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혁주의 종말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15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비판

   1) 세대주의는 성경 계시의 근본적 통일성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 세대주의 체계가 노출하고 있는 최대의 난점은 구속역사의 다양한 기간들 간의 차이점들이 그 역사의 근본적 통일성을 제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만일 누구라도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통일성을 공평하게 취급하지 않고 여러 다양한 시기(세대)들 사이의 심한 차이와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면, 그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종합적, 영원적 구속사역의 진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적대감 내지는 분리의 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제거되었다(엡 2:14~15)는 사실을 신약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아직까지도 천년왕국 시기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다루고 있습니까? 왜 그때에 (천년왕국 시) 유대 인들이 더 호의적인 지위를 얻고 이방인들보다도 더 높아지게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들의 답변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세대주의적 틀의 요청 때문에 신약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이 제거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바로 신약성경 가르침 그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점이다.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 사이의 비연속성의 원리가 점진적 계시의 원칙을 묵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세대주의 신학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원리들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항상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경우 그것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구약의 약속들이 있기 때문에, 이 약속들은 아직도 미래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온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서 있는 언덕들 중의 하나를 구약에서는 종종 의미하고 있다. 신약은 이 용어들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여기서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용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일군의 구속받은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한 요한 사도가 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은” “새 예루살렘”은 유대인 신자만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도 큰 포괄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있으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 교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없단 말인가? 물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자들의 미래가 이방인 신자들의 미래와 분리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미래는 동시에 이방인들이 소망하는 미래이기도하다. 즉 그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궁극적 영화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일천 년 동안 계속되어질 팔레스틴 지방에서의 정치적 왕국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영화롭게 새로워진 땅에서 함께 공유하고 나누게 될 영원한 축복 상태라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구약은 장차 미래의 지상적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위대한 구절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미래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곤 한다. 사실상 구약은 이러한 천년통치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천년기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종종 해석되고 있는 성경 구절들도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결정체인 새 땅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 성경은 유대인들이 천년기에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여러 구약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이스라엘의 본토 회복에 관한 구약 예언들이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로운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대주의자들과 서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영화로운 미래의 세계가 단지 천년기 에만 국한되는 것으로서는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영원한 상태로 계속된다고 주장한. 이 영화로운 미래는 이스라엘인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받은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언들을 일천 년 동안 팔레스틴 지방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주의적 민족주의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5)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뒷받침을 결여하고 있다.

   6) 교회는 괄호에 해당하는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배척되어야 한다. 첫째로,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구약은 결코 교회를 예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 

   7) 그리스도가 다신 오신 후에도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후에도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세대주의적 사고에 있어서 휴거가 그리스도 재림의 최종적 단계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십사만 사천 명)와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칠년 환난기 동안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오직 중생한 사람들만이 천년기가 시작 되는 때에 이 땅에서 살고 있을 것이지만, 이런 사람들의 수많은 후손들이 천년기 동안에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교회(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가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신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또한 구원 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8)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천년기는 요한계시록 20:4-6에서 묘사하는 천년기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신자들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는다. 라이리는 이스라엘의 지상적 목적은 천년기 동안에 유대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인데 그때 그들은 부활되지 않은 육체들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년기 동안에 부활한 성도들이 하는 역할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천년기 동안 공중 위에 떠 있게 될 새로운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천년기 시대는 부활하지 못한 사람들, 즉 그때까지 자연 육체들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관계하고 있다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4절)은 이런 사람들에 관해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있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생긴다. 세대주의자들의 천년기에 대한 이해는, 가장 중요한 이 구절(계 20:4~6)에 대한 그들이 주장하는 문자적 해석에 마저도 기반을 두고 있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년기의 목적은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지상적 왕국을 세우는 일이며 이 왕국에서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적 왕위에 앉아 개종한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천년기의 목적이라면, 요한계시록 20:4-6이 유대인에 대해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팔레스틴 땅에 관해서 예루살렘에 관해서 등등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은 이상하다. 

제16장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

   후크마는 본 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묘사된 천년기에 관한 “무천년론적 견해”를 상세히 전개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후크마는 윌리암 핸드릭슨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란 방법을 따른다.

 l) 이 해석 방법에 따르면 계시록은 일곱 단원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각 단원들은 서로 평행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시까지의 교회와 세상에 대하여 진술한다. 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천년 통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주의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요한계시록 20~22장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단원들 중 마지막 단원에 속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재림 후에 되어질 것에 관해 서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20:3은 다시 한 번 신약 시대의 시작기로 돌아가게 한다. 옥에서 다시 놓임을 받아 나라들을 속여 모이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러 모이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9절).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결박 되어 있을 동안에는 가능치 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세대 기간 중에 사단이 결박되었다는 뜻은, 첫째 그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는 것이고, 둘째는 그는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모두 함께 모을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 시대에 교회는 심하게 핍박받았다는 사실은 이 환상이 가져다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우리는 깊이 간직하게 될 것이다.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동료 신자들 중 많은 숫자가 죽음을 맛보았고 그중 어떤 이들은 잔인하게 처형되어 순교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죽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영흔들이 살아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안 다는 것은 무한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요한이 지금 지상적 천년기 왕국을 묘사하고 있다는 흔적을 이 구절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6절을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이 축복받은 상태에 대한 이유가 본 구절에 제시되어 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죽음은 영원한 형벌이었다. 만일 여기서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면, 그들은 “다시 사망이 없는” 장차 올 세상의 완전하고 충만한 희락을 이미 향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둘째 사망이 그들을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하더라고 말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천 년 전기간 동안 죽은 신자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할 것이며 왕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될 것이다. 비록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될 기간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육체의 부활이 있은 후에 이러한 죽은 신자들은 그들이 지금하고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며 그리스도와 왕노릇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에 그들은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육체를 입고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 속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론적 해석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국을 지상적으로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의 사이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며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사단이 복음의 전파를 막을 수 없도록 이 현세대 기간 중에 결박되어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17장 육체의 부활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인의 인간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헬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약하고 방해물이다. 죽음 시에 육체는 소멸하게 되나 영혼은 계속 살아 남게 되며 육체 부활이란 꿈도 못꾸는 일이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육체없이 완전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육체가 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 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도 영화로운 육체들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중간기 상태 동안 잠정적 행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은 독특한 기독교 교리인 것이다.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약간의 힌트는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미래의 존재를 설명함에 있어서 부정법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부패가 없음, 약함이 없음, 불명예스러움이 없음, 죽음과 눈물과 곡함과 울음과 교통이 없다(고전 15:42-43; 계 21:4).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 바울이 어디선가 한 말이 여기에 잘 적용될 것 같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제18장 최후심판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미 현세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3:18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또한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도 말하고 있다. 이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심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1) 심판의 뚜렷한 중요 목적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 최후심판 때까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은 감추어진 바 되었으나 이제 그 운명이 나타난 바 되었다. 신앙을 가졌었는지 그렇지 못했었는지, 어떤 행위를 했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행위들이 펼쳐질 때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통해 자기의 은혜를, 자기 원수들을 정죄하는 일을 통해서는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핵심이 되는 것은 개인의 운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2) 두 번째 목적은 각 사람이 받게 될 보상과 형벌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도의 다소는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최후의 심판 때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3) 세 번째 목적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제 각 사람에게 그들이 영원토록 지내야 할 장소를 정해주신다. 새 땅이든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든 말이다.  

    최후심판은 어느 정도 지속될 것인가? “심판날”(마 11:22), “그 날”(마 7:22; 살후 1:10; 딤후 1:12), “진노의 날”(롬 2:5)에서 “날”이라고 쓰여진 단어는 종종 긴 시간을 의미하곤 한다. 그러나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듯, 심판의 날이 새 세계의 첫 천 년 동안 지속된 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나타났다면 모든 신자들도 이 속에 포함되었음에 틀림없다. 신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후서 5:10에서도 “우리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무엇이 심판될 것인가? 이 현재의 삶 동안에 이루어졌던 모든 일이다. 심판의 날은 우리가 내뱉었던 말들도 다 심판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충만한 계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의해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만을 갖고 있었던 자들은 그들이 구약성경에 반응한 정도에 따라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도록 경고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인 평강, 행복, 구원을 추구하도록 권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이나 신약에 나타난 계시들을 전혀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가졌던 빛 아래서 판단받게 될 것이다. 

 로마서 2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풍성한 계시를 받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 마음속에 쓰여진 율법의 사역”에 대해 그들이 취한 반응에 근거하여 판단을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그들이 받지 못한 계시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었던 빛에 근거해서 판단받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많은 책임들을 갖게 될 것이요 적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적은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이 당하게 될 고통에도 “등급”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2:47-48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 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풍성한 빛을 받은 자들에게 관해서, 즉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자들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의 완전한 의로움으로 옷입었느냐이다. 사람의 영원한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이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왜 성경은 그렇게도 끊임없이 최후심판은 행위들에 따라 판단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지 결단코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최후의 심판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집행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신앙과 행위간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신앙은 행위들 속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야 하며 행위들은 참 신앙의 증거들이다. 요한 칼빈이 잘 요약했듯이, “의롭다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믿음은 혼자서가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실질적으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증거로 나타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만일 믿음이 참이라면 그곳에는 행위가 있을 것이며,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참이 아닌 것이다. 

   상급(rewards)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상급을 얻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급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상급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터 위에 사람이 어떤 재료들로 집을 지어 나가느냐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장차 신자들에게는 그러한 상급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예수님도 종종 상급들에 관해 말씀하신 일이 있다(마 5:11~12; 6:19~21; 녹 6:35; 막 9:41; 마 25:33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못박아 말씀 하시기를, 그러한 상급들은 인간의 행위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미래의 상급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여 어떤 음악기구를 잘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자. 그렇다면 그의 음악을 즐기는 능력 역시 크게 증가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커질수록 지금과 미래의 그리스도의 왕국의 축복들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용량 역시 커질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마음의 모두를 바치는 사람을 절반 정도의 마음만을 바치는 사람보다 더 큰 주님의 기쁨 알게 된다. 하늘에서만 그런 기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보장해 주고 있지 않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심판의 날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1) 세상의 역사는 무의미한 원형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운동이다. 

2) 구원과 영원한 축복 상태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각 개인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최후심판의 날은 최종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3)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게하며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 모든 각 개인들이 도덕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4)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와 역사 속의 그의 구속사역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한다. 즉, 그날은 모든 악에 대한 최종의 결정적 정복의 날이며 죽임을 당 하신 어린양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날이다. 심판의 날은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서 세상 끝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드러낼 것이다. 

제19장 영원한 형벌

   오늘날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를 부정하는 두 가지 형태의 주장들이 있는데, 하나는 보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전멸주의이다. 보편주의자들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전멸주의의 교리는 인간은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은 불멸성을 탈취당하게 되고 완전히 전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건적 불멸성”이라고 알려진 것은 사람은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신자들은 은혜의 선물로서 불멸성을 받게 되고 사후에 축복상태 속에서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형태의 완전 소멸론은 모두 악한 자의 소멸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영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16세기 중엽 의 소시니안파(the Socinians)들도 불신자들은 결국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제칠일 안식교와 여호와 증인들은 소멸이란 악한 자, 사단, 귀신들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우리는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다. 지옥의 형벌들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여러 다양한 표상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러한 표상들을 취한다면, 이러한 표상들은 서로 모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어떻게 지옥이 동시에 암흑도 되고 불도 될 수 있단 말인가? 표상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상징들보다 더 좋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자 모두가 유다가 당한 고통들을 겪어야만 하지는 않는다. 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들이 받아야 할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끝으로 지옥의 장소성에 관해 말해 본다면, 중세기에는 일반적으료 생각하기를 하늘은 지구 위의 저 공중 어느 한 곳에 있을 것이며 지옥은 그 아래 어느 곳, 아마도 지구의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현대적 천문학을 알고 있는 20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식의 사고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재 우주체계에는 위도 아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히 2:2);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만일 저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제20장 새로운 땅

   새 땅이란 현재의 땅과는 전혀 다른 땅인가 아니면 현재의 땅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사야 65:17과 요한계시록 21:3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전우주를 지칭하는 성경적 표현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우주는 완전히 소멸되고 현재의 우주와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우주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우주는 현재의 우주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되 오직 새롭게 되고 정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루터교 신학자들은 전자를 택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마태복음 24:29, 베드로후서 3:32에 호소하고 있다. 분명히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들이 현재의 땅이 파괴될 때 발생할 것인데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은 죄와 불완전으로 오염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음에 열거할 4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입장보다 우주가 새롭게 된다는 의견을 받아 들인다. 첫째, 베드로후서 3:33과 요한계시록 21:1을 살펴볼 때, 새 우주의 참신 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neos가 아니라 kainos임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neos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 것이라는 뜻인데 반해 kainos의 뜻은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ouranon kainon kai gan kainan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이란 의미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 소멸이론보다도 갱신이론을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는 로마서 8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에 근거를 둔다. 창조의 세계가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20-21절). 바울의 요점은 장차 종말에 현재의 창조세계가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세번째 이유는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양자간에는 엄연히 연속성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인종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러한 유추적 방법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놀랍게도 새롭게 변한 현재의 땅이다. 

   갱신이론을 받아들이는 네번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주를 완전 소멸시키셔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단이 승리를 쟁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단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창조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며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어떻게 다루실 수 없어서 결국 완전히 소멸하시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단은 이러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사단의 결정적 패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썼던 바로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단의 악한 음모 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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