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이런스] 평

영화 [사이런스] 평

l영화 [사이런스 Silence] 평

‘침묵’이라는 이름의 이 영화는 1640년 경, 일본 에도시대(1603-1868) 초기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를 배경으로 한 실화를 깊이 들추고 있다.

(줄거리)

1633년, 일본의 천주교 박해 정책에 의해서 20만의 천주교 일본 신자들이 각처에서 죽어나가고 있는 판국에, 신앙을 버리고 일본 정치권력에 굴복하고 그들 반(反)-천주교 포교 정책에 협력하는 예수회 선교사도 덩달아 등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포르투갈 예수회 당국에까지 전달된다.

예수회에서는 당분간 일본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 방침이 굳어졌는데, 여기에 굴복하여 혈기 넘치는 두 젊은 신부가 자진해서 일본에 보내달라고 떼를 쓴다. 키가 큰 쪽이 라루페 신부이고, 절적한 키에 잘 생긴 쪽이 로드리게스 신부이다.

이들이 일본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는 이유는, 그들의 스승이자 선교 활동의 모범 성공사례라고 예수회 내부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 페라이라 신부마저 일본 당국에 포섭되어 천주 교리를 반대하는 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이다.

예수회 후배 신부들에게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그 어떤 이보다 신앙면에서 강직하게 버티실 분이라고 여긴 분이 배교했다고 하니 확인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없는 두 젊은 신부는 자진해서 일본행을 요청한 것이다.

1640년 10월, 예수회는 ‘두 명의 군대’라고 칭하면서 중국으로 그들을 보낸다. 마카오에서 일본까지 인도할 일본인을 찾아내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기치지로 이다. 그는 자신을 ‘기르스탄(일본에서 불리는 천주교인에 대한 명칭)’이라고 소개하면서 나가사키에서 살던 어부라고 한다.

밤에 몰래 일본의 어느 산기슭 해안에 도착해서, 기치지로의 안내로 아직 남아 있는 천주교인들을 10명 정도 만난다. 그들은 두 외국 신부를 대해서 ‘하나님이 보낸 자’라고 여긴다. 그동안 노인장이 천주교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었다.

이미 그 나가사키 지역에는 이노우에 수령이 강력하게 천주교를 박멸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천주교인을 신고하면 은 100량을 주고, 모임을 신고하면 은 200량을 주고, 외국인 신부를 신고하면 은 300량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두 젊은 신부는 포르투갈을 떠나면서 궁금한 사항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페레이라 신부가 과연 배교해서 일본 여인과 같이 살고 자식까지 거느리고, 천주교인을 잡아 죽이는 앞잡이 노릇하고 있는지 그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남았던 것이다.

일본당국에 의해서 자행되는 천주교인에 대한 살해 방법은 참으로 다양했다. 펄펄 끊는 유황 노천 온천으로 데려가서, 신도들을 십자가에 매달게 하고서는 구멍 뚫린 국자를 가지고 윗몸에 갖다 붓게 되면, 이미 마치 불타는 석탄조각을 직접 몸에 달구는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천주교인들을 매달고 밑에서 불을 붙여 화형에 처하고, 마을 주민들이 천주교인을 신고하지 아니하면 마을을 대표해서 애매한 사람, 4명을 대신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고,

그리고 강력한 파도가 내리치는 얕은 바가 속에다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에 천주교인들을 매달아서 썰물 때 파도에 맞아죽게 하는데 기껏 나흘까지 살 수 없다. 죽어서도 부활되지 못하도록 나무로 제단을 만들고 시신을 불에 태우고 뼈까지 바다에 빠트렸다.

그리고 멍석으로 천주교인을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서 명석채로 긴 막대로 밀어 빠트리고 철저하게 익사시키기 위해서 배에서 이미 빠진 사람이 물에 더욱 가라앉도록 계속 쑤신다.

가장 강력한 살해 방식은 십자가를 세우고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바로 밑 흙을 파서는 머리만 들어가게 하고, 그 머리에 약간 상처를 내어 피가 똑똑 떨어져 결국에는 피 한 방울을 남기지 않고 죽이는 방식이다. 이런 살해 방식이 영화 내내 감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선배의 배교 여부가 궁금했던 두 젊은 신부는 숨어 있는 천주교인들을 대하면서 자신들의 위상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기쁨이요 환희요 보람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신부님, 지금 죽으면 천당 가지요?”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던지는 순박하게 평안한 질문에 대해서 두 신부는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신앙이 일본 천민들의 순수한 신앙을 당해낼 수가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두 신부는 자신의 사명의 고귀함을 도취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고토라는 제법 큰 마을까지 진출하여 밤에 몰래 6일 동안 숨어있던 천주교인들과 미사를 드리고, 신고 들어와 위험이 처할 때에도 가지고 있는 모든 증표, 심지어 묵주 조각들까지 신자들에게 다 나누어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중국 마카오에는 나가사키 해변까지 안내했고, 그 이후에 줄곧 천주교인들을 주선해준, 노름 쟁이, 술주정꾼 천주교인인 기치지로는 그가 중국으로 도망치지 전 8년 전에도 가족들 앞에서 배교한 적이 있다.

관졸들이 이 천민 천주교인들에게 예수님과 마리아 얼굴이 그려진 네모난 성화 상을 다들 보는데서 밟아라. 고 했는데 이 이치지로는 혼자라도 살고 싶어 공개적으로 밟은 것이다. 혼자서 배교한 양심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두 신부를 만나서 하나님에게 죄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드리게스 신부와 그와 만났던 마을 사람들을 관가에 신고하고서는 은 300량을 받는 배반을 한다. 결국 이 기치지로로 인하여 처음 만났던 숨어있는 천주교인들을 다수 죽게 되고, 로드리게스 신부도 체포되어 나가사키에 있는 이노우에 관가 틀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아직 페레이라 신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두 신부가 아무리 초고를 당해도 신앙의 스승은 여전히 자기네들과 같이 순교의 길을 가거나 장렬하게 순교해서 천주진리의 빛을 찬란하게 빛내 주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배신했던 이치지로는 또다시 갇힌 신부에게 자진해서 찾아와서는 자신이 여전히 천주에 대한 신앙을 있음을 발설하면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를 청한다. 그때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고해성사를 해준다.

이노우에 수령은 수시로 로드리게스 신부를 불러내어 배교하기를 회유한다. 심지어 어느 날 바닷가에 불러놓고서는, 같이 포르투갈에서 온 가루페 신부가 장렬하게 신자가 물에 던져져 죽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어 바다로 뛰어 들어가 건지려다가 같이 익사하는 그 현장을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사제의 사랑은 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신부라는 위치와 당신의 신앙을 사수하기 위해 비겁하게 자기 몸을 사린다. 이러고서도 사제인가?”

오랫동안 이노우에 수령이 로드리게스 신부를 즉결 처분하지 않고 계속 잡아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드리게스 신부가 그렇게 흠모하는 페레이라 신부의 전철을 젊은 로드리게스 신부가 그대로 밟고 있다는 사실을 감 잡았기 때문이다. 즉 저러다가 언젠가는 페레이라 신부처럼 본격적으로 배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했다. 늙은 이노우에 수령과 젊은 통역관이 수시로 로드리게스 신부를 설득시킨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는 우리의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에 더 고통을 주기 싫습니다. 우리네 종교는 우리에게 맞고 당신네 종교는 당신에게 맞습니다. 어떤 나무는 그 나라에서 잘 자라지만 어떤 나무는 늪에서 고사합니다”

그러자 로드리게스 신부는 대꾸한다. “진리란 보편적입니다. 만국에 다 적용됩니다. 진리는 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씨앗의 문제입니다. 당신네들이 그 씨앗을 죽여 놓고서는 땅 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늙은 이노우에 수령은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해서 설득시키려 한다. “우리 다이묘(영주)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첩을 4명 두었는데 첩들이 서로 싸워서 다 내어보내고 나니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들이 서로 이 일본에 시집오겠다던데 우리 일본의 입장은 다 내어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대꾸한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속 썩이는 아내는 진정한 아내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천주는 국가를 위한 아내가 아니라 천주님을 위한 아내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천주님과 신자를 떼어놓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서 잘 설득이 안 되자 이노우에 수령은 이미 배교해서 일본인이 되어버린 페레이라 신부를 로드리게스 신부와 만나게 한다. 그것도 늙은 중을 대동해서 절에서 설득케 한다.

배교자인 페레이라 신부는 전에 자신을 그토록 흠모하고 존경한 후배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보기에 내가 그렇게 달라 보이냐? 이 절은 내가 공부하는 곳이다. 나는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다. 나는 이 나라에 도움 되는 존재다. 너는 서양에만 진리가 있다고 알고 있었지. 하지만 내 생각은 좁았어. 이 일본에도 온통 진리 토성이야. 단지 의학과 천문학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 내가 이 일본에서 천문학이라는 책을 쓰고 있는 중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젊은 통역관은 페레이라 신부를 추궁한다. “사와로 추안(페라이라 신부의 새 일본식 이름)씨. 다른 책도 언급해주셔야지요” 그러자 페라이라 신부는 마지못해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또 다른 일을 토설한다. “실은 나는 천문학 말고 또 다른 책을 쓰고 있어. 그리스도교의 오류에 관한 책이야. 즉 [거짓이나 잘못이 드러난 진리책]이라는 내용이야. 나는 이 일본생활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었어. 자아를 버려야 돼. 두 종교는 같은 거야 꼭 한 쪽이 꼭 이겨야만 되는 게 아니잖아”

옆에 있는 늙은 중까지 거든다. “우리 일본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산과 강은 옮겨도 사람의 본성은 옮길 수가 없습니다” 즉 서양인이 와서 개종을 요구할 필요 없다는 논리를 내놓은 것이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페레이라 신부를 보면서 한탄하면서 외친다. “수치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뒤 로드리게스 신부는 감옥소 벽에 쓰인 어떤 글을 발견하게 된다.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그것은 라틴어로 쓴 ‘예수님 찬미’라는 글귀다. 페레이라 신부가 쓴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가 들어와서 말한다. “그 글 내가 썼다”

이로서 로드리게스 신부는 배교해도 배교가 아님을 알게 된다. 드디어 공개석상에 성화를 밟게 되는데, 밝히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게 된다. “날 밟아라. 나는 너의 고통을 아노라. 밟아라!”

이 배교한 두 신부의 주된 일은, 세관에 앉아, 서방에서 들어오는 교역물품 가운데서 선교용으로 몰래 들어온 것들을 골라서 폐기하는 일이다.

페레이라 신부가 죽고 난 뒤, 이노우에 수령은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일본인 처와 자식을 소개해주어서 같이 살림을 차리게 해준다.

그 뒤라도 이노우에 수령은 수시로 배교의식을 치러서 여전히 천주신앙을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1667년 기치지로가 그 확인과정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지닌 것이 발각되어 결국 처형당한다. 그 뒤에 페레이라 신부도 죽고 1682년에는 주인공은 로드리게스 신부도 죽게 된다.

죽기 전에 로드리게스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신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셨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여태껏 하나님께서 침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이제는 고백합니다.”

일본당국에서는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했고, 일본인 아내는 울지도 않는다. 그녀는 당국이 시키는 대로 악령을 추방하는 축문을 적은 문서를 시체의 담긴 둥근 통 안으로 집어넣는다. 불이 붙는 통 안으로 카메라는 로드리게스 신부의 손 안을 비쳐주는데 거기에는 십자가 성물이 놓여 있었다.

(평)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 [침묵]이라는 유명한 일본인 소설가 엔도슈사쿠의 작품을 영화한 것이다. 감독(마틴 스콜세지)은 일반인들이 천주교의 교리를 직면할 때, 자신들의 마음속에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에 주목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과연 천주교 진리가 목숨까지 내놓을만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를 나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탐색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고려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목숨을 내어놓게 되는 것이 상황이 자발적이지 않고 강제적이다 는 사실이다.

순교하게 된 것을 마치 유치원 아동들이 도시락 들고 꽃피는 봄의 들녘으로 소풍 나가듯이 이전부터 학수고대한 즐거운 순간이 찾아온 것처럼 반기면서 순교하는 자가 드물다는 말이다. 억지로 국법에 발각되어 죽게 된다면, 순교의지가 빛나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살해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마지못해, 그것도 자기 종교를 거부한다는 의사표시까지 무시당하면서 죽게 된 순교라면 과연 이 타율적 순교가 과연 진정 순교이겠는가?

이 질의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비겁하다고 평을 받는 배교가 자율적인 배교가 아니라 타율적인 배교라면 과연 그 배교행위가 비난받을 만한 배교이겠는가?

쉽게 말해서, 평소에 ‘살고 싶어서’ 살아온 자들이 어느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어느 순간부터 “나 더 안 살래. 제발 나를 죽여서 얼른 하늘나라로 가게 해줘”라는 투로 살아가는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치 안심 보험 하나 들여놓듯이 “이제부터 신께서 나를 조용하고 편안하게 남은 생애를 보내게 해주세요”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영화에서 순교했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자랑스럽게 자진해서 관아에 가서 “나 천주신자요”라고 자수한 자들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들키지 않기 위해 밤에 몰래 만나면서 온갖 노력을 다 한 자들이다. 이들이 왜 이런 행위를 했을까? 천주교리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서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바로 ‘혈육의 존속’이다. 자신을 포함한 자기 가족들의 소중함! 이것보다 더 다급하고 진정한 진리성이 또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게 하는 창세기 22장의 대목이 생각난다. 그리고 마태복음 10:36-37에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달리, 이 일본 에도 시대의 순교 사태는, 집단의 추상적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가족 공동체 위주의 저항의 한계를 말해준다. 천주사상은 하나의 빌미다.

즉 만약에 21세기의 일본이라면 이런 식의 순교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권력의 바탕에는 ‘가족 공동체' 이념을 보장하고 구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가 진리라서 순교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시대이기에 순교 당한 것이다.

이점은 페레이라 신부의 변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종교적 순교자 되기를 희망했지만 이것도 짝이 맞아야 한다. 일본 당국이 ‘종교적 순교’ 의미도 발생하는데 적절한 짝이 되지를 못한다. 그들의 안목으로는 천주교리가 국법의 가치를 훼손하는 반역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차피 ‘종교적 순교’를 살릴 수 없는 입장이라면, 비록 자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순교를 통해 복음의 씨앗 남기기’라는 천주 교리에 맞지 않게 될 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페레이라 신부는 자신의 활동 성격을 바꾼다. 천주 교리의 전파자에서 과학 전파자로 바꾸는 것이다. 미래를 도모하면서…

페레이라 신부는, 자신은 지혜롭게 처신했다고 여긴다. 이런 결정이 차라리 천주님 보시기에도 옳은 결정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믿는다. 페레이라 신부는 ‘과학’이 중립적 위치에 있다고 보고 있다.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천주교의 주장처럼)

칼도 쓰는 사람에 따라 선도 악도 되듯이 과학도 쓰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천주님의 진리를 펼치는데 유용하고 지혜로운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정 순교는 없어진 것일까?

(복음적인 평)

오늘날의 복음으로 ‘과학’으로부터 핍박받고 무시당한다. 모두들 과학의 신도로서 과학 발전만 쳐다보고 사는 형편이다. 과학이 양산하는 경제적 축복을 보다 많이 획득하는 것이 보편적 진리로 통한다.

교회에서나 성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장하고자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에 기초한 경제력을 얻기 위함이다. “신이 도와주면 가족공동체가 부자 되고, 신을 버리면 가족공동체가 가난하게 됩니다”를 구호로 내걸면서 과학이 가져다주는 혜택에 의존하고자 한다. 그러니 복음은 자연적으로 멀리 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 기술력은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건설하게 된다. 따라서 과학이 펼치는 범위는 이미 종교계에서 외치는 교리의 범주마저 삼켜버린 것이다. 그 원인은 악마에 의해서 주어진 ‘살고자 하는 의지’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의지는 단순히 “살려주세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을 때 살고, 죽고 싶을 때는 죽는다. 왜냐하면 과학에 의하면 인간은 그런 처분권을 행사하는 한 가장 인간답기 때문이다”

즉 국가가 나를 죽이고, 경제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순교 결정권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 바로 과학에 입각한 민주주의 사상이다. 따라서 페레이라 신부처럼, “나는 나의 운명을 내가 결정하는 유일한 당사자라는 사실이 곧 하늘의 뜻이며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자유요 구원이요 생명이요 천국이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바로 이 경지를 달성해주는 그런 시대에 돌입되어 있다.

따라서 17세기 일본에 전파된 예수회 천주 교리는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 단지 그 시대까지 발달된 과학과 합리적 의식에 의해 높아진 ‘새 인간성을 준한 해방 교리’일 뿐이다.

이 교리가 여전히 비-과학적인 시대를 탈피하지 못하는 에도 시절의 일본 입장에서는 자기네 정치 구조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가족 공동체’를 철저하게 지배력을 원칙으로 삼아 구성된 무사 정치권력집단에게 있어 ‘인간 해방’이라는 참으로 대책 없는 무질서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살고자 하며 경쟁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죽어도 좋아”라는 식으로 움직인다면 그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태도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 끝날 까지 유일한 복음의 내용이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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