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 11장
삼위일체 논쟁
만일 성부가 한분이고 성자는 또 다른 분이라면 그리고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 게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성부께서 참으로 한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Novatian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초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자가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관련된 문제는 초대교회 수 세기 동안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새 Trinitarian Controversy)이라 부른다.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비록 소위 신학적 의미의 삼위일체에 관한 분명한 교리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학문적으로 좀 더 체계화시킨 변증가들에게 오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저스틴에게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 되시는 분”이다. 로고스는 하나님 다름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즉 지혜와 권능과 영과 능력에서 아버지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그의 삼위일체는 종속설(subordinationism)과 비슷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견해이다.
변증가들에 의하여 상당히 발전된 삼위일체 개념은 교부들에 와서 좀 더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이레인우스는 변증가들 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갖고 있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이전에 존재하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한 하나님 창조주가 계시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분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레니우스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고 가르쳤다 인류에 관련된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자를 성부와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이 로고스는 “참 하나님이며 참 하나님”이시다.
터툴리안은 서방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한 본성(one substance),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사실 그의 가르침이 325년 니케아 회의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에 신조의 기초가 되었다. 비록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니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한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2. 단일신론
우리는 삼위일체 논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유들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관련된 오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의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면 다름과 같다.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동방에서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 알렉산더 감독과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에서 발단되었다.
서방의 양자론자들과 같이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부 혼자만 시작이 없으신 분이며 성부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와 구별된다. 아들은 시작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로고스를 창조하셨다. 이면에서 아리우스 사상은 헬라의 중기 플라톤주의를 반영한다. 결국 이 로고스는 는 무에서(ex nihilo)창조된 첫 피조물(first born of creature)이며,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성부과 같은 동질(homoousios)이 아니고 유사 본질(homoiousios)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 논쟁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한 교회지도자가 출현했으니 그가 바로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계승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이다.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373년에 세상을 떠난 아다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헌했으며 그것을 보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이름은 니케아 정통 신앙의 동의어가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오리겐을 오해했다며 아리우스주의를 전투적으로 공박하였다. 사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로고스 사상을 잘못 이해했다. 아다나시우스가 볼 때 오리겐의 영원성은 곧 성부와의 동등성을 의미하였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질이라고 선언한 니케아 회의 신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321년 알렉산드리아 회의를 소집가혹 아리우스 및 그 동료들을 정죄하고 출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다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아리우스가 하나님이 물질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헬라 사상을 주저함 없이 수용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로고스를 신적 존재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니코메니아 감독 유세비우스는 전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수리아에서는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도 아리우스 편으로 기울어졌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에서 있으면서 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당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4. 니케아 회의 신조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5월 니케아에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는 약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니케아 회의는 의견을 달리하는 세 부류의 집단이 주도하고 있다. 첫째가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아리우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당대에 가장 학식있는 사람으로 알려졌던 교회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내심으로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동정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했으며, 세 번째 그룹은 알렉산더를 중심으로한 대부분의 대표자들로 반아리우스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니케아회의에서 처음 작성된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닮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콘스탄틴 황제의 황실감독 호시우스의 개입으로 니케아 신조에 동일이 삽입되었다. 이것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교회사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섭리하시고 개입하신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니케아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시들지 않고 확산되었다. 심지어 아리우스 세력은 황실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확대 하였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전개된 아리우스 대 아다나시우스 논쟁은 3단계로 대별할 수 있다. 제 1기는 콘스탄틴 대제의 사망시기는 337년 5월 22일 까지이며, 제 2기는 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후부터 콘스탄티우스 1세가 죽던 361년 까지, 그리고 제 3기는 줄리안이 즉위할 때부터 데오도우스 1세의 통치하에 아리우스가 완전히 제압될 때까지로 대별할 수 있다.
아다나시우스 니케아 정통주의가 발전되고 더욱 체계화 된 것은 3인의 갑바도기아인(Cappadocans) 때문이다. 이들은 대 바실(Basil the Great; 330-379) - 가이사랴 감독,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4) - 대 바실의 동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90)등이다. 바실은 삼위일체를 위한 인정된 문구 즉 한본질(substance, ousia)과 삼위(three persons, hypostasis)를 확정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373년에 아다나시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바실은 동방에서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바실과 두 그레고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위한 용어 사용 방법에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곧 “한 본체안에서 세 위격”이라는 용어이다.
6. 콘스탄티노플 회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79년 황제에 오른 다음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래 동로마에선 최초의 열렬한 서방신학 지지자였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정죄를 받은 셈이며 독 아리우스파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제 12 장
기독론 논쟁
한 분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지시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동시에 육신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이시되 죄는 없으시며, 신성으로는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모(데오토코스)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으니, 한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주 성 신성과 인성{한 인격 안에}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과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 칼케돈 신조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를 해결할 셈이다. 그러나 두 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에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가 정립되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기독론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회의부터 칼케톤 회의까지 다루어진 주제였다. 기독론의 논쟁은 362년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로 시작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아폴로나리우스의 견해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가 그리고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는 유티키안의 견해가,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단성론이, 그리고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일의론(Monothelitism)이 정죄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켜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영(human soul)을 대신하였다고 이해함으로 신인(divine-human)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안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자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오나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을 대신했다고 봄으로써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지성을 가지고 활동하신 예수에 불고하다고 이해했다.
갑바도기아인들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구원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370년 갑바도기아 바실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377년에는 로마 감독 다마수스 지도하에 한 회의가 열려 그를 정죄하였으며, 그 후 382년에 다시 확인하였다. 또한 379년에는 안디옥에서 한 회의가 열려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정죄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다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388년 데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s)이단 목록에도 포함되어Te. 그 후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가현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단으로 간주되어왔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스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이라는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신성과 인성이 뚜렷이 구별되며, 양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약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 되었는가하는 문제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1) 논쟁의 핵심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원초적인 출발점은 과연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로(Theotokos)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육체적 연합이 있었다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분’(데오토코스)로 불러야한 다고 보았다.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불어야 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따라 시릴은 마리라을 데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그녀는 데오토코스라고 부를 수 없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성은 십자가에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를 인성으로서의 예수와 신성으로서의 예수 즉 두 인격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신적 그리스도와 인간적 그리스도 두 그리스도(two Christs)를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이단이라는 표지가 붙게 되었고 아울러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사이의 그릇된 대조를 주장하는 견해의 원형으로 간주되어왔다. 네스토리우스의 기계적 연합은 유기적인 연합과는 달리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나신 분(God-bearer)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데오토코스(theotokos)는 어머니의 특권을 강조하기 보다는 아들의 신성(the Deity of the Son)을 강조하는데 포인트가 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가 뱃속에 갖고 있는 예수는 단순한 인간 예수가 아니라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때문에 마리아는 육신과 연합된 하나님의 말씀(the Divine Word)을 잉태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데오토코스(“theotokos" ; God bear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리아가 인격적으로 신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기 때문에 양성의 구분은 가능하지만 양성의 분리는 불가능한 것이다.
3)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에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였다. 431년 6월 22일 성 마리아 교회당에서 개최된 에베소 회의는 지리적이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미루어 시릴에게 유리했다.
네스토리우스보다 먼저 도착한 시릴은 그들이 15일 가량 늦게 도착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감독들의 항의에도 그들의 도착하기 4일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스를 정죄하고 파문시켰다.
안디옥 감독 요한의 인솔 하에 나중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은 에베소의 주교 멤논의 직위를 박탈하고 시릴을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릴, 네스토리우스, 멤논 세 사람 모두를 해임하고 이들을 연금시켰으나, 시릴이 가지고온 거액의 뇌물을 황실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보냄으로 시릴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에베소회의 이후 반 시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시릴도 교리적인 면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해야만 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과 유사한 시릴의 단성론적 기독론 이해는 그에 대한 반대세력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시릴의 12개 파문조항은 반발을 샀고 극단적인 시릴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들은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데오도시우스 황제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화해를 위해서는 안디옥의 요한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시릴에게는 안디옥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하는 대가로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시릴은 사이러스의 데오도렛 감독이 작성한 평화안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 평화안은 안디옥 측이 에베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디옥의 신학을 상당히 반영하는 것이지만,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긴 논쟁점이던 마리아 호칭을 데오토코스로 결정함으로써 시릴에게 상당한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 평화안은 한편으로는 시릴의 연합교리를 양성의 인정 하에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한 인격 안에서의 연합 하에 받아들어 한 인격(one person)의 두성(two natures)연합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다.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유티키스도 평화안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양성의 구분을 강조하여 예수를 두 인격으로 구별하는 오류를 낳았음을 잘 알고 있었던 유티키스는 에베소 회의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 후에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448년 11월 유티키스는 콘스탄티노플 한 지방 회의에 소환을 받고 이단성에대해 심문을 받았다.
레오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키스의 극단의 단성롱(Monophysitism)을 피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레오는 연합 후에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진술하여 그의 사상이 후에 칼케돈회의에서 작성한 신조의 중심 교리로 정착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티키스의 단성론을 배격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칼케돈 신조는 433년의 조문, 시릴의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 레오의 톰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따와 종합적으로 재합성한 것이다. 그 중에서 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변함, 나뉨,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레오의 가르침은 칼케돈 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케돈 신조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교리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칼케돈신조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키스주의와 단성론 문제를 해결했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했으며, 셋째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에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동정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God-bearer)로 확정함과 동시 양성의 연합 관계를 피함으로써 그 동안의 기독론의 문제를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외에도 칼케돈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각 지방회의로부터 항소를 취급할 수 있는 상급법원으로 결정”됨으로써 명실 상부한 로마교회 다름의 서열을 굳힌 셈이다.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칼케돈에서 정죄를 당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각각의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넓혀 나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감독으로 앉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감독이 살해되고 단성론자가 임명되었다. 심어어 안디옥에서도 461년 단성론자가 감독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단성론자들에 2년간이나 추방당한 후 돌아온 제노황제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주의자들과 분열을 피하기위해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신조를 통합시키려는 통합성(Edict of Reunion), 헤노티콘(Henotikon)을 482년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제노황제 이후 동방황제들은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다 저스틴(Justine : 527-565)황제가 들어서면서 반 칼케돈 쪽으로 방향이 선회되었다.
단성론 논쟁은 단의론(monothelitism)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틴 포고나투스 황제는 단의론 논쟁으로 인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681년 콘스탄티노플에 제 6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5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재확인한 후 일의론 지도자인 셀기우스와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5. 기독론 논쟁 요약
기독론과 관련된 모든 회의 핵심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각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신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조건을 모두 갖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기독론논쟁과 교회 회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는 “완전한 인성문제”와 관련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2)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두 인격 교리(“the doctrine of Christ as two persons”)가 그리고 (3) 유티키스 단성교리(“the doctrine of one nature")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거부되었다. (4) 단성론 논쟁이 553년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칼케톤 신조를 재확인함으로써 해결되었고, (5) 그리스도의 일의론(monothelite)이 제 6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서 거부되었다.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 13 장
위대한 지도자들
… 거듭 되풀이 하거니와 신앙의 일에 있어서 감독들이 기독교 황제들을 판단하는 것이 관례였고, 황제들이 감독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니다. Ambrosius
1. 탁월한 행정가 앰브로스
엠브로스(Ambrose : 340-397)는 고울의 수도 트레베에서 약 340년에 출생했다. 그는 34살의 나이에 감독의 직을 맡아 충실하게 그 직을 감당하였다. 그는 감독으로 상상할 수 없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후 세상을 떠나던 397년까지 앰브로스는 서구 사회에 교권을 강화시켜 놓는데 탁월한 행정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감독직에 오른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유했던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바친 일이다. 탁월한 행정가였던 앰브로스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성경과 신학연구 그리고 설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금욕적인 삶과 개방된 삶과 사역 그리고 꾸준한 연구는 세속정치에서 차지한 그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전투적인 캐톨릭 입장에서 확고히 서 있었던 앰브로스는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또한 앰브로스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위에 국가를 위에 올려 놓았다. 즉 평신도인 황제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감독 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엠브로스 감독과 황제가 직면한 또 하나의 사건은 데살로니가 학살 사건이었다. 이 일일 있은 이후 앰브로스와 황제와의 대결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앰브로스는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나 황제는 감독의 회개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하지만 앰브로스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오는 황제의 출입을 막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몇 달 동안 황제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황제의 참회가 있을 후에야 예배에 참석 시켰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제롬(331-420)은 성경번역과 함께 서방 수도원제도를 도입함으로 서방교회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넓은 식견과 빼어난 언어적 은사는 그로 하여금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빼어난 성경 번역가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하였다.
오리겐과 제롬과의 관계는 제롬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이다. 오리겐을 상당히 존경했던 제롬은 오리겐이 방법론을 상당히 차용했다. 이것은 특별히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개단했던 초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변함없었고 “오리겐의 정통주의적 생애를 언제나 선만하였으나 오리겐의 신학 사변에 대해서 학자적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오리겐의 주석에 대한 존경은 여전했지만 그의 신학적 사명에 회의를 느낀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정죄에 재빨리 가담하였다.
제롬의 재치 있는 풍자와 격렬한 논박은 결국 인격적인 약점들을 넘겨 놓았다. 편파성, 편협한 마음, 불공정, 허영심 그리고 그의 박학 다식에 흠을 낸 주주의성 등이 그것이다. 제롬의 학적 감식력이 종경 받다 보니 결국 그의 통렬했던 개성은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상당한 인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경 번역, 주석, 기타 학적 저술을 통해 서방 기독교계에 헤아일 수 없는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기독교사에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350년 경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개교회가 낳은 가장 명설교가 이자 성경 강해자 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하며 단순한 것이 그의 특징이며, 교리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진정한 설교자의모습이 무엇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균형있게 보여주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자신의 곧은 성품과 직설적인 외침 때문에 황실의 미움을 사 오늘날 터어키의 북동쪽에서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다 외로이 세상을 떠났지만 요한의 멧세지는 그의 삶과 함께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되어 왔다.
제 14 장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두 나라가 서로 섞여 있는 동안은 우리는 또한 바벨론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봉사하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바벨론에서의 자유해방을 이미 받는다. 그러나 아직도 잠시 바베론과 함께 순례하여야 한다. Augustine
역사, 신학, 철학, 문화등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거스틴은 “고대철학과 기독교의 종합”을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어거스틴은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방 타가스테에서 아버지 패트릭(Patrick)과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17살 나던 해에 카르타고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한 여인과 깊은 육체적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때부터 그의 방탕한 생활을 시작되었고, 얼마후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을 않았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 이면에 진리에 대한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철학적 사유를 일깨운 것은 버질과 키케로의 작품이었다.
373년 19살 나던 해 있었던 진리에 대한 이 체험은 어거스틴에게 두 번째 도약이었다. “오 진리여, 진리여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얼마나 불타는 마음으로 그대를 사모했던가?”라고 어거스틴 자신이 고백하듯이 부와 명성에 대한 욕구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마니교
고백록에 어거스틴은 마니교, 플라톤주의, 그리고 기독교로 세단계의 개인 확신을 회고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어거스틴의 성숙한 사고에 두드러진 요소들로 부각되었다. 373년 19세의 어거스틴은 동방에서 기원된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오랫동안 기독교의 중요한 라이벌 중교 중의 하나로서 당대의 진실된 과학적 신학체계를 대표하였던 이 철학체계는 특별히 이념적인 면에서 젊은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원인은 악의 기원 문제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가 악의 기원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여 주는 것 처럼 느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던 악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니교도들은 하나님과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악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다. 악은 하나님과의 병존하는 본래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제한하는 독립적인 권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맞서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하나님과 악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해결한다.
그들의 구원관 역시 영지주의 이원론과 비슷한데, 구원이란 인간 안에 있는 빛이라 부르는 영적인 것과 암흑이라 부르는 물질의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영혼이 순후한 빛, 혹은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19살부터 29살까지 10년 동안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마니교가 갖고 있는 진리 체계가 이론적이고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면서도 실존적이었고, 둘째, 악한 원리에 의하여 사로잡힌 선의 요소들을 악한 원리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구원체계야 말로 참된 구속의 진리이며, 셋째, 진리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 속에 존재한다는 마리교의 가르침이야 말로 가장 설득력 있는 세계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떠나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천문학과 플라톤 사상이다.
2) 신플라톤주의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청산한 것은 그의 나이 29살 때이다. 마니교를 떠나온 후 어거스틴은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잠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회의주의에 빠진 어거스틴은 당시 널리 읽히던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플로티누스의 작품을 닥치는데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이원론과 아카데미의 회의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영적실재를 발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플라톤주의 신관은 마니교의 신관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을 절대적이시고 불변의 선으로 모든 변화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근원으로 인식하였다. 악은 결코 독자적인 원리는 아니며 악이 선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단지 궁극적 존재로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악은 하나의 부정적인 성질이며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선의 결핍을 의미한다. 마침내 어거스틴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서이다.
3) 어거스틴의 회심
그를 완전히 기독교로 전향하도록 한 것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읽었던 로마서 13장 13절에서 14절이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어거스틴의 신학이 계시 신학이며 그 계시신학은 기독교 회심을 통해서 발현되었다고 지적하듯이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노리가르(Noregaard)와 홀(Holl)같은 전통주의자들 역시 역기에 동의한다. 비록 어거스틴의 사상에는 플라톤적 구조가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거스틴의 회심은 지정한 의미에서 인생, 사상, 신앙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회심이전에 신플라톤주의를 일차적 원리로 삼은 것이 사실이나 회심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일차적 원리로, 신플라톤주의를 이차적 원리로 삼았다. 후에 어거스틴은 진정한 진리 탐구와 종교적 삶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앞에 헌신한 후에 생겨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386년에 기독교로 귀하하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수년후 어거스틴은 히포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그 뒤에 395년 같은 도시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430년 말 발급소리를 들으며 임종하였다.
3. 어거스틴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어거스틴의 사상은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bsurdum)는 터툴리안의 견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어거스틴의 노력은 세례 직후에 저술한 <독백>(Soliloquia), 394년 의 <참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 395년 6월에 완성한 <자유 의지론>(De Libero Aritrio), 그리고 416년에 완성한 거작 <삼위일체론>(De Trinttat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성이 영원한 것을 직관하는데 필수적일 만큼 중요하지만 영원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보다 탁월하고 영원한 존재가 무엇인가? 그것이 궁극적인 인식 대상인 진리 자체이며 그 진리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어거스틴은 이 진리가 바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 곧 자신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인식하였다.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삼위일체론에서도 나타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며 그 후 그 믿음을 밝히는데 우리의 이성이 중요한 도구로 쓰임 받는다.
삼위일체의 영원성, 동등성, 통일성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 깨달았을 때에야 계속 탐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케하는 이성은 필수이다.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는 어거스틴의 원리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삼위일체론을 끝맺음 하면서 “나는 내가 믿은 것을 나의 지성으로 보기 위하여 많이 희구하여 왔다”고 고백한 것도 그의 인식론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어거스틴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거스틴의 일차적인 관심을 실천적인데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관심은 실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2) 어거스틴의 교회관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 404년 어거스틴이 주도하여 열린 칼타고 회의에서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오나투스파의 난폭한 행위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이들의 교회당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411년 칼타고회의 이후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진실로 거룩한 자들만이 정당하고 효력있는 세례를 베풀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 의한 세례가 무효하다는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심지어 이단자들에 위해 베풀어진 세례도 교회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베푸는자의 거룩성에 상관없이 세례를 효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는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철저히 반박하였다. 교회관은 키프리안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례관은 로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던 어거스틴으로서는 이 둘의 전통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교회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내세웠던 키프리안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으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순수성이 보편적인 교회에만 속했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볼 때 교회의 순수성은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바티안 그리고 어거스틴 당대의 도나투스파에도 있었다.
교회의 하나님도 사랑을 전제로 한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교회 통일성의 기초이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신앙의 일치를 외치면서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곧 복음의 본질을 떠난 것이며 따라서 그런 교회는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3)어거스틴의 인간이해
동방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서방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방의 인간이해가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이다. 어거스틴은 적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은총론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영국 아일랜드 수도승 출신이었던 펠라기우스는 400년에 로마로 와서 7, 8년간 머물면서 활동하였다.
그 즈음 펠라기우스는 두 가지 사건을 만난다. 첫 번째 사건은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충격을 받은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자신과 입당을 같이 하는 코엘레스티우스를 만난 사건이다. 이때부터 펠라기우스는 공개적으로 어거스틴 사상과 대립되는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펠리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죄를 인간의 본성에 돌리는데 분개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은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조건이다. 그리고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지 않으며 모든 계명은 인간이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시며 인간의 공로에 따라 심판하신다.
계명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은 의지를 가지고 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 계명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사. 펠라기우스는 이것을 가능성(posse), 의지(velle), 실천(esse)이라는 세 가지로 구별하여 순서를 나누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고, 선과 악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고 보았으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국한되며 전 인류에게 전가 될 수 없다. 적어도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협력한다. 따라서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 인간의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히 성숙한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악을 행할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유아는 죄 없이 무죄한 상태서 태어나기 때문에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죄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선행과 악행 가능성 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자신이 져야 한다.
410년 고트족에 의하여 로마가 멸망당한 후에 펠라기우스는 411년에 북아프리카 칼타고로 가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그곳에서 어거스틴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다음해인 412년 칼타고에서 회의가 열려 펠라기우스의 제자 콜엘레스티우스를 정죄했다. 그 이유는 1)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2)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인간 전체에 미치지는 않는다. 3)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4)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죄 없는 인간이 있었다. 5) 새로 태어난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에 있다. 6)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이 죽는 것도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맘아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생을 소유한다. 세례를 받은 부자라도 자기의 전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행에 의해서도 공로를 얻지 못하며 따라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이와 같은 선행을 통한 공로 사상은 어거스틴의 믿음을 통한 은총론과 대립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펠라기우스 인간론이 자유의지론에서 출발했다면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불가항력적 은총론에서 출발하였다. 어거스틴의 자유이해 역시 그의 은총론에 기초한다. 인간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아담의 원죄를 전가 받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완악함으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할 때만이 가치 있다. 어거스틴에게 은총 없는 율법은 의미가 없으며, 은총 없는 율법은 성취될 수도 없다. 이런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sola gratia로 집약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 사랑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먼저 믿도록 명령을 받는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따라서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듯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가 거부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불가항력적 은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자연히 예정론을 따른다. 어거스틴은 예정받은 자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예정 자체가 신적인 기원을 같은 다면 그것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선물이듯이 예정 역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중예정론과 성도의 견인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개혁자들에 와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재확인 되었다. 또한 어거스틴의 역사관 역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정통적인 기독교 사관으로 정착되었다.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생명을 상실할 때 교회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흩으시고 개혁하셨다. 한편으로 로마의 멸망은 문화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못한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로마 멸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문화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로마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계시면서 역사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 편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또한 로마 제국의 주변의 수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결국 어거스틴이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이해는 창조이후 인간의 역사가 하나이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시한 역사이해 즉, 목적론적이 직선적인 역사관은 당대까지 지배해온 헬라의 순환논적 역사이해를 넘어 성서적 견해를 따라 역사에는 처음과 절정이 있으며 시작과 끝이있고 시간 속에서 한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역사란 한 편의로 개인의 실졸 속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실존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개인의 실존속에서 또 그 실존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도 각 개인이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를 형성하여 가는 역사의 주체자들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문화변혁의 동참자인 인간이 문화 명령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속에서 적극적인 문화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자율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어거스틴의 독특한 역사해석은 마치 이성과 신앙의 조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어울리는 새로운 역사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어거스틴이야 말로 최초의 역사철학자 혹은 역사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의 도성이 쇠잔해 간다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독립적인 역사철학의 한계를 설정하여 기독교 역사철학이란 결국 역사신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 소아시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 라틴 신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의 물줄기가 어거스틴에 와서 하나로 종합되어 서양의 중세와 근대의 사상적 맥을 형성하였다. 중세 사상, 종교개혁도 어거스틴이 없었다면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존주의, 역사신학, 역사철학, 개인주의, 역사관, 문화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현대사조도 사상적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거스틴에 귀착된다.
그렇게 그의 사상이 설득력 있고 영향력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라틴의 전통을 대립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종합시켜 두 개의 상이한 전통을 하나의 전통으로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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