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실체를 왜곡시킨다.(2013.3.3 모임)

언어는 실체를 왜곡시킨다.(2013.3.3 모임)

갓 난 아이의 뇌 속에는 어떤 언어 체계도 없다.


욕구만이 있다. 그 욕구가 울게 하고, 젖을 빠는 흉내(배냇짓)를 하게 한다.


그런데 욕구라는 것은 무엇이 모자란다,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결핍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핍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충족된 기억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차이이다. 결핍은 충족된 기억과의 충돌에서 튀어나오는 파편이다.


 


그렇다면, 갓 난 아이를 울게 만드는 결핍의 상대편, 즉 충족의 기억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즉 세상에 낳아짐을 당하기 전의 상태일 것이다. 엄마와 하나 됨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없음]이다. 그런데 나의 없음이 [충족의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것이 충족이었다는 기억은 엄마와의 분리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즉, [나의 있음]으로부터 충족은 기억으로서만 재생될 뿐이며, 나의 새로운 있음(태어남)의 충격은 곧 [엄마 없음]이라는 결핍을 생산한다. 결국 나의 있음이 결핍의 출발이다. 나의 있음은 엄마 없음을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의 前提이다. 그것은 울음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과연 울음이 엄마를 호출하는 언어일까? 의도된 체계일까? 아이의 뇌 속에는 그 어떤 언어 체계도 없지 않은가. 그 어떤 문법도 없지 않은가. 운다고 모든 엄마가 다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단지 울었기 때문에 죽는 아이도 있지 않은가. 아이가 운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낮잠을 자거나, 외출한 엄마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울음은 그냥 인간을 배제시킨 사건일 뿐이다. 울음은 아이가 죽든지 살든지 고려하지 않고 터져 나온다. 그 울음은 아기의 유불리를 전혀 배려해 주지 않는다. 여기서 결핍에 반응하는 욕구는 인간과 별개의 인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욕구는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고 있는 별개의 생명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별개의 생명체를 인간의 언어체계로 포획하는 다른 개별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 언어 체계에 의해 조작된 엄마 혹은 그 누군가가 아기 옆에 있다. 그 누군가가 없다면 결핍은 아기를 살해한다.


 


울음과 배냇짓을 언어,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은 엄마 쪽이다. 엄마는 그의 엄마로부터 갓 난 아이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 내야 하는 지를 배운다. 먹이고, 치워주고, 씻기고, 재운다. 이런 반복된 시간을 통하여 울음은 여전히 아기와는 별개의 생명체(사건)이지만, 언어 체계를 이용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필연에 도착한다.


 


몸은 주인인 욕구의 지시에 따라 충족되는 방향으로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인간이 배우는 최초의 언어이다. 언어를 통해서 몸은 자란다. 내가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커짐으로 결핍이 소멸되는가? 아니다. 성장은 다른 결핍의 생산을 위한 준비기간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있음이 결핍의 출발이었다. 그러한 내가 더 커진 것이다. 나의 개별성의 부피가 더 커졌다. 따라서 결핍도 점점 커진다. 언제까지? 나의 없음까지. 나의 없음이라는 완벽한 충족의 기억까지.


 


허나 욕구는 물질인 몸을 숙주로 삼는 탓에 물리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욕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질서적 체계를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하지만, 언어는 이미 공고한 질서 체계. 커져가는 무질서(엔트로피)가 정결한 언어체계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언어가 찢어지고 녹아 뭉그러지고 변형되어 결국 욕구는 각자 나름의 언어를 창조하게 된다.


 


언어는 더 이상 실체의 반영이 아니라, 개별 욕구의 창조물이며, 실체라는 온전한 객체는 욕구라는 사건의 먹잇감이다. 욕구에게 씹히고 소화되어 결국 배설된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그토록 목말라하는 疏通의 실체이다. 실체의 찌꺼기들을 문법이라는 이름으로 잘 나열한다 하여도 본질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본질의 똥들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잘 치장해도 마음이 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족, 친구, 동창 등과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내 혀 같은 말로 칭찬과 긍정의 메시지를 들어도, 아무리 좋은 고전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아도 마음 한 구석, 풀리지 않는 매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욕구는 결국, 나의 없음이라는 충족을 향해서 달려가는 무질서의 향연이다. 그 무질서의 향연을 언어의 그릇에 담아두는 것은 애시당초 거짓말이었다.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속이기 위한 기만책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속여야 한 것일까? 속임으로써 그토록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언제든, 단 한 번도 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주인은 죄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아니라, 죄의 종으로서만 존재했다는 본질이다.


 


성경이 독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고 그 육신이 죽어 나의 주인이었던 죄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난 사건을 문자라는 속임수 안에 생경하게 밀봉시킨 것이다. 이로써 이를 해석하고자 하는 모든 거짓말을 거짓말로 탄로 나게 만든다. 성경은 해석당하는 문자가 아니다. 나의 있음이 투영되는 무질서의 광기를 침묵케 한다. 그 침묵은 오로지 죽음 뿐이다. 성경은 욕구의 종착점인 나의 없음(죽음)을 선물하는 살인자로 등장한다. 성도는 그 살인자를 은혜라고 중얼거리면서 소중하게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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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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