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 생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주기철(朱基徹, ~)은 출신으로 였다.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福)이었다. 목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거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다. 아울러 목사와 더불어 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아호(雅號)는 소양(蘇羊)이다. 에 의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생애

학창 시절

1897년 11월 25일 읍내면 백일리(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에서 주현성(朱炫聲)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주기복(福)으로, 세례 후 '기독교를 철저히 믿는다'는 뜻의 주기철(朱基徹)로 바꾸었다.

웅천개통학교(현 )를 졸업하고 (현 )에서 유학한다. 졸업 후 1915년에는 (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에 2기생으로 입학했으나 로 1년 만에 중퇴하고 고향인 웅천으로 귀향한다. 이후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여 웅천교회의 집사로 추천되기도 한다. 1919년에는 남학회(南學會)를 조직, 에 참가한다.

청년기

1926년 를 졸업하고 부산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 은사 으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 부임해줄 것을 요청받는다. 요청을 수락하여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초빙목사로 부임한다.

이 때 자기 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설교 로 신앙실천과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의 를 거부한다.

수난

1938년 4월,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다가 1차 검속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에 풀려났다. 그러나 두달 후인 8월 제2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다시 1939년 1월 풀려났다. 같은 해 10월에는 제3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9년 12월 19일 불법 총회로 결의된 의 평양노회로부터 신사참배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했다.

1940년 2월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설교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설교가 된다. 같은 해 9월 제4차 검속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 함께 체포되었다가 1944년 복역 중 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인해 48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학력

졸업.1916년 (옛 ) 졸업.192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졸업.

1963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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