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양 교회와 한국 교회의 기도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서양 교회와 한국 교회의 기도

변종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서론

 

본 논문에서 필자는 먼저 서양 교회 특히 개혁교회에서 기도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어 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양 교회의 특징 중 하나를 이 루는 침묵기도에 대해 비중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성경에서는 기도에 대해 어 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를 어떻게 행하였는지 를 관심 있게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국 교회의 특징인 새벽기도와 통성기도와 즉흥기도에 대해 살펴보고, 이것이 교회사적으로 가지 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기도에 대한 연구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1)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아직 희소한 실정이다. 특히 서양 교회와 개혁교회에서 중요시여기는 침묵기도에 대해 그 근원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초대 교회는 어떻게 기도 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한국 교회가 보편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바 새벽기도와 통성기도와 및 즉흥기도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실제 신앙과 교회 생활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1) 예를 들면, E. F. von der Goltz, Das Gebet in der ältesten Christenheit. Eine geschichtliche Untersuchung, Leipzig: J. C. Hinrich, 1901; O. Cullmann, Das Gebet im Neuen Testament: Zugleich Versuch einer vom Neuen Testament aus zu Antwort auf heutige Fragen, 2. Aufl., Tübingen: J. C. B. Mohr (Paul Siebeck), 1997 (1. Aufl. 1994); Cullmann, O., Prayer in the New Testament, tr. by J. Bowde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R. N. Longenecker (ed.), Into God's Presence. Prayer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1; J. P. Versteeg, Het gebed volgens het Nieuwe Testament, Amsterdam: Buijten & Schipperheijn, 1976; C. Trimp (red.), De biddende kerk. Een bundel studies over het gebed aangeboden bij gelegenheid van het 125-jarig bestaan van de Theologische Hogeschool te Kampen, Groningen: De Vuurbaak, 1979 등.

 

I. 서양 개혁교회의 기도

 

1. 베르코프의 주장

 

종교개혁 이후 서양 신학에서 기도가 소홀히 다루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레이던의 헨드리쿠스 베르코프(Hendrikus Berkhof)는 “기도는 신앙 교리에서 무시된 주제였다.”고 말하였다.2) 물론 칼빈은 기도에 대해 무려 52개의 파라그라프를 가진 한 장 (章)을 할애하고 있지만(Inst. III,20) 그 후에는 거의 무시되었다고 말한다.

1625년에 레이던에 서 나온 Synopsis purioris theologiae에서는 52개의 논쟁점들에 대해 다루면서도 기도에 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Vom Gebet im Namen Jesus)라는 제목으로 조금 다루고 있다고 한다(CG §146 s.). 바빙크에게 있어서는 독립된 주제로 다루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하나님의 작정이란 주제를 다룰 때 지나 가면서 논의한다고 한다. 트릴하스(Trillhaas)에게는 주제 색인에 ‘기도’란 단어 자체가 없다고 한다. 프렌터(Prenter, SE p.460 s.)에게서는 약간 낫다고 한다. 브룬너(Brunner)는 ‘기도의 신학’(Theologie des Gebetes)이란 제목으로 따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pp.364-376). 틸리히(Tillich)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지나가면서 다루지만 반복적으로 기도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기도를 교의학의 주제로 만들었다고 한다.3)

베르코프는 이러한 기도 무시의 이유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하면서 다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경시인데 이것은 예정론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개혁주의 스콜라주의(gereformeerde scholastiek)와 관련되며,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경시인데 이것은 19세기의 현대주의(modernisme)와 20세기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e)와 관계된다고본다.4)

 

2) H. Berkhof, Christelijk geloof, 2e dr. (Nijkerk: G. F. Callenbach, 1974), 517.

3) Berkhof, Christelijk geloof, 517f.4) Berkhof, Christelijk geloof, 518.

 

2. 두꺼스 교수의 비판적 검토

 

그러나 캄펀의 교의학 교수였던 두꺼스(L. Doekes)는 베르코프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판 적으로 검토하는 논문을 써서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제목은 “칼빈 이후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의 기도”인데, 캄펀신학교 설립 125주년을 기념하여 출판한 『기도하는 교회』(De biddende kerk)라는 책에 기고한 것이다.5) 이 논문에서 그는 “기도는 신앙 교리에서 무시된 주제이다” 라는 베르코프의 주장이 과연 그러한지 칼빈 이후 개혁신학자들의 문헌을 통해 자세히 검토하 였다. 물론 이런 주장은 그 전에도 있었는데, 1968년에 한스 숄(Hans Scholl)도 위 베르코프 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6) 1976년에 로트하이전(G. Th. Rothuizen)도 위 베르코프의 주장에 대해 약간의 비판과 함께 동조하였다.7) 그러나 두꺼스 교수는 칼빈 이후 개혁주의 교 의학에서 과연 기도에 대해 독립적으로, 충분히 다루고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그는 먼저 16세기의 올레비아누스(Olevianus)8)와 우르시누스(Ursinus)9)와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10)의 작품에서 기도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한다. 그래서 그는 칼빈의 사망 연도(1564)에서부터 1625년에 이르기까지 기도라는 주제가 무시되지 않았 다고 결론 내린다.11) 1625년은 그 후 개혁신학의 표준 자료가 된 Synopsis purioris theologiae가 출판된 연도이다.

 

그러면 17세기 초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편집된 이 책에서는 과연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는가? 이 책의 36번째 논의는 “De Cultu Invocationis”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cultus를 정확하게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는 논란이 되지만, 어쨌든 기도 가운데 하 나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12) 따라서 기도에 관한 개 혁주의 교의학의 결함이라는 지어낸 동화(童話)는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고 한다.13) 그러면서 Synopsis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 주요 내용을 자세히 소개해 준다.14)Synopsis는 먼저 기도를 ‘의존감정’이나 ‘인간의 필요’에서 시작하지 않고, 언약의 구조 안에 서 기도는 ‘우리의 주요한 의무’에 속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덕에 참여하는 중요한 수단들 중 의 하나’라고 본다.15) 그리고 나서 Synopsis는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며, 누구를 통해 기도해야 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참된 기도의 내용과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 이에 대해 두꺼스 교수는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해 주고 있으나16)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하도록 하겠다.

 

Synopsis가 출판된 그 무렵과 그 후에도 개혁신학에서 기도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17 세기에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저술한 몇몇 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Johannes Wollebius(1626), Guilemus Bucanus(1651), G. Amesius(1623), James Ussher(1656 화란어 번역), G. Voetius(1667), Johannes Hoornbeek(1689), Johannes Coccejus(1662), Herm. Witsius(1681), Johannes à Marck(1686), P. van Maastricht(1655), 제네바의 Bened. Pictet(1695-1696), W. à Brakel(1700), Johannes Braunius(1694), Franc. Burmannus(1681), Johannes Maccovius(2판: 1650), Bernh. de Moor(1768) 등. 따라서 칼빈 이후에 개혁주의 교의학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도라는 주제 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두꺼스 교수의 결론이다.17)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달라졌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교의학에는 ‘기도’에 대한 독립된 장(章)이나 섹션(파라그라프)이 없지만,18) 아마도 그들은 이것을 윤리학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19) 그리고 클라스 스킬더도 따 로 교의학 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다른 책들과 설교 원고에서 기도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다.20)

 

그리하여 두꺼스 교수의 결론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기도 주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H. 베르코프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배척한다. 예정론이 기도의 의미를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오류라고 지적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대한 고백이 기도의 큰 의미에 대한 관심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도르트 신경에서도 마찬가지다(I,13; V,2).21)

 

5) L. Doekes, “Het gebed in de gereformeerde dogmatiek na Calvijn,” in De biddende kerk,43-83.

6) Hans Scholl, Der Dienst des Gebetes nach Johannes Calvin, 1968, 9: “Das Gebet, seine Bedeutung und Stellung, fällt gerade im Protestantimus am wenigsten ins Auge ... Ist da das Gebet verstummt oder im Verstummen begriffen? ... Dass Ausführungen übers Gebet in der protestantischen Dogmatik bald einmal spärlich wurden, ja versiegten, ist eine Tatsache.”(Doekes, “Het gebed,” 43 n.2에서 재인용)

7) G. Th. Rothuizen, Ethiek en gebed, 1976.8) Olevianus, 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unter Deum et electos, itemque de mediis quibus ea substantia nobis communicatur, 1585.

9) Zach. Ursinus, Catechesis, summa theologiae per quaestiones et responsiones exposita(Catechismus Major).

10) Franciscus Junius, Theses Theologicae Leidenses, 1592.11) Doekes, “Het gebed,” 52.12) Doekes, “Het gebed,” 53.13) Doekes, “Het gebed,” 53.14) Doekes, “Het gebed,” 54-65.15) Doekes, “Het gebed,” 55.16) Doekes, “Het gebed,” 55-65.17) Doekes, “Het gebed,” 79.18) 물론 Abraham Kuyper가 직접 교의학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출판한 Dictaten Dogmatiek, 5권(2판, Kampen: J. H. Kok, 1910)이 있다. 여기서는 ‘기도’에 대해 따로 다루는 부분이 없다.

19) Doekes, “Het gebed,” 80.

20) Doekes, “Het gebed,” 80f.

21) Doekes, “Het gebed,” 82f

 

3. 필자의 평가

 

두꺼스 교수의 비판적 검토와 평가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칼빈 이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책에서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개관해 주고 있다. 직접 그 들의 책들을 통해, 그들이 ‘기도’에 다루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논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이 칼빈 이후로 기도를 소홀히 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꺼스 교수가 살핀 자료들은 다 칼빈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이다. 주로 교의학 책들에서 ‘기도’에 대해 독립적 장(章)이나 단원이 있는가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책들이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사실 이 개혁교회가 기도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게 해 주기는 하지 만, 그것이 개혁교회의 기도생활에 대한 실상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니다. 교리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책에 기술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힘쓰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이 주지주 의적 경향으로 흘렀다면 책에서는 잘 논했다 할지라도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교의학 책에서 많이 논의한다는 사실은 실제 신앙생활에서의 관심을 어느 정도 또는 상당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칼빈 이후의 개혁신학에서 과연 ‘기도’에 대해 충분하게 다루어졌는가 하는 것 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물론 칼빈이 기도에 대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상당히 많은 분 량에 걸쳐 다루고 있으며 또 그의 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에 대 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17세기와 18세기의 개혁신학자들이 기도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는 것을 두꺼스 교수의 논문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기도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고 다른 교리적 주제에 밀려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비록 아브라 함 카이퍼가 기도에 대해 쓴 글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의 신학이 전체적으로 합리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헤르만 바빙크도 비록 개인적으로는 경건 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개혁 교의학』에서는 기도에 대해 따로 다루는 것이 없다.

 

이러한 것은 클라스 스킬더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개혁교회의 전반적인 관심은 언약론, 교회 론, 문화론 등에 관한 교리 논쟁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꺼스 교수의 이 논문이 나온 후 10여 년 후에 출판된 판 헨더런과 펠러마 교수의 『간결한 개혁 교의학』에서도 기도에 대한 별도의 항목은 없다.22) 남아공화국의 헤인스 교수가 저술한 교의학 교과서인 『교의학』에도 기도에 관 한 항목은 없다.23)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 신학』에서도 ‘기도’(Prayer)에 대해 다루는 항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책 말미의 인덱스에도 없다. 이런 것들은 아마도 ‘기도’는 교의학의 주제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서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와는 분명히 다르며 17 세기, 18세기의 개혁신학과도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실제 설교와 글에서도 나타난다. 필자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간 개혁교 회에 소속하여 들은 설교는 거의 대부분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등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필자가 읽은 개혁신학의 글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말씀’ 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때마다 필자가 가진 의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 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그 올바른 교리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으로 끝 나고 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부족한 것’, ‘미완성’은 바로 ‘기도’이다. 물론 ‘기도’ 만이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보여야 할 반응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중 매우 중요 한 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이 반응들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 는 것,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고 겸비하게 되 는 것,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 등이 포함되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는 것으로서의 ‘기도’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어 려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입어 하나님께 순 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 보다도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의 사랑과 보호를 매순간 받게 된다. 물론 이런 것이 개혁교회 성도들과 신학자들에게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 교회 성도들과 비교할 때 그리고 한국 교회 성도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관심과 강조와 실천이 적었다고 생각된다.

 

22) J. van Genderen-W. H. Velema, Beknopte Gereformeerde Dogmatiek, Kampen; J. H. Kok,1992.

23) J. A. Heyns, Dogmatiek, Pretoria: N. G. Kerkboekhandel Transvaal, 1978, 1984(3e dr.).

 

 

II. 침묵기도의 문제

 

그러면 서양 교회 기도의 특징 또는 문제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단지 종교개혁 이 후의 개혁교회나 루터파 교회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중세 가톨릭교회를 포함해서 서양 교회의 기도의 특징 또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칼빈 이후 개혁 신학자들의 ‘책’에서 기도에 대해 얼마나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를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양 교회 전반에 대한 거시적 통찰이 필요하며 서양 교회 자체를 객관화 해서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양 문화권에 속한 한국 교회의 성도에 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문화적 차이가 올바른 이해에 이점을 주는 것은 아니며 성경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말씀 앞에서 동양 교회와 서 양 교회 모두를 객관화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마저도 객관화할 수 있는 정직과 겸손이 필요하 다. 이에 필자는 서양 교회 기도의 중요한 특징 또는 문제점으로 침묵기도를 지적하고자 한 다. 그래서 서양 교회에 침묵기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왜 그것이 강조되었는지에 대 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개혁교회와 침묵기도

 

서양 교회 특히 개혁교회에서는 침묵기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물론 서양 교회 가 항상 침묵기도만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양 개혁교회는 대부분 소리 내어 기도하며 분명한 말로 기도한다. 예배 중에는 대개 목사가 대표로 기도한다. 가정에서는 식사 전과 후에 아버지 또는 어머니 또는 가족 중 한 명이 대표로 기도한다. 그러나 서양 교회에서는 침묵기 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필자가 참석한 화란기독개혁교회 소속의 한 교 회에서는 예배 시작 무렵에 다함께 침묵기도를 하는 순서가 있었다. 한 30초 정도 아무 소리 도 나지 않는 절대 정적(靜寂)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예배를 시작할 때 ‘묵상기도’(Silent Prayer)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전통은 아마도 130여년 전에 서양 선교 사들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침묵기도’가 과연 옳은 것인가? 이것은 도대체 어디서 들어온 것일까?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 아마 다른 서양 교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합심해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찾아보 기 힘들다. 다함께 기도할 때는 침묵기도하는 것뿐이다. 서양 사람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특히 기도할 때는 조용하게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20세기의 오순절 교회의 기도 는 이에 대한 예외적 현상으로 여겨지며, 전통적으로는 침묵기도 또는 조용한 기도를 당연하 게 여긴다.

 

2. 고대 사회의 침묵기도

 

그러면 침묵기도는 어디서 왔을까? 이에 대해 P. W. van der Horst가 “고대 사회의 침묵 기도”란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이 있다.24) 이것은 침묵기도가 고대 사회에 어떻게 시행되었으 며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연구한 흥미로운 논문이다. 이 논문의 첫 문장은 “고대 사람 들은 소리 내어 기도했다”(The ancients said their prayers out loud)는 것이다.25)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관습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었다.26) 침묵기도(silent prayer)는 대부분, 적어도 기독교 이전의 헬라 로마 문헌에서는, 분명히 비정상적인 것 (anomaly)으로 여겨졌다.27)

물론 침묵으로 또는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들이 있었다. 원수들이 듣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 초자연적 능력들이나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경우(이름을 부 르면 진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 기도자가 부끄러움(당황)을 느끼는 경우, 간구의 내용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 또는 범죄적인 경우, 마술을 행하는 경우 등이 다.28) 마지막으로 말없이 기도해야 하는 전혀 새로운 근거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신들의 본질 에 관한 개념의 변화와 관련된다. 특히 후기 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 곧 순수히 비물질적이고 이성적인 신적 세계와 그리고 특히 부정적 신학(theologia negativa)에 대한 개념이 침묵기도 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합당한 수단으로 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29) 예를 들 면, 신플라톤주의의 대표 철학자 중 하나인 주후 3세기의 플로티누스(Plotinu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먼저 신 자신을 부르는데 큰 소리로써가 아니라 항상 우리의 능력 안에 있 는 그런 기도의 방식으로 부른다. 곧, 홀로이신 분에게 외로이 영혼으로 그를 향하여 갈망하 는 것이다.”(Ennead V 1, 6)30) 그의 제자인 포르피리(Porphyr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당한 방식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자. 곧, 다른 능력들에게 다른 희생 제사를 드리자. 만물 위에 계신 신에게는, 어떤 현자(賢者)가 말했듯이, 감각의 세계에 속한 어떤 것으로도 제물을 드리 지도 말고 바치지도 말자. 왜냐하면 비물질적인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즉각적으로 부정(不淨)하 지 않은 어떤 물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신에게는 목소리도 내적 언어도 합당하 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충동에 의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수한 영혼과 신에 대한 순수한 개념들을 가지고 심오한 침묵으로 그를 경배해야 한다.”(De abstinentia II,34,2)31) 포르피리는 또 다른 곳에서 “현자(賢者)는 또한 침묵으로 신을 경배한다”(sofo;" ga;r ajnh;r kai; sigw'n qeo;n tima')/ 고 말하였다(Ad Marcellam 16).32) 그는 또 신들은 ‘말할 수 없는 부름’(ineffable callings, klhvsesin ajfqevgktoi")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33) 그리고 고 대 이집트의 지혜는 말하기를, 신들의 신은 “오직 침묵에 의해서만 경배된다”고 한다(cf. Iamblichus, De Mysteriis VIII, 3).34) 후기 신플라톤주의 저술가인 프로클루스(Proclus)는 우리의 온 육체적 감각을 침묵함으로써만 신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35)

이런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성(神性)이 온 우주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스며든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에 기여하였다. 세네카(Seneca)의 다 음 말은 자주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올릴 필요가 없 다. 또는 우리가 우상의 귀에 가까이 가도록 - 마치 이렇게 해야만 우리 기도가 더 잘 응답될 수 있는 것처럼 - 성전 문지기에게 구걸할 필요가 없다. 신은 너희 가까이 있다. 그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 안에 있다.”(Epistula XLI 1)36) 스토아 철학자들은, 너희 안에 있는 신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37)

플라톤주의가 기독교의 기도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주후 200년경의 알렉산드리 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의 경우에 분명하다. 그는 그의 Stromateis란 책의 한 장(章) 전체를 기도에 관한 문제들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 중 몇몇 문장들을 인용하면 다음 과 같다.38) “하나님은 듣기 위해 인간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생 각하듯이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하나님이 무엇 을 지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VII 7,37,1) “목소리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지만, 성자의 생각은 공중과 온 세상에 나아간다.”(VII 7,37,3) “기도는, 좀 더 대담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입을 열지 않고 끊임없이 속삭이지만 우리는 침묵 가운데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속으로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내적 대화를 들 으시기 때문이다.”(VII 7,39,6)

 

 

24) P.W.van der Horst,“Silent Prayer in Antiquity," in Hellenism-Judaism-Christianity(Leuven: Peeters, 1998), 293-315.

25)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3.26)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3.27)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3f.28)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4-302. 29)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2f.

30)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3f.에 있다.31)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에 있다.32)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에 있다. Van der

Horst는 여기서 sigw'n 앞의 kaiv를 번역하지 않았으나 필자는 ‘또한’으로 번역하여 추가하였다. 33)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에 있다. 34)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f.35)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5.

36)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3.37)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3.38) 아래 인용문들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1f.에서 취하여 번역하였다.

 

3. 중세 교회의 침묵기도

이러한 침묵기도 강조의 경향은 주후 5세기 초 존 카시안(John Cassian)의 경우에 분명하다. 그는 수도승은 완전한 침묵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Conlatio IX 35).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우리의 원수들(아마도 마귀들을 가리키는 듯함)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기도는 오직 침묵으로 행해질 수 있다.39) 또다른 수도승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는 그의 『기도에 대하여』(De oratione)란 책에서, 기도는 모든 생각을 완전히 내쫓아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침묵과 심지어 무의식적 기도를 찬양한다.40) 그리하여 중세 교회에서 침묵기도가 보편화되고 서양 교회 기도의 중요한 한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41)

 

서양 교회의 이러한 경향은 결국 참 신은 순수한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더러운 육체로 나 아가기보다는 영혼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 헬라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곧, 영 (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靈知主義)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중세 교회는 입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보다도, 그런 것이 없이 고요히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 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본 것이다.42)

 

39)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4.40)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4.41)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5.42) 침묵기도에 대해서는 또한 필자가 크리스챤 Q&A 2017년 10월 13일에 기고한 “침묵기도에 대하여”를 보라.

 

 

III. 성경에서의 기도

 

1. 구약에서의 기도

 

그러나 성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주 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부득이한 경우에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왕 앞에 선 느헤미야가 그러하였으며(느 2:4), 또 한나처럼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하거나 사적인 내용인 경우에도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였다(삼상 1장). 그러나 한나는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말하였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삼상 1:13). 즉, 한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기도한 것이다.43) 따라서 아무 말도 없는 절대 침묵과는 다르다.

시편에 보면 다윗은 종종 큰 소리로 기도했다고 나온다. 특별히 환난 때에는 부르짖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시편 18편에 보면, 3절에서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 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고 하였다. 여기서 ‘아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크라’(ar;q]a),인데 ‘부르다, 부르짖다’(call upon, cry)를 뜻하는 동사 ‘카라’(ar;q);의 미완료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에 한 번 부르짖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적으로 부르짖 는 것 곧 일상적 원리로서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다윗은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인 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위기 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다윗이 말하는 ‘아뢰다’는 것은 침묵기도가 아니라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6절에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여기서 ‘아뢰며’(ar;q]a),와 ‘부르짖었더니’(['WEv'a)}란 동사와 ‘부르짖음’(h[;w]v)'이란 명사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의 원형은 ‘카라’(ar;q);와 ‘십바’([W"v)i인데, 후 자의 것은 사용되지 않은 칼(Qal)형 ‘샤바’([w"v); 의 피엘(Piʽel)형이다. 피엘형 ‘십바’의 뜻은 ‘도움을 청하다, 도움을 탄원하다’(to ask for aid, to implore help)이다.44) 명사형 ‘샤브아’의 뜻은 ‘부르짖음, 도움을 위해 부르짖음’(outcry, cry for help)이다.45) KJV에서는 여기의 동사 와 명사를 “cried”와 “cry”로 번역하였다. NIV와 ESV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다윗은 수많은 환난을 당하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환난을 벗어나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 을 드린 것을 알 수 있다(49절). 즉,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그의 ‘부르짖는 기도’에 있었다. 시 편 3:4에서도 다윗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 다”고 말한다. 여기의 ‘부르짖다’는 말도 ‘카라’이다. 그 외에도 다윗이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말은 많이 있다(시 5:2; 16:2; 17:1; 27:7; 34:6; 40:1 등).

이것은 아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삽의 시’라고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 50:15에서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한다. 여기에 사용된 ‘부르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라’(to cry)이다. 따라서 환난 날에는 하나님께 소리 내어 ‘부르는, 부르짖는’ 기도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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