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쓴 뿌리와 거절감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의 방법 (용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단지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다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누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주십니다. 에베소서 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용서함’이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의 기반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용서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용서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남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4:30,32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서로 용서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13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피차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뿌리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굉장히 큰 열쇠가 됩니다.
여러분에게 용서에 대해 잘못된 개념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에 따라 해야 된다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용서는 사실 그것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다릅니다.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 상처를 입거나 누가 나를 대적하거나 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깊은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기도하고 자유롭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마치 영웅 같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냥 삼켜버립니다.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 나는 괜찮아, 문제없어’ 그리고 속으로 다 삼켜버리고 ‘나는 영웅이다’라고 느낍니다. 이 사람들은 문제를 이렇게 다루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나는 용서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그냥 속으로 삼켜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만약 내가 그런 영웅같이 느낀다면 몇 년 후에는 그 문제들이 다시 더 발전이 될 것입니다. 삼켜버린 문제들이 이 속에서 쌓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안에 있는 것이 점점 차 올라오기 시작해서 아주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굉장히 성질이 급해지고, 그 사람의 첫 번째 문제로써 야기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마음 안에 있는 감정적인 문제들이 육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합니다. 소화기관, 근육, 뼈 같은 곳에도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 감정이 우리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생각하기를 육체의 질병이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고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웅이라면 우리 삶 가운데 직면할 수 있는 위험스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굉장히 쉽게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안에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거나 근육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감정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감정의 정도가 다릅니다. 용서는 그 일어난 일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용서해야 되겠다.’ 그 다음 잘못된 개념은, 어떤 사람은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만약 내가 말하기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묶어버리는 맹세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맹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이 맹세를 깨뜨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아니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어’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굉장히 심각해집니다. 그것은 우리 감정을 감옥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용서를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에게 아주 조금 빚진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이 목덜미를 잡았습니다. 28절에 보면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관이 엎드려서 간구하고 간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동관이 빚진 돈은 갚기 쉬운 금액이었습니다. 30절에 보면 그 사람이 말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용서하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번역에 보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33절-35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옥으로 가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 의미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묶인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가 평강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맹세를 하셨다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나는 그것 때문에 너무 상처받고 너무 아파서 정말 용서할 수 없어’라고 느낍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감정을 이해하십니다. 여러분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용서하고 싶은 우리 감정이 나는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만약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영혼을 주시고, 영혼은 지 정 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감정보다 더 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만약 감정이 의지보다 더 강하다면 우리는 벌써 병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때는 의지가 감정보다 더 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우리 속 안에 있는 느낌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함을 벌써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함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그 진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용서함으로 우리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나는 용서하겠다.’ 그렇게 결정하면, 그리고 그 결정한 대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감정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용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용서할 때 첫 번째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통해 이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하면 먼저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한 것이 있다면 그것부터 하나님 앞에 깨뜨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구하기를 “주님, 그 모든 맹세를 다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그런 잘못된 맹세를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판단과 쓴 뿌리로부터 그런 맹세가 나옵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누구를 용서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그 사람이 살았든 죽었든지 간에, 그 사람이 한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남자이든, 그것이 다른 나라 종족이든지, 그것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 누구를 용서한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가 왜 그들을 용서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한 것에 대해 용서합니다.’라고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네 번째, 그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서 이 사람을 향해서 혹시 나쁜 태도나 잘못된 태도를 취한 것이 있다면 그런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꼭 기도해야 합니다.
1. 맹세를 깨트리라.
2. 누구를 용서하는지 말하라.
3. 왜 용서해야 하는지 말하라.
4. ‘나를 용서하십시오.’라고 기도하라.
이것이 바로 용서함에 대해 기도할 때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18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다는 의미는 바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까운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통 우리들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관계가 깨어졌다면 우리는 화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놀라운 능력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해할 수 있습니까?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나쁘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 가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에게 대해 미운 감정이 있었던 것에 대해 사과할게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올 것을 기다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가세요. 여러분이 먼저 그 사람에게 가세요. 남편과 아내이든지, 형제와 자매이든지, 기독교 공동체 안이든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든지 화해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용서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21,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진짜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했으니까 됐어 끝났어!”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용서했는데 다시 생각하면 물론 생각이 기억이 납니다. 영어 속담에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가다가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우리가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절대로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가끔씩 그 기억들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다시 보면, 만약 그 사람과 같이 사는 상황이라면, 아니면 꿈을 꾼다면, 정말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가다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사실 자체가 우리가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이 나면 다시 용서하십시오. “나는 용서했는데 지금도 용서하고 미래에도 계속 용서할 것이다.” 이게 바로 진짜 용서입니다.
절대로 성경에서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는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만약 여러분 안에 분명히 용서해야 될 사람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보여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을 때 용서함도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제8장 내적 치유와 용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해코지 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내 힘으로 보복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실제로는 나를 고문하고 학대하는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떤 의사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 중에서 용서만 제대로 한다면 약 50% 정도는 금방이라도 퇴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해코지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보다 실제로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용서의 최대의 수혜자는 용서하는 사람 자신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이다.
1. 용서와 회개가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는 회개와 함께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용서와 회개가 없는 내적 치유는 불가능하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비록 신자이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란 쉽게 말하면,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가 회개할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옥가야 마땅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무자비한 종의 비유
우리의 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런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처분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18장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1-3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고통을 받는다(마 18:34-35).
“옥졸들에게 붙이셨다”는 말은 옥졸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말이다. 인권이 최고로 발달한 미국이나 한국의 교도소에서도 때로 간수들은 죄수를 무자비하게 다룬다. 하물며 인권 사상이 거의 전무한 당시의 옥졸들이 무자비한 종을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이냐?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크나 큰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일만 달란트, 6,000만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나 되는 엄청난 빚을 공짜로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윽박지르며 용서하지 않는 이 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고슴도치같이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죄인이다. 알게 찌르고 모르게 찌른다. 문제는 내가 남을 찌른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남이 나를 찌른 것은 쉽게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복한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나를 괴롭히고 해코지를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수록 내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증오심이 지나치면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뛴다. 오래 되면 화병이 나서 몸져눕는다. 신체적인 병의 70%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며 분노에서 오는 병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사람은 ‘세월이 약이다.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심은 세월이 간다고 잊혀 지지 않는다.
잊혀 진 것 같지만 깊숙이 박혀 있다가 짜증나는 일이나 언짢은 일이 생기면 온갖 형태의 추한 몰골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극도의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 관계나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이것들이 바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무자비한 종이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당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힘입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해코지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죗값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100 데나리온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대신 희생시키신 값은 6,000만 데나리온이다.
여러분은 어떤 죄 값을 갚겠는가? 100데나리온인가, 6,000만 데나리온인가?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축복까지 해 주라고 말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병은 이 세상의 어떤 약(藥)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미워할수록 내 가슴에 굵은 대 못을 망치로 쾅, 쾅 박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을 치유하는 약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나를 저주하고 나의 신세를 망친 사람을 축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의 가시를 뽑아내는 유일한 약이다. 나의 원수를 축복할 때 나를 괴롭히던 증오의 가시가 뽑히고 내 심령에 평강과 안식이 임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3. 용서하지 않았을 때 받는 불이익들
형제를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그 반대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마 6:14-15; 막 11:25; 롬 12:19-21; 요 20:23).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내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으면 그 화살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날아간다.
➭영, 혼, 육의 고통을 당한다(롬 2:9-10; 8:6; 사 48:22; 57:2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9-1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하나님이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마 5:23-25; 호 6:6; 암 5:21; 사1:11-18).
예수님은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5).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
용서 않고 금방 분을 삭이지 않으면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고후 2:10- 11; 엡 4:26-27).
죄 지은 형제를 제 때―해가 지도록 즉 하루가 지나기 전―에 용서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공격할 팔 발판(foothold)을 주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통해, 분노. 증오, 배신감, 죽음과 자살의 영이 역사 하여 이후에 용서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4.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이런 불이익들의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서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나는 잘 했고 남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 폭행이나 어른의 폭행 등과 같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사적인 보복은 절대 금물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벧전 2:22-23).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당했다기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은 보지만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나를 이렇게 대해’라면서 복수의 칼을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죄 지은 형제를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야 한다(엡 4:32).
➭용서해준 것 같은데 기도 중 용서해 주지 않은 것같이 생각된다.
사역을 할 때 이런 간증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표면적으로는 용서한 것 같지만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았을 경우에 성령이 다시 중심으로 용서하게 하시는 경우이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마 18:35).
내가 죄 지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했나를 알려면, 그 사람이 잘되었거나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배가 아프고 잘못 되었을 때 고소한 마음이 생기면 중심으로 용서했다고 할 수 없다.
➭보상 심리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보상 심리가 있다. ‘내 원수의 빚은 공짜로 탕감해 주면 내가 받을 빚은 누가 갚아주는가? 내 원수를 누가 갚아 줄 것인가?’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가해자가 먼저 사죄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용서하셨고(롬 5:8), 간음한 여인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셨다(요 8장). 특히 고의적으로 해를 가한 가해자일 경우 가해자 먼저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때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용서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람이며 가해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다.
5.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얼른 나에게 죄 지은 사람만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서의 대상은 하나님, 나에게 죄 지은 형제 및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
충격적인 사건이나 뜻밖의 재앙을 당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why me?)라면서 무엇보다 먼저 이런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원망한다. 욥이 재앙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악담을 했다.
➭다른 사람들
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본인 자신
자신이 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연민의 정과 함께 피해자가 된 그 사실을 증오하여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완벽주의, 율법주의, 부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자신마저 용서하고 축복할 필요가 있다.
6. 용서하는 방법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신자는 누구나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그러므로 용서는 직설적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 저는_____죄를 지은 _____를 용서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_____를 용서하기를 원합니다.”“하나님 제가___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용서할 때 매인 것이 풀린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가능하면 가해자 본인에게 직접 용서를 해주면 좋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가해자의 사망, 원거리에 거주, 행방불명 등―으로 가해자를 직접 용서하기 힘들거나 가해자가 아직 용서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유의할 사실은 마음으로 지은 죄는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할 것이며, 성적인 죄를 배우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고백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용서할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 내적 치유가 주는 심령의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전 2:24)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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