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가서 연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3편/ 아침 기도의 시 3편은 개인 탄원시이다(시인이 일인칭 "나"로 표현되며, 그 내용이 고통의 탄식과 하나님께 대한 청원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 1. 개인탄원시의 특징 개인 탄원시의 용어적 특징은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 "부르짖음"으로 말할 수 있다. 구조적 특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부름," "간청," "하나님에 대한 탄식," "원수에 대한 탄식," "간청," "신뢰," "찬양," "확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물의 구조의 특징은 대개 "시인," "원수," "하나님"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대부분의 개인 탄원시에 일정하게 나타나며, 본 시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편의 시인은 많은 원수들에 의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 그는 "여호와여(인물구조-하나님) 나의(인물구조-시인) 대적이(인물구조-원수) 어찌(용어적 특징) 그리 많은 지요"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1절). 시인은 많은 원수들에 둘러싸여(1절)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고 있다(2절). 시인은 원수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2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패시며 영광임을 말하고 있다(3절). 그러나 시인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6절).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원수가 무너짐을 목격하였고(7절),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구원이 실현되기를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다. 2. 시인의 정체와 저작 시기 시인은 왕이나 군사의 지도자인 것 같다.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영광은 히브리어로 투구(kwb)를 가리키는 듯하다. 곧 전쟁과 밀접한 의미를 묘사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시인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백성들에게 내리소서"하며 본문을 마치고 있다(8절). "주의 복을 백성에게 내리소서"라는 표현은 지도자나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축도이다. 따라서 시인은 전쟁 중의 왕이나 군사 지도자로 볼 수 있다. 본문의 저작시기는 남유다가 바벨론의 통치를 받기 전이다(주전 586년. 바벨론 포로기 이전). 4절에 의하면, 시인은 여호와께서 성산(聖山)에서 응답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성산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솔로몬에 의하여 완공된 것이다. 예루살렘성전은 주전 586년 7-8월에 함락되어(왕하 25장; 렘 39장) 불타고 성벽은 무너져 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저작 시기는 포로 이전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3. 아침 기도의 시 본 시는 유대교와 초대교회에서 "아침 기도"의 시로 애용되었다. 그 이유는 5절의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는 고백 때문이다. 4. 셀라( )시 본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셀라"라는 표현이 세 번 나나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 시를 가리켜 셀라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셀라는 구약성서에서 총 74번 나타나고 있는데 시편에서 71번, 하박국에서 3번 나타나고 있다(3:3, 9, 13). 모빙켈은 셀라는 이스라엘의 제의행위 때 나타나는 것으로서 예배시 시편이 낭독되면 회중들이 순종의 표시로 땅에 부복하는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빙켈의 이러한 관점은 아마도 미쉬나의 언급에 기초한 것 같다. 미쉬나(Tamid ⅶ, 3)에 따르면, 제2성전 시대에 일상적인 시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읊어졌으며, 각 부분의 마지막에는 쉬도록(pause) 구성되어 있었다. 쉴 때에 제사장들 중 두 명의 제사장이 나팔을 불었고 이 때 예배자들은 엎드려 기도를 하였다. 이와 같이 세 부분으로 구분된 요소가 시편에서 "셀라"라는 단어가 출현한 것과 관련지을 수도 있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셀라가 나타나는 시편(이하 "셀라-시편")이 일반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참조. 86편). 그러나 때때로 시편에서 인용문으로 추정되는 내용 다음이나(가령, 44:9), 인용문 가운데 나타나기도 한다(시 68:8). 스나이드(Snaith)는 셀라-시편에서 셀라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7가지로 구분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다. 첫째, 각 세 연의 마지막에 모두 나타나는 경우-3, 24, 32, 46, 68, 77, 140편. 둘째,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만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4, 39, 49, 50, 52, 55, 57, 59, 62, 66, 67, 75, 76, 84, 87, 88, 89편. 셋째, 첫 번째 연과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만 두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5편. 넷째, 두 번째 연과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만 첫 번째 연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9편. 다섯째, 첫 번째 연의 마지막에서만 나타나는 경우-2, 7, 20, 21, 44, 47, 54, 60, 66, 74?, 81, 83, 89, 98, 143편. 여섯째, 두 번째 연의 마지막에서만 나타나는 경우-18, 22, 34, 48, 61, 68, 73, 80, 94, 118편. 일곱째,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서만 나타나는 경우-19?, 45, 63, 89, 100, 103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편에서 셀라의 위치가 약간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학자 사이에서 셀라의 기능적, 용어적 의미에 대하여 여전히 일치점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기능적 의미에서 볼 때, 셀라-시편의 대부분이 표제어를 갖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표제어가 음악적 지시와 관련 있으므로 셀라도 음악적 분위기와 관련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셀라의 용어적 의미는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왔지만 현재까지 확실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고대의 사본에서조차 셀라의 용어적 의미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칠십인 역을 위시한 헬라어 역본들은 셀라를 '디아프살마'( )로 번역한 것인데, 그 뜻은 '쉼,' '간주곡' 또는 '더 큰소리로'이지만 정확한 의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탈굼, 아퀼라, 제롬에서는 셀라를 '항상' 또는 '영원히'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 학자 킴히(Kim i)는 셀라가 '높이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살라'(sll)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참조. 사 57:14; 시 68:5), 가수나 음악인들을 위한 어떤 지시(instruction)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셀라가 '바구니'를 뜻하는 히브리어 살(sal)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바구니 모양을 한 북을 두들기는 것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또 다른 학자들은 셀라가 답관체(acrostic)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셀라에 대한 용어적 의미를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셀라라는 용어는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현재 헬라어 구약성서의 해석이 원래의 의미와 상대적으로 가깝다고 추정할 뿐이다. 4편/ 의인의 고난 1. 시인은 의인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1절). 이것은 시인 자신이 의로운 자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경건한 자로 말함으로써(3절), 경건한 자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의 소리를 들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3절). 그는 하나님께 의의 제사를 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5절), 이러한 표현은 예배자들에 대한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표현이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시인이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의 신앙에 큰 기쁨이 되고 있으며(6절), 그 기쁨이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보다 귀하다고 고백하고 있다(7절). 2. 시인의 고난 시인은 원수들에 의하여 고난을 받는 자이다(2절). 그는 자신의 영광이 원수들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히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2절).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2절의 "어느 때까지"). 시인의 영광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수들은 부(富)를 지닌 자로서(7절), 세상적인 일에 몰두하는 자들이었다(2절). 비록 시인은 원수만큼 풍족하지는 않지만(7절), 원수의 삶이 부질없는 것임을 신앙적으로 확신하고 있다(2절). 3. 하나님의 응답 시인은 극심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자이다. 세상적으로 시인이 고난받는 이유는 원수들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의 해결을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1절). 이것은 고난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시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에 의하여 상달되었음을 말하고 있다(3절). 비록 시인이 고난받는 그 순간 직접적으로 고난이 극복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하여 고난이 분명히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다(3절). 4. 평안한 잠자리 시인은 자신의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에 의해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모진 세상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의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8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밤새 시인의 잠자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5. 저녁의 기도의 시 8절의 "평안히 눕기도 하고 자기도 한다"는 표현 때문에 고대 유대인들이나 초대교회에서는 이 시를 저녁의 기도의 시로 애용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 시가 3편(비교. 시 3:6-아침 기도의 시) 다음의 순서로 편집되었던 것 같다. 5편/ 판단하시는 하나님 1.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자신의 心思가 편치 않음을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의 기도가 하나님에 의하여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洞燭하소서." 2절). 그는 하루 일과의 시작인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믿고 있다(3절). 비록 시인의 고통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침부터 기도로 시작하는 모습에서 시인의 경건성을 엿보게 된다. 그가 아침부터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망한다는 것은 시인이 하루 일과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다는 보여주는 대목이다. 역설적으로 하루의 일상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 할 것으로 시인은 믿고 있는 것이다. 곧 자신의 고통이 사라지리라고 믿는 것이다. 2.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므로 죄악에 빠진 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다(4-5절). 또한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므로 악을 행하는 자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절). 시인은 악한 자란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속이는 자'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하면서(6절), 상대적으로 자신의 경건성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7절). 여기서 시인의 지적 수준을 엿보게 된다. 먼저 악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악의 줄기에 속한 원수들의 행위 역시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진술에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한 보호, 내지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3. 원수에 의하여 고난받는 시인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고난받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로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8절). 이제 시인은 악한 원수들 때문에 자신이 사실적으로 고난받고 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시인은 원수를 가리켜 신실함도 없고, 마음이 악하며,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혀는 아첨하기에 급급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9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악행 하는 자 역시 그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시인은 그 악행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주동적인 개입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하나님의 판단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4. 판단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께 원수를 고발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원수들을 정죄하실 것이며, 그 허물로 인하여 원수들이 고통 당할 것임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시인은 원수의 악행이 곧 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배반임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다(10절).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은 결과적으로 사악한 원수들에게는 정죄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11절). 6편/ 병자의 시 표제어: 스미닛(6, 12편) 스미닛은 '여덟째'를 가리키는 음악 용어로서 6편과 12편 외에도 대상 15:21에 나타나고 있다. 대상 15:21에 의하면, 스미닛은 '여덟째 音'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스미닛에 대하여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이 여덟 개인 악기를 가리키거나 여덟 개의 음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6, 12편에서 스미닛 앞에 나타나는 전치사 알( )은 '위에,' '앞에,' '때문에,' '관하여,' '맞추어(따라서)'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알 스미닛'은 '여덟째 음에 맞추어서,' 곧 음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시인은 병자 6편의 내용 중 시인이 병자라고 추정할 수 있는 곳은 2절과 7절이다. 이 중 2절의 내용은 시인의 병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수척함과 뼈가 떨림을 말하면서, 그것이 치유되기를 간청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고난받는 상태를 알아보자. 2. 수척하고 뼈가 떨리는 자 '수척하다'라는 히브리어적 의미는 '메마르다'(참조. 사 16:8), '쇠약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은 꽃이 바싹 시든 것처럼 시인의 육체가 말라 가는 것을 가리킨다. 삼하 2:5과 렘 14:2에 의하면, 이 말은 육체적인 쇠약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수척하다'라는 말은 시인의 육체가 "심각하게 쇠약해졌음"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떨리다'라는 히브리어적 의미는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본문에서 사용된 의미는 '떨다'이다. 이 말이 단순 수동으로 사용될 때는 '두려워하다'(시 83:15; 렘 51:32), '놀라다'(창 45:3; 출 15:15; 겔 7:27), '급하다'(대하 35:21; 잠 28:22; 전 5:2) 등의 뜻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인이 쇠약 상태에 빠져 '두려워서 떠는 것'을 말한다(참조. 시 104:29). 이 단어는 이어서 나타나는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3절)에서 재차 사용되고 있다. 6:2에서 '뼈가 떨림은 시인의 육체적 상태를 말하며, 6:3에서 '영혼의 떨림'은 정신적 상태를 말하는 듯하다. 3. 간청하는 자 '고치소서'라는 히브리어적 의미에는 "건강하게 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대략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죄나 허물에 대한 용서해달라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며(참조. 사 19:22; 53:5; 57:18), 다른 하나는 육체적 병 고침을 뜻하는 것이다(신 28:27; 삼상 6:3). 광의의 의미로 볼 때, 이 말에는 "변했던 상태가 원래의 상태로 회복됨"을 가리킨다(참조. 사 53:5). 특별히 이 말에는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뜻도 있다(창 50:2). 이런 맥락에서 6편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은 육체적 질병을 심하게 알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로 추정된다(참조. 3, 4절). 4. 앞을 보지 못하는 자 이와 같이 시인은 병을 앓고 있는 자이다. 시인은 자신이 병으로 인한 고통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견책하지 말 것과 징계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1, 2절). 그는 자신의 고통이 장시간 진행되고 있음을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절규로 대신하고 있다(3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방관하지 말고 돌아와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4절).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했던 자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경건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고통받고 있는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다. 시인은 병의 고통으로 인하여 밤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6절), 육체적 고통이 급기야 정신적인 근심으로 변하였고 그 결과 앞을 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7절). 7편/ 재판 중에 있는 무죄한 자의 고난 표제어: 식가욘 이 단어는 동사 '샤가'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샤가'는 '고함치다,' '미치다'(삼상 21:14-15; 참조. 신 28:15-68),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삼상 21:13; 참조. 왕하 9:11; 렘 29:26; 호 9:7)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7편의 표제어에 나타나는 명사 '식가욘'은 7편 외에 구약성서에서 세 번 나타나고 있다. 두 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내려지거나(신 28:28)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경우(슥 12:4)에 사용되었다. 다른 한 곳은 예후 왕의 광기에 차서 병거를 모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왕하 9: 20).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서에서 '식가욘'은 '미침,' '광기'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동일한 의미로 시 7편의 표제어에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여기서 문자적,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7편에 나타난 '식가욘'의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문자적 해석이다. 고대 아카드語에서 이 단어와 동일한 어근으로 추정되는 '세구'의 뜻이 '부르짖다,' '탄식하다'로, 에디오픽語에서는 '미치다'(찬게아로, 아랍語에서는 '속삭이다,' '(音이 있는 산문 형식으로) 낭송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시 7편이 탄식시라는 점과 산문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식가욘의 히브리적 의미와 근동어 사이에 일치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7편 외에 시편 탄원시 어디에도 식가욘이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식가욘의 뜻이 탄식과 관련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 식가욘이 산문시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합 3장을 통하여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합 3장의 내용이 서사시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형식면에서 정형화된 시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분히 산문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식가욘은 산문시 형식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단어가 멜로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합 3:10에는, 3장의 노래가 영장을 위하여 수금에 맞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절에서는 '시기오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진술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식가욘은 어떤 멜로디를 연상케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7편의 표제어에 나타난 식가욘의 문자적 의미는 '음률과 관련 있는 산문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신학적 해석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식가욘이 사용된 내용들은 공히 전쟁의 모습과 관련 있다. 시 7편에서도 다분히 여호와 전쟁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가령, '일어나사'(6절; 비교. 민 10:35), '깨소서'(6절; 비교. 삿 5:12), '영광'(어원상 전쟁용 투구를 가리킬 수도 있다) 등에서 전쟁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문자적,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식가욘은 전쟁 상황에서 여호와께 탄식하는 모습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합 3장의 내용이 전쟁 중에 여호와의 위용이 한껏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3-16절) 식가욘은 간청자의 열광적인 염원이 담겨진 내용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1. 시인과 원수 7편은 무죄한 자가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예기치 못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그 고통이 자기의 잘못이나 실수에 의하여 비롯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잘못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7편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7편에서 시인은 스스로 무죄함을 말하고 있다. 그는 악행한 것이 없으며(3-6절), 스스로 의롭고 성실하며(8절), 정직한 자라고(10절)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의로운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당하고 있다. 이들은 시인의 원수로서 사자와 같이 무서운 자들이며(2절), 회개하지 않는 자이며(12절), 악인으로서 죄를 해산하는 자이며(14절), 함정(웅덩이)을 파서 남을 모략하는 자이다(15절). 2. 송사에 빠진 시인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어떤 재판 중에 원수들에 의하여 모함을 당하여 고통받는 자로 볼 수 있다. 또한 시인이 하나님께 '심판'(8절), '판단'(8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시인이 법정에서 모함을 당하고 있는 자일 가능성을 높게 한다. 특별히 시인이 원수를 가리켜 '웅덩이'(함정)이를 파는 자라고 언급하는 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자신이 잘못한 점이 있으면 천벌을 받겠다는 자신에 찬 자기 변호에서 그 가능성은 한층 더 높다고 볼 수 있다(3-5절). 묵 상 우리 나라의 인권이 과거와 비교해볼 때, 괄목할 만큼 신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회 곳곳에 인권이 온전하게 실현되고 있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다. 언론 매체를 통하여, 간혹 잘못된 재판에 의하여 억울하게 고통 당하거나 피해를 입은 자들을 보게 된다. 재판 중에 자기 방어능력이 부족하거나 여건상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재판관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재판의 결과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억울하게 송사 되어 감옥에서나 법정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절규는 곧 7편의 시인의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의로움 때문에 법정에서나 감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면 더더욱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군사독재 하에서 억울하게 재판 당하고 사형되거나 장기수로 복역했던 많은 인사들이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울부짖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개 소시민이 잘못 없이 모함에 빠지거나 법정에 서게 될 때, 그 심정 또한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직 신만이 진실을 안다"고 하면서 체념할 수도 있지만, 그 체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의 실질적인 개입을 바라는 시인의 부르짖음은 7편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모함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실로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시인은 그 고통의 중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선처를 바라고자 세상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면서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10절). 7편은 잘못 없이 남으로부터 모함을 당하거나 박해를 당할 때,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도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야함을 보여주고 있다. 악은 의로운 하나님에 의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7편을 통하여 우리 주변에서 억울하게 모함 당하거나 핍박당하는 자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나로 인하여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는지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한다. 8편/ 창조주 하나님 찬양 표제어: 깃딧( )(8, 81, 84편) 히브리어로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포도즙 틀 또는 포도즙을 짜는 통'을 가리키는 명사 '갓'( )과 관련 있는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이 단어는 포도즙 내기 위하여 사람들이 포도주를 밟으면서 부르는 소위 勞動謠로 해석할 수 있다(참조. 사 16:10; 렘 25:30). 이 단어가 나타나는 시 8, 81, 84편에 모두 하나님에 대한 찬양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깃딧'은 즐거운 가운데 부르는 노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즐거움은 포도주를 수확하여 즙을 낼 때도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본 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다. 찬양은 기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본 시의 전체 내용에서 시인의 기쁨의 찬양을 볼 수가 있다. 또한 표제어에서('깃딧에 맞춘 노래') 이러한 기쁨을 엿볼 수 있다. 1.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하나님을 찬양 우리는 때때로 세파에 찌들고 세속화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기보다는 육적인 삶에 더 관심을 두곤 한다. 하나님의 원대한 창조 목적을 망각하고 어떻게 하면 더 윤택해지고,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명예를 얻을까 고민하고 있다. 본 시가 쓰여진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인은 이러한 세속적인 인간들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재삼 고백하면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하나님을 찬양함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세상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고 무시함을 보시면서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자신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시면서 본 시의 2절을 인용하시고 있다(마 21:16).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알려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고전 1:27). 스스로 지혜 있다고 믿고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순진무구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원수를 잠잠케하시기 때문이다(2下). 하나님께서는 순진하고 약하며 미련한 듯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상적인 부나 권력 또는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2.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 시인은 1절과 마지막 9절에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오묘한 조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어디 하나 흠잡을 때 없는 멋진 창조사역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하나님의 창조 작품에 대한 시인의 감탄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멋진 작품이 나올 수가 있을까 하는 시인의 경외심의 발로인 것이다. 묵 상 시인은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고 있다. 하늘의 달과 별을 본다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상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대상물인 것이다. 시인은 누구나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자연의 대상물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시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주위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특별한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나 기도원에서, 또는 일정한 시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 시인은 무심코 본 밤하늘의 달과 별에서 오묘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을 본 것이다. 조금한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건에서 또는 대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창조 사역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광활한 하늘을 보면서 현재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왜소한 것을 깨달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들에게 특권을 주신 것에 대하여 놀라움과 함께 고마움을 고백하고 있다(4,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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