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하는 자

데살로니가전서 3:1-5 시험하는 자 ‘흔들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이나 그 사람의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흔들어 보는 겁니다. 뭔가 튀어나오겠지요. 시험이란 본질이나 본성을 외부에서 측정하고 싶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상대가 자기와 뭔가 달라도 확연하게 다른 것 같아서 확인차원에서 흔들어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성도를 흔들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이는 분명히 베드로 속에 예수님께서 받아들일 수 없

진리와 함께

고린도전서 10:6-7 진리와 함께 얼룩은 보통 지워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불의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불의로부터 핍박을 받는 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이란 ‘복음이 아닌 것’과 대비되는 바로 그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불의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활약상을 충실하게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의 절정’을 예고해주셨습니다. 악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거나 퇴치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은사 없이는 모든 자는 불의 편에 서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보고 ‘불의이다’고 말하는 것은 곧 사랑의 은사가

사도의 직책

고린도후서 6:3-6 사도의 직책본인에게 일어난 일이 남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렇게 자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의도적으로 타인을 변화시키려 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남이 조종되는 것을 기대하는 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철두철미하게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세상이 인간들만 활동하는 영역이 아님을 압니다. 이 사실은 본인이 예수님에 의해서만 달라지고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에 있어 진정한 변화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 예수님의 몫입니다. 인간들이

마음을 넓혀라

고린도후서 6:11-13 마음을 넓혀라‘쫄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들려오는 말의 내용이 듣는 사람에게 위협이 될만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단순히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식으로 다가왔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이 누구와 대화할 때에 상대방이 자기에게 우호적인지 아니면 공격할 자인지를 살피기 마련입니다. ‘우호적’이라는 말은 상대를 만나고 난 뒤 생겨나는 새로운 환경에 자신의 기여분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를 말합니다. 즉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다 제공하는 것도 실은 찝찝하기 마련입니다. 나중에 무슨 딴지를 걸지를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정도로

생명의 능력

히브리서 7:16-19 생명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인간들의 죽음은 개선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죽음의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 율법의 저주에 의한 것이었던 겁니다.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는 제사 기능과 레위지파 계열의 제사장들이 행하는 제사 기능의 효력을 비교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던 겁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곧 전쟁 승리) 멜기세덱의 제사장 기능이 이 땅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율법이 주어지는 그 세계는 영원히 죽음을 없이 오직 영생만이 넘쳐나

온전한 사람

에베소서 4:13 온전한 사람 ‘온전치 않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짐작하는 바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전치 될 수도 없으며 온전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온전함’이란 항상 완벽하게 철저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온전함’이란 항상 실패할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고매한 경지에 인격이 이르렀다고 할 수 있어도 조그만 흠집이라도 나는 날이며 그동안 쌓아놓은 온전함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바는, 인간들이 이 온전함을 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하나님의 온전함입니다

헛되지 않는 일

고린도전서 15:57-58 헛되지 않는 일성도란, 예수님께서 친히 사망을 이겼다 는 사실에 의해서 생겨난 증거자들입니다. 즉 기적에 의해서 새로 발생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왜 본인의 인생이면서 본인의 뜻대로 되어진 운명이 아닌가를 증명해줄 속성들이 계속 발휘되게 됩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상황 자체도 예수님에 의해서 제공된 것들입니다. 성도라는 영원한 신분이 영원히 파괴 되지 않고 보존되기 위해서는 성도 개인의 뜻은 항상 배제당해야 하고 실패로 끝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최종성이 보장되는 조건은 ‘확인’이지 ‘점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으로부터 받은

인간들의 본성

갈라디아서 3:2-5 인간들의 본성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한 일이 자기 영광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무가치하지 않음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성령’의 뜻에 대적되는 생각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님의 완료하신 것만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함이 철저하게 악마적이었다는 사실을 아울러 폭로하는 겁니다. 인간이 신을 죽였다는 겁니다. 피조물이 합세하여 창조주를 죽였다는 겁니다. ‘죽음’이란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겁니다. 그 싫어하는 바를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낸 바

말과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13 말과 말씀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이래서 사고가 난 겁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창 11:1) 인간들은 생각이 하나같다는 뜻입니다. 상호 통하는 있는 관계로서 사회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향하는 것,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 바로 이러한 생각이 옳지 않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런 조치를 내리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

할례당의 횡포

디도서 1:10-11 할례당의 횡포 사도가 보기에 그레데 교회에 문제는 장로가 없어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어지렵히고 있다는겁니다. 거짓 교사들의 활개침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장로의 역할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복음 진리와 관련해서 확실한 기준을 제시할 줄 아는 자가 장로라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기준 안에서 하나로 뭉쳐있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물론 장로라는 것이 있어도 문제는 일어납니다. 따라서 장로의 특징은 복음 진리에게만 관심두고 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자존감이나 타인으로부터 대접받고 존경을 받는데 신경쓰면 안 됩니다. 진리를 위하여 그 모든 것까지라도 기꺼이 던져

기업

에베소서 1:11-12 기업 삶과 죽음의 세계까지 통일되는 것에 대해서 에베소서에서는 ‘하늘과 땅’의 통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러한 통일을 체험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시간상으로는 ‘죽음’에 갇혀 있는 자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땅’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게 대해서 이해하는데 한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제대로 땅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다는 겁니다. 전체 통일성을 안에는 인간들이 이해하는 것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적 사태에 대해서 인간들은 목숨을 걸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모든 가치와 중요함을 일부에 불과한 경우에다

학문의 종

갈라디아서 4:1-3 학문의 종갈라디아서 1: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이 말씀은 곧 “나처럼 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알아들을 수 없음’은 기껏 사도와의 개인적 사이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정해지는 징후가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알아들을 수 없는 뜻들이 어느 날부터 들려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사도의 복음이 들려지면서 세상을 다시 보고, 다시 듣게 됩니다. 세상의 말이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말임을 인지하게

성경

디모데후서 3:13-15 성경 사도는 악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구분을 성경에 대한 관심사로 규정합니다. 이는 곧 성경에서 어떤 기준점이 제시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악한 자가 아니라 정당하게 사는 사람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지식 속에 놓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선과 악의 지식이 인간들 외부에 따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마다 각자 그 사람 안에 선악지식으로 체계 잡혀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따라서 선악 지식의 주인들은 각자 본인들입니다. 아무리 외부에서 자신을 보고 악한 자라고 지적해도 본인이 그것을 거부하면, 그 거부하는 태도조

복음적 행함

골로새서 1:10-12 복음적 행함 복음으로 인하여 새롭게 야기된 행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선한 일에 열매가 맺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려면 복음이 그 사람 속에 내재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성도 안을 점령하는 방법은 구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으로 원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성도는 주변에 불신자와 만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그 불신자와 성도가 본질상 동일하고 거러하기에 쉽게 혼합된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로서 인간의 힘으로 성도답게 산다는

아들의 능력

히브리서 7:20-22 보증받은 언약 사람 살아가는데 굳이 언약이니 맹세가 필요할까요? 돈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왕에에 살아 있는 존재를 계속 살리는 데 있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아예 죽은 존재를 살리는데는 돈이나 세상 능력으로는 소용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믿는다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근원적으로 인간 자신이 이미 죽어 있으며 죽은 존재가 하나님에게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것조차 하나님에게 거부당할 호소에 불과합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눅 17:12-13) 열명의 문둥

복음 전파의 방법

데살로니가전서 2:9-12 복음 전파의 방법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놀지 못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5:17에 보면,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그 원리로서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은 주님의 일하심과 같이 일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일하시지만 그들의 일하는 것을 육에서 나와 육으로 말미암아 육을 위해서 일하시는 겁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이처럼 성령으로 인하여

연약한 제사장

히브리서 5:1-4 연약한 제사장 제사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함유하고 있는 직책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란 속죄가 가능한 제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속죄함을 받는 당사자가 왜 속죄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속죄일까요? 자신이 절대적인 신이 되기 위한 속죄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드러내기 위한 속죄 제도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을 이렇게 평합니다. ‘무식하고 미혹한 자’라고 말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이익 받는 것 외에는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

향기로운 제물

빌립보서 4:18-20 향기로운 제물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입니다. 이 사람이 로마까지 와서 옥에 있는 사도 바울에 선물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대해서 사도 바울은 ‘제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을 만한 제물’이라는 겁니다. ‘제물’은 레위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의 핵심 사물입니다. 특히 ‘향기로운’라는 말이 붙는 것은 불로 몽땅 다 태우는 번제일 경우에 자주 언급됩니다. “너는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위에서 번제물을 더하여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니 곧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출 29:25) 자연물의 속하면서

흑암의 권세

골로새서 1:13-14 흑암의 권세‘권세’는 힘을 말합니다. 실재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허공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아무 것도 없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뚱아리가 손에 잡히고 이리저리 살펴서 존재가 확인되고 거울을 통해서 마주 보이니 그것이 근원적인 요소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세’, 그것도 ‘흑암의 권세’ 가 근원적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무엇이 더 근원적인지 투쟁을 벌리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반 교사가 학교에 출근해서 아이를 가르치고 돌보다가 저녁에 퇴근했습니다. 자 이 교사는 무엇과 싸웠습니까

삼켜진 죽음

고린도후서 5:4-7 삼켜진 죽음‘면허’라는 것이 이 세상에 있습니다. 국가와 개인과 상호작용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 필수적 요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허가제는 개인이 자기 운명을 임의로 다루거나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여건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관을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인간관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살고 죽는 것은 개인의 의도와 무관한 현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 활동의 구체성에 인간의 끼어듬을 허가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선 ‘죽음’이라는 굴레가 뒤집어 씌어져 있습니다. 그 죽음은 원인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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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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