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본질과 현대 복음의 오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구원받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현대의 인기 있는 이론이 거짓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은

어느 누구라도 그가 결심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는 육체중심주의와 피조물 찬양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그 까닭은 자연인은 죄의 종이며(요 8:34) 각색 정욕에 종노릇을 하며(딛 3:3),

마귀의 포로이기 때문에(딤후 2:26),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끄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3:3),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따라서 자연인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깨뜨리고 감옥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보존본능 때문에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사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삶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죄인은 "그의 길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사 55:7).

그리고 우상으로부터 돌아서지 않고는(살전 1:9) 아무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눅 14:33)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찬미를 빙자하여

그리스도를 죄의 사역자로, 즉 그의 속죄 제사로써

육적이고 세상적인 정욕들을 습관적으로 즐기는 인간들의 사면을 획득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공할 만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대속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또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공언을 하면, 그의 매일의 삶이

신앙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 불신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마귀는 바로 이 착각 작용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마취시킨 후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고 말씀하시며

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신다.

영광의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의 용서를 획득키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며,

또 우리 마음이 여전히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하여 있는데도

우리를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오신 것이 아니며

(요 10:4,14, 히 10:20-22, 벧전 2:21),

또 그 길로 사람들을 불러들이시려고 오신 것이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0-2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그리고 그의 교훈과 약속,

또 그의 선례와 정신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영화된 상태로 재구성하시려고 오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화의 소망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도록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목적으로 사시다가 죽으신 후에

그의 성령께서 오셔서 죽은 죄인들을 생명의 새로움으로 소생시키시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들로 재창조하시며,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또한 마음이 이미 세상과는 절연된 자들로서 이 세상에서 체류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심령의 변화나 회개, 개인적인 성결, 하나님께 대한 지고한 사랑,

그리고 주저함이 없는 순종 등,

즉 인간 없이도 가능하나 인간에게 전혀 무익한 구원을 연출하시려 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이상한가!

우리는 로마서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 말씀이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입술로 주를 부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든 사람은 단지 말의 소리에 속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마 7:22-23).

만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옥의 공포가 죄인으로 하여금 주를 부르게 하는 것이라면,

그는 나무정령을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능자는 공포를 느껴 자비를 간청하는 어떤 반항자가 하라는 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 중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이시는 경우는

상한 심령과 온유한 마음,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성결을 목말라 하는 마음에서 부르짖을 때 뿐이다.

동일한 원리가 사도행전 16:31과 다른 모든 유사구절,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으리라"는 모든 구절들에게도 적용된다.

무관심한 독자들은 한번 힐끗 봐선 잘 모를 깊은 의미를 찾아내리라.

사도가 빌립보 간수에게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의지하라"거나

"그의 속죄제사를 의지하라"고 하지 않은 점에 주의하라.

그 대신에 그 간수 앞에 그는 한 인격을 들이댔다.

그것은 단순히 "구주에 대하여 믿으시오"라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12은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과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시기도 한 분을 영접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렇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리스도는 구주가 되기 전에 '주님'으로서 영접되어야만 하는 분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골 2:6) 받는 일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우리 자신의 죄 된 주인의식을 포기하는 일과

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사용하던 무기를 내려놓는 일,

그리고 그의 멍에와 율법을 복종하는 일에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어떤 인간이 그런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스런 이적이 먼저 그 사람의 내부에서 역사해야만 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인간 심성의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전달된 영적인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골 2:12)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능력'(고전 2:5)의 산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1:12),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5)]

죄인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므로

그가 세상을 창조할 수 없듯이 스스로 회생할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은 세상의 죽음의 의복과 육체의 정욕으로 꽉 조여 있기 때문에

오직 전능자만이 그의 마음을 소생시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할 수 있다.

만일 이 완악한 세대의 형식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개개 자연인의 실제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바른 개념을 소유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은혜의 이적만이 구원받고자 하여 믿는 어떤 죄인에게나

진정한 권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덜 빈정거리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가장 세련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지는 마음의 태도가

가장 비천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갖는 그 태도와 과히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과,

또 동료 피조물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리스도를 많이 갈망하고

반대로 가장 이기적이고 야수 같은 자들이라고 해서

덜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만 있다면,

오직 신적인 능력만이

사람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리라.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