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가서 연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5편/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 많은 주석가들은 본 시를 가리켜 "성소에 들어갈 때 그 자격을 제사장에게 묻고, 제사장은 그 자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은 양식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예배자들이 제사장에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묻는다(1절). 제사장은 그 자격 조건에 대하여 응답한다(2-5上절). 제사장의 축복으로 끝마친다(5下절). 1. 예배자의 도덕성 강조 이 시의 특징 중 하나가 성소에 들어가는 예배자의 조건 중 도덕적 자격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2-5上절). 이 자격이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나타난다고 하여서 일부 주석가들은 십계명과 관련시키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추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직하게 행함, 공의를 일삼음, 진실을 말함, 참소치 아니함(거짓이 없음), 악행하지 않음, 비방하지 않음, 망령된 자를 멸시함,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신앙인, 고리대금을 받지 않음, 뇌물을 받지 않음. 이러한 내용들은 일반적인 도덕성을 열거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절대적 도덕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2. 예배자가 예배드리기 전에 자신을 살핌(1절; 참조. 고전 12:28)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이 때 예배자는 주님의 십자가 달리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개인적인 필요나 은혜에 대하여 서원하거나 감사하곤 한다. 오늘 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배드리기 전에 자신을 살핀 후,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배자가 주변의 이웃에게 죄를 짓거나, 이웃을 실족케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고전 8:12). 그러므로 예배드리기 전 형제나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마 5:23-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예배가 깨끗하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롬 12:2), 예배드리기 전에 자신을 살펴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1절은 예배자가 자신을 살피는 태도로 설명할 수 있다. 3. 예배자의 인격(2절) 예배자는 인격적으로 정직해야 하며, 항상 공의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직과 공의의 기본은 진실이다. 이것은 빛의 자녀로서 당연한 태도이며(엡 5:8),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는 모습이다. 이러한 예배자의 인격은 곧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고전 11:1). 그리스도인들의 선함은 때때로 고난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을 통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벧전 2:20).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정직, 공의 그리고 진실만을 말할 때 주위의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되며, 빛을 드러냄으로써(빌 2:15; 참조. 딛 2:7) 복음전도에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입을 통하여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의하여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자의 인격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개인적이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공적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4. 예배자의 행동(3-5上절) 예배자의 인격은 거짓이 없어야 하며, 벗에게 악행하지 말아야 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는 것이며(요일 1:21), 혀의 거짓은 악이요 사람을 죽이는 독과 같은 것이다(약 4:8). 악행은 무지한 것으로서(시 14:4),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일삼았던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과 회개치 아니함인 것이다(고후 12:21). 이러한 행위는 육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들이다(참조. 갈 5:17-21). 그리고 비방한다는 것은 그 마음에 온유나 관용이 없는 것을 말한다(참조. 고후 10:1). 이러한 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고 사랑으로 용납하였듯이 이웃에 대한 관용과 용서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다. 또한 남을 비방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랑할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것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랑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뿐이다(고후 10:15-18절). 그는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는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자이다(참조. 롬 2:6). 그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남의 재산을 탐하지 않는 자이다. 남에게 고리(高利)로 돈을 빌려주어 부당하게 이익을 구하거나, 뇌물을 받아 무죄한 자를 모함하는 일에 동참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묵 상 성서는 개인의 신앙 지침서 일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회성을 강조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성서는 개개인의 삶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이웃과의 화목과 덕, 그리고 나눔을 말하기도 한다. 나만 주님 앞에서 바로 서있으면 된다는 신앙은 주님의 거룩한 사업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이다. 이웃과 함께 하는 신앙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시작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상에서 역동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16편/ 主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표제어: 믹담(참조. 56, 57, 58, 60편) 탈무드에서는 믹담이 '기록된 문서'를 가리키며,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풍자시'(epigrm)를 지칭하며, 아킬라(Aquila)와 시마커스(Symmachus)는 다윗에 대한 별칭으로서 '막'(겸손한)과 '탐'(완전한)이 결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모빙켈(Mowinkel)은 아카드語 카타무(katamu)가 '덮다'(대속하다)라는 의미가 있음을 착안하여 믹담을 '대속하다'라는 뜻과 관련 있다고 보고 있다. 만약 믹담의 뜻이 '대속하다'라는 말과 관련 있다면, 믹담이 표제어로 등장하는 시들은 '화해의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믹담의 어원과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믹담에서 두 가지 특징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믹담이 등장하는 시편 본문의 절수(節數)가 11절과 18절로 일정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시들이 모두 다윗과 함께 배치되어 있으며 역사적 배경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본 시는 '확신의 시'로서 볼 수 있지만, 고대의 본문이 매우 파손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 시의 구조를 정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다만 전체의 내용으로 미루어, 시인이 어떠한 위기로부터 구원을 받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본 시에 담겨져 있다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을 것 같다. 특별히 2下의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은 시인 외에 제 삼자의 고백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시는 시인의 고백 외에도 제 삼의 인물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나타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제 삼의 인물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 다른 神에게 예물을 드리고(4上), 피의 전제(奠祭)를 드리곤 하였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과 제 삼의 인물과의 신앙을 대조시키면서 여호와 신앙이 자신의 유일한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 미루어 본 시의 구조를 서론(1절), 제 삼자의 신앙(2-4上), 그리고 시인의 확신(4下-11)으로 나눌 수 있다(대부분의 학자들은 제 삼의 인물로 보지 않고 시인의 일관된 고백으로 보고 있다. 가령 A. Weiser.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나와 같다. 가령. P. C. Craigie). 1. 主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2下절)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라고 경배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방신들에게 제사지내고 섬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혼합주의'라고 한다. 그들은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하였고,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가나안의 이방신에게 빠져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이 하나님에 의한 복임을 알면서도, 신앙적으로 혼합주의에 빠졌던 것이다(참조. 히 3:8-11).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이 우리의 복인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속화되어서 요행이나 운수에 민감한 그리스도인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신문란에 '오늘의 운수'를 즐겨 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점을 보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들도 있다.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복권을 산다든지 투기성 이익 등에 관심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자신도 모르게 경감시키는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이러한 세속적이고 혼합주의적 신앙 태도에 대하여 시인은 자신의 신앙과 대조시키고 있다. 2.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5上) 여기서 '산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고랄'은 분깃(또는 몫 lot)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이 단어는 '투표'(제비)라는 뜻도 갖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 제비뽑기를 통하여 각 지파가 땅을 분배받은 것을 알 수 있다(수 14-18, 21장). 이런 점에서 '고랄'은 추상적인 의미로서 땅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랄'이 '상속,' '소유' 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으로 미루어, 이 단어는 운(運)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될 때도 있다(참조. 사 17:14; 34:17; 57:6; 렘 13:25). 본 시에서의 '산업'(고랄)이라는 표현은 곧 시인의 '運'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단 12:3절에 의하면. 이 단어가 종말에 이르러 부활한 자의 몫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내세적 복(福)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잔'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코스'는 단순한 잔(盞)을 지칭하지만, 추상적인 의미에서 '저주의 잔'(참조. 렘 25:15; 사 51:17, 22), '고난의 잔'(마 26:39), '구원의 잔'(시 116:13)으로 사용되었다. 본 시에서는 이 용어가 '구원의 잔'을 의미한다. 두 용어를 살펴본 결과, 시인은 혼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여호와가 단순히 자신에게 복을 주는 분"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자신의 운명이며, 구원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시인의 적극적인 신앙은 곧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는 고백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6下). 묵 상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 시를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사이비 그리스도인의 유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매우 소극적인 신앙 태도인 것이다. 본문의 시인처럼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요동치 아니함으로(8절), 기쁨과 영광을 즐거워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9절). 시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삶을 살고자 하며, 이를 기뻐하며 영원한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이 본 시의 교훈이다(11절). 17편/ 정직한 자의 탄원 본 시의 서두에서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정직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전체 내용으로 볼 때 시인은 원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이다(9-13절). 이런 점에서 시인의 고통은 그의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본문의 전체 내용에서 시인의 정직함은 도덕적 요소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정직한 자의 탄원(1下-2절). 시인은 자신의 거짓되지 않는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시인은 원수들로부터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자이다. 그는 주변 사람으로부터 어떤 이유로 해서 "거짓된 자"로 몰린 것 같다.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과 거짓되지 않음을 직설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공평한 판단을 기대하는 자이다. 이러한 기대감은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2절)라는 간구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검증하고 시험하셨음을 확신하고 있다. 특별히 3절에서 밤에 하나님의 권고와 감찰은 시인이 밤 사이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탄원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슬퍼하고 고민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본 시의 마지막 절인 15절에서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에서 알 수 있다. 매일 밤마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탄원한 것 같다. 이제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강조하면서 자신의 고난이 극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권고하시며 감찰하셨으나 (나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3절). 시인은 더 이상 자신의 고난이 부당하다는 사실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밤새도록 반성하고 묵상해 보아도 자신이 흠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에 시인은 작정하고('결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자신은 정직했고 앞으로도 (물론) 범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2. 정직한 자의 입(4절). 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인의 입," "원수의 입," 그리고 "하나님의 입"이 대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특히 개인 탄원시)에서 등장하고 있는 입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신체적 기관을 뜻하는 것(참조. 겔 3:3)만이 아니라, 말(言)과 관련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원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악한 것으로서, 그 말들이 시인을 핍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원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악하다는 사실은 다음 성구가 잘 보여주고 있다(참조. 10:7; 59:7). 렘 9:3에 의하면, 거짓말하는 혀는 화살과 같다고 했다. 구약성서는 혀를 잘못 사용한 예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별히 개인 탄원시에서는 원수의 혀를 '신실함이 없는 혀'(5:9), '살인하는 혀'(52:2), '궤사한 혀'(120:3), '독이 있는 혀' (140:3)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원수는 악독하게 말할 뿐만 아니라, 달변가(達辯家)로서 언변에 능하지 못한 시인을(참조. 38:14) 괴롭히고 있다. 본 시에서 원수의 입(口)은 세상적인 행사를 논하며(4절), 교만하지만(10절), 시인의 입은 거짓이 없는 입술임을 말하고 있다(1절). 결과적으로 시인이 정직하고 시인의 입술이 거짓 없고 순결한 이유는, 그가 주의 입술의 말씀을 쫓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은 당연히 정직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정직한 자신이 원수의 압제로부터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13절) 하나님의 복까지 받을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14-15절). 18편/ 지도자의 덕목 본 시의 내용은 시인인 왕이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감사하여 부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본 시를 가리켜 "왕의 감사시"라고 부르고 있다(참조. 16-17절). 일부 학자는 본 시가 두 편의 시(1-30절과 32-50절)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나(포러), 그 근거가 충분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본 시가 여러 구약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아주 고대에 저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 시가 구약성서의 여러 사상을 담고있다는 증거는 다음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가령, 20-21절은 신명기적 사상을 강하게 담고 있으며(신명기의 주요 사상-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 31절의 내용은 사 43:11; 44:6, 8; 45:21절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 그리고 본 시의 전체 내용이 삼하 22장과 비교된다는 점이다. 또한 본 시가 고대에 저작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29절과 33절에서 "왕이 걸어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고대의 전쟁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삼하 1:23; 2:18). 본 시에서 시인은 왕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왕인 시인은 자신을 자비한 자, 완전한 자, 그리고 깨끗한 자와 동일시함으로써(25-26절), 여호와의 구원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확신하고 있는 자이다. 여기서 이 세 가지 표현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1. 자비한 자 히브리어로 이 말은 "하씨드"라고 하는데, 그 뜻은 "거룩한 자"이다. 이 말은 구약성서에서 32회 사용되며 그 중 시편에서 25회 나타나고 있다. 이 단어의 어근은 "헤세드"이며, 그 의미는 "친절," "사랑," "자비"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부 구약학자들은 이 단어에는 "계약"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참조.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계약." 창 21:23), 문자적인 의미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참조. 삼하 1:26). 특별히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민 14:18-19; 느 9:17; 시 86:15; 103:8; 145:8-10). 8:25절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비한 자"라는 말은 고결한 성품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룻이 베푼 사랑(룻 3:10), 라합의 친절한 응대(수 2:12), 요나단 죽음을 충심으로 슬퍼한 다윗의 마음(삼하 9:1, 3, 7) 등에서 "헤쎄드"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 단어는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25절에서 시인이 스스로를 "자비한 자"라고 칭한 것은, 자신이 이웃과 공동체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지닌 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이 왕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백성에 대한 시인의 사랑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비롯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완전한 자 히브리어로 이 말은 "타밈"이라고 하는데, 그 어근은 타맘이다. 타맘은 "완전하다," "완성하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종교적, 도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용어가 종교적으로 사용될 때, '온전한 희생제물'(레 22:21-22), '완전하신 하나님'(신 32:4; 삼하 22:31), '여호와 앞에서 인간의 온전한 종교적 행위'(신 18:13)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타맘이 도덕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암 5:10의 "이스라엘이 정직히(타맘) 말하는 자를 미워한다"에 나타난 바와 같이 도덕적으로 '정직'한 경우에 사용된다. 본 시에서 시인이 "완전한 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자임을 말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시인이 자신의 여호와에 대한 사랑(1절),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한 사실에서(20절) 시인의 종교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3. 깨끗한 자 히브리어로 이 말은 "바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근은 "바라르"이다. "바라르"는 "정화시키다," "순화시키다," "깨끗이 하거나 밝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고대 근동어의 유사성을 들어 이 용어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충실하다," "헌신적이다," "깨끗하다"(아라비아語), "순수하다," "깨끗하다"(아카디아語와 우가리트語)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이 말은 "없애버리다"("더러운 것을 없애버림으로써 깨끗이 하다"라는 의미로. 겔 20:38), "정결케하다"(단 11:35; 12:10), "순수한 언어"(습 3:9), "선택된 것"(사람이나 양들이 선택된 것을 의미. 대상 7:40; 9:22; 16:41) 등을 뜻하고 있다. 특별히 본 시에서 이 용어는 수동형(니팔동사)으로 사용되고 있는데("나바르." 참조. 삼하 22:27), 이것을 직역하면 "깨끗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깨끗함을 드러내신다"라고 할 수 있다. 본 시에서 시인이 스스로 "깨끗한 자"임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순수함(purity)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선택(구원)이 보증되었음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묵 상 지금까지 세 용어를 살펴보았다. 이 용어들을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왕의 덕목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한 자"에서 지도자의 국민을 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오늘 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한다고 하는 정치가들이 항상 기득권 옹호를 위하여 정쟁만을 일삼는 것은 이들의 마음에 국민을 위한 자비가 상실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정권창출에만 혈안이 되어 기득권 고수나 쟁취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다. 또한 "완전한 자"에서 지도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지도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으로 온전한 삶을 지향할 때, 그 민족과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와 은혜를 받는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정치가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렵고 갈수록 삶이 힘든 이 때에 지도자들의 신앙적 온전함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깨끗한 자"에서 오늘 날 지도자의 도덕적 덕목이 더욱 절실한 때임을 느끼게 한다. 현재 여당과 야당이 과거 정치자금 사용 때문에 서로 공방을 펼치고 있는 모습에서 지도자들의 도덕적 깨끗함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경제 위기는 단순히 경제정책의 오도나 지엽적인 제(諸) 문제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국가 구성원인 국민과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큰 문제일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신앙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이웃이나 공동체를 위하여 진실하게 삶을 영위할 것이고 불로소득이나 일확천금의 요행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국가의 도덕적 위기는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민이 공범에서 비롯된 위기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족(自足)하는 마음과 자기 비움(空)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이 땅에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과 기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19편/ 토라(율법)의 명칭, 정체, 역할 1. 토라의 중심사상 토라의 중심 사상은 여호와께서 유일한 하나님이며, 여호와가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이스라엘은 여호와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며, 여호와의 권능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인도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들은 이스라엘의 여호와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며 구약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토라를 단순히 유대인의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개신교의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토라를 구약시대의 것으로 국한시키고, 그것을 신약의 복음과 은혜시대를 위한 과거의 한 예표로 봄으로써 그 가치를 신약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신학자 크루제만은 벨하우젠이 토라를 유대인의 것으로 고착화시킴으로써 개신교가 율법을 이해하는데 악영향을 미쳤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말은 벨하우젠을 비롯한 역사 비평적 입장에서 있는 학자들이 결과적으로 교회와 신학이 토라를 비중 있게 다루고자 하는 노력을 막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라가 기독교 정경의 일부분이라는 사실과 복음의 한 요소라는 점에서 소홀히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신약의 중심 사상이라 말할 수 있는 '이웃 사랑'(마 5:43)이 레 19:18에서 인용되었으며, 레 19:34에서는 이웃뿐만 아니라 타국인들까지도 자국민처럼 사랑할 것을 말함으로써 토라의 사상이 이미 신약의 중심과 만나고 있다. 2. 토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토라를 단순히 신학적, 종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토라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학적, 종교적 내용뿐만 아니라 세속적 사회상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토라가 법률적 실체를 나타내기보다는 인간들 사이에 상호관계적 유대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고대로 올라갈수록 종교와 세속이 지금처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두 요소는 혼합된 상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적 전제 위에 세속적 사회상이 자리잡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종교와 세속간의 구분된 시각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상황을 한 측면으로(특별히 종교적 측면)만 살펴본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토라에 대한 세속적 상황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토라의 세속적 사회상과 시편에 나타난 세속적 내용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정경으로서의 토라와 시편이 단지 고대 과거의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현재 세속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시편에 나타난 토라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그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시편에서 토라의 특징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편과 119편이다. 이 두 편은 1편과 함께 토라-시편이라고 할만큼 토라의 사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중에서 19편은 토라의 명칭과 정체 그리고 역할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3. 토라의 명칭, 정체, 역할 대부분의 학자들은 19편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1-6절과 7-14절). 이와 같이 보는 이유는 내용으로 볼 때 1-6절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특별히 해에 대한 찬양을, 7-14절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神名이 하나님과 여호와로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전자는 상대적으로 긴 행의 문체로, 후자는 짧은 행의 문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하여 19편이 두 가지의 시가 하나로 편집되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본 시는 세 가지의 면에서 통일된 시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이 1-6절에서는 자연을 통하여 높임을 받는 조물주로서, 7-14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연뿐만 아니라 만물의 영장인 인간까지도 구속하시는(14절) 만유의 주이심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둘째, 해와 토라를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해 아래 (만물이) 숨을 수 없듯이(6절) 토라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허물을 감출 수 없다는 내용에서(12절)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셋째, 만물이 여호와의 계획에 의하여 움직이듯이(1절) 인간은 토라에 의해서만 참다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7-9절). 이러한 통일성에 비추어 볼 때 1-6절은 비유로서 시작되는 도입부로, 7-14절은 본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토라와 직접 관련된 7-9절의 내용에서 토라의 명칭과 정체, 그리고 역할이 명확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토라의 명칭 토라는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그리고 '여호와의 규례'로도 불러진다. 토라의 정체 토라는 완전하며, 확실하며, 정직하며, 순결하며, 정결하여 영원하며, 확실하여 다 의로운 것이다. 토라의 역할 토라는 인간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밝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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