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선] 평
[별들의 고향]으로 대 히트를 친 그 이장호 감독이 19년만이 컴백해서 필리핀 ‘단기 선교’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내어 놓았다.
(줄거리)
서울 드림 교회에서 ‘해외 봉사단’이라는 이름의 필리핀 단기 선교에 나섰다.(영화에서 ‘이스마르’라는 가상 국가로 나온다). 정부군과 이슬람 반군이 대처하는 그런 나라다. 단기 선교팀은 목사를 비롯해서 장로, 권사 부부 등 총 인원 8명이 참여했는데 현지 한국인 선교사 (실제 영화의 주인공)의 도움을 받아서 필리핀 후진 곳에서, 이발봉사와 목욕 봉사, 찬양봉사, 그리고 유아 교육 봉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된 스케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한국인 현지 선교사라는 자가 신앙하고는 영 거리가 멀다. 우선 현지인들과 짜고서 가시적인 선교 성과를 조작해서 선교비를 받아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현지민을 불교 중으로 위장시켜 세례를 받게 하므로서 감동적인 장면을 일부러 연출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에서 온 선교팀들을 현지 한국 식당에 소개하면서 식당업자로부터 과다한 소개비를 뜯어내면서 현지에서 생활라고 있었던 것이다.
일행은 또 다른 깊은 곳으로 이동하는데 그곳은 차로 9시간이나 걸리는 외진 곳이다. 무더운 날, 간이버스로 이동하다가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고 기아에 문제가 생긴다. 현지인 운전사가 근처 마을 기술자를 부르러 가고, 일행은 휴식하고 있는데, 갑자가 ‘지역민병대’라는 이슬람 반군으로부터 포위당하고 총격 공격을 받는다. 목사가 배에 관통상을 입는다.
선교사가 이 목사를 치료하면서 선교사 전직이 이 필리핀에 선교하러 온 적이 있는 의사였음이 밝혀진다. 아지트로 이동되고 9명은 엄중한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 선교사는 나름대로 살아남는 요령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이 단체가 ‘단기선교’하러 온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냥 관광하려 온 자라고 말하라고 하지만 일부 열심 있는 교인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반군들은 이들 일행을 카메라 찍어서 한국과 필리핀 당국에다 협상 자료로 사용하려고 한다. 이슬람 반군이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금 10만 달러이며 또 하나는 반군 지도자를 교도소에서 풀어달라는 것이다.
불편한 억압 생활이 계속되면서 일행 중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히스테리성 발작들이 일어난다. 어떤 여신도는 방언이 터지지도 하고 부부로 온 장로 권사를 늘 티격태격 싸운다. 일행 내에 불화가 심화되는 것이다.
인질 기간이 길어지면서 반군의 가족들과 인질들 사이가 친밀해진다. 치약껍데기로 패를 나누어 족구를 하기도 하고, 아동들에게 산수도 가르친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협상은 지리멸멸하게 진행된다. 참다못해 반군 쪽에서 자신들이 내건 협상 조건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것이 바로 인질들을 하나씩 처형하는 것이다. 누가 나서겠는가를 놓고, 목사가 자진해서 먼저 죽겠다고 하지만, 이슬람 반군 쪽에서 거절한다. 상처 난 신체는 거룩한 알라신의 제물로는 적합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결국 부부로 참여한 권사가 ‘내 주를 가까이’ 찬송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희생하기로 하고 총대 앞에서 선다. 처형 직전에 마침 입금되어서 극적으로 총살형을 면한다.
일행내의 신앙적인 결집을 보고서 현지 선교사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의 과거사 속에 그도 아픔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어린 자를 물에서 대신 건져내고 죽었던 아버지를 이름을 부르면서 바로 이러한 고귀한 사랑이 곧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필리핀에 의료 선교를 하러 왔지만 반군에 체포되면서 그는 본인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반군 앞에서 성경책을 칼도 난도 짓했던 경험이 있고 부터는 그는 삐딱하게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내용은 이사야 44:1-2와 이사야 56:1의 내용이 섞어진 것이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라”
그런데 사태는 급변한다. 반군의 총지도자까지 풀려나지만 이슬람 반군은 약속대로 인질을 풀어주지 않고 두 패로 나뉘어 정부군의 공격을 따돌리려 한다. 그리고 일행들에게는 알라신 믿기를 강요한다.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를 따라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가시 난 몽둥이로 때렸다. 그 고문에 못이겨 일행들은 알라신에 대한 강요된 고백을 내뱉게 된다.
한 편 현지 선교사와 목사와 몇몇으로 따로 분류된 일행에게 반군의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목사가 알라신을 받아들이면 인질들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현지 선교사는 여기에 대한 통역을 하지 않고 그냥 목사보고 반군의 지도자와 악수하라고 시킨다. 아무 것도 모르는 목사는 반군의 지도자와 악수하고 잠시 풀려난다. 그 대신은 현지 선교사는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거꾸로 달려 총탄을 받아 사망한다.
목사와 일행은 다른 곳으로 끌려가서는 목사를 협박한다. 목사 외에 다른 교인들을 교수형 시키는 자세로 만들어놓고 다른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목사가 성경책에 난도 짓하면 다른 교인들을 살려두겠다고 말한다. 목사는 울면서 성경책에 칼질을 하고 온 일행이 풀려난다.
(평)
현지 선교사가 마지막으로 목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순교보다 더 거룩한 배교도 있습니다.” 바로 이 대사가 감독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감독은 두 개의 시선(視線)을 제시하고자 했다. 하나는 타인의 시선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시선이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순교라는 개념에 대해서 인간들이 너무 쉽게 들뜨거나 동화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정작 하나님께서 유발시킨 상황에서 순교와 배교는 간편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비기독교적인 편견에 맞서서, 감독은 실제 선교현장에서 보다 진지한 면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 반군을 선교 일행을 학살하고 감금했지만 반군 가족들 중, 장님이 된 어린 누이동생은 한국에 가면 치료받을 수 있다고 현지 선교사에게 소년병에서 말하고 그 부탁은 최종까지 살아남은 목사에 의해서 성취가능성을 보이게 된다. 이게 사랑의 승리라는 것이다. 원수 가족의 애환과 아픔에 동참하여 들어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에 부합되는 본정신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 같이 이슬람 반군에 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될 지경에서, 평생토록 자신을 학대한 그 남편을 권사는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한다. 따라서 다 같이 주님의 시선으로 보면, 아무리 어려운 곤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실천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감독은 던지고 싶은 것이다.
(복음적인 평)
하나님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인간과 흥정하지 않는다. 즉 “이것하면 살려줄게”도 아니요 “살려 줄 테니 이것 하라”고 제시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인간은 죽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버린 존재인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목적성을 부여하고서 마치 당연히 ‘살아있을 권리가 있는 존재’로 행세케 한다. “살기 위한 그 어떤 수단도 본인에게는 당연하고 정당함”을 인식시킨다. 이 대전제에 준해서 지금도 이슬람 반군도 활동하고 교회도 활동하고 있다.
두 위험한 단체가 필리핀에서 만난 것이다. 따라서 위험한 곳이 필리핀 밀림지역만이 아니요 북한 땅도 아니다. 따라서 “여행가서 납치 안 되고 무사히 돌아와서 나는 참 다행이다!”고 안심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모든 곳이 위험하다. 내가 살고자 하는 이상, 타인이 나에게 위협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위협을 주는 이슬람 반군의 입장이 되어 살게 된다. 내 살기 위해 남을 인질로 삼게 되는 경우가 내가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게 경쟁이요 모든 게 충돌이다. 바로 선교란 지금 우리가 놓인 이 자리에서 하라고 성령을 보내주셨다. 거기서 악마의 술책을 접하라는 것이다. 악마를 벌주고 모든 인간을 죽인 자로 간주하는 신에 대해서 악마는 인간을 인질로 삼아 최후의 보복을 가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따라서 선교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타인이나 교회가 이해하는 선교나 전도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날마다 죽기 위해 살아가면 된다. 이런 자만이 한국에서 일상생활을 하든지 필리핀에 선교라는 이름으로 놀려가든지 상관없이 늘 선교 중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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