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아름다운 신앙고백 글 (퍼온 글)

참 아름다운 신앙고백 글 (퍼온 글)

참 아름다운 신앙고백 글입니다. 


 


이글은 정낙원 목사 블로그에 올려진 이근호 목사님의 글과 정낙원 목사의 글을 자신들의 까페에 옮겨 놓았다는 죄목으로 여러 곳에서 비판을 받으신 분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의 글입니다.  


너무도 귀한 고백글이라 옮겨 놓습니다.


비판하는 사람과 비판 받는 이 분의 관심사가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여서 댓글로 흔적을 남겨두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에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줄 모르겠군요.


아울러 이 분을 비판하는 자와 비판 받는 이 분을 비교하여서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는지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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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향기님께 우선 죄송한 인사를 드리고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개혁 방에 이근호 목사와 관계있는 글(정낙원목사님 글)을 퍼왔기 때문입니다.


글을 옮겨 왔다는 것은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동의하던가 아니면 여러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저의 입장을 먼저 밝혀야 오해가 줄어 들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근호 목사의 십자가 복음에 대하여 현재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완전하다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성경 해석과 복음에 대한 기본인식에 동감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맹종하거나 추종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볼 때 성경에서 즉 사도들이 전한 복음관,


특히 바울신학(저는 신학이라는 단어가 별로 맘에 안들지만...) 에 근거하여서는 가장...비교적 대다수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인식보다 좋다고...훨신 근접했다고 개인적으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판단이기에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사실 제가 이근호 목사님을 전혀 모릅니다.


밥 한끼 먹은 적도 없고 그렇습니다만 웹상에서 글을 접하고 참 오랫 만에 시원한 복음에 대한 글을 보았고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미 여러 곳에서 이단운운하는 글을 보았기에 덜컥 겂이 나서 한동안 관심을 끊었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검색하는 과정에서 자주 이근호 목사의 십자가 마을 싸이트를 방문하게 되었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근호를 비난하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많은 글을 읽지는 못했지만 수십 편을 글을 읽고서, 아니 이렇게 십자가 복음만을 줄기차게 외치는데 무엇 때문에 변질되었다느니 하며 오류가 있다는 둥(물론 누구나 오류와 실수할 수 있지요) 이단적이다는 식으로 몰아갈까 의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양무리 마을 카페와 손무성 목사의 싸이트도 방문했습니다.


이근호 반대자들의 비난은 이근호 신학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올린 글을 삭제했다더군요.  


그래서 이근호 목사의 십자가마을을 뒤져 보았습니다만 지난 게시판인가 하는 곳에 손무성목사를 동조하는 분들과 이근호 목사를 동조하는 분들 간의 팽팽한 접전의 현장을 일목요연하게 올려놓았더군요. 


더구나 이십년간 친밀하게 함께 싸이트를 운영까지 했었던 두 사람(손무성목사,이근호목사)이 결별을 하게 된 것이 참으로 미묘하더이다. 


두 사람 다 인간인지라 감정적인 상태가 우리가 소망하는 환상적인 인격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더군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제가 객관적인 시각에서 개인적으로 보자면 아직까지 저는 이근호 목사님의 복음이 더 합당하다고 봅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저는 현제 제도적인 교단과 관계된 교회와 제도권을 등에 없고서는 결코...결코...결코... 


십자가 복음과 바른 복음(진실 된 마음과 사심 없는 마음)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보고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느냐 해도 상관없습니다. 


십자가는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저것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근거는 우리쪽에서의 어떠함도 개입을 할 수 없다는 이근호 목사의 주장에 대한 지지를 합니다.


그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개혁주의에서도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바쁜 (별 볼일 없어도 사실 무지 바쁜사람이거든요^^*)와중에 인내심을 갖고 읽었더니


성화 론에서부터 입장이 구별 되기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구원 이후에 대하여 성화론을 고수하는 자들은 이제 구원받아 십자가 안에 들어 왔으니까 신자답게 이것도 저것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이근호 목사의 주장은 십자가 안에 들어 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니까. 


우리가 뭔가를 하려고 할수록 우리의 의가 나오기에 그러함까지도 중단 혹은 포기하고 주께서 행하심을 보자는 쪽입니다. 


암튼 무식한 제가 이해하는 것은 이정도입니다.


물론 여기에 팽팽한 접전이 있었고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점진적으로 성화의 과정을 향해 신자는 조금씩 완성되어간다는 것이 성화론자들의 주장입니다. 


이근호 목사는 우리는 결코 성화에 대하여 도달할 수 없기에 죄 밖에 안 나오니까 그럴 생각조차 하지 말자는 식입니다. 


손무성 목사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기에 산 자로서의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고,


이근호 목사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말로 십자가에서 죽었고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으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에 대하여 감사함을 누리는 것이지 뭔가를 보답하는 맘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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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간 향기님이 댓글로 올리신 이근호 목사에 대한 생각을 인용합니다. 


 


이근호 목사(홈피)에서 저도 수년전 1~2년 정도 탐독했습니다. 당시 보기 드문 개혁적 주장 이였기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보고 (초기에는 호의적인 자세로 심취하기도 했고) 참여하기도 했습니다만...


어느 순간 이게 아닌데..하고 분별하게 되더군요^^;;


"항상 십자가만을 말하지만 십자가와 아무 상관없는 행동과 잣대" 목사직에서 제명된 것이 순진한 영혼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손무성 목사는 처음에는 이근호 목사와 궤를 같이하는 목사였습니다. 손무성 목사가 먼저 십자가마을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었고, 함께 열심히 이근호 목사의 독특한 철학에 기반한 신학을 전파, 변호했더랬습니다.  


문제는 나중에 손무성 목사가 이근호 목사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마을의 인터넷 주소지 소유권을 놓고 한참 분쟁이 일어났고.. 결국 이근호 목사가 또 다른 십자가마을 사이트를 만들어 떠나는 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근호 목사는 구원에....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칩니다. 여기에 인간의 행위나 공로는 단 1%라도 섞어서는 안되고 섞일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죠. 여기까지는 충분히 복음적입니다. 


문제는 십자가 아래(안에, 와 함께)에서 죽는...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습니다. 진전이라 함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임을 고백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사시도록 하는 것, 즉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데...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거의 분노에 가까운 히스테릭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를 행할 능력이 없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성화되려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는 식으로 논리적인 비약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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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순례자님의 댓글입니다(죄송^^*)


 


이근호 목사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기가 쉽지 않은데 잘 보셨습니다(말투가 건방진 것에 대해서 용서를....). 다만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사시도록 하는 것, 즉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능하시면 부언설명을 부탁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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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향기님 댓글~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것에 대한 제 대답은 단순합니다^^;;


갈5장에 기록한 것처럼....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


성령으로 살며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 믿음과 앎의 분량을 따라, 말씀 안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씀을)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것이라 여깁니다.


적용은ㅡ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적용하는 거겠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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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순례자님~


 


한번만 더 사족을 다는 것을 양해를 바라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 사시도록 하는 것은 그분의 생명이 내게 풍성케 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생명이 사람으로 죄를 지음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처럼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풍성케 되실 때에 내게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되는 것과 죄가 나타나는 것이 역전이 되고, 그 끝은 죄가 자연스럽게 나왔듯이 하나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당신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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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님~


 


아멘, 그렇습니다... ^^*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케 되어 흘러 넘치는 것은...(그리스도의 영이신)성령이 충만한 상태이고,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므로) 말씀 충만한 상태로도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너는 더러운 자다. 나도 더러운 자다." 더러운 자는 십자가의 공로만,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이 다 이루셨고, 또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다. 우리는 죄인 됨을 더욱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 됨을 더 드러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시키려는.... 마귀의 짓이다."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근호 목사에게 마귀로 정죄된 기독교인들이 무수합니다. 


그의 철학적, 논리적, 말장난을 보통 사람은 쉽게 간파하기 힘들 것입니다. 아마 하이퍼 칼비니즘(극단적 칼비니즘)해 객관적으로 공부해 보시면... 그의 신학의 흐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가 주장하는 바 대로만 따라간다면... 홀리기는 쉬워도 분별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다른 분별법은 그의 말에 몰입하는 것 만큼...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요한1,2, 3서 야고보서에 몰입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이 지향하는 바와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그 말의 실상을 분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현란한 신학적 말장난으로 엉성한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기 철학으로 성경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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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향기님의 댓글을 무단 복사함을 용서 바랍니다. 


 


 


저는 누군가와 공개적으로 싸우자고 덤비는 무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만한 실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해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변명 한마디 할랍니다. 


제가 혹시라도 누군가와 논쟁 비스므리하게 다른 의견을 개진하거나 누군가의 글에 대하여 이의를 다는 것은 그런 중에 혹시라도 비난과 감정적인 면이 다소 분출된 다해도 그것은 그 누군가라는 사람의 인격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분노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거짓 삯군들과 미혹하는 궤술로 성도를 실족하게 만들거나 세뇌시켜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세력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농간에 중독된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엉뚱한 소릴 하는 것은 오히려 불쌍히 여길 뿐이며 그렇게 만들어 이용하는 세력들에게 이를 갈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러한 원수들이 대부분 겉으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교단을 자랑하고 목사의 권위가 주는 안락함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서 훨씬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기에 제도권 교회에 더 이상 희망을 두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제 홈페이지나 카페 공지에 올렸습니다. 


오직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기준이 되어서 만일 그 기준에서 벗어난다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자라면 그가 누구 간에 저는 아닌 것은 아니라 하며 옳은 것은 옳다하렵니다. 


그리고 만일 나중에 라도 제가 판단한 것이 혹 명백하게 오류가 있거나 잘못되었다면 언제든지 뒤집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으며 미혹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분명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합니다. 


 


다시한번 정리 합니다. 


 


저는 이근호 목사, 손무성 목사, 그 외 여러분들과 차 한 잔 마신적도 없고 얼굴한번 대면한적 없습니다.


향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확대 해석해볼까요^^* 


저는 바울과 베드로와 여러 사도들과 선지자들과도 당연히 동시대를 살지 못했고 얼굴도 모르고 밥 한번 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과 사도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십자가의 피로 맺은 형제로서의 친밀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복음 안에서 우리는 신분 고하를 떠나서 인종과 언어를 초월해서 형제요 자매입니다.


한 가족들입니다. 


그러나 같은 동족 유대인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새롭게 관계를 맺은 새사람들은 분명하게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구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비방하며 무시하며 멸시 천대했던 이방인들과 새로운 관계가 성립이 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라고 자타가 인정하였습니다. 


물론 선배인 베드로 역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와 성령 안에서 극적으로 교제의 악수를 하였고


예수께서도 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단 교파주의적이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결코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언약의 피로 맺은 관계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날 한국 교권주의의 한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교회의 틀 자체가 이미 복음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근호 목사가 주장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구조는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강조하니까 결국은 교단에서 재명 당한 것이고 손무성 목사 역시 20년동안 한 마음으로 길을 가다가 결국은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 죽을 때 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신학제도와 교회와 목사 우상주의와 연관된 기득권들을 내려놓아야 하는대 말입니다. 


말로는 자기 부인하라고 십자가를 말하고 내려놓아야 하겠는데 계속해서 기득권으로 치장한 것들을 품고 가자니 맘이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손무성 목사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변명을 해도 그가 계속해서 목사노릇을 유지하려면 더 이상 이근호와 한 배를 타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같은 길로 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한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가 누군가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지혜롭다 하는 이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지만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 바울이 전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밖히심 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주의자들은 십자가 말고도 자랑할게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은혜로 이것도 할 수 있고 했으며 저것도 할 수 있고 했다는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향기님이 거론하셨지요.


저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말자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입니다. 


그것이 지나쳐도 저는 좋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바울은 죽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많은 학문과 지식과 방언과 은사를 경험한 사도라면


얼마나 불쑥 불쑥 자기 능력이 튀어 나왔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바울로 하여금 교만하지 못하도록 사단의 가시를 주었는데 후일 그가 고백하지요. 


내 은혜가 족하다. 내가 약함으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강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강하면 반대로 그리스도는 약합니다.


내가 강할수록 그리스도는 자꾸만 잠을 자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스도는 저만치 가십니다.


바울이 그것을 깨달았기에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근호의 십자가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은 혹은 성화론 자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이제 성도니까 이전에 지키지 못했던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건물도 크게 짓고 십일조도 은혜와 감사함으로 십의 구조까지 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주께서 구원하셨으니 우리가 이제는 열심으로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거 모르십니까?


이게 당연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지금의 교회제도와 목사권위와 각종 종교적인 것들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 간다는 말이며 그것은 결국 목사의 야망이 합법화 되는 구조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사단의 망상에 미혹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억지 논리를 펴고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죄를 안 짓는다는 헛소리를 귀담아 들으시나요?


정말 성령과 동행하면 죄와 상관없습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병고치고 방언주고 죄를 전혀 짓지 않게 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아니랍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시지 모든 문제를 만사형통하게 해주시는 수호신이 아니랍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 한 예수께서 광야로 끌려가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슬퍼하며 고민하며 땀이 핏방울이 될 만큼 엄청난 고통을 토로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정말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느냐고 부르짖으십니다.


쉽게 말해서 결정적으로 십자가를 피하고자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롬7장에 그가 비명을 지릅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절망하며 비통해 합니다.


자기는 곤고한 자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나오는 것이 죄 밖에 없다고 비통해 하지 않습니까? 


그가 성령을 안 받아서 그런다고요?


어떤 자들은, 롬 8장으로 넘어가면 안 그런다고 누군가 억지를 부립니다.


롬7장까지의 바울은 성화 혹은 성령 없는 육에 속한자라고 말입니다.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립니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가 완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보낸 서신서 랍니다.


 


성령의 사람 바울이 죄 때문에 고통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 후에 더 이상 죄와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여러 서신서를 통해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싸운다고 하지요. 


성령의 인도함으로 살으라고 했지 성령의 인도함으로 살면 죄와 상관없는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내가 나오고 절제가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것은 그만큼 성령에 순종하기가 힘이 들만큼 우리의 본성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정과 욕심과 죄 된 몸이 못 밖혔다고 하며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살았다가 아니라 산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고 생각하라는 것이지 완성품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화로운 완성은 여기서가 아니라 신랑 되신 주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려오실 때 주와 함께 혼인잔치로 들어갈 때 거기서 영화롭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보시기바랍니다.


 


다윗이 성령의 사람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령의 사람인것을 알고 있지만 그가 밧세바와 간음을 한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의 사람이었으나 멀리서 목욕하는 여인의 육체를 보고 참지 못한것입니다.


 


그때 성령이 다윗을 떠났다고 하실렵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러한 유혹에서 상관없습니까?


요셉은 도망을 쳤지요?


 


그러나 다윗은 왕이었기에 얼마든지 합벅적으로 그의 권위를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울 수가 있었기에 성령의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넘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억지로 통재하시지 않습니다.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죄를 지어도 상관하시지 않습니다.


나중에 죄에서 벗어날 때 역시 우리의 의지와 결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 할 수 없이 탄식하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우쳐 주실 때,


비로소 우리가 통회 자복하며 나는 역시 철저하게 부패한 죄덩어리였구나! 하고 항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신 후에 비로소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도 십자가요.


회개도 십자가요.


은혜도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주의자들의 주장은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든지 우리가 성령의 소욕에 따라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로 가는 것입니다.  


뭐든지 사람이 많이 동원되고 열심히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수고하면 충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십자가! 십자가 그의 피는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느냐 하고 반발합니다. 


지금의 개신교회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주일성수, 목사권위, 십일조, 교단, 그리고 돈을 합벅적으로 모을 수 있는 각종 씨잘대기 없는 무수한 절기의식들.... 


살아계신 주와 함께 살아가는데도 굳이 특정한 날을 정해서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대림절 벼라별 절 성서주일 어버이주일 종교개혁 주일등등...


아주 일 년 내내 교회법과 교회전통에서 만들어놓은 수 많은 프로그램을 지키느라 생 쇼들을 하고 있으니.... 


이근호 목사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살려고 발버둥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주께서 행하심을 보라고 주장한 것이 틀립니까? 


그렇다면 성령 받은 여러분들이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다고 자신하시는지요?


그동안 교회에서 무엇을 그렇게 주님을 위해 말씀대로 살았습니까?


 


열매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껏 나온게 칼빈파 루터파 웨슬레파 은사주의파들 밖에 더 있습니까?


 


전도 왕들을 말하고 싶습니까?


사람들을 수천 명씩 모아서 그들이 행한 열매가 뭡니까?


거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값으로 산 성도들의 구원과 삶이 있습니까? 


결국 교회당 건물만 초호화판 만들어 놓고 기도원 만들어 놓고 신학박사학위 주렁주렁 걸어놓은것 빆에 더 있습니까? 


차라리 십자가만 전하고 아무것도 할수 없으니


십자가에서 주께서 행하심을 기다리며 기대하며 잠잠하라는 이근호 목사의 주장이 저는 더 복음적이라고 판단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이근호 목사와 커피한잔 마신 적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의를 깨부숩니다.


거기에 어떤 이론도 공로도 낄 수가 없습니다.


구원하심도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이며 그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맺은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두 관점이 있습니다.


아직도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십자가를 말하지만 하나는 행함이고 하나는 누림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의 모습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저는 이근호목사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손무성 목사의 구별에 대하여 지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또 다른 얼굴를 보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고신 측에서 이광호 목사를 재명 한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 교단은 성경대로 하며 개혁주의라고 주장을 해도 말입니다.


여전히 교단 지키기에 급급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막말로 고신 노회에서 이광호 목사를 차라리 독립교단으로 가서 자기 소신을 펴라 할 정도라면 말다했지요? 


백주년기념 교회 이제철 목사에 대하여 장로교단이 간섭하는 것도 웃깁니다.


 


장로교단과 상관없는 독립교단의 목사를 왜 장로교단에서 간섭을 하는지요?


장로라는 호칭을 사용해서 그런다면 장로교단이 성경을 만들었나요?


성경의 장로라는 직분을 오직 장로교단만 사용해야할 무슨 근거라도 있는지요?  


시비하자는 게 아니라 결국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 십자가는 외면당할 것이며 기득권자들에게는 불편하며 걸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 때문에 핍박을 받았는가 하면 자꾸만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인간적인 모든 종교적인 행위가 부정되어야 하기에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반작용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들고 가면 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전통을 지키느냐 전통을 넘어서느냐....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한순간에 뒤집어지는 지점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살아납니다.


자꾸만 십자가를 밝고서 살아나서 뭔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성경은 지금까지 십자가 때문에 싸우는 전쟁의 기록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들의 싸움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는 자들과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자들로 갈라집니다.


   


저는 이제 고백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만 바라봅니다.


주께서 새 일을 행하십시오.


그 일하심을 보고 즐거워하며 십자가 그늘 아래 쉬기를 원합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죄에서 사함받아 깨끗하게 되었으니 오직 십자가에 흘린 주 예수의 피를 간증하며 날마다 구원을 전하렵니다. 일을 아니할 찌라도 불법을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고백한 다윗처럼 우리의 불법과 죄들을 가리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찬양합니다.


 


말이 길어 졌습니다. 


그냥 지나가야 하는데 제가 교만해져서 그만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합니다. 


본의 아니게 향기님을 앞세워서 제 주장을 정당화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만 개인적인 견해라고 양해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직접적인 이근호 목사와 반대자들과의 문제로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넘어가기에는 사실 예향에서도 한번은 발생할 수 있는 주재로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대하여 다른 입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향도 복음과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06/02.ⓒ 사랑 그리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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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정낙원


 


드디어 복음으로 인하여 건축자들이 버림 당한 돌과 연합한 길로 들어섰군요.


십자가를 증거하면 반드시 닥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 피만 남기고자 하는 사람과 예수도 귀하지만 예수 믿어서 착하게 산 자신도 귀하게 여겨 달라고 하는 자들의 싸움입니다.  


내 몸에 예수님이 일하신 흔적만 남기고자 하는 사람과 내 몸에 예수 믿어서 자기 흔적도 남기고 싶어하는 자의 차이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면 난 율법 아래서 죽은 자인데, 십자가 밖에서 바라보면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말씀 지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손무성목사와 이근호 목사의 차이는 손 목사는 십자가 밖에서 성경을 보니 자기 행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고, 이 목사는 십자가 안에서 성경을 보니 모든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으로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은 빛과 어둠처럼 전혀 달라서 합일점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과 싸우려고 하지 마세요.  


소경에게 어찌 하늘에 떠 있는 해를 설명 하겠습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소경으로서 알고 있는 해라는 이미지가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알고 있는 해를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그 내어 놓는 해는 소경으로 알고 있는 해이지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 안에서 본 십자가와 아담 안에서 본 십자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이해 시킬 수도 없습니다.


격동하지도 마시고 마음 상해 하지도 마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버려짐과 핍박이 옵션으로 담겨져 있답니다.  


예수님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셔서 신령한 집의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이제 그 신령한 집을 위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들도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어 버려짐을 당합니다.


비로서 예수와 한 형제라는 것이 드러나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님처럼 버려진 자들을 데리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라내는 일을 하셔서 산상보훈의 팔 복이 드디어 꽃이 피도록 하시고 계시네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과 한 형제된 것을 감축 드립니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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