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가서 연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시가서 연구

 

1편/ 의인과 악인 1. 전체 시편의 서론이며 결론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시편을 가리켜 성서 속에 작은 성서라고 하면서 시편의 내용을 강조한 바가 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소위 '교독문'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시편을 읽는다. 시편 중에서도 1편은 전체 시편의 서론이자 결론에 해당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편 1편은 전체성서의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통틀어 하나님을 경외했던 자와 하나님을 멀리했거나 배반했던 자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그 인생의 결과도 알 수 있다. 즉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볼 수 있다. 시편 1편에는 이처럼 의인과 악인의 길을 분명하게 대조시키면서 믿는 자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2.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1절)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되고 있다(3절). 이스라엘에서 물은 곧 생명과 같은 것이다. 1편의 시인은 물과 율법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늘 과실을 맺는 것 같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그 행사가 형통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을 의인과 연결시키고 있는데(5, 6절), 그 고리는 율법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여호와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 인간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 실망, 분노 그리고 인간들의 여호와에 대한 순종과 거역, 그 결과에 따라 인간들의 고통과 행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율법의 가르침에 절대 순종하고 사모할 때 의인이 되며 곧 온전한 여호와 신앙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율법이란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성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3. 복의 의미 히브리어로 '복'을 가리키는 말은 에쉐르인데, 시편에서 이 말은 여호와와 불가분한 관계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복 있는 자를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2:12; 40:4; 84:12), "여호와에게 피하는 자"(34:8), "주의 집에 거하는 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84:4, 5), "여호와께 소망을 두는"(146:5)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주로 시인의 주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기대되는 표현들이다. 즉 복이란 인간들의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지, 소망 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악인은 꾀를 쫓는 자이며 죄인으로서 오만한 자이다(1절). 그의 행사는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 같다(4절). 그는 여호와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자이다(6절). 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의인(복 있는 자)의 길을 인정한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복 있는 자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인정하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요데아'는 동사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야다'는 '알다'(to know. 知)를 의미하는데,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된 말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창 18:19; 신 34:10)과 인간의 도리(사 48:8; 시 1:6; 37:18)에 대한 앎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나 동물의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나타나고 있다(사 1:3). 하나님이 의인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認知)의 차원을 넘어선 '保護' 내지는 '引導'를 전제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의 인정하심은 곧 여호와의 적극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가 인간의 복을 동의할 때만이 그 복이 완벽해짐을 뜻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희로애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본받아 여호와를 의지하고 소망하고 행동할 때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묵 상 복 있는 자는 기쁨 중에서도 여호와를 의지할 뿐만 아니라 슬픔과 고난 중에서도(특별히 탄원시)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분을 소망하는 자이다. 이 때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여호와의 적극적인 보호나 인도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여호와가 만나는 곳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로부터 인정받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생수이기 때문이다. 2편/ 하나님의 아들 시편 2편은 1편처럼 표제어가 없다(1편에서 표제어가 없는 것은 시편 1편이 전체 시편의 서론이자 표제어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원래 2편이 1편과 함께 하나의 시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별히 2:12下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에서 1편의 내용이 2편에서도 계속 이어짐을 보여준다. 본 시는 고대 이스라엘 왕이 등극하는 소위 '대관식' 모습을 강하게 띠고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됨(7절) 고대 근동에서는 왕을 가리켜 '신(神)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마치 신이 왕을 낳은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신의 아들은 곧 왕의 신격화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도 고대 근동의 표현 양식을 빌러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아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표현에서 '오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다. 이 말은 원래 노예에게서 낳은 아들을 적자로 합법화시킬 때 쓰는 고대 근동의 표현이다. 이것은 과거 사탄의 권세에서 종노릇하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같은 의미이다. 2. 아들의 특권(8절)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다(8절). 아버지께 당당하게 간구할 수 있는 자는 아들밖에 없다. 이것은 아들의 특권이다.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땅'을 아들에게 유업으로 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땅은 단순한 영토적 개념이나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의미를 갖고 있다. 땅은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야곱, 모세 등과 맺은 언약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땅을 소유하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땅의 소유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며, 땅의 손실은 그들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땅의 소유는 자신들의 여호와 신앙이 구체화되는 증표로 간주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땅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최고의 가치를 상징하는 실체이다.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본문과 평행구절로서 대상 28:6과 삼하 7:14(참조. 시 89:26-27)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특권뿐만 아니라 범죄할 경우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내 아들을 삼고 나는 그 아비가 될 것임이라. 저가 만일 나의 계명과 규례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과 같이 하면 내가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니"(대상 28:6).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묵 상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 유업을 소망하는 것이 특권이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적 모범이 따를 때 그 특권은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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