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가서 연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9편/ 가난한 자는 실망치 아니함 표제어: 뭇랍벤 이 단어는 9편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개역성서에서는 '뭇랍벤'으로 표기되었지만, 히브리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랍벤과 알무트로 분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두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아들의 죽음'이다. 이런 점에서 뭇랍벤을 일종의 애곡(만가)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뭇랍벤'은 한 단어로서 소녀나 젊은 레위인들이 '목청을 높이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1. 9편과 10편은 단일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본 시는 원래 10편과 함께 단일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9편과 10편이 연속된 답관체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답관체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를 순서대로 각 연에 미리 써넣고 그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로서 시를 지은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詩에서 답관체는 한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알파벳 순서로 시작되는 각 '행'이나 '연'의 길이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시편에서 답관체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은 9-10편(한편의 시로 봄), 25편, 34편, 37편, 11편, 112편, 119편 그리고 145편이다. 시인이 답관체 형식으로 작시(作詩)하였다는 것은 시인의 문학적 소양이 깊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몇몇 히브리어 사본들에는(칠십인역: 헬라어 구약성서, 불케이트: 라틴어 구약성서) 9편과 10편을 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칠십인역에서는 114편과 115편도 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셋째, 대다수 시편들이 표제어를 갖고 있는 반면에 10편은 표제어가 없다(1, 2, 33편도 표제어가 없다). 넷째, 두 시편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발견된다. 가령, "환난 때"(9:9; 10:1), "가난한 자"(9:12, 18; 10:2, 9, 17), "압제 당하는 자"(9:9; 10:18) 등이다. 본 시의 시인은 가난과 의(義)를 고수하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자이다. 여기서 가난은 경제적인 것이며, 의는 종교적인 것이다. 2.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관 시인은 의로운 자이다(4절).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변호해 주시고 심판하실 줄로 확신하고 있다(4절). 시인은 하나님의 온전한 심판이 자신에게는 구원을,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는 징벌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공의(公儀)와 정직으로 세상만민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8절). 시인은 자신이 의로움과 하나님의 절대의(絶對義)를 연관시킴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믿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의로움 때문에 핍박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는 압제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오,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9절). 3.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 시인은 원수 때문에, 의로움 때문에, 그리고 가난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13절). 특별히 시인은 가난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자였던 것 같다. 여기서 가난은 시인의 사회적 신분과 형편을 가름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던 사람들이다. 물질만능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 날도 가난한 자들이 더욱더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인은 그 가난 때문에 원수들의 질타를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자이다. 시인은 그러한 질타와 자신의 가난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사망의 문" 곧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13절). 원수들은 가난한 시인을 모함하는데 서슴지 않는 자들이다(16절). 가난하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가난은 스스로의 게으름이나 무능 때문에 비롯될 수도 있겠지만, 본 시에서 시인의 가난은 시인의 의로움과 사회의 구조적 악("원수들의 웅덩이-함정")에서 야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조적인 악에 편승하거나 사악한 자들과 결탁하여 이익을 취함으로써 당당해 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한 쪽에서는 거짓과 악으로 부(富)의 배를 채울 때, 다른 한쪽에서는 가난한 자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본 시의 시인의 부르짖음이 오늘 날에 가난한 자들의 탄식으로 이어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세상사람들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개의치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4. 가난한 자는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비록 지금은 가난 때문에 힘들고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탄식을 들으시고 공의로 판단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역할 하심을 믿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스스로 자위(自慰)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생(원수)들이 활개치지 못하게 일어나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19절). 여기서 "일어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원수를 쳐부순다는 소위 "거룩한 전쟁 사상"이 내포된 말이다. 시인은 악인이 잘 살고 형편이 좋다고 우쭐하지만 그저 인생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0절). 이 말씀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고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을 때 우리의 세상사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세상적으로 가난한 자이지만 하나님을 신앙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기대함으로써, 자신의 울부짖음이 미래의 희망으로 변하게 됨을 확신하고 있다. 묵 상 몇 년 전 생각도 하기 싫은 소위 IMF사태를 한국민들은 잘 기억하고 있다. 요즈음 몇몇 대기업들이 퇴출이니 법정관리이니 하면서 언론의 톱뉴스거리로 장식되고 있다. 대기업이 부도가 나면 그 하청업체의 줄줄이 연쇄부도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러한 파장은 전체 국민의 부담으로 남게 될 것이다. 과연 과거의 IMF사태와 같은 지경에 또 이르게 될지 여간 걱정이 아니다. 본 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한층 고조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종종 어떤 사항이나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마치 심판관처럼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나의 판단이나 결정이 하나님의 공의처럼 늘 바르게 행사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또는 교만에 의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들을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 그들을 고소했을 뿐 하나님에 의한 공정한 판단을 기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칭하면서 세속적인 재판이나 어떤 송사에 휘말리고 또는 그리스도인들끼리 세속의 재판에 뛰어들어 아전인수격으로 서로 잘했다고 하는 모습을 가끔 보면서, 본 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시인의 신앙에 머리 숙여질 뿐이다. 10편/ 고통과 해결 10편은 9편과 연속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앞의 9편의 "가난한 자는 실망치 않음"을 참조할 것). 10편은 하나님, 원수, 시인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 가지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본 시의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 하나님은 시인으로부터 멀리 서 계시며, 숨어 계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1절).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고통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도움을 간청하는 시인의 절규인 것이다. 우리가 심각한 고통을 당하거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을 토로할 때가 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린신것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때도 있다. 시인 역시 이러한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원수들의 사실적인 핍박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2. 원수 원수는 교만한 자로서 가련한 시인을 핍박하고 있다(2절). 그는 이익을 탐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배반하고(3절),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는 자이다(4, 11절). 그는 웅변이 능한 자로서(7절), 시인과 같은 무죄하고 외로운 자를 괴롭히고 있다(8절). 원수 때문에 시인은 함정에 빠져(9절), 넘어지고 있다(10절). 원수의 핍박으로 인하여 시인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빠진 자이다. 원수는 세상에 속한 자이다(18절).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적인 유익만을 위하여 살고, 세상적인 재물이나 권력으로 인하여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는 자이다(참조. 4-6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안중에도 없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인 삶을 위하여 죄를 범하는데 개의치 않는 자이다(7절). 3. 시인 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고립된 자, 무능한 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스스로 진술한 고백에서 알 수 있다. "가련한 자"(2, 9절), "무죄한 자"(8절), "외로운 자"(8, 10, 14절), "가난한 자"(12절), "고아"(14, 18절), "겸손한 자"(17절), "압제당하는 자"(18절). 시인은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그는, 위의 내용처럼, 세상적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더라도 원수와 함께 세속의 현장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경건한 자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고난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고난은 일시적일뿐 종국에는 영광으로 승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시인 역시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다만 현재의 고난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난 중에도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으며(14절),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과 감찰하심이 자신에게도 역사할 것을 확신하고 있는 자이다(14절). 묵 상 시인은 원수들의 사실적인 핍박에 대항하지 않았다(상대적인 약자로서 대항할 힘도 없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이 원수들에 의하여 야기되었지만, 그 해결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시며 해결자도 되시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신앙이 돋보인다. 우리는 세상적인 고통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통을 주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본 시를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1편/산으로 도망가라 1. 산으로 도망가라 시인은 마음이 바른 자(정직한 자. 2, 7절)로서 악인에 의하여 쫓기는 자이다. 그는 악인의 교활한 술책('어두운데서 활을 쏘려함.' 2절)을 피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대하여 단호히 거절하고 있다(1절). 주변 사람들은 시인에게 '산으로 도망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산은 속세와 구별을 상징한다. 산은 속세의 찌든 삶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안식처로 대변될 수도 있고, 단순히 피난처로서 적합한 곳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1절에서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라는 표현에서 산은 피난처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시 55:6-7에 의하면, 새는 곧 새로운 안식처 이동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주변 사람들의 세속적 권유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께 피난했음을 말하고 있다. 절대 도망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적인 지혜나 권고가 얼마나 거짓이며 허위의 피난처가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자이다(사 28:15) 2. 시인의 피난처 시인은 자신의 피난처가 여호와임을 말하면서, 여호와의 정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며, 그의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고 감찰하신다"(4절)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시인의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 보좌와 인생만사를 감찰하시는 여호와께 자신이 피했으니, 이 보다 더 완벽한 피난처가 어디 있느냐 하는 확신의 고백인 것이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피난처일 뿐만 아니라 선악을 판단하시며 그에 대한 응보를 인생들에게 내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3. 여호와의 응보 여호와께서는 시인을 보호해 주시뿐 만 아니라 시인을 괴롭히는 악인들에 대하여 분명히 보복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현재는 시인이 악인들에 의하여 궁지에 몰린 바 되어 있으나, 악인들이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이 소득이 되리라." 6절). 시인은 악인들의 최후를 '소돔과 고모라의 악인들의 최후'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4. 여호와를 뵙다 시인은 "정직한 자는 여호와의 얼굴을 뵙는다"(7절)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제의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구원을 재삼 확인하며 하나님의 현재성을 경험하는 것처럼 시인도 여호와의 현재성을 경험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적 정직함이 여호와의 현재성 곧 사실적인 구원을 경험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는 시인의 피난처이자 시인의 구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묵 상 우리는 간혹 궁지에 몰리거나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세상적인 대책이나 해결책을 모색하곤 한다. 더 나아가 위기 상황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세상 친치이 제안한 해결책에 귀가 솔깃할 때가 있다. 본문은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아뢰고 그 해결책을 찾을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구원이기 때문이다. 12편/ 궤변, 눌변, 하나님의 말씀 1. 인간의 궤변 시인은 경건한 자이며, 충실한 자로서 말(言)을 잘하는 이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이다(1절). 시인의 이웃은 거짓말과 아첨을 잘하는 자로서 이중 인격자들이다(2절).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변호에 능한 자들이며, 힘센 자에게 아첨하여 세상적인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언변(言辯)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조건이며, 출세하는데 충분조건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언변이 뛰어난 것에 대하여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다(4절). 그들은 땀을 흘려서(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이 아니라,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되게 하며,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시인의 눈에는 이들의 궤변이 불성실한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을 "충실한 자"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가증한 이웃들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이웃들은 불성실한 자들, 궤변의 입으로 먹고살며 출세하려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재판이나 토론에서도 지지 않을 만큼 언변에 능한 자들이다(4절의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2. 시인의 눌변(訥辯) 시인은 스스로를 가련한 자, 궁핍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5절). 궤변에 능한 이웃과는 달리 시인은 언변에 능숙하지 못한 자이다. 말을 잘 못하고, 붙임성도 없으니("아첨하지 못하니") 가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조건으로는 시인이 세상적으로 출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자신이 충실하고 경건함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1절). 이것은 시인이 세상적인 유익이나 출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종교적으로), 성실한 것이(도덕적으로)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부귀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자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물 없는 순은(純銀)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여 용광로에서 완벽하게 정제된("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된" 6절) 순은과 같다(6절). 여기서 '순결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타헤르(taher)인데, 이 말은 대개 구약성서의 제사문서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은 종교적(儀式的)인 것과 도덕적인 것에 많이 사용되었던 언어이다. 특별히 이 말은 은을 단련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말 3:3).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다는 것은 곧 시인과 같이 충실하고 경건한 자에게 그 의미가 다가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궤변에 능한 시인의 이웃들에게는 순결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이 자신처럼 신앙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충실한 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7절). 묵 상 세상적으로, 말을 잘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들은 출세할 기회가 많다. 그들은 시인과 같이 약한 사람들 앞에서는 우쭐거리며 군림하기를 즐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자기 보다 힘있는 자들 앞에서는 고개 숙이며 아첨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권세 있는 자들 앞에서 머리 숙이고 손을 비비는 예스맨이 많다. 그들은 불쌍한 자들이다. 자신의 비굴함을 가족들에게나 친지들 앞에서는 세속적인 이익으로 변명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말은 매끄러워서 청산유수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변보다는 그 충실함과 경건함을 보시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기 때문이다. 13편/ 병자의 시 이 시는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언어로 구성되었으며, 시인의 한탄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시이다. 1. 어느 때까지 개역성서에서는 모두 '어느 때까지'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마소라 본문에서는 이 말이 다음과 같이 (m h) 혹은 - (' dh-meh), (m th y) 혹은 - (' dh-m th y), - (' dh-' n h) 등으로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m h):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 )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4:2). 주여 어느 때까지( ) 관망하시리이까(35:17). (m th y):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6:3). 내가 어느 때에( )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42:2). - (' dh-' n h):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 - ) 숨기시겠나이까(13:1).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 - )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 - ) 하리이까(13:2). 세 단어들을 직역하면 '얼마 동안'인데,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숨으심과 원수의 핍박, 그리고 시인의 고통이 장시간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 시에서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네 번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고통이 그만큼 심각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본 시에서 이 용어가 두 번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고통을(1절), 하나는 시인 자신의 심적인 고통을(2절), 다른 하나는 원수들의 핍박에서 받는 고통을(2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잊어버리심과 숨으심에 대한 탄식, 마음의 고통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그리고 원수들의 자긍에서 오는 비통함이다. 이러한 탄식 뒤에 시인은 냉정을 찾은 듯, 하나님께 (잊지 마시고) 자신을 기억할 것(생각하사)과 자신 앞에(숨지 마시고) 나타나실 것(응답하시고)을 간청하고 있다(3절). 2. 나의 눈을 밝히소서 이 성구를 통하여 많은 구약학자들은 시인이 병자라고 주장한다. 시인이 병자일 가능성을 더 높여 주는 것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는 표현이다(3절).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3절). 구약성서에서 눈이라고 할 때, '신체적인 눈'과 '영적인 눈'으로 구분된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의 '눈'은 신체적 눈을 말하고 있다. 왜냐 하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자신의 눈이 어두어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이저는 시인을 병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인의 질병에 대한 세심한 관찰보다는 제의적 관점에서 13편을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시인의 육체적 고난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3절에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표현은 시인의 영육간의 건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크레이기는 시인이 중병에서 비롯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3절에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표현은 약화된 시력에서 비롯되는 건강 상실과 그로 인한 고통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크레이기 역시 바이저의 입장처럼 시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이상의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3절; 참조. 욥 17:7). 시인은 자신의 눈이 밝게 되어 육체의 생기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참조. 스 9:8). 이러한 사실은 '밝히소서'라는 단어에서 잘 알 수 있다. '밝히소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오르(or)의 사역 능동형이다. '오르'는 '빛이 있다,' '비추다'를 가리키는 말이며,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될 때는 '빛을 주다,' '비추게 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13편의 시인은 육신의 눈이 심각하게 병들었고, 그로 인한 심령의 근심이 가득한 자로서(2절), 그 증세가 생명을 빼앗길 정도로 심한 지경에 이른 것 같다. 3. 요동할 때 원수가 기뻐함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시인처럼 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불신자들의 조롱의 눈을 피하기 어렵다. 시인은 이러한 심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진술하고 있다(4절).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 형통할 것처럼 생활하고 전도하다가, 스스로 고난에 직면할 때 그 난처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전도의 외침이 무색하게 만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묵 상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에 의하여 해결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결국은 주의 인자하심에 의지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5절). 이러한 고백에서 우리는 시인의 위대한 신앙을 보게 되는 것이다. 비록 현재는 고통과 절망에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하여 고통과 절망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는 연단의 과정이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요소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6절). 이런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5절). 14편/어리석은 자 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면서 그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1절),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자이다"(4절). 본문에서 원수는 '어리석은 자'로서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이다(1절). 여기서 '어리석은 자(나발)'는 '어리석다'라는 동사 '나발'에서 유래한다. 이 때 '나발'은 '구원자이시며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경홀(輕忽)히 여기는 것'(신 35:15),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미 7:6) 등을 의미한다. 2. 교만한 자 또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여호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강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을 시편에서 원수에게 적용시킬 때 후자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고 볼 수 있다(참조. 시 36:1).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 든든하다고 자만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시 52:7).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대자연의 오묘한 법칙 앞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임을 느낄 때도 있고, 삶의 여정에서 조그만 사건 앞에서도 간혹 인간으로서의 무력감도 깨달을 때가 있다. 또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이 잔혹할 정도로 우리 앞에서 변하는 것을 보고 상실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으로서의 나약함, 무력감, 또는 상실감이 피조물로서의 한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역사 안에서 자신이 조정되는 유한한 존재함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3. 악행을 일삼는 무지한 자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삶이 진행되고 마치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그에게 있어서 삶은 곧 절대자에 대한 의지이며 순종의 과정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반(反)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모르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는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은 곧 부패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다(1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이나 태도가 그에게는 없기 때문에 악행을 일삼는 것에 대하여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그를 무지한 자라고 말한 것이다(4절). 어리석은 자는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행으로 인하여 타인을 핍박하며 선한 사람의 삶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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