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을 본다. 무척 정의롭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정의를 보고 싶어 한다. 기성세대에다 대고 외치고, 동연배들에게 외친다. “사람은 정의로울 때만 사람이다”고. 그래서 본인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충분히 정의로울 여지가 남아 있는데 미리 죄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온종일 정의로움에만 정신 팔려있으니 설마 그것이 죄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다.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들이 교회에도 넘쳐난다. 예수 믿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우기는 자들이다. 목사된 것도 정의로운 일이고 장로된 것도 정의로운 일이라고 우긴다. 본인이 죄인인 것을 믿고 있기에 이것도 당연히 정의로운 일이라고 우긴다. ‘예수 믿는 것도 죄다’고 한다면 그들은 기겁을 한다. 그것마저 죄라면 정의로운 것이 전혀 남지 않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그리 정의에 목말라하는가? 이들의 존재에는 ‘죽음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본인 속에서 죽음이 안 들어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당연히 허구다. 하지만 이들이 체험하고 싶어 하는 자아상에는 죽음을 배제한 자아상이다. 세상 체험, 교회 체험을 통해서 죽음과 무관한 몸이라고 자부하고 싶어 한다.
젊은이들은 세월이 가면 중년이 되고 늙은이가 된다. 그들이 사회에서 체험하고 사회에서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은 죽음만이 진실임을 느끼게 한다. 희망도 소용없고 낭만도 지루하고 추억도 식상하다. 살고자 하는 인간은 꾸준히 자신을 속여야 한다. 죽음 요소가 자기 안에 없는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다. 살고자 하는 자들이 교회에 모여 있으면 설교자는 예배 시간마다 교인들을 속이게 된다. 교인들도 화답한다. “제발 우리를 속여더라도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세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도 역겹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죽음에 접촉하는 방식’이다. 개인적인 사고에만 국한하는 교통사고나 불치병 경험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모든 이들은 저주받아 마땅하냐에 관한 체험에 접촉시키신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접촉시킨다. 그것도 호명된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로마서 8: 30)
존재 보다 죽음이 우선이었다. 선악과 사건 뒤에 태어난 인간들은 이점을 모른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 사실을 되풀이해서 각인시키신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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