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가서 연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20편/ 성도의 승리 본 시는 시인의 '중보'(1-5절)와 '선포'(6-8절), 그리고 '청원'(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에서 특징 중 하나는 동일한 용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응답하다"(아나. 1, 9절), "날"(욤. 1, 9절), "하나님의 이름"(쇔. 1, 5, 7절), "기억하다"(체콜. 3, 7절), "성소"(코데쉬. 2, 6절), "구하다"(예솨. 5, 6, 9절) 등이다. 이 시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개인적으로 군대의 출병에 앞서 드리는 예배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대하 20:5-19에서 본 시와 유사한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전쟁의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사전의 철저한 준비를 통한 군사력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시에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의 전쟁에서의 승리여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앙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5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줄 때만이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 시는 오늘 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승리적 삶을 교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는 자(5절) 성도는 십자가의 군병이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기를 앞세우고 세상에 출병하는 용사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지식이나, 부(富), 명예, 권력 등을 내세우지는 않는다(참조 7上). 그는 항상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자이다(4절).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며 그의 인도자가 되며 하나님의 이름은 성도를 이끄는 기와 같은 것이다. 2.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6절) 성도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세상에서 많은 곤고를 겪기도 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영생을 부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자신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위하여 행사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3.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7절). 세상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내세운다면, 이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자랑하고 그분의 능력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4. 성도는 바로 선 자(8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인하여 성도는 바르게 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전에는 넘어져 있거나 엎드려 있는 자였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께 속한 후, 인생의 지혜를 맛보고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경험한 자이다.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세상보다 더 값진 영생을 경험한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적 자긍심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이다. 묵 상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자신의 조그만 능력을 내세우거나 교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그에게서 떠날갈 것이다.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보호만을 기대할 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힘을 필요로 하거나 그 힘에 아첨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질없는 세속적인 삶에서 일시적인 영화를 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넓고 깊은 신앙의 웅지(雄志)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만 할 것이다. 이럴 때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0편/ 성도의 승리 본 시는 시인의 '중보'(1-5절)와 '선포'(6-8절), 그리고 '청원'(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에서 특징 중 하나는 동일한 용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응답하다"(아나. 1, 9절), "날"(욤. 1, 9절), "하나님의 이름"(쇔. 1, 5, 7절), "기억하다"(체콜. 3, 7절), "성소"(코데쉬. 2, 6절), "구하다"(예솨. 5, 6, 9절) 등이다. 이 시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개인적으로 군대의 출병에 앞서 드리는 예배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대하 20:5-19에서 본 시와 유사한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전쟁의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사전의 철저한 준비를 통한 군사력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시에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의 전쟁에서의 승리여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앙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5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줄 때만이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 시는 오늘 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승리적 삶을 교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는 자(5절) 성도는 십자가의 군병이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기를 앞세우고 세상에 출병하는 용사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지식이나, 부(富), 명예, 권력 등을 내세우지는 않는다(참조 7上). 그는 항상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자이다(4절).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며 그의 인도자가 되며 하나님의 이름은 성도를 이끄는 기와 같은 것이다. 2.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6절) 성도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세상에서 많은 곤고를 겪기도 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영생을 부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자신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위하여 행사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3.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7절). 세상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내세운다면, 이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자랑하고 그분의 능력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4. 성도는 바로 선 자(8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인하여 성도는 바르게 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전에는 넘어져 있거나 엎드려 있는 자였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께 속한 후, 인생의 지혜를 맛보고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경험한 자이다.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세상보다 더 값진 영생을 경험한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적 자긍심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이다. 묵 상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자신의 조그만 능력을 내세우거나 교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그에게서 떠날갈 것이다.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보호만을 기대할 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힘을 필요로 하거나 그 힘에 아첨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질없는 세속적인 삶에서 일시적인 영화를 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넓고 깊은 신앙의 웅지(雄志)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만 할 것이다. 이럴 때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1편/ 아름다운 복과 지극한 복 본 시는 감사(1-6절), 확신(8-12절), 찬양(13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일한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절의 "주의 힘"에 대한 감사와 13절의 "주의 능력"에 대한 찬양이 같은 단어("여호와 베아츠크")를 사용하면서 시작과 끝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본 시가 양괄식(兩括式)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쁘다"(1, 6절), "구원"(1, 5절. 원래의 의미는 "승리하다"), "주다"(2, 4절), "씌우다"(3, 6<"받게 하다">, 9<"할 것이라">, 12절<"함이여">), "복"(3, 6절) 등의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 점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일부 학자는 1, 5절에서 "구원하다"라는 말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 시를 군사적 승전(勝戰) 또는 출전을 앞둔 시점에서 지어진 시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 시가 과거뿐만 아니라(1-6절), 미래적 전망도 함께 나온다는 점에서(7-13절) 군사적 의미를 담은 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히브리 성서에서 "아름다운"이란 말은 "토브"인데, 원래 "즐거운," "선한," "적절한," "올바른," "보배로운"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선한 것, 즐거운 것, 올바른 것, 보배로운 것 등은 곧 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단어 자체가 "복"을 의미하기도 한다(민 10:29; 신 30:9). 여기서 "아름다운 복"이란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4절). 또한 히브리 성서에서 "지극한"이란 말은 "아드"인데, 원래 "영원불멸"의 뜻을 갖고 있다(출15:18; 시 618). 이러한 영원불멸의 복은 기쁨과 즐거움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며(6절), 하나님의 인자함으로 가능한 것이다(7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풍요, 육체적 건강 등은 부수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을 받았다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이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 좋은 직장에 취업하게 해달라, 어떤 명예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복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아무런 명예나 부를 취득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골고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뿐이다. 그를 따르던 수제자까지 그를 부인하였고, 그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거나 은혜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도 그를 멀리하였다. 그는 외롭게 생을 마감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분께서 우리의 복이 되심은 무슨 이유인 것일까? 바로 그분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영접한 자녀라고 하면서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안달이며 그것을 복의 범주로까지 해석하고 자위하면서 내세에 대한 소망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이 땅에서 세속적인 평안과 부, 명예나 권력을 향유하게 하시면서 하늘 나라까지 보장해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시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에서 이러한 모습은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름다운 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생명을 취득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에서 이 땅에서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히 13장).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의 삶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것이 곧 지극한 복이다.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본 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편 중에서 가장 잘 아는 시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본 시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동일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하여 번영을 누린 적이 거의 없었다. 솔로몬 시대를 전후하여 일시적이나마 국가적/민족적 번영이 있었을 뿐 항상 고난과 함께 한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과 함께 특별히 시편의 여러 부분들이 고난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도 이중 하나에 속한다. 본 시는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그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1. 표제어: 아앨렛샤할에 맞춘 노래 "아앨렛샤할"은 시 22편에 한 번 나타나는 것으로서, '암사슴'을 가리키는 '아이예레트'( )와 '동틀 때'를 의미하는 '핫샤하르'( )가 합성된 말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아앨렛샤할은 '암사슴이 동틀 때' (부르는) (노래. 앞의 '알'( )은 전치사로서 風, 또는 類로 해석할 수 있다)로 직역할 수 있다. 창 49:21에 의하면, 암사슴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는 동물로 은유하고 있다(창49:21). 사슴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이얄/아이야라( / )와 동족어로 보이는 우가리트語 'ayl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 희생제의와 관계된 짐승을 가리키는 뜻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2편의 표제어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제의와 관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두 가지 해석에서 아앨렛샤할은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암사슴이 부르는 노래와 닮은 風'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2.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단어는 하나님께 불평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서, 시편 이외의 구약성서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참조. 창 25:22; 민 11:11; 렘 14:18, 19; 사 58:3; 합 1:3; 시 44:23, 24). '어찌하여'는 두 가지 측면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 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탄식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이 원수로 인하여 고난받을 때 나타나는 탄식의 부르짖음이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라고 부르짖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거리감,' '하나님의 숨으심,' '하나님의 버리심'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거리감: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10:1上).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22:1下). 하나님의 숨으심: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0:1下).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88:14下). 하나님의 버리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2:1上; 43:2上).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88:14上). 2. 병 때문에 고난을 받음 시인이 고난받는 일차적 이유는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병이 든 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일명 '원수')이 시인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14-15절은 시인이 병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22:14-15). 본문에서 '어그러졌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트파두'의 기본형은 '파라드'입니다. '파라드'는 '사물이 나누어지거나'(창 2:10; 겔 1:11), '조화적 관계가 깨어져서 분리되는'(창 10: 5, 32; 13:9, 11, 14) 등의 의미가 있다. '히트파두'는 강조 재귀 동사로서 '스스로 분리되다' 또는 '스스로 나누어지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뼈는 어그러졌으며'라는 표현은 뼈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말한다. 이 말은 뼈가 정상적이지 못하여 뼈마디 마디가 심각하게 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독일의 신학자 크라우스는 시인이 고열(heat of fever)로 인하여 매우 고통 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말라'는 구약성서에서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수분이 결핍되어 '메마르게 되다'(창 8:7, 14; 수 2:10; 시 74:15)는 것이다. 둘째, 심판 유형에서 사용되고 것으로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메마르다, 시들다'(왕상 13: 4; 욥 8:12; 15:30; 18:16; 겔 37:11; 슥 11:17)는 것이다. 셋째, 비유적이고 교훈적인 표현에 나타나는 '마르게 되다'(시 90:6; 사 40:7-8)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말라'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질그릇 조각 같고" 그리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는 표현에 비추어, 몸에 수분이 빠져나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시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은 뼈가 쑤시고 심한 갈증 상태를 느끼는 자로 생각할 수 있다. 3. 원수 때문에 고난을 받음 시인은 자신의 병 때문에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원수)의 조롱과 무시 때문에 더욱 고통을 당하고 있다. 본 시에서 원수가 짐승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원수의 사악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황소'(12절), '개'(16절), '사자'(13절; 57:4; 참조. 7:2; 10:9; 17:12; 22:13, 21) 그리고 '들소의 뿔'(21절)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황소'는 대개 희생 제의의 제물로 많이 언급되어 있다(참조. 출 29:1; 레 4:3, 14; 8:2; 16:6, 11; 민 7:15, 21). 본 시에서 상징적 의미로 원수를 '황소'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원수의 권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동일한 구절(12下)에 나타나고 있는 '힘센 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이 때 대조적으로 시인은 '벌레처럼 나약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6절). 따라서 시인이 원수를 가리켜 '황소'라고 부른 것은, 도저히 서로 경쟁이 될 수 없는 강자와 약자의 대조적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사람을 '개'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경멸'(참조. 신 23:18; 삼상 17:43)이나 '사나움'(렘 15:3)을 의미하며, 이 때 사나움은 상대방을 두려움에 빠뜨리기도 한다(참조. 시 59:6). 16절에서 원수를 '개'로 묘사한 것은 경멸보다는 원수의 포악함에서 비롯된 두려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같은 절의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라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개'라는 은유적 묘사를 통해서, 원수는 포악한 자라고 본다면 시인은 그 포악함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참조. 20절). 구약성서에서 '사자'라는 표현은 강한 힘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리킬 때 은유적으로 묘사된 경우(참조. 사 38:13; 애 3:10)와 인간의 강한 힘을 상징할 때 묘사된 경우로 나타난다(참조. 렘 4:7; 5:6; 49:19; 50:44; 욜 1:6; 나 2:11-13). 본 시에서도 원수를 '사자'로 비유할 때, 원수의 힘이 막강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원수가 시인을 괴롭히는 장면인 "사자처럼 시인을 찢다"(13, 21절; 참조. 7:2; 17:12上) 또는 "사자가 은밀하게 먹이를 찾듯이 시인을 기다리다"(10:9; 17:12下)라는 묘사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런 묘사에서 원수는 매우 강한 자며, 시인은 약한 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원수를 '들소의 뿔'과 연관시켜 묘사한 경우이다(21절). 구약성서에서 '뿔'은 힘이나 능력을 상징한다(참조. 신 33:17; 삼하 22:3; 시 18:2). 이러한 능력의 뿔(출 34:29; 합 3:4)은 하나님만이 높이거나 낮추게 하는 것이다(시 75:4-7). 이런 관점에서 원수를 '들소의 뿔'과 관련시킨 묘사에서 두 가지 추정을 하게 된다. 하나는 원수의 권능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었을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원수의 교만을 묘사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본 시의 경우에는 해당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시인이 원수를 들소라는 짐승과 관련시켜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 '권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즉 뿔은 원수의 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 하면 본문에서 시인이 원수의 뿔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는데(21절), 이것은 원수의 권능이나 교만을 하나님께서 꺽었다는 의미와 일치되기 때문이다(참조. 시 75:10). 4. 하나님 때문에 시인은 질병과 원수들 때문에 고통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그 고통을 호소하며 해결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위대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고난 상황에 개의치 않고 계심을 말한다(참조. 욥 9:25-35).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버렸다고 할 때,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범죄(호 4:10)와 종교적 배교 행위(신 28:20; 31:16; 대하 24:18; 욘 2:8) 때문이다. 그러나 본 시에서 시인의 범죄나 종교적 배교와 직접 관련된 '버림'을 말하지 않는 듯한다. 여기서 '버림'은 시인의 고난 상황이 최고조에 다다른 것을 보여주는 극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셨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 시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듣지도 응답치도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실제로 버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1-2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관심은 시인의 고난을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끝까지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묘사되며, 찬양이 나타나고 있다(22-31절). 이것은 하나님의 '숨으심,' '분노하심,' '버리심'에 대한 탄식이 고난 중에 나타난 시인의 일시적인 탄식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인의 확신이나 찬양은 하나님께서는 시인에 대하여 숨으시거나, 분노하시거나, 버리시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는 내용들이다. 이 때 확신이나 찬양이 단순히 미래적인 기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고난 상황이 어떤 형태로든지 변화되고 있음을 예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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