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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과 상전
골로새서 3:22-4:1 종과 상전 인간 사회란 노동과 노동의 결집으로 형성됩니다. 농사를 짓더라도 협력과 분업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10에 보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회 구성에 보탬이 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사회가 없는 자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자는, 이스라엘 내부에 ‘절대적 자아’란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체를 깨는 자를 범죄자로 여겨서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는 곧 ‘타인을 위하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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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의 책망
갈라디아서 2:11-14 사도의 책망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에게 한 책망은, 특정 개인의 형편이 복음적 삶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에게 ‘유대인’으로 껍질이 일단 벗겨졌다고 여기고 복음만을 전파하라는 겁니다. ‘유대인’이라는 껍질을 벗기에 베드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곧 복음 자체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제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2:15-16에 보면,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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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경륜
에베소서 3:1-3 하나님의 경륜 창조란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피조물 입장에서 자신이 새삼 손댈만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없음’의 형편에 있었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있음’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 뿐입니다. 그 계획의 추진에 의해서 생겨난 그 피조세계의 일부가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계획을 우리 피조물에게 알려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주고받음이 성립됩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공로와 성과를 찬미하기 위해 피조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고 있는 천국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천국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특혜 받은 이방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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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갑주의 내용
에베소서 6:13-17 이 본문에 나오는 주요 단어들을 나열하면 이러합니다. ‘진리’, ‘의’, ‘평안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 ‘하나님의 말씀’ 등입니다. 이러한 단어 안에는 전부 악마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적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단어라는 말씀입니다. 악마는 이 단어들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성도는 간파해야 합니다. 악마도 얼마든지, 도리어 더 빈번하게 이 고상해 보이는 단어들을 가지고 여전히 이 세상을 정신적으로 지배해 오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를 골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를 가지고 어떤 예상되는 결과를 추구하느냐를 봐야 합니다. 이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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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
디도서 3:10-11 이단‘스스로 정죄한 죄’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욱 몰락에 이르도록 가속화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영생의 길이 아니라 멸망의 길을 고수하고 그쪽으로 질주하는 삶입니다. 본인 안에 들어있는 괴물에 의해서 본인이 철두절미하게 지배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모든 것은 다 내 덕이다.”라는 인생관으로 버티는 자입니다. 이들도 당연히 하나님을 앞장 세우거 거론하지만 그냥 하나님에 대해 걸쳐놓는 식입니다. 전혀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무가치되는 것을 용납못합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유대인들의 공통점입니다. “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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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사람
골로새서 3:7-10 새 사람인간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사실을 감히 못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옛 사람의 특징은 바로 ‘자기 파멸’을 거치지 못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문제점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하다’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악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난 뒤, 인간의 사악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도저히 회개를 안 하겠다고 버티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창조주, 즉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창조 바탕을 본인에 의해서 새로 깔겠다는 심보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무엇을 결정하든 항상 옳은 결정임을 증명해줄 그런 바탕으로 자신의 근거로 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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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남자에 대한 교훈
디도서 2:6-8 젊은 남자에 대한 교훈 젊은 남자는 죽음에 대한 감각보다 생동감이 여전히 활발하게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넓고 그속에서 멋지게 자기 할 일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확고한 자기만의 자리가 영광과 더불어 장만되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입니다. 미래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지금보다 훨등하게 좋은 시절을 갖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좌절하기에는 아직 못 살아보고 못해 본 일이 너무 많아 포기할 의사가 없는 그런 시기의 사람입니다. 즉 젊은 남자는 자신에 대한 평가나 인생 성적을 아직 내릴 대상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공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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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막의 기능
히브리서 9:6-10 장막의 기능 성소 안에 장막이 있습니다. 성소 공간을 둘로 차별화하는 장치입니다. 장막 이편과 장막 저편으로 성소 공간이 나뉘어집니다. 성소 자체가 이 세상과 차이나는 공간이라면 총 공간이 세 개가 되는 셈입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구분되는 선과 악의 세계, 그 밖에 더 큰 범위를 지닌 선과 악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성소 안과 밖은 일반인의 죽음으로 가름한다면 성막을 가운데 구분되는 두 공간은 예수님(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로서 지성소 안의 세계는 예수님의 살과 피만 효능이 있는 공간이기에 기존의 모든 인간의 노고를 배제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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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움에 참예
빌립보서 4:14-17 괴로움에 참예복음으로 인해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선물에 대해 진실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마게도냐 지방에 복음 전할 때에 빌립보교회가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행 16:12) 이 빌립보 교회에서는 ‘루디아’라고 하는 자주 장사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 여인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고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행 16:15) 빌립보 교회에서 비롯 바울 일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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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자의 부활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0:4-6장에서 이렇게 둘로 구분 짓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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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빌립보서 3:7 그러나 성도는 필히 ‘그러나’가 자기 인생에서 튀어 나온 것으로 자신이 전과 다른 인생임을 압니다. 사도는 주저없이 자신의 자존심과 과거 명성을 파괴합니다. 일종의 ‘자기 때리기’입니다. 열심히 교회를 핍박했을 때는 ‘자기 파괴’가 아니라 반대로 ‘자기 높이기’였습니다. 이런 자신을 반대로 행동하게끔 한 그 분을 사도는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즉 사도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자기 파괴’를 동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전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냐를 파악하는데 있어 사도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도입합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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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주를 유발하는 복음
갈라디아서 1:9-10 저주를 유발하는 복음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저주’란 모든 것들에 대하여 파괴를 도모합니다. 아무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가치 있다고 우기는 것들에 대한 반대요 공격입니다. 따라서 ‘저주’의 등장은 곧 ‘전쟁 선포’와 같습니다. 봐주거나 못본척 하거나 누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주는 구체적으로 감행이 됩니다. 이 저주 앞에서 세상적인 그 어떤 고상함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선함도 저주를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선함은 없음”를 통보하면서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를 유발하는 원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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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려주는 영
고린도전서 15:50 살려주는 영고린도전서 15:45에 나오는 ‘산 영’과 ‘살려 주는 영’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살았다’ 혹은 ‘살려 준다’가 성립되려면 그 바탕으로서는 ‘죽음’을 뜻하는 것들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첫 번 아담은 흙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흙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흙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은 흙이 아닌 ‘산 영’이 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살려 주는 영’에 있어서는 ‘산 영’ 과 ‘살려 주는 영’ 사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산 영’이라고 인간을 표현했지만 실은 ‘살려 내시는 분이 아니면 결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반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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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주심
디도서 2:13-15 자신을 주심예수님은 자신을 주셨다는데 우리가 받은 적이 없다면 어디서 배달 사고가 일어났지요? 인간은 주님을 인간 쪽에서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멸망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그 독생자와 더불어 이 세상 전부를 저주 아래 두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인간들이 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살해하고 그 뒤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들은 자신의 결정이나 선택이나 행함에 비중을 두고면 평소에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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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4-7 항상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외부인이 보면 ‘주님’께 지독스럽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울의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것에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모든 일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하게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이 무가치하게 본다면 이는 인간들의 타고난 본심에 대치되는 일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대화할 때,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해낸 일들을 내어놓고서 서로의 가치를 견주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사도 바울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 일을 내어놓는데 사도는 주님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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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상태
에베소서 1:13-14 구원 상태구원이 된 상태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은 단어를 동원합니다. ‘진리의 말씀’, ‘복음’, ‘믿음’, ‘약속의 성령’, ‘인치심’, ‘기업의 보증’, ‘구속’, ‘그 영광’, ‘찬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개념들과 오늘날 개인이 이 현대사회를 살면서 흔히 내놓는 개념들과 비교해 보세요. ‘돈’, ‘주택’, ‘음식(맛집 탐방)’, ‘건강’, ‘출세 및 성공’, ‘여행’, ‘스포츠’, ‘공동체’, ‘국가 경쟁’, ‘실력’, ‘자격증’ ‘권력’ 같은 단어들이 비교 대상이 될 겁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소유’해야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내 것이 될 경우에만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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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몸 세우기
에베소서 4:11-12 그리스도 몸 세우기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선물이요 상급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몸을 세우는 일에 사람을 동원시키셨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물론 인간의 몸이 지탱하는데도 타인의 도움이 여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최종 판단은 인간 본인 관리 하에 있지만 늘 타인의 손길을 요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을 하나 세우는데도 혼자서 되지를 않습니다. 온 식구가 총동원 될 판입니다. 즉 가정 일이 남의 일이 아닌 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의 일’이 될 수 상황 속으로 성도를 발생시켰습니다. 단순히 자기 몸을 세운다든지, 자기 가정을 세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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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층천
고린도후서 12:1-4 삼층천‘하늘’과 ‘땅’ 개념은 벌써 인간들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땅’이요 그 푸른 창공은 ‘하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면,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 곤란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땅 밑’이라는 장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소위 ‘음부(陰符)’ 곧 ‘저승’이라고 표현한 곳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시편 6:5에 보면,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음부 개념과 반대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낙원’입니다. 누가복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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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히브리서 10:19-20 길 인간 세계에서 사실상 ‘길’은 필요치 않습니다. ‘길’이라는 자신이 출생해서 만나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전제로 할 때나 성립되는 것인데 인간들은 아무리 탐구해도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를 확증할 증거를 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을 가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자포자기하고 ‘길이란 애초부터 없다’로 결론 내립니다. 행여 주위에서 천국 길을 누군가 사모한다면, 어쩔 수 없이 비웃게 됩니다. 있지도 않는 환상을 쫓지 말라고 핀잔을 줍니다. 그리고 있지도 않는 길 찾는데 정력도 돈을 소모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충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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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안에서의 기도
골로새서 4:2-3 복음 안에서의 기도충격이란 자신이 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발생되는 겁니다. 복음은 충격입니다. 왜냐하면 전혀 예상 못할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평생에 걸쳐 애썼던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신에게 비는 것과 복음이 복음답게 전달되기 위해 빌어야 하는 것과 확연하게 차이납니다. 자신이 잘되기 위해 비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조치하시는 심판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반항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데 인간들은 그 의도를 알지 못한 채 계속 이 세상과 그 속에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와 관련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