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5]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5 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9:21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 밀란의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박해 받는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했으며, 자연히 종교의 중심도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영적인 측면이 간과되고 예전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이 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나타난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일종의 갱신운동이었다.

1. 최초의 수도승들

초기 수도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애굽 출신의 곱트인 성 안토니(c. 256-356)였다. 안토니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을 실천하고 그 후 안토니는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 삶을 시작했다.

초기 수도승은 후기에 찾아 볼 수 있는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은자적인 성격이 강해 독립적으로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며 수도했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수도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된 것이다. 이 수도원은 나일강변의 타벤니시(Tabennisi)에 안토니와 동시대 사람 파코미우스(A. D. c. 285-346)에 의해 설립되었다. 파코미우스와 이 공동체의 특징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중앙 수도원에서 여러 수도원을 다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수도원 공동체는 일종의 운영규칙들이 발전되었고, 4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파코미우스 제도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수도원 운동이 2, 3세대로 내려가는 동안, 금욕주의적 생활은 자체 내에 특수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4, 5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도원 제도는 보편화 되었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틴 및 시리아에 두드러지게 많았다. 아마도 그것은 수도원 제도 이전에 금욕주의 성격이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바실은 고립적인 고행생활보다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을 강력히 선호하였다. 수도사들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반문화주의적인 당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서 바실은 금욕주의 운동이 개인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벗어나 사회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실은 지나친 개인적인 경견을 반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들 가운데 다수가 남과 함께 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고립된 금욕 생활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수도승들이 “거룩함”을 경쟁하기보다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실의 수도원 이상은 그의 가정배경, 교육 배경 그리고 훌륭한 동료들과 교제를 통하여 성숙되었다.

바실은 이 세상을 전적으로 타부시 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에 어거스틴과 칼빈처럼 당대의 이교문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표현상의 기교와 아름다움을 제공해 준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실의수도원 성격이 파코미우스 수도원 공동체와 달라 교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이상을 연결하려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에게도 이원론적인 측면이 있었다. 바실은 영혼에 비해 육체를 낮은 차원으로 이해했고 당대의 조류에 따라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게다다 바실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한 시대를 살았던 바실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며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를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서방 수도원 발흥

서방에서 수도원 운동이 발흥한 것은 투어스 마르틴(Martin of Torus). 제롬 그리고 요한 카씨안(John Cassian)에 의해서 이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서방 수도원 운동이 베네딕트 수도원과 켈트 수도원에 와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

서방 수도원 운동의 개척자 중에 또 한 사람은 유세비우스 히에로 니무스 소프로니우스(Eusebius Hieronimus Sophronius)이다. 그는 제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롬에 와서 서방의 수도원 제도는 결코 낯선 제도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기독교 이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밀란의 엠브로즈는 수도원 제도를 더욱 확대시켰고, 이탈리아 베르셀리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사원에 속한 성직자들이 규칙에 따라 살도록 요구했고 어거스틴은 성직자 가족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수도원 이상을 실현했다.

서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도원 공동체는 역시 540년경에 출현한 베네딕트 수도원 이었다. 또 하나의 수도원은 5세기 말엽에 시작된 켈트의 수도원 운동이다 .

5. 요 약

영적 갱생의 필요성에 따라 발흥한 수도원 운동은 각 시대에 따라 모습이 약간씩 달랐음을 보여준다.

수도원 운동이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이었고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수도원 운동은 교회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 운동으로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으며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수도사들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수도사의 첫째 목적이 그 자신의 구원에 있었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도원 공동체는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려는 무리들과 안주하려는 무리 두 종류로 처음부터 대별되었다.

제 16 장

교황제도의 발달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들 가운데 최고이다. Leo the Great

교회로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교회라는 로마교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삼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이다.

1. 로마교회의 부상

로마교회에는 신경이 발달하였고 이단들과 투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사도들이 남긴 전통의 수호자라는 자신들의 자각은 대단했으니 약 160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그곳에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권위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로마의 감독 줄리우스(Julius)가 341년에 있었던 안디옥 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Marcellus)의 복권을 추구하는 서신에도 나타난다.

마태복음 16장에 근거한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신학적 성경적으로 정립된 것은 그 후 382년 다마수스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로마교회는 상당히 권위적인 교구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2. 세르디카 서방교회

세르디카(Serdica) 서방회의에서는 로마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 법원으로 지정하여 로마교구의 우월성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세르디카 회의 법령에서는 밝히지 않고 자신들의 법령의 출처를 니케아회의에서 제정된 법령들과 합치시킴으로 말미암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르디카 법령들이 니케아 회의의 결과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세르디카 법령들을 니케아 회의 법령들과 동등하게 다루게 된 이면에는 로마교회의 위치가 니케아 회의의 위치와 버금간다는 입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마수스 외에 로마의 우월권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밀란의 감독 앰브로스이다. “다마수스 당시 로마 관습과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정책은 일정 한도까지 밀란의 앰브로스에 의해 촉진되었다.” 엠브로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당대의 감독들을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향력이 우주적으로 모든 지역에까지 균형 있게 미친 것은 아니었다.

3. 교황제도의 확립

로마의 영향력은 레오 1세(Leo I : 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더욱 강화되었다. 레오가 로마 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이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50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한,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보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 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레오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 1세(492-496)였다. 겔라시우스 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교황제도는 역사에 정착되었다.

제 17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 Patrick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은 로마주변의 야만족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은 서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과 사도로 임명되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의 핵심은 대 수도원장들의 권력을 쥔, 반 은둔적 수도원제도였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지방의 왕들과 속 왕들(sub-kings)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 귀족의 자제들의 그를 수행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는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었던 것이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일찍이 패트릭과 콜럼바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 콜러바(521-597)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속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역에 있는 아이오나(Iona)라는 작은 섬에 정착한 콜럼바는 동료들과 함께 이교도적 스코트인들과 픽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웠다.

콜럼바의 영향력 아래 563년부터 597년 까지 35년동안 아이오나는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핵심지가 되었다. 콜럼바의 선고는 단순한 기독교인에로의 회심에만 초점이 맞추어 지지 않았다. 당시 종족문제가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콜럼바는 575년에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데리 근처의 드럼시애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종족들의 국민 의회에 참석하여 고질적인 문제였던 고왕과 음영시인 들과의 분쟁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러한 요인들에 힘입어 콜럼바와 그의 수도승은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심고 그와 함께 보다 큰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도 있는 수도원적 삶, 문제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럼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산시켜 주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헌신적 삶을 통해 실천했던 콜럼바는 사랑하는 동료 수도승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한 후 597년 6월 9일, 주일날 이른시각에 평화로이 잠들었다.

제 18 장

결 론

지금까지 초대교회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적하고 초대교회사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듯이 초대교회 역사 역시 이전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초대교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또 하나가 도전과 응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셋째, 초대 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주제는 그리스도 또는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로고스라 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 전통, 그리고 소아시아 전통이 어거스틴에게 와서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섯째,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절대 절망을 초극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 희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신 그 주권적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

박용규저, 총신대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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