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이근호 목사, '사울과 압살롬의 세계'ㅡ
모든 인간은 참말을 해도 거짓말이요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이 된다.
참말과 거짓말이 인간들 수준에서 구분되지 않을 뿐더러 구분할 자격도 없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나도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라고 다툴 것이 아니라 '나는 다윗의 언약을 믿는다' 라고 말해야 정상이란다.
그 말은 곧,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라는 뜻이다.
그런가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그래도 나는 착해, 왜냐하면, 나는 이 사실을 아니까.라는 말도 옳지 않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거짓말하는 사람인데 야곱이 구원받고 다윗이 구원받고 우리가 구원받는다.라고
고백해야 옳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선택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면 하나님의 선택이 곧 유일하게 의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시편51편에 보면 '모친의 죄 중에 내가 태어났다'이런 형편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상한 심령을 원한다. 그런데 인간이 무슨 재주로 자신을 상한 심령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겠는가.
심령 속에는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는데 머리 염색 잘 나왔다고 기뻐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정신병자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왜냐면 사람의 시선만 신경쓰고 예수님의 따가운 시선은 전혀 못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ㅡ인간의 능력으로 가 닿을 수 없는 경계선 ㅡ
하물며 저자는 명품 쇼핑에 재미를 들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영성훈련을 하고, 큐티를 하는 것은
자아의 품질을 고급화시키기 위해 안달난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은혜와 긍휼은 오직 십자가 사건에서 나오고 그 십자가에 달려야 할 자들의 공통점은 예외없이 '상한 심령'이란다.
'상한 심령'과 은혜가 만날 때 비로소 은혜가 폭발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종교라성의 비밀은 '나를 절대화시키기 위한 시도'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언약에 관한 생각 자체'가 거짓이라고 하신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언약의 참 내용을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이고 거짓된 인간이다. 그렇다고해서 거짓되지 않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왜냐면 인간의 노력으로 본래의 내용과 일치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우리 인간은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거짓된 존재로 나타나야만 한다.
하나님의 죄 용서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죄를 용서해주신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나타난 말씀이요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한 것도
예수님의 의의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할례란, 십자가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해부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이 다 쏟아져 나온다. 하나님도 그 사건 안에서 나온다.
물론 성도라는 것도 십자가 안에서 새롭게 생산된 개념이다.
ㅡ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든 수첩에 적힌 명단처럼 ㅡ
예레미야애가1:14절에 보면 '내 죄악의 멍애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라고 되어 있고 2장1절에는 드디어 '시온'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심지어 '처녀 시온'으로 묘사된다.
시온이란 하나님이 기거하시는 거처라고 했다. 그 시온이 불타버린다.
ㅡ스스로 불태운 하나님의 거처! ㅡ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거처를 자신이 파괴하고 말았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통해서 낯설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세계가 역사 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자를 버림으로써 비로소 하나님다운 일을 하신 것이다.
그때, 버림받아야 할 자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가 된다.
이 선택 행위 안에 십자가 죽음 사건이 내장되어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사건이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리시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애매한 고난과 징벌을 받는다.
예레미야나 다윗은 '시온'이라는 공간에 합류되었다는 이유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교회가 이런 운명에 가담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에게 묻게 된다.
'주여, 저로 하여금 왜 이렇게 힘들게 살도록 합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이 고린도후서 4장7-10절에 나온다.
내 안에서 매일 나를 죽이지만 나는 그 죽여주시는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삶을 살고 있음이 확인된다.
우리를 마지막 때에 쓰레기처럼 여기시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강의 위험과
마주치게 하는 삶.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다.
시온이라는 하나님의 거처에 초청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의 삶이다.
그 좁은 길이 생명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 반대의 길은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다.
시편 자체가 주님의 그림자다.
예수님과 더불어 시온을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애매하고 낯선 고난 가운데서 찬양할 수가 있다.
시편은 삶의 현실에서 도피하는 지혜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 더러운 세상의 본질을 있는 대로 다 받아내야 하는 성도의 삶을 현실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박아 두시고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는 능력의 말씀이다.
근원적인 구원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상황은 이 세상에서 시온에 합류된 자들이
주님과 함께 당해야만 하는 운명이다.
세상 종교인들 눈에는 다윗이란 그저 지명 수배자일 뿐이다.
ㅡ예수님이 이땅에서 지명수배자였던 것처럼 ㅡ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 다윗의 입에서 나오는 현실관을 보자.
사무엘하 15장에서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게 된다.
다윗을 쳐다보는 백성의 마음을 회유하여서 자기에게 돌려놓는다.
ㅡ현대 종교 지도자들이 눈 먼 종교에 빠진 인간들을 회유하듯이 ㅡ
따라서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 강제적이 아니라 유혹만 해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ㅡ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자의 현상?ㅡ
다윗 혈통의 나누어짐은 인간의 혈통을 통해서 상호 다른 성격의 두 노선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해준다.
ㅡ두 노선의 시초는 선악과에서부터 시작됐다.ㅡ
이스라엘 나라에 이로써 왕이 둘이 되고 말았다.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진다.
ㅡ왕이 되겠다는 자나 왕을 삼고자 하는 자의 두 노선 ㅡ
만약에 압살롬이 뜨지 않았다면 자기네들 입장은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이라고 우기면서
다윗 왕을 추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자신들의 마음이 이단적이란 사실을 알길이 없었을 텐데 마침 압살롬이 등장함으로써
백성이 자신들의 솔직한 심성울 드러내는 계기가 된 것이다.
ㅡ하나님의 놀라운 둘추심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인간의 생각 들추기다.ㅡ
그러니까 다윗의 자비심은 세속적인 인간들의 폭력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 예가 창세기4장에서의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다.
가인은 영적 소외를 폭력과 살인으로 되갚음으로써 현실감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 현실이란, 폭력과 살인이라는 바탕 위에 구성되는 현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은 이 땅에 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순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동생 아벨의 죽음이다.
이로써 이 땅이 폭력과 살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신바 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식으로 그 정체가 드러난다.
압살롬의 행세가 그러하다. ㅡ잠재된 죄의 열매다. ㅡ
말하자면 자신의 여동생이 이복 오빠에게 겁탈을 당하자 이복형 암논을 죽임으로써
압살롬의 폭력적 성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것은 과연 죄인가, 정의인가? 다윗의 눈치를 살핀다.
창세기 가인과 비교해보자.
하나님은 가인을 찾으시면서 가인이 죄를 아는지 아니면 스스로 의롭다 하는지를 보신다.
'하나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피해자를 발생시켜 놓고 그 피해자와 오직 자기 자신만 지키면 죄 없다고 여기는 자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다가오신다.
ㅡ이렇게해서 세상의 모든 죄와 의의 관계, 성경에 나타난 죄의 드러남이 낱낱이 파헤쳐진다.ㅡ
다윗은 죄인으로서 왕으로 지냈고
자기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서 자기 자리가 마련되었음을 안다.
하지만 압살롬의 왕의 조건은 '회개 없이' 사람들이 가진 힘으로 왕이 되려는 것이다.
압살롬과 백성은 혜택과 은혜는 좋아하되 회개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방어에 충실하다.
ㅡ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인 것을 모른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ㅡ
압살롬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구실 하에 헤브론에서 자신의 왕 됨을 선언한다.
저자는 여기서 마태복음 6장26절을 인용하며 '권력이란 인간에게 필요치 않다.' 라고 말한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키워주시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모습이 하나님이 주신 긍휼과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이다.
저자의 신앙고백이다.
율법의 완성은 처벌이 아니라 상한 심령에 대한 용서에 있음을 다윗은 하나님을 통해서 알았다.
ㅡ하나님이 알게 하셨다.ㅡ
자신이 하나님의 죄인임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다윗언약의 정신을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울 수 있는 위인을 찾았고 다윗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 압살롬을 차기 왕으로 옹립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언저리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행태들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윗 언약이란 진정 하나님의 다스림이 뭔가를 다윗의 일생을 매개로 해서 드러내 주는 언약이다. 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그 강조에 아멘으로 찬성한다.
다윗 언약이 이 역사 위를 긁고 지나가는 흔적이다.
ㅡ하나님의 역사다.ㅡ
그리고 저자는 마태복음 9장27절을 인용한다.
'나는 개 같은 이방인에게는 안 간다'
'주여, 옮소이다마는 개들도 그 주인의 상 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ㅡ'개'라는 단어는 인간에게는 혐오의 대상으로 다가온다.ㅡ
*나는 한 떄 교회 안 다니는 남편을 향해,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나의 남편이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밥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비 신앙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죄의 본질'을 깨닫고 난 뒤에는
나야말로 주인이 주시는 남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뭘 해도 쓸모없는 개다 라는 사실을 즐겁고 반갑고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나에게 저자가 말한다. "그렇다면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개 같은 존재에게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한다.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이미 의미 없음이 확정되어버렸기 때문이다.(갈 6:14)(고전1:31)
내가 죄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나를 관리하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절대 공감한다.
이미 그 내막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등장으로 밝혀져버렸다.
ㅡ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그것이다. ㅡ
ㅡ십자가 처형은 인간의 죄의 들추심이다.ㅡ
"죄가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65:3)
ㅡ누가 누구를 향해 정죄하고 송사하리요.ㅡ
아!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가 다윗의 고난 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그동안 우리를 점령헀던 점령군들이 이제는 다윗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공격함으로써 그 정체를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점령군들과 단짝이 되었고 호흡을 맞추었으며 정을 주고받았으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왔었는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등장으로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취미가 성격이나 취향이 맞아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주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시41:9)
영적 구조는 편하게 내 위주로 살 떄는 드러나지 않는다.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으니 다윗 언약 안에 놓인 성도들에게 땅에 대한 기대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땅이 시온성이 포함된다면 그 시온성마저 불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나님은 그 시온성마저 포기하기를 학수고대 하신다.
시온성이 불탄다는 것은 인간들이 기대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모든 종교단체가 불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끌어당기려는 자들은 여전히 자기 사랑과 애착을 포기 못 했기에
조작된 신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예수라는 이름의 이방신, 여호와라는 이름의 이방신, 성령이라는 이방신,
삼위일체라는 이방신은,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하셨던 그 신들이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여호와를 믿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길 때에는 만사가 형통했는데
여호와의 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만사가 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십자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낯선 축복에 가깝다는 것이다.
내가 믿고 싶었던 데로 믿었던 신은 '만사형통 신'이었다.
저자는 독자를 향해 바꾸라고 한다.
바꿔라! 하나님을 바꾸기 전에 너 자신을 바꿔라.
그때부터 우리는 주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 증거가 솔솔 우리 생을 통해서 흘러나오게 된다고 한다.
아멘.
ㅡ시편 속의 그리스도 ㅡ'사울과 압살롬의 세계'요약 (녹매교회 오후 2시 성경공부)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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