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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란의 소문
데살로니가전서 1:6-8 환란의 소문 마게도냐 지역과 아가야 지역을 합쳐서 오늘날 ‘그리스’라는 나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환란의 소문’이 돌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우들 사이에서는 관심사가 되는 현상입니다. 환란과 역경을 반긴다는 것은 희한한 일입니다. 성도 자신이 이 세상에 살면서 복음으로 환란과 역경을 당하는 것은 곧 천국 백성인 것을 확인하는 방식이 됩니다. 물론 스스로 환란이나 역경을 유도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조작입니다. 인간들은 육적 본성상 아픈 것은 참지 못합니다. 괴로움은 누구나 기피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매사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어서는 아니된다는 신호와 같은 겁니다. 자기 뜻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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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에 관한 이해
데살로니가전서 1:9-10 사도에 대한 이해하나님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계시고 또 ‘우상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상의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인간 마음과 통하게 됩니다. 즉 절대적인 선함과 공의로움과 거룩함과 깨끗함과 완전함과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는 신이 바로 ‘우상의 하나님’입니다. 불교의 미륵보살이 그 신입니다. 그리고 힌두교나 불교나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 신이 바로 우상의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았기에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의 하나님’을 구분할 줄 압니다. 고린도후서 11:3-4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비꼬아서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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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우편
히브리서 10:11-14 하나님 우편옛날 제사장들이 매일같이 제사를 드려도 그 제사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원수(=악마)에게 전혀 먹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마저 이 악마의 마음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간이 인간을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악마는 인간 마음에서 끄떡도 하지 않고 계속 버티게 됩니다. 차라리 악마가 ‘여호와 종교’를 만들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악마가 율법을 동원해서 ‘여호와 종교’ 내부를 가득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악마가 인간에게 법으로 유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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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
고린도후서 13:7-10 진리‘진리’는 모든 인간에게 심적 부담을 안기게 합니다. ‘바르게 산다’라는 말은 곧 ‘쉽게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더 나아가서 ‘생존 위주의 삶’을 포기하게 국면이라고 여깁니다. 만약에 진리 위주로 살게 되면 ‘인간관계 단절 상황’은 뻔합니다. 이는 곧 ‘사회적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진리’ 앞에 주눅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비-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혹시나 신에게 된 통으로 당하게 되면, 자기만 손해라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서 사람들은 ‘변명’과 ‘핑계’로 일관합니다.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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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타나시는 하나님
디모데전서 6:15-16 나타나시는 하나님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이 알아야 될 모든 것과 사는 이유와 의미가 가치와 최종 운명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다 쥐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면 그 자체가 파멸이요 저주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인간 세계에 나타나시지 않으므로서 인간 세상에 품고 있는 모든 심판받아 마땅한 원인들을 다 넉넉하게 폭로되도록 하십니다. 인간 사회의 가장 노골화된 본색은 어떻게든 하나님을 추방하고 인간들만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존귀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고 소중한 것들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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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과 복음
골로새서 2:8-10 철학과 복음 철학이란, 관찰된 자연변화 속에서 반복되는 일관성 있는 질서를 포착하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그것으로 인간의 세계 안으로 끌어온 것을 말합니다. 소위 ‘나도 안다’가 되고 싶은 겁니다. 더이상 변덕스러운 자연세계에 휘돌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이 신을 안 믿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을 믿되 인간이 납득이 되는 신만을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이 철학을 ‘유신론(有神論)’이라고 합니다. 즉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겁니다. 일단 자연의 창조하고 주관하는 신을 인정하되, 그 신이 어떤 질서와 법칙을 가지고 세상을 주관하는지 인간도 같이 알자는 겁니다. 이게 철학의 기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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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추어 온 비밀
골로새서 1:26-27 감추어 온 비밀그동안 하나님의 비밀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이외에 그 어떤 이방민족도 알지 못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지니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민족과의 차별성도 분명해집니다. 이 특수함과 차별성이 마지막 때에 이방인에게도 적용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몰랐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겁니다. 즉 이스라엘민족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민족 내에서도 이스라엘처럼 선택받은 자들이 창세 전부터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바가 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런 사실을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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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의 아들들
에베소서 1:5-6 자기의 아들들‘거저 주시는 바’가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를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는 ‘은혜 없이 아들 없다’가 됩니다. ‘은혜 안’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기에 ‘아들들’이 생겨나는 걸까요? 그것은 ‘은혜’란 예수님의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정’으로 완료되어 있습니다. ‘예정된 뜻’이 역사를 통해서 전개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아들들’ 만들기에 나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아들들 만들기’가 무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증명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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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립보서 1:27-28 복음에 합당한 생활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두려워하지 않는 생활’이라는 점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인간들의 생활은 무심한 가운데 기계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알 수없이 늘 찾아오는 두려움에 대처하는 생활입니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 지도 모릅니다. 운명과 같이 평생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심지어 하나님께 계시받은 선지자들도 수시로 두려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두려움은 ‘하나님의 원수’의 무기로서 찾아듭니다. 즉 예수님 믿고 사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일이라고 강압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악마의 상투적인 업무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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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의 면류관
디모데후서 4:6-8 의의 면류관빌립보서 2:17-18에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관제(전제)는 제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제물 위에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관제는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번제나 소제와 함께 드려지는 주된 제물이 아닌 일종의 보조적인 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레 23:12, 13, 18/민 15:5). 즉 구약 율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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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의 자랑거리
빌립보서 1:25-26 성도의 자랑거리 빌립보서의 내용은 ‘기쁨’을 많이 강조하는 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역설적으로 ‘죽음’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나 공포보다 더 기쁘냐?’는 겁니다. ‘죽어도 좋아’할 만큼 기쁘다면 이는 그 사람이 자기 자랑보다 다른 자랑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여러 자랑거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다른 자랑거리는 자랑도 아닐 정도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자랑’이라는 말은 ‘최종적 가치거리’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아무리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그것을 이겨낼 충분한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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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고린도전서 13:4-5 사랑은? 사랑은, 사랑 아닌 것과 함께 비교되면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 ‘사랑 아닌 것’도 같이 나열해야 합니다. 즉 사랑 아닌 것은 오래 참지 않는 것, 거친 마음, 시샘하는 태도, 틈만 나면 제 자랑하는 일, 남을 낮추어보는 마음, 상대방을 깔보고 무례히 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서만 결코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 지금 나열한 이 ‘사랑 아닌 것’들이 실내용은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악한 감정을 펼치느냐로 가지고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즉 인간 본인이 사랑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판단자로 나서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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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내용
에베소서 3:14-17 기도 내용기도란, 기도하는 자신도 기도 내용대로 가고 있는 자일 경우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기도하고 그 기도 내용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외부의 힘에 의해서 자신마저 그 기도 내용대로 이끌림을 받는 자이기에 그런 기도가 나왔다는 겁니다.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본인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분의 의사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자는 그 기도 내용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숨을 소모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목숨을 바치지 않는 기도 내용은 위선입니다. 기도란 남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남들에게 보여기 위한 기도입니다.(마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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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가시성
고린도전서 15:5-8 부활의 가시성‘보이지 않는 부활 신체’가 일부 사람에게는 ‘보이는 부활 신체’로 작용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실, 누구의 부활이 아닙니다. 공장이나 시장이나 직장터에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돈으로 표현될 소유의 증가입니다. 이것을 보고 싶은 겁니다. 돈은 이 사회에서 힘이 되고, 힘은 뭐든지 구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정신과 영혼까지도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가 있습니다. 이 힘으로 스스로 마다할 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평소의 이런 활동성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그런 활동이 결국 인간성을 황폐화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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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여
빌레몬서 1:20-25 형제여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이 거할 처소를 당부합니다. 허물없는 사이로 지냈으면 한다는 뜻입니다. 에라브라가 현재 처한 상태에 대해서 빌레몬에게 알려줍니다. 사도와 더불어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빌레몬은 그 당시 골로새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라브라에 대해서 잘 아는 사이입니다. 왜냐하면 에라브라는 사도의 편지를 골로새까지 전달한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도 담당했던 사역자입니다.(골 4:13) 사도는 또한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도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끝까지 사도 바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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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와 해산
디모데전서 2:11-15 여자와 해산여성이 남성과의 관계성 이전에 먼저 남성을 제키고 단독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음을 사도 바울은 주목합니다. 남편되는 남성과 협의없이 경솔하게 여자가 저지른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여성이 몰랐던 것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남성의 운명에 영향을 입혔다는 사실입니다. 즉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가 결코 사람 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개재되어 있던 겁니다. 여성은 하나님도 그리고 남성도 안중에 없습니다. 자신이 먹고 싶어하는대로 손이 갔습니다. 여성의 이러한 행동은 본격적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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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 없는 믿음
디모데후서 1:3-5 거짓 없는 믿음 믿음은 인간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 넣으시는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인간 내부에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믿음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를 믿는 것은 이미‘거짓 없는 믿음’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과 그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오류이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출발점과 자신의 종착점을 그런 식으로 설정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했으며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감안하지 않고 하루하루 자기에게 충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우울해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이 매일 허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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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널 수 없는 죽음
고린도전서 15:16-19 건널 수 없는 죽음인간이 다시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기에 대해서 더는 시도할 일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꿈도 계획도 접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처지가 인간으로부터 내부적으로 분노를 유발하게 됩니다. 즉 복음은, 그리고 부활은 인간으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시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항상 ‘살아 생전’에 국한됩니다. ‘살아 생전’이라는 조건을 빼버리면 모든 자신의 활동이 무의미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살아 생전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지”라고 젊은이들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소박한 꿈에 초치는 대꾸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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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대함
히브리서 10:35-36 담대함요한복음 16:32-3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결과적으로봐서 요셉은 대단히 담대한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매순간 초조하고 긴장될 수 밖에 없고 늘 암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매사가 자신이 기대한 코스대로 펼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요셉의 앞길은 갈수록 가능성보다 불가능성을 강렬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요셉에게 있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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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받는 자
갈라디아서 5:7-10 심판받는 자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나쁜 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운명이 절단 나는 지경을 말합니다. 세상이란 사람 대 사람으로 모든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치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같은 사람하고 상대해서 모든 가치를 종결지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력으로 심판을 모면할 수도 있고 요령에 따라 기피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들키지 않게끔 완전 범죄를 꿈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심판하는 심판은 그것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누구에게나 최종 남아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심판에서 벗어난 신분입니다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