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사유화(私有化)

죽음의 사유화(私有化)

"수빈아빠, 큰 일 났어..."


칼날 보다 날카로운 절규가 저를 보자마자 제 아내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아내의 팔에는 "큰 누나 어떻게..."라며 소리높여 울고있는 막내아들이 막 바다에서 구조된 사람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저는 둘째 딸 아이를 달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동안 무슨 사건이 터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급하게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해수욕장 안전선 넘어 노오란 튜브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 위에는 제 큰 딸이 위태하지만 조심스럽게 앉아있었습니다.


 


그토록 즐겁고 평화롭던 휴가라는 허상 속으로 죽음의 어뢰가 막 폭발하려는 듯이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죽음의 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던 하늘과 구름과 바다를 깨끗이 걷어내고 죽음이 완벽하게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죽음의 색깔로 덮여 있었습니다.


 


딸아이에게 헤엄쳐 가는 동안 저에게 과연 그 무엇이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풍경은 그대로인데 저에게는 오히려 그 아름답던 풍경은 차라리 저주였습니다. 그 때 제게 필요한 것은 오직 힘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해 줄 수 있는 힘! 그런 힘을 제공해 줄만한 신(神)!


 


"오 제발, 저에게 힘을 주세요..."


 


천만다행으로 저와 딸아이는 안전하게 구조되었습니다.


 


평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그냥 머리통 속에서만 공기돌처럼 가지고 놀았던 한 죄인이 자신과 연결된 죽음이 아주 잠시나마 고개를 쳐들자 화들짝 놀라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을 온 몸으로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는 과연 안전한 것일까요?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 전부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노라고 지금 마치 자랑처럼 떠벌리고 있습니다만, 과연 저는 죽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제 대답은 그렇게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던 아이가 나와 상관없는 '남'이었다면, 저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결코 제 딸과 같은 다급함과 절박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나'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내 딸이기 때문에 저는 그 아이의 죽음을 내 것으로 사유화한 것입니다. 즉, 내 몸이 만들어낸 죽음의 이미지만을 확대해서 나에게 불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니까 비로소 '이것이 진짜 죽음이구나!'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참 죽음일까요, 아니면 육이 만들어낸 허상일까요?


 


둘째, 저와 우리 가족이 그토록 소리질렀지만,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죽음을 그냥 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 위에서 헤험치는 것은 저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헤엄치시지 않았습니다. 파도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수심이 갑자기 낮아지는 기적따위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관심 갖지 않는 죽음이 과연 죽음일까요?


 


셋째,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저는 그동안 어떻게 조작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저와 상관없는 분입니다. 그 분의 죽음은 그 동안 뉴스에서 들어왔던 수많은 재난과 사고의 희생자 중 하나에 불과한 '남'의 죽음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예수님의 죽음에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관심을 가지시는지요? 그의 출생과 죽음, 말씀 한 구절까지 미리 예언하시고 성취하시면서 철저하게 간섭하시는지요?


 


바로 그 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참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간이 참 죄인중 괴수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는 십자가 죽음을 내 쪽에서 해석하고 논리적으로 짜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오직 나에게 유리한 것으로 조작되어 결국 나 천국가도 되는 자격있는 사람으로 귀결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실상은 나와 상관없는, 나의 죽음, 내 가족의 죽음은 거들떠 보시지도 않는 그 냉정한 하나님께서 유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저벅저벅 살아서 그 죽음의 힘을 온 우주에 적용시키고 계시더라는 말입니다. 나와 상관없이......나의 가족의 위험과 행복과 건강과 상관없이, 그냥 당신의 약속을 당신이 스스로 아주 냉정한 무표정으로 철저하게 지키고 계시더란 말입니다.


 


죄인은 죽음조차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합니다. 딸 아이가 바다가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통해 삐죽 새어나온 그 가짜 죽음을 마치 대단한 것처럼 십자가와 비교하고 있는 저의 쓰레기 같은 모습을 통해서 사람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일 수 밖에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만일 제 아이나 제가 죽었다면, 과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공로에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까? 그 찬양을 드릴 주체가 아예 없어졌는데요! 사람을 원래 그렇게 죽은 존재가 맞다고 수백번 주장했으면서도 막상 위험한 곳에 자기 딸이 빠져있으니까 미친듯이 흥분했던 그 모습이 바로 죽음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참 모습 아닐까요?


 


진리가 생존보다 우선이라고 쓰신 글이 생각납니다. 저에게 불가능한 글입니다. 생존이 진리보다 우선입니다. 숨이 차오르고 물을 먹으면 먹을수록 살고싶다, 살리고 싶다라는 욕망은 30배, 60배, 100배 확장되었습니다. 아무리 멋진 글을 쓰고 아무리 은혜로운 설교를 해도 죽음을 만나면 모두 거짓, 모두 죄로 드러납니다.


 


참 죽음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심가지신 유일한 죽음이 있습니다. 그 죽음을 맞이한 몸은 말씀이 육신되신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몸이 아니라면 죽음조차 모두 가짜입니다. 그저 인간이라는 것은 사단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성경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만들어 놓으신 가짜 죽음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죄인의 몸뚱이가 경험한 가짜 죽음과 비교하니 차마 감사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감사하라, 찬양하라는 말씀이 왜 기록되어 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제 꼴로는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할 수 없는데 성경을 응하도록 나지막 하게나마 성령께서 고백하도록 하실테니까요.


 


인간 중 누군가 구원되었다고요?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라도 그것은 불가능해요!


십자가가 그 증거라고요?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당신이 구원받고 싶어서 조작한 것이잖아요!


그런 사실이 믿어지신다고요?


 


당신 정말 누구세요???????

The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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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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