨌든 우리가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여러 번 기도하는 것은 잘못 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과 바울이 모범을 보인 기도임을 알 수 있다.

 

 

62)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s. v.63) H. G. Liddell-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68), s. v. battologevw.

64) J. Keulers, Het evangelie volgens Mattheüs (Roermond en Maaseik: J. J. Romen & Zonen, 1950), 88.

 

65) 물론 오늘날처럼 정확한 1시간(= 60분)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한 시간 전후로 생각할 수 있다. 여 기서 w{ra를 단순히 ‘때’(time)로 보기보다는 ‘시간’(時間, an hour)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W. Bauer도 이 구절의 w{ra에 대해 하루의 구분으로서의 ‘시간’(hour)로 설명하고 있다(Lexicon, s. v. 2 a). 예수님이 이런 ‘한 시간’의 기도를 세 번 하셨으니 중간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대충 서 너 시간 정도 흘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룟 유다 일행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시간을 밤 3, 4시경으 로 보면, 유월절 식사 후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에 기도하신 시간과 맞아 떨어진다.

66) 신약 성경에서 ‘기도 응답과 불응답’에 대해 연구한 보리스 파스커(Boris Paschke) 사도 바울의 이 기도에 대해 응답되지 않은 기도로 본다. Cf. B. Paschke, “Gebed, gebedsverhoring en onverhoorde gebeden,” in A. Baum & R. van Houwelingen, Theologie van het Nieuwe Testament in twintig thema's (Utrecht: KokBoekencentrum, 2019), 345-64 (특히 357). 그러나 Oscar Cullmann은 사도 바울은 “응답되지 않음 가운데서 응답됨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곧, ‘높은 차원에서의 응답’이라고 말한다(위 논문 357에서 재인용). 물론 우리는 Paschke처럼 ‘응답되지 않았 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응답되지 않은 기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응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결국 ‘응답’을 어떻게 정의(定義)하느 냐에 달려 있다. 내가 기도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응답’으로 보면 응답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 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응답’으로 보면 응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인간 중심의 생각이고, 뒤의 것은 하나님의 중심의 생각이다.

 

 

V. 한국 교회의 기도

 

그러면 한국 교회는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실행해 왔는가?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든가, 어떻게 해야 응답을 받는 다든가, 또는 기도의 축복이 무엇인가 등에 대한 실제적 이슈들뿐만 아니라, 서양 교회의 기 도와 비교하여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고 특징이 있는지, 그리고 성경과 초대 교회의 기도와의 관계는 어떠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 교회의 기도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며, 나아가서 한국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이에 필자는 과거 100여년 동안 한국 교회의 기도의 특징 중 다음 세 가지를 간단히 지적하고 자 한다.

 

1. 새벽기도회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의 특징이며 자랑이다. 또한 한국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며 한국 교 회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능력이다. 이 새벽기도회는 1906년 가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 선주 장로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그러나 정확한 시작 연도는 알기 어려우며,68) 그 전에도 간헐적으로 새벽기도 모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69) 그러나 박 용규 교수가 The Korea Mission Field 1909년 11월호(p.182)에 실린 W. L. Swallen의 “A Story of Korean Prayer”에서 “길선주 목사가 장로 한 사람(박치록)과 같이 기도했다”고 하 는 말에 근거해서, “만약 길선주가 평양대부흥운동 이전에 이 일이 있었다면 그의 신분은 장 로이지 목사가 아니었다. 길선주의 새벽기도 사건은 1907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909년 에 일어난 사건이다.”고 결론지은 것70)은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1907년 이전에 길선주의 신분 이 ‘장로’(또한 助師)이었다 할지라도 그 후의 직분을 따라 ‘목사’로 부르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이기 때문이다.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가 1907년 평양대부흥의 상당히 중요한 동력(動力)이 되었기 때문에 바로 그 전 해에 새벽기도회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71)

물론 처음에는 길선주 장로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걱 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다. 이에 여러 교인들이 호응하여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 였는데, 얼마 후에는 수백 명의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길 장로는 당회의 정식 허 가를 얻어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72) 물론 그 전에도 특별한 경우에 여기 저기서 간헐적으로 하는 새벽기도 모임이 있었지만, 정기적인 교회 모임으로 시작한 것은 1906년 가을의 평양 장대현교회라고 볼 수 있다.

길선주 장로와 박치록 장로는 처음에 새벽 4시에73) 모여 기도하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교 회에서 공적으로 광고할 때에는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새벽 4시 반에 교회에 모이라고 하였 다.74) 그런데 이 새벽기도회는 율법적인 의무사항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것이었다. 길진경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는 대중적으로 매일 계속한 것이 아니었고 개인의 실천은 그 개인 자유에 일임했고, 교회의 특수 사정이 있을 때 마다 그 필요에 의해 집단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가졌다.”75) 이 새벽기도회는 1907년 1월 6일 부터 시작된 장대현교회 집회 시 대부흥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76) 그래서 방위량 선교사 는 이 사건을 ‘한국의 오순절’(The Korean Pentecost)이라고 불렀다.77) 길선주 목사는 부흥 회에 초청을 받으면 성령의 역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910년 9월 18일 에 모인 제4회 노회에서 부노회장이면서 전도국장인 길선주 목사는 백만구령운동의 일환으로 “각 교회가 1주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할 일(10월 24일부터 향후 한 주일)”을 보고하였다.78)이를 통해 새벽기도회가 한국 교회 전체로 점차 보급되어 간 것을 알 수 있는데, 처음에는 이 것이 교회 부흥을 위한 특별기도의 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제5회 노회에 보고 된 바에 따르면 각 대리회는 기도 면에서 “가정 예배, 정일(定日) 기도, 특별 기도, 개인끼리 의 동맹 기도, 직원들끼리의 특별 기도, 금식 기도, 특히 남전라 대리회 보고에는 1월-4월 순 회 가정 예배 등을 가졌다.”고 한다.79)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에 정착되었는데, 이처럼 기도 중심의 교회 공식 모임으로 정착한 것은 아마 한국 교회가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고대 교회가 아 침 일찍 모임을 가진 것은 알려져 있으나,80) 그것이 한국 교회에서처럼 기도회 중심이었는지 는 알 수 없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의식적인 미사가 행해졌으며, 가톨릭의 수도원에서는 기도문을 외우는 정도의 기도회가 있을 따름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제네바 교회가 아침에 모 임을 가졌으나 아마도 설교 중심으로 생각된다. 존 웨슬리가 새벽 5시에 새벽기도회를 가졌는 데, 이것은 그가 동료들과 함께 가진 기도회였다. 찰스 피니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몇 시간 씩 기도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 기도였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서처럼 전 교회적으로 모여서 기도 중심의 새벽기도회를 가진 것은 아마도 한국 교회가 사실상 최초라고 생각 된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는 건전한 기도회였다.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난 것도 그 전부터 한국 교회가 가져온 사경회가 그 바탕이었다. 한국 교회는 처 음부터 성경을 사랑하였으며 성경을 배우기를 힘썼다. 초기 선교사들은 정기적으로 사경회를 가졌으며, 이를 위해 많이 준비하고 기도를 하였다. 길선주 목사도 매일 한 시간씩 성경을 읽 고 외웠으며, 성경 연구와 집필에 하루 세 시간씩 보내었다고 한다.81) 이처럼 한국 교회의 초기 대부흥은 기도와 말씀에 기초한 성경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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