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들어갈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이 하늘, 이 땅이다. 그러나 새롭게 된 세상이다. 구속의 장면이 펼쳐질 장소는 바로 이 삼림들, 이 들판들, 이 도시들, 저 거리들, 이 사람들 속에서이다. 비록 현재는 전쟁터와 같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성의 때를 향해 소리지르며 다투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나 그때에는 이상의 모든 장소와 배경들은 승리의 들판이요 추수의 밭들이며 그 밭들에 눈물로 뿌려졌던 씨앗들이 영원한 곡식단들이 되어 창고에 들여질 것이다.”(에드워드 투르네이)
새 땅에 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 65:37-25와 66:22-23, 베드로후서 3:33; 요한계시록 21:3-4 등이다. 베드로의 관점을 보면, 비록 현재의 땅이 다 “타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될 새 하늘을 창조하실 터이니 우리는 이를 소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 하늘은 악과 불의는 모두 제거되고 의로움만이 존재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 중에서 새 땅에 관해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21:1-4일 것이다. kainos(새로운)라는 단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상에서 요한이 본 세계는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주가 영화롭고 새롭게 된 상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절에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땅 위에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곳이 바로 하늘이기에, 장차 올 영원한 삶의 영역에는 현재처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진 상태가 아니며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마치 새 땅에서 사는 것처럼 새 하늘에서도 계속해서 살 것이니 새 땅은 새 하늘에 대한 포괄적 대명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은 은혜 언약의 골자를 이루는 핵심 약속이라 할 수 있다(참조. 창 17:7; 출 19:5-6; 렘 31:33; 겔 34:30; 고후 6:16; 히 8:30; 벧전 2:9-10).
그러므로 새 땅에 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용기를,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이 세상 속에서 낙관적으로 살게끔 한다. 비록 악이 이 세상에 횡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무한한 안위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충만하게 노출시키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노력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값진 것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현재의 봉사를 통해서 새 땅의 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이미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들이 번역되기도 하며 많은 종족과 나라들이 복음화되기도 하며 신자들이 새롭게 되고 문화가 변혁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위해 현재 이곳에서 행해진 일들이 장차 영원세계에서 그 충만한 진가의 빛을 발할 것이다.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역사가 끝날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다.
부록: 종말론에 관한 최근의 경향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 속에서 발견되는 강조점들이 눈에 띄게 변천하였음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의 하나였던 알브레흐트 리츨은 하나님의 왕국의 개념이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리츨적 이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우리는 아돌프 본 하르낙을 들 수 있다. 하르낙은 예수님은 종교와 도덕을 아주 훌륭히 결합시켰으므로 종교는 도덕의 영혼으로, 도덕은 종교의 육체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모든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성 등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그는 단정한다.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예수님의 상과 하나님의 왕국의 이해에 대항하여 지난 19세기 말엽에 강렬한 반항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리츨의 사위인 요하네스 봐이스는 하나님의 왕국에 리츨의 학설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진화론적이고 비종말론적 사고경향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비난했다. 봐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신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왕국에 대한 봐이스의 견해는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해 동의되고 확대되었다. 봐이스와 함께 슈바이처가 행한 위대한 신학적 봉사란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 모범자나 윤리의 선생으로 그리려 했던 구식의 예수님 상을 철저하게 깨뜨렸다는데 있다. 슈바이처는 그의 초기 저서에서 개진되었던 왕국의 종말론적 이해를 계속해서 견지하면서도 바울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종말의 현재 속으로의 돌입을 인정하는 견해를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
봐이스와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 아니라 미래적이었지만(임박한 미래) 도드에게 있어서는 이 왕국은 이미 도래했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미래 종말론의 대부분은 유대 묵시문학의 잔영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허구적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도드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진정한 공정을 기했다고 할 수 없다.
종말론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한 신학자 게르할더스 보스는 1893년부터 1932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신학을 가르친 교수였다. 보스에 따르면, 신약의 신자들은 이 세대(세상)와 장차 올 세대(세상) 속에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올 세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의미에서 보스는 도드와 입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이라는 장에서 보스는 주장하기를, 신약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론을 형성시킨 것이 종말론이었지 결코 종말론을 형성시킨 것이 구원론이 아니었다고 한다.
종말론에 관한 “구원사” 학파의 대표적 학자 중의 하나인 스위스의 현대 신학자인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접근방법을 묘사하는 용어로 구원사란 단어를 선호한다. “구원사”란 뜻은 하나님께서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심을 의미하며 이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의 중심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고 부활이 놓여 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견해이다. 쿨만에게 있어서 성경의 종말론이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적 요소와 아울러 이미 성취된 현재적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몰트만은 성경의 종말론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종말론은 교의학에 붙어 있는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체 메시지를 열어젖힐 수 있는 열쇠라고 주장한 몰트만의 공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가진 견해의 문제점 첫째는, 하나님의 왕국을 단지 미래적인 것으로만 보는 그의 일방적 강조점에 있다. 몰트만에 대한 두 번째 반대 이유는 그가 계시를 전적으로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고 있는데 있다. 몰트만에 대한 세 번째 어려움은 그가 미래를 모호하고 단순히 형식적이며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데 있다.
역사의 최종적 종말론적 완성은 아직도 미래 속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개혁주의 종말론]을 읽고 나서
안토니 후크마는 “시작된 종말론”(제1부)과 “미래 종말론”(제2부)이라는 큰 맥락에서 개혁주의 종말론을 전개하고, 부록으로 최근 종말론의 흐름을 싣고 있다. 후크마의 책은 “성경주해”에 기초하여 논증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를 믿고 이 성경에 의지하여 신학하는 개혁파 신학도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배우는 시각으로 책의 주제를 몇 개 선정하여 생각한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종말론은 철저히 “성경”에 기초해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겸손하게 순종해야”
후크마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기초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만 종말론 사상을 전개한다. 성경의 계시 아래서만 종말 신앙을 갖도록 강조하면서 성경의 계시 앞에 겸손하게 개인과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 논할 것을 권면한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 종말론 신학의 기초로 본다. 그는 제3장, “역사의 의미”에서도 “역사 특히 구속사는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을 계시”하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 있다.”고 한 견해를 인용하며(p. 60) 역사적 사건을 판단할 때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7장, “육체의 죽음”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이나 칼 바르트가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 부분에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크마는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성경이 죄와 죽음을 철저하게 연결시키는 부분을 부정하게 된다고 본다. 무엇보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 나아가 부활신앙을 부정하게 되기에 후크마는 바르트의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성경에서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한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 대해서도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라면서 영혼불멸사상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반대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라는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후크마는 “중간상태”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라면서 이는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7장, “육체의 부활”에서도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면서 성경은 다만 약간의 힌트는 주지만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이 부분에 침묵한다고 내세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는가? 아니다. 후크마는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라면서 주님이 이루실 세계에 대해서 오히려 산소망, 건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후크마는 제19장, “영원한 형벌”에서도 지옥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있다고 믿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면서 지옥이 있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처럼 순수한 재림신앙을 방해하는 첫째 세력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후크마는 이들의 견해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종말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만큼 사고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 사는 존재요 우리 자신의 종말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하고 희망찬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만 계시하셨다. 후크마는 고전 2:9을 인용하면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지만, 놀라운 세계를 상상하며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다른 교리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종말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건전한 쪽으로 빠져들어간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알려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겸손한 자세를 상실하는 자세다. 이런 면에서, 후크마는 철저한 성경 주해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계시를 참으로 소중히 여긴다. 갈수록 혼탁해지는 종말의 세상에서, 역사 앞에 겸손하고 미래의 일에 대해 겸허하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실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이 오늘을 사는 신자의 성경적인 내세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천년기론에서 재림신앙을 강조: “성경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 배격”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는 천년기론을 네 가지 입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무천년의 입장”에서 전개한다고 밝힌다. 본 책에서 후크마가 무천년기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재림의 기대”와 “현재의 삶”이다. 그는 제10장, “재림의 기대”에서 “그리스도의 재립에 대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했다고 강조한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후크마는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종교적 확실성”(pp. 14-15.)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선을 행하며 살았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에게 재림신앙이 없다면, 긴장감도 없어지고 산소망도 없어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되므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후크마는 “재림 신앙”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재림을 믿지 않는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실수를 하여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울에게는 원래 종말신앙이 없었는데,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본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는 “재림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분명히 깨어 경성할 것을 강조하는데, 재림 신앙이 없어지면 미래에 대한 소망도 식어질 뿐만 아니라 긴장감이 생기기 어렵다.
그러나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면서 이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며 연약한 인간들에게 산소망을 심어준다고 강조한다. 제20장,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라면서 내세에 대한 산소망을 강조한다.
3. “이미”와 “아직”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
후크마는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에서 신약의 종말론을 특정지워 주는 특징은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 관계라고 한다. 그는 제4장 “하나님의 왕국”에서도 건전한 종말론을 가진 신자는 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후크마는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시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을 거듭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서도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면서 현재에 대한 강조는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의 관계를 “연속성”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한다. 균형잡힌 종말론은 결국 오늘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으로 “일반은총”을 존중하며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오늘과 내일을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은 영원한 왕궁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데 아주 유익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후크마는 이런 긴장 속에서도 기독교인은 “승리”를 확신하는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D-day 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 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는 쿨만의 말처럼 재림신앙이 있어야만 승리의 날을 향해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후크마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은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오늘 주어진 삶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
4. 전인적인 관점을 강조한 종말론
후크마는 성경은 전인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헬라철학처럼 이원론적인 사고는 결코 성경적인 종말론에 맞지 않다고 본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서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는 부활한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간상태의 교리에서도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되며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라면서 우주의 종말도 “갱신”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한다. 이러한 전인적인 생각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갱신, 문화 창달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책임성을 일으킬 수 있다.
5.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강조
후크마는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한다.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이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역사의 종말이 임한다. 그는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면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었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완성될 것을 기대한다.
후크마가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본 예는 제12장 “특별한 징조들”에서도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지는 부분에서도 여러 가지 입장을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논리를 전개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본토”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는 이스라엘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면서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라고 희망한다.
특히 재림의 때를 알려주는 징조 중에서 “배도”를 강조한다. 후크마는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면서 배도를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을 심각한 배도로 본다.
오늘의 세상과 기독교 현실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너무나 멀리 간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기 보다 돈과 명예와 정욕을 예배 대상으로 삼는다. 예배당에서 예배하지만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종말이 없을 것처럼, 인간을 즐겁게 하는 예배들이 늘어간다.
가장 큰 배도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을 윤리 선생 정도로 인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들은, 브라운 교수가 [이단과 정통]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론을 부정하는 이단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거나 다른 견해를 첨가하거나, 예수님 자체를 왜곡하는 일이 늘어가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상황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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