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간과 영원함

고린도후서 4:16-18 잠간과 영원함 우리의 육신 자체가 ‘잠간’을 나타내는 기호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좀 살다보면 늙어 죽을 때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소모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일생을 소모케 했을까요? 그것은 ‘영원함’입니다. 영원함은 확정된 영역으로서 이 보이는 세계에 미련두지 않고 떠날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가치나 자신의 지난 세월이 지금에 와서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신호입니다. 지난 날 아무리 건강해도 지금 이 순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취소시켜주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누구나 구원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나 구원이 세상 사회란 차별과 계급이 존재합니다. 물론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권력의 변동에 의해서 기준도 달라집니다. 분산되었다가 다시 계기에 의해서 재조립됩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울고불고 합니다. 태어나면서 권력의 여파로 인하여 형성되는 자아성이기에 수시로 변화되는 권력지형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권력의 변동은 계파와 파당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사람들은 ‘혹시 타인으로부터 무신 당하지 않을까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둘 수 있을까요?’를 따져 묻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힘은 인생에 편안함을 제공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힘의 획득은 대

집사

디모데전서 3:8-13 집사 초대교회는 성령을 입은 일곱 집사들을 세웠고 특히 스데반 집사가 유명합니다. 오는날 바로 문제가 되는 대목이 이것입니다. 성령께서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 주셨다는 겁니다. 특히 ‘누구에게는 아니 주셨다’는 게 심각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33에,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즉 알아서 성령을 주시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되는

죽을 일

빌립보서 2:25-30 죽을 일죽을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목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죽음에 도달되지 않는 자도 아무도 없습니다. 안 죽을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때, 이로서 평소에 우리 인간의 삶의 목표가 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이 밝혀집니다. 현실은 인간들의 이런 간절함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이미 확정된 상황’이라는 점을 전제로 했을 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파악하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은 다 죽게 생겼습니다. 죽음을 단순한 현상이라면, 왜 죽었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뭣하다 이제는 죽게 되었느냐를 봐야

노하심이 아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11 노하심이 아니다성도는 까이는 서러움을 겪어야 합니다. 성도가 아닌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하나님의 노하심이다”고 판정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믿고서도 매사가 자기 뜻대로, 소원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고 힘든 인생이 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주신다’는 말은 인간쪽에서 볼 때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하나님 믿기’를 결심했다면 이제 그다음 절차는, 왜 나는 내 힘으로 성도가 되지 못하는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설사 어떤 이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다면, 이때부터의 공부는 “왜 나는 애초부터 이단인가”를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

자유하는 여자

갈라디아서 4:30-31 자유하는 여자‘자유한 여자’란 ‘종으로의 여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종으로의 여자’의 의미를 먼저 규정해야 합니다. ‘종의 여인’은 자기와 관련된 자식을 낳지를 못합니다. 임신을 하고 자식을 낳아도 어미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종으로의 여인’은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어머니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여인’입니다. 즉 아무리 자식을 낳아도 계속해서 죽고, 죽고, 또 죽어야 될 속성만 반복해서 확산시킬 성격만 지닌 여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여인의 성격의 범주를 그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즉 언약

배도하는 일

데살로니가후서 2:1-3 배도하는 일예수님의 강림에 대해서 사람들 사이에 이렇쿵 저렇쿵 이야기하는 것보다 강림의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대자연은 예수님의 운명을 따라갑니다. 마태복음 24:4-6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 세상은 자연의 일부로서 같이 움직이고 이 움직임 중앙에서 예수님이 가셔야 길이 놓여 있습니다. “가라사대

사도의 안부편지

골로새서 4:7 사도의 안부편지 4장 7절에서 18절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사도의 편지를 전한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입니다. 바울의 복음 때문에 덩달아 밉상을 받아 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조카 마가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했던 장소가 이 사람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유스도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고린도에서 전도자에게 숙식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할 때 듣고 골로새로 가서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아킵보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권세

골로새서 1:16-17 권세자연세계와 인간 세계는 결코 하나로 뭉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감히 인간 정치에 원숭이나 개미의 의견이 그다지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이 동식물을 봐주면 그때사 동식물은 인간의 자비심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는 위계상, 인간은 자연세계의 위를 점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 나열되어 있는 창조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연세계의 운명과 같이 갑니다. 특히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6일날 만들어진 땅의 피조물들은 인간들과 같이 망합니다. 인간과 대자연은 하나님의 언약실시 안에서 묶여져 있습니다. 인간들이 단독으로

복음의 일군

골로새서 1:21-23 복음의 일군 사명자는 본인이 해야할 일을 본인이 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의 일에 말려들어간 상태가 사명자의 상태입니다. 자아 결정권이 없다는 것은 곧 더이상 ‘자기를 위한 생애’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명 자체가 없는 사람은 ‘나를 위함’이 없는 상태를 피폐한 상태라고 여기고 질겁을 할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지속된다면 굳이 세상을 살 이유가 없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복음의 일군’은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받고 외부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이것은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라고 합니다. 고용주는 자신으로부터 봉급을 받는 이가 사

원수와 형제

데살로니가후서 3:13-15 원수와 형제 원수와 형제는 반대말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일방적으로 형제삼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본인이 본인에게 형제다운 면모가 있는지 살펴야합니다. 참다운 형제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는 자’라고 사도는 규정합니다. 끝까지, 한결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 원수(적)가 생겼다는 말은 한결같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한결같이 않는 것은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각자 속해 있는 구조가 달라서 그러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늘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원수같은 자들은 매사를 본인의 본성대로 움직입니다. 그 본성 배후

교회 형편

데살로니가전서 1:1 교회의 형편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머물면서 전도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해(행 17:5-6) 베뢰아로 피신했으나 그곳까지 쫓아온 유대인들로 인해 아덴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실라는 베뢰아에 각각 남겨 두었고, 그 뒤 베뢰아에서 합류한 실라와 디모데는 아덴으로 와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와 시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직접 데살로니가로 가기를 원했지만 결국은 디모데를 그것에 보내었습니다. 얼마 후 고린도로 온 사도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을 잘 견뎌내며 그 가운데서도 기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골로새서 1:15-17 그는 ‘그는’ ‘우리는’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그’이십니다. 독보적인 분으로서 ‘그’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있어도 ‘우리는’ 그분을 평가하거나 분석하거나 소유하거나 이해하거나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그분의 활동 결과로서만 이 세상에 나타났을 뿐입니다. 이럴 경우에 전에 우리가 소속된 ‘우리’는 무효가 되고 제거가 되고 죽음이 됩니다. 그분과 우리 사이의 단절성이 계속 살아 있는 방식으로 ‘그분의 나라’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그분의 나라’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식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인간들은 온갖

위선자들

디도서 1:13-14 위선자들디도서 1:12에 보면, 사람을 보고 ‘짐승’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따라서 사람보고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은 ‘사람답게 살아라’는 차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인지를 알아야’라는 더 낮은 차원으로 끌고 가는 말입니다. 짐승이라도 이 대지 위에서 살면서 본능적으로 고생할 줄은 압니다. 제 먹을 것을 찾고 챙기는데 짐승도 사투를 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레데 사람들은 편한 것만 찾는 ‘게으름장’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본성이 십자가 복음을 이

편당

고린도전서 11:17-21 편당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봐서 그 현장에 필히 패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패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할 주체가 발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교회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주님의 만찬’에 견해 차이 때문입니다. 이는 ‘주의 만찬’에 대한 표준 의견이 한꺼번에 쑥 제시될 성질이 아니라 패싸움을 통해서 후차적으로 밝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어떤 제사냐’를 놓고서 표준 지침서가 사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형제들의 타협 못할

사도의 관심사

고린도후서 12:11-13 사도의 관심사대인관계에서 동등하게 대우받고 싶어합니다. 물론 일방적 요구입니다. 하지만 역할이나 꼭 필요한 기능의 발휘에서마저 동등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작업을 수행할 능력이나 기술이나 덕이 부족한 사람이 함부로 자기가 나서겠다고 하면 일을 망쳐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게 마련입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알고, 동등함보다 우위의 대우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어서 고린도교인들이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 그들은 전혀 복음에 대한 고마움이나 소중함을 사도가 원하는 만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는 자진해서 고린도교인들에게 무시당할 각오로 그

주님의 이름으로

골로새서 3:16-17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단단한 고리에 인간은 자발적으로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그 어떤 시도에도 하나님은 없었던 겁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던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을 상관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아에 하나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형편인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실시한 ‘이스라엘’ 실험에서 밝혀진 사항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이 되었습니다. 이방민족들에게는 각 민족마다 신도 있고 신전도 있고 거기에 따르는 경배, 찬양, 신앙, 소망, 사랑 같은 것들을

사도의 사랑

고린도후서 12:14-18 사도의 사랑사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이 습득한 고유한 삶의 공간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즉 자신이 평소에 자기를 지키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기에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자도 자기와 같은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장벽을 사도는 미리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이라는 사랑을 전달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를 확충하는데 보탬이 되는지 여부를 검토하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예가 누가복음 18:11-12에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복음의 요약

갈라디아서 1:4-5 복음의 요약복음을 이해한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현실의 삶 속에서 복음을 써먹고자 했을 때,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복음을 이해한다는 자를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원하는 구원을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만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도 힘을 발휘합니다. 복음에서 발휘되는 이 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구원되는 것을 막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세대’에서 나온 의도들을 묻히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즉 ‘누구를 위한 구원이냐’를 따지게 됩니다. ‘악한 세대’

빌립보서 3:1-3 개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악한 감정을 갖는 것은 어느 한 쪽이 피해 보았다는 의식을 가질 때입니다. 상대방을 통해 손해 보았다는 느낌을 가질 때입니다. 특히 손해라는 것은 오늘날에서 금전적인 손실이나 신체적 상해를 당한 경우가 주류입니다. 물론 명예 훼손도 덧붙일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경우에는 사과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체로 금전으로 보상하므로서 해결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피해 입은 쪽의 분노가 풀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어떨까요? 진리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피해자는 사람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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