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 본 시는 간결한 문체와 함께 그리스도인에게 목가적인 이미지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그 중심에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게 하는 시이다. 이런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본 시를 '확신시'로 간주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체 내용에서 여호와가 목자라는 이미지를 그려내는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기는 하나, 소수의 학자들은 5절과 6절의 내용이 앞의 1-4절의 내용과 상충한다는 점을 들어 여러 가지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는 대부분 가설에 국한할 뿐 본 시가 여호와가 목자라는 근본적인 전제를 흔들 만큼 충분하지는 못하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됨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중동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든 뉴욕이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농경사회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든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사회에서 목자의 사실적 개념과 도시사회에서의 목자의 이미지적 개념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독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본 시에 대한 감회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목사회에서 목자는 양의 생명을 보호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 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에는 지금도 많은 양을 이끌고 인도하는 베두인 목자들을 볼 수가 있다. 건기 때 풀 한 포기 찾기가 힘든 광야 지역에서 푸른 초장으로 안내하고 물가로 인도한다는 것은 현실적 의미에서 거의 실현 불가능한 스토리이다. 이런 점에서 양들에게 있어서 푸른 초장과 물가는 소위 '패러다이스'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 시는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이상적 이미지를 우리들에게 제공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안락과 미래적 소망을 제시해 주는 '소망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힘들고 삶에 지친 성도에게 여호와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이 시를 통하여 재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시는 돈을 목자로 삼고 지식을 목자로 삼았던 세상적 가치관을 일시에 무너뜨리게 한다. 돈이 좀 있다고, 힘이 있다고 공부 좀 하였다고 우쭐대는 사람이나 그 앞에서 머리 숙이고 이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다 부질없는 짓임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변두리에 처진 사람들에게 이 시는 소망과 안위를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성도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간혹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하고 이 곳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세상적 욕망은 곧 사라질 것에 대한 허무만을 양산할 것이다. 이곳은 잠시 지나가는 길목과 같은 곳이다. 나그네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최종의 희망으로 알 뿐 그 여정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여정은 힘들고 고달픈 것이다. 공부를 조금 더 했다거나 권력이 있다거나 돈이 좀 있다고 하여서 우쭐대거나 잘난 체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 재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며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곳의 사망의 골짜기에서 성도를 보호해주시고 미래로 인도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나그네에게 희망이며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도록 하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미래이며 현재를 이기도록 하는 힘인 것이다. 이제 나그네 삶을 인정하고 서로 아끼고 위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생에서의 삶이 그리 길지만은 않은 것이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바로 음침한 골짜기를 헤어나가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3.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임 이제 나그네의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힘들고 고단한 몸이 영원히 안식할 곳을 보게되는 것이다. 그 동안의 고생과 모든 수고가 이제 추억이 될 것이다. 목적지에는 푸른 초장과 물가가 넓게 펼쳐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영원히 즐길 것이다. 그곳은 나그네의 서러움도 없고 그 여정에 대한 미련도 없을 것이다. 목자의 인도를 따른 조바심이나 궁금한 것도 없을 것이다. 목자의 지팡이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저 바라보고 웃으며 즐거워하는 패러다이스만 있을 뿐이다. 24편/ 예배드리는 자의 자격 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세 번에 걸쳐 질문과 응답이 나타나는 것이다. 질문1: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3절). 응답1: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듯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4절). 질문2: "영광의 왕이 뉘시뇨"(8절上). 응답2: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절下). 질문3: "영광의 왕이 뉘시뇨"(10절上). 응답3: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10절下). 이러한 질문과 응답은 본 시의 구조에서 골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 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구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창조주에 대한 찬양(1-2절). 둘째, 제의에 참여하는 자의 자격(3-6절). 셋째, 영광의 왕(7-10절). 1. 여호와의 창조에 대한 찬양(1-2절) 1절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과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므로 창조된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 주권 아래 만물이 속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단순히 여호와의 창조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후 현재의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에 귀속되어 있고 창조주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시인은 2절에서 여호와가 '바다'와 '강' 위에 "세웠다," "건설했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여호와의 주동적 창조행위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와 '강'은 혼돈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창조는 곧 혼돈에서 질서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질서를 이루신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피조물의 당연한 자세임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3-6절의 내용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2. 제의에 참여하는 자의 자격(3-6절).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해서 모두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예배)을 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여호와는 질서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질서는 곧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3절)라는 질문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질서의 여호와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를 아니하는' 자라고 응답하고 있다. 질서의 여호와가 계신 곳, 곧 거룩한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는 이와 같이 선해야 하는 것이다. 선한 자의 예배는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며, 의를 얻는 것이다(5절). 예배를 통하여 예배자는 다시 한번 여호와를 찾는 족속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 규정되고 있다(6절). 이제 예배자는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위엄을 선포하는 책무를 안게 되는 것이다. 3. 영광의 왕(7-10절). 여기서 "영광의 왕이 누구냐"는 질문이 두 번 나타나고 있다(8절上, 10절上). 이에 대하여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며"(8절下),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10절下)라고 응답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질문과 응답은 영광의 여호와에 대한 강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응답에 나타난 '강하고 능한,' '전쟁에 능한,'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전쟁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이러한 표현은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성서에 나타난 전쟁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혼돈(바다, 강)을 타파하는 곧 악을 무너뜨려 선의 질서를 세우신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다. 묵 상 우리는 예배드리기 전에 "과연 내가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며(참조. 고전 11:27-29), "예배를 받으시는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를 자문해야만 할 것이다. 25편/ 젊었을 때의 죄를 회개 본 시는 시인이 과거 젊었을 때 지었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있으며, 그 죄로 인하여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자신의 고통이 원수에 의하여 수치를 당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2, 3, 20절). 1. 시인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 시인은 자신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가 젊은 시절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7절), 자신과 자신의 죄를 분리하고 있다(7절).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죄인인) 나를 기억하시되. 이것은 시인이 과거에 자신이 지었던 죄에 대하여 철저히 반성하고 후회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시 32:5을 참조할 것. 여기에는 시인이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여호와께 고백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시인은 더 이상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여호와의 교훈을 새기고 있다(8, 9절). 시인은 "여호와의 길은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라고 고백하면서(10절), 다시 한 번 자신의 죄가 크다고 말하고 있다(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 )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2. 시인의 죄 본문에서 '죄'를 가리키는 말 '아원'은 동사 '아와'에서 유래한다. '아와'는 '구부리다'(애 3:9), '뒤집다'(사 24:1), '왜곡시키다'(욥 33:27), '고통받다'(시 38:7) 등의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죄는 곧 '바른 길을 벗어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아와'는 여러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구약신학자 다후드는 시인의 큰 죄를 '우상 숭배'로, 크레이기는 '간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에 의하여 시인의 죄를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10절과 14절의 내용에 나타나고 있는 '언약'이란 용어와 연결시켜볼 때, 시인의 범죄는 계약을 파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계약이라고 할 때,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며, 둘째, 국가와 국가간(또는 민족과 민족간)의 계약이며(참조. 창 14:13; 31:44-47; 수 9장), 셋째, 사회적 계약이다. 넷째,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이다(삼상 18:3; 20:8; 23:18). 본문에서 시인이 계약을 어겼다면, 그것은 시인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나 또는 사회적 계약을 어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다후드는 시인의 범죄를 종교적인 것으로, 크레이기는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의 죄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이 "여호와는 선하고 정직하시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 하신다"고 말하는 것(8절)에서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정직'을 의미하는 '야샤르'는 '곧다,' '바르다,'라는 '야샤르'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앞서 살펴보았던 죄라는 용어의 의미와 대조를 이루는 말이다. '정직'과 함께 '여호와의 길'이라는 말이 나타나고 있다. 이 때 여호와의 길은 '道'(4, 8절) 또는 '길' (4, 10절)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은 모두 '도로'를 나타내는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추상적으로는 '행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과거 젊었을 때, 바르지 못한 행실로 인하여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자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시인은 젊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또는 사회에서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였다. 그러한 행동이 인과응보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까닭에(15절. '그물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사해 줄 것을 빌고 있다(17절). 묵 상 우리는 누구나 주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다. 시인도 한 때는 주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던 자로 보인다.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 과거의 부끄러웠던 시간들을 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도(道)로써 더욱 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유사한 죄를 재차 범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중한 범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불신자로서의 삶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매일 반성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은 더 이상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주님의 진리에 의하여 지도되고 교훈 되기를 바라고 있다(5, 9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신자였던 과거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교훈과 지도에 의하여 훈육되고 단련되기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본 시는 이런 점에서 매우 사실적이고 현재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26편/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본 시는 양괄식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본 시의 첫머리와 마지막에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시인은 종교적으로 매우 경건한 자로 추정할 수 있다. 특별히 본 시의 12절에서 "회중"(마크헤림)이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5절의 "집회"(케할)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본 시에서 "집회"는 행악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며 "회중"은 "예배하는 회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중"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본 시의 배경은 시인이 예배를 드리려는 한 순례자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시인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손을 씻고 주의 단을 두루 다니는" 모습에서 더욱 지지를 받는다(6절; 참조. 시 24:4). 손을 씻는 것은 정결의식의 하나로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행하는 종교의식이었다(참조. 시 73:13). 또한 "주의 단"은 주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므로 시인이 순례자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완전하게 행하는 것 시인은 자신의 완전한 행위는 곧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 요동하지 않고 완전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허망한 사람과 同席하지 않았으며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않았으며 행악한 자의 집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여호와에 대한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4-5절).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사람들과 세속의 허망한 것을 나누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단순히 세상사람들과 성별(聖別)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주의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한다"고 함으로써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8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대하여 무가치만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미치는 곳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시인이 순례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때, 그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만끽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주일예배와 성도들간의 교제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속의 삶에서 주일예배를 고대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갈망하는 것은 곧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2.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여기서 "단련하다"는 말은 금속의 연단뿐만 아니라 불순물이 제거된 소위 정제까지도 내포하는 말이다. 시인은 자신의 단련이 "주의 인자함"과 "주의 진리"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는 자이다(3절). "주의 인자함"이란 말은 대체로 종교적인 용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시인의 도덕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구약시대에 종교와 도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때, 본 시에서 이와 같이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세속의 도덕과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시인의 종교적/도덕적 가치관은 큰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커녕 세속사람과 별 차이 없이 생활하고 주일의 회개의 기도로써 자신의 부도덕성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만한 자세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곧 고도의 도덕적 삶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도덕 그 자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고매한 인격과 이웃을 위한 삶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의 인자함을 흠모하고 스스로 세속에서 경건한 신앙인으로 단련되어야 하고 단련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회개하기 위하여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가피하게 인간들에게 열려진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끄러운 선택인 것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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