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세계 유랑과 유대교
A 이스라엘의 멸망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2. 제1차 유대 독립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여 성전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1차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전도서〉·〈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슈모네 에즈레, 아미다라고도 함)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비르카트 하 미님)에 나자렛 사람들(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그 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 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제12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은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씌어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 찬양받으소서."
4. 제2차 유대 독립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키레네·키프로스·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바르코크바)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게 처형되었다.
1952~61년에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B 중세시대의 유대인
유대인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모슬렘 통치하에서는 기독교 국가에서보다 다소 억압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기독교 국가에 정착한 유대인은 모슬렘 세계에 서구의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 상인이 이러한 무역을 연결함으로써, 근동과 서유럽을 왕래하는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 유대 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그들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 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또한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중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2,13 세기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리 대금업은 때로 금지 당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자(1348-1349),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이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16세기 주변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Ghetto)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55년에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곧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난다.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게토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C 나치의 유대인 학살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나치즘의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독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후 의심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판 없이 투옥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33년 독일에는 50여 개 이상의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이들 수용소는 나치 친위대가 관장했다.
가장 유명한 수용소는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강제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다.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유럽에서 유태 인종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이 수립되면서부터 아유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된다.
매일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하루 1,000명 이상 죽은 때도 많았다.
대부분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했다.
강제 노역과 기아, 시도 때도 없는 처형으로 산목숨이 아니었다.
1945년 소련군의 진주에 따라 해방되었을 때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7,000명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인종 위생 캠프'를 설치하여 유대인을 포함한 900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D 유대교 역사
1.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경~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경~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2.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 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640경~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모슬렘 시대는 가온(Gaon 뛰어난 자. 6세기 -11세기)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빌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 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빌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이집트 출신으로 바빌론의 수라에서 가온으로 임명된 사디야 가온(Saadyah ben Joseph 882-942)은 유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유대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문법, 사전 편집, 시, 주석, 기도문, 달력 제정의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성경의 아랍어 번역이며 주석인 '타프실'(Tafsir)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 학자에게는 표준 성경이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 (Solomon Ibn Gabirol c.1021-1056)은 네오 플라톤 철학자로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바빌론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시적 철학 작품인 '고귀한 왕관'(Keter Malkhut)은 운율이 있고 모든 절이 성경의 구절로 끝나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찬양하는 성가이다.
이성에 근거한 사디야 가온의 철학은 마이모니데스 (Moses ben Maimon 1135-1204,보통 Rambam으로 부름)가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모슬렘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 팔레스타인으로 전전하다 이집트에 정착했다.
'미시네 토라'(Mishneh Torah, 토라의 반복1166-1176)는 지금까지의 할라카, 율법의 집대성이며, '모레 네부킴'(Moreh Nevukhim, 당황한 자들을 위한 안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
그의 이성에 대한 우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조화는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 후 그의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불살라졌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학자에게 철학적인 근거와 영향력을 줌으로 해서 그에 반대하는 논쟁은 끝을 맺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정립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유대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 보통 Rashi로 부름)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빌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통치하에서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모슬렘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3.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권)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 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슈)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주석은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월 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년 6월 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년 2월 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월 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년 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년 9월 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4. 하시딤 운동 (Hasidism)
이삭 루리아(Isaac Luria 1534-1572)가 이끄는 카발라 운동은 하시딤의 신조를 채택하여 그 가르침을 대중화시켰다.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 운동은 신비주의에 기초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다.(주전 2세기 마카비 반란에 동참했던 하시딤이나 12세기에서 13세기에 존재하던 하시딤이 아님)
하시딤 운동의 대표는 바알 쉠 토브(Israel Baal Shem Tov c.1700 - 1760)로 사람은 모든 생각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과업이다.
이러한 헌신은 기쁨과 무아경을 만든다.
하시딤 운동은 도브 벨(Dov Ber) ,잘만(Shneour Zalman 1747-1813)의 제자에 의해서 '하바드'(Habad, 지혜, 이해, 지식의 히브리어 약자임)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하시딤 운동은 종교적 체험에서 지적인 노력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원래의 하시딤 운동과 다른 점이다.
하시딤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나 특히 뉴욕, 캐나다, 이스라엘에서 활발하다.
뉴욕에서 포교하던 하바드의 최고 랍비인 멜루바비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1993년 1월 메시야로 선포되었으나, 1994년 6월 92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죽었다.
5. 하스칼라 (Haskalah 계몽주의)
유대인의 계몽주의는 중세의 금욕주의와 관념론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는 휴머니즘을 이상으로 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주의는 17세기 서구화된 네델란드와 이탈리야 유대인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18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역사, 철학, 과학의 습득은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넓혀 갔다.
독일에서는 멜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5-1786)의 노력으로 계몽주의가 싹트게 되었는데, 그는 게토의 벽 안에 갇혀 있던 유대인을 세속적인 유럽 세계로 이끌어 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관용이 포고되자 세속적인 교육이 유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작가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월간지 HaMeassef가 발행되었다.(1783-1829)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으로 그들을 제한하는 대신 주변의 세계와 융합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계몽주의는 유대 사상과 삶의 방식에 현대화를 촉구하여 이후 자유주의, 시온주의를 낳게 하였다.
6. 현대 유대교(1750~)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 결과 멘델스존(1729~1786) 같은 계몽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 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딤 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끼리 다투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딤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1860~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열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 J.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 데 이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인티파다, 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예수관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야브네 시대(70~135) 이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히브리대학교 교수이며 시온주의자였던 J. 클라우스너(1874~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밸푸어 선언을 반대한 C. J.G. 몬테피오레(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 했다.
독일의 진보적 랍비 레오 베크(1873~1956)는 예수를 일컬어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의 보수적 랍비 밀턴 스타인벡(1903~50)은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했다.
비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한 마틴 부버(1878 ~1965)는 예수를 대형(大兄)이라고 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중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친교를 권하고 성서와 신학 공동 연구를 격려했다.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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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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