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싸움과 기도(3)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4)낙심(영적 침체)으로 공격한다(시 42:5).

●선을 행하다가 지쳐서 낙심한다. 오늘날 마귀의 궤계 가운데 가장 흔한 보편적인 방법이다. 성도들은 생활의 긴장과 반복되는 일상 업무의 단조로움, 어려움과 자극이 없음으로 인하여 지치기 쉽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선을 행하는 성도들은 진리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어두움의 왕국을 대적할 때 빛의 왕국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보여줄 것이 많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중요치 않다. 성도들은 그 곳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햇빛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작은 불빛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느린 것 같으나 완벽하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것이 자신이 책임을 맡은 것이든, 다른 사람이 책임을 맡은 것이든 간에 어느 것이든 멸시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시시하다고 느끼는 모든 감정은 마귀의 장난이지 그 밖에 다른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늘날 마귀는 크고 위대한 것만이 가치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은 하잘것없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마귀의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햐 한다(눅 18:1)

●고난과 핍박 때문에 낙심한다.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다(행 14:22, 빌 1:29, 딤후 3:12). 이것은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과 형태로 일어나므로 여기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잘 대비해야 한다. 이처럼 성도의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을 크게 망치게 하는 마귀의 궤계인 낙심을 조심해야 한다. 더욱이 이 낙심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슬플 때도 물론이려니와 기쁠 때도 찾아온다. 때로는 심각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심지어 기도할 때도 찾아오니 진실로 깨어 있어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도 환경은 우리가 기도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비유(눅18장)를 말씀하셨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 이 때 과부는 재판관에게 원한을 풀어달라고 구하나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는 이 재판관은 과부를 무시하였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낙심하지 않고 재판관을 번거롭게(성가시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일로 다른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 하였더니 마침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런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게 하닌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택한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에게도 낙심하지 말고 과부처럼 끈기있고, 간절하면서도 꺾일 줄 모르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 밤낮 부르짖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열심이 필요하다. 이런 기도의 침노자가 될 때 깊은 은혜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간절함이 없다면 기도의 응답도 없다. 그러므로 간절함으로 밤낮 기도해야 한다. 아주 절박하게 기도해야 한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해야 한다. 또한 삶 속에서 기도의 제목이 잊혀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기도하자. 낙망하지 말고 밤낮 부르짖자.

(5)충동적인 거짓 교훈으로 공격한다.

●이단의 특징

이단은 첫째,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훼손한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요14:6). 둘째, 성경을 더하거나 뺀다. 셋째, 지금도 성경적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이단들은, ①성경의 교리가 아니다. 또한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실제적인 면에서부터 출발한다.②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③겸손이 없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영적 각성이 없다. 오히려 자랑과 교만이 가득 차 있다.④아주 단순한 형식과 방법을 중요시하며 찬양한다. ⑤즉시 복을 주고, 즉시 치료해준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도 있는데 무엇이든지 그저 즉시 준다고 한다.

(6)정욕과 욕망의 영역으로 공격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거대한 연기로 불태우고 흥분시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왜 따먹었는가? 창세기 3장에서는 하와가 선악과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라고 했다. 결국 정욕, 욕심 때문이다. 정욕, 욕심이 저들을 타락케 한 것이다. 욕심 때문에 교만하게 되고, 타락케 되는 것이다.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욕심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 이렇게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말았다(롬5:19). 그리고 그 때부터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특권과 축복은 전부 상실하고 만다.

①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②공포가 생기고,

③부패한 인성이 생기고,

④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⑤도덕적으로 악하게 되고,

⑥생활의 고통이 임하고,

⑦자연까지 저주받고,

⑧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저들에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부터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고 말았다. 바로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셨고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게 하셨다(롬 5:19).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욕심을 몰아내야 한다. 욕심을 붙들고 있으면 사단은 춤을 출 것이고 계속 찾아올 것이다. 지금도 마귀는 계속 선악과의 유혹을 할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의 욕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못 박아야 한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지금 나에게 욕심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할 수 없다(롬 8:7~8). 그런데 종종 성도들이 우선순위의 신앙에서 처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예배도 뒤로 하고, 기도 생활도 뒤로 하고, 십일조, 감사, 헌신, 봉사하는 것도 뒤로 한다. 전부 욕심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이 욕심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뒷걸음치게 만든다. 앞으로 전진해야 할 성도가 뒷걸음치면 침륜(멸망, 파괴,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만다(히 10:39).

오늘도 사단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 곳곳에 선악과를 준비해놓고 따먹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사단의 이러한 전략을 분별하고 있는 성도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예 전략과 흉계인 줄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식어지고 세상일에만 분주하게 뛰어다닌다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 욕심 때문에 침륜에 빠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최초의 타락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사단은 성도들을 욕심으로 게속 넘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속지 말고 욕심을 다 버려야 한다. 또한 다 놓고 갈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다 무너질 세상에 애착을 갖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잠깐 누리고 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길어야 100년이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더욱이 욕심을 내어서 시기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합 왕 때 이세벨 왕비가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차지했다. 그까짓 포도원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 앞에는 비참한 결말이 놓여 있는데 포도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욕심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가인도 욕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다. 삼손도 욕심 때문에 비참한 일을 당했다. 다윗도 욕심 때문에 음행을 범하고 사람을 죽이는 등 큰 죄를 범했다. 그리고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가룟 유다도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욕심 때문에 성령을 속이고 즉사하고 마는 침륜을 당하게 된다. 언제나 욕심 때문에 갈등, 미움, 싸움, 살인, 분쟁, 전쟁 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욕심을 성도의 생각 속에 집어 넣는 것이 사단의 전략임을 잘 분별하여 속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몰아내야 한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 맺었던 그 최초의 언약은 오늘날에도 지켜져야 한다. 왜나하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마 24:35),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면서 살아야 할것이다.우리 주님도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쫓을 것을 요구하셨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욱이 주님의 가르침은 이론상의 가르침이 아니다. 체험적인 가르침이다. 주님 자신이 먼저 행하신 후에 가르치셨고, 가르치신 대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체험이 있어야 진정한 성도이다. 깨달은 대로 체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었다. 못 박혀 죽기 위한 것이 우리 예수님의 최대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목적대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가? 과연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목적을 갖고 있는가?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6)을 들으시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언급하신다. 이 때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예수님을 붙잡고 “정신 차리라”고 꾸짖는다(‘간하여’라는 말은 ‘꾸짖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리 마옵소서”라고 애원한다. 아주 간절하게 부탁한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를 지려는 예수님의 목적을 무산시키려는 단호하고 강한 의지를 보게 된다. 이것을 보면 첫째,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해하는 세력이 있으며 둘째, 하나님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영적 교만으로 나가게 된다. 셋째, 육의 생각으로 십자가를 지려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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