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사의 위기
목사의 위기는 더 이상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자기 소유로 전환하는데부터 시작이 된다. 스데반 집사님은 죽는 그 순간까지 결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책임 하에서 벗어났다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돌에 맞아 시신이 되어가는 자신마저도 즐겁게 그리스도를 만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목사가 자신을 독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목사에게 위기가 온다. 계산을 하게 된다. 자기에게 손해인가 이익인가를 고려하면서 행동한다. 심사숙고하고 매사에 조심한다. 위기가 들이닥친 초창기에는 신으로부터 얻어낼 것은 다 얻어내려한다. 말씀을 연구하고 신학 지식도 많이들 챙겨둔다. 열심히 교인들을 사랑해주려 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신으로부터 꾸중들을 빌미를 사전에 없애기 위해서이다.
신으로부터 꾸중 듣게 되면,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을 필시 자꾸만 생길 것이라는 예감을 지녔기 때문이다. 신이 보시기에는 하자없이 충성되이 일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들이 행운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머금고 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순간에서도 자기는 오직 자신의 소유일 뿐이다.
열심히 설교 준비해서 열심히 설교를 해댄다. 그러면서도 이상스럽게 설교 할 때마다 짜증이 난다. 설교하기 전부터 짜증이 나다가, 설교 도중에도 짜증이 나고, 설교 끝나고 난 뒤에는 왕 짜증이 난다. 그 이유는, 설교 전에는, 이토록 코피 나도록 준비한 설교를 교인들이 이리저리 핑계 대면서 교회 출석을 아에 안 해서 안 들을까봐 짜증이 나고, 설교 도중에 짜증이 나는 것은, 이렇게 간절하고 간곡한 심성을 토해내듯이 설교해도 그것을 별 생각없이, 성의없이 듣고 있는 교인들의 태도를 보니, 목사 본인이 도리어 교인들에게 노리개감이 되어 놀아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짜증나고,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짜증이 나는 것은, 전적으로 목사가 아쉬워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제 때에 풍족하게 안 채워주고 자기네들 끼리 히죽거리면서 노는 꼴이 얄미워서 짜증이 난다.
쉽게 말해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목사 앞에 퍽 엎어져 목사가 마음속 깊이 괴로워하는 모든 것을 다 채워지지 않는데서 오는 적개심이 마구 속에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단지 ‘점잖은 목사’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서 만사가 불평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만 오면 짜증이 난다.
“야이, 이 교인들아! 목사 좀 봐라. 이 목사가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좀 봐라. 정말 당신네들 미워죽겠다. 네들은 지옥이나 가라고 저주하고 싶다!”
이러한 미움도 하루 이틀이지, 도저히 참다참다 못참으면 위기의 중반기에 접어든다. 이 시대에는 신을 포기한다. 신을 포기하는 방식은 일체 성경 말씀의 진실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은 현 시대에는 실효성없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된 지점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낭패를 당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전략으로 나오게 된다.
일체 성경의 진실성을 포기했기에 성경 말씀 탐구에서 손을 뗀다. 실효성도 없는 것 백날 연구해봤자 쓸모없는 지식덩어리에 불과하다. 성경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 복음이고 진리고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는 나부랭이들이다. 신을 버리고 신의 말씀을 포기했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들이 마음 속에 들어있는 ‘신 찾아주기’ 업무를 대행해주고 혹시 교인들이 찾게 되면 커미션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전략으로 목회하고자 한다. 소위 ‘잠자는 신’을 깨우는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노골적 방식은 ‘기도발’이다. 성경 버리고 기도를 택한다. 기도발을 세울 수 있는 모든 성경 구절을 총동원하여 그것으로 설교시간을 채운다.
설교의 내용은 이렇다. “나 목사가 당신네들 사업 잘되기 위해서 축복 기도, 사업기도, 생활 시도를 해주는데 당신네들 교회 돈 안 내놓을거야? 이 약아 빠진 인간들아. 이렇게 해놓고 당신네들이 신앙적 양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평소에 성경 말씀이 이해도 되지 않았고, 따라서 당연히 지겨워했던 교인들이 비로소 ‘기도발 세우기’ 목회로 선회한 목사 설교는 이해가 된다. 천국 가기가 얼마나 간단한지, 성경이고 뭐고 교회가 요구하는 돈만 몇 푼 내면 천국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당당하게 갖게 되었다.(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교인들은 부지런히 교회 행사에 봉사하는 것으로 돈을 많이 못내놓는 미안한 감을 대신하려 한다)
교회 돈 내는 것은 많이 아깝지만 교인들 입장에서 기분좋아진 바도 있다. 그것은 성경을 몰라도 내 속에 있는 진작부터 들어있는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목사로부터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는 돈 주고 받는 관계고, 교회와의 관계가 이렇듯 정상적이라면 죽어서 만날 하나님과의 관계도 벌써부터 정상적인 관계라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의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갈수록 교인들이 교회에 안 나타난다는 것이다. 직분을 주어서 강제로 책임을 뒤집어씌어보는 수법도 써보지만 효과가 몇 주가 가지 않는다. 왜 교인들이 교회에 못 나는가?
그것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국민소득이 2만 불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온 집안 식구가 다 돈버는데 매진하지 아니하면 2만불을 벌어들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잠시라도 일을 하지 아니하면 벌써 중산층으로부터 저만치 뒤쳐져 있다. 어른들은 그나마 세상 원망하며 참을 수 있다. 그러나 한참 커가는 애들이 당하는 상대적 박탈감을 보고 있는 부모의 마음을 찢어진다. 애들이 무슨 죄인가?
처음에는 “휴대폰 사 달라” 것에서 만족하던 아이들이 “신모델 휴대폰”이 아니면 학교 가기가 부끄럽다는 식으로 나온다. 따라서 계속 국민 소득 증가에 따라 계속 따라잡고 또 따라잡아야 한다. 이것 때문에 교인들이 교회 나올 여유가 없다. 설사 그 시간에 놀더라도 내일을 위해 육체의 에너지를 보충해 위해 잠 자고 휴식하는 시간으로 충당되어야 한다.
국민소득이 3만불이 되면 그 때부터 교회가 완전 위락시설로 바뀌지 아니하면 교회 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제발 노시더라도 교회 와서 놀아주세요. 우수한 강사님들을 초빙하되 염가로 회원등록 가능하게 해드립니다.”라고 애걸복걸해야 한다.
이 때부터 교인들은 ‘기도 하세요’라는 이야기조차 부담스러워 한다. 목사는 아무 소리를 말아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입을 다물수록 훌륭한 목사다. 세상 번영에 대해서 목사보다 교인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자는 신도 각자가 알아서 잘 도 깨우는 시기다. 돈 버는 신도 깨우고 이제는 잘 노는 신도 자발적으로 깨운다. 목사가 필요치 않다. 단지 교인들이 노는데 있어 재정적인 부담을 줄이는 수완만 발휘하라고 요구할 판이다. 즉 부자들 교인을 꼬셔서 기부금 많이 내게 해서 가난한 교인들도 부자 흉내내며 놀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 조치가 곧 대출 받아서라도 예배당, 아니, 문화 및 위락센터를 크게 지어서 주민들에게 봉사하는 교회로 탈바꿈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 목사가 할 일은, 인간들이 즐길 수 있는 가지가지의 문화와 여가 활동의 컨셉을 마련하고 실시하는 일이다.
목사는 나중에 이 일조차 하기 싫어한다. 미쳤다고 봉사하냐? 봉사도 지겹다. 언제까지 교인들 뒤나 닦아주나? 목사도 한 몫 잡는데 혈안이 된다. 이권개입에 나선다. 전에는 장로들이 주로 전담하는 사업에 목사가 전면에 나선다. 목사가 본격적으로 사업가가 되는 것이다. 지방 유지가 되기 위해 공직에 있는 사람들과 사귀어놓는다. 권력에 선을 걸쳐 놓는 것이다. 정치 권력까지 엿본다. 거기에 돈이 집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목사의 본성이다. 결국은 인간은 자기가 가진 본성대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본성을 이길 위인은 없다. 어떤 식으로 미끌어져 가는 것이 육적 인간인지 미리 공부해야 한다.
2. 헤겔이 펼쳐놓은 육적 인간의 세계
헤겔은 인간의 육적인 이성과 정신이 궁극적으로 펼칠 수 있는 그 넓은 범위를 알려주고 있다. 손하진 성도님께서 수고스럽게 녹취하신 김석기 교수의 헤겔 강의를 참고로 해서 육적 세계의 인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낯선 타자와 대립하면서 마주 보면서 그 낯설었던 상황들이 갖는 문제점들을 어떻게 극복해가면서 자와 타가 하나의 통일된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가. 그래서 나중 단계에 가서는 타가 나라는 단계에까지 내가 타라는 단계에까지 어떻게 이르러서 자타가 분리되어 있는 대립상태가 끝나고 주객이 통일되는 그런 단계에 이르게 되는가를 인식의 발전 역사를 통해서, 정신의 자기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완성에 이르는지 정신이 어떻게 자기 자유에 이르게 되는지를 원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이미 자기를 자기 것으로 간주한 이상, 인간들은 절대 자아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인간은 신까지 동원시킨다. 천상의 신과 지상의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가진 예수를 필요로 했고 인간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닮은 예수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예수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인 A와 인간인 not A가 결합한 B이다. 이런 방식으로 가져가면 A와 not A가 동시적으로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 논리를 배제하고 다른 구상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능력을 능력을 가능성 있는 능력으로 키워내는데 주력한다.
절대 정신을 자신 안에서 채워넣어서 자아를 절대신으로 충실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감각이라는 고단한 과정을 겪어야 된다. 그래서 감각이라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보지 않고 극복해야 되는 과제로 본게 된다.
감각은 진리가 아니기에 다음 단계 지각 단계로 넘어간다. 하지만 지각만으로 진리의 보편성에 이를 수 없고 기껏 피상적 보편성에 머문다. 초감성적 보편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각이 아니라 오성(지성)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 오성이라는 것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힘을 밖으로 표출한 게 ‘외화’, ‘밖으로 펼쳐나간다. 오성의 단계에서 ‘일’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힘을 외화하여 다양한 것으로 나타나고, 또한 어떤 힘을 발휘하여 다시 다양한 것을 자기에게로 귀환시킬 수 있게 된다. 밖으로 펼치고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이것은 곧 흔히 인간들이 ‘살아간다’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힘을 발산하고 또한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힘을 쓴다는 것은 노동한다는 것이다. 정신적 노동이든 육체적 노동이든 힘을 쓰는 거잖아요. 그럼 힘을 썼으면 힘이 밖으로 나간다. 힘이 나간 그 빈 자리는 그 나간 힘이 되돌아와서 나에게 더 큰 힘으로 메워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절대자인 내가 죽는다. 이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 힘을 찾아내는 과정. 그것은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죠. 현상 너머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원초적 신의 정신이 움직움이다.
사람이 자기의 타자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자기를 인정받고자 자기 힘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남을 자기와 대립하는 것으로 정립하는 동시에 자기 분열로부터 자기로 되돌아오는 운동을 한다. 따라서 이제 자아와 대상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와 자기 자신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자기 힘을 내보내는 자기와 자기 힘이 자기에로 되돌아오는 그 자기를 되돌아봐야 되는 거죠. 왜 힘을 내보내는지 왜 힘을 또 되돌려 가져와야 되는지. 힘을 내보낼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의 상황, 그것을 되돌려 가져와야 되는 자신의 상황. 그것을 다시 되돌아봐야 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뭐냐 하면 타자를 온전히 대상으로 처리해서도 안 되고 또한 온전히 주인으로써 대접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타자를 때로는 주인으로 때로는 소유물로 바라봐야 되는 그런 갈등상황이 내 안에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타자를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냐, 타자를 나의 소유물로 볼 것이냐에 따라서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승인의 관계>가 발생한다.
근대 이전의 삶에 있어서 인간 이성이 절대적으로 노예가 되고 인간의 타자인 조물주가 절대 주인이 됨으로써 내가 그 앞에 완전히 종이 되어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한 번쯤은 누군가가 나에게 명령을 할 때 나한테 왜 저렇게 명령을 하지? 내가 받아들여야 되는가. 한 번쯤은 자기자각을 해봐야 되는데, 자기의식이 싹텄어야 되는데 자기의식 없이 무조건 복종만 한 것이 중세를 암울한 지경으로 만들었다.
사실 주인이 노예에 의존되어 있으면서, 노예의 자립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부모도 자식한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이고 목사들도 신자들한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타인에게 의존하면 대타적 존재로 전락된다.
대타적 존재라는 것은 타자가 하라는 대로 내맡기는 것이다. 대자적으로, 즉 자기를 마주해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대타, 즉 타자에 겁만 먹고 타자가 어떻게 하나 눈치만 보는 것이다. 대자적 존재는 자기로 돌아오는 존재인데 반해서 대타적 존재는 자기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정신이나 육체나 어느 하나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노예는 육체로 대변되고 있고 주인은 정신으로 대변되고 있다. 정신과 육체가 상호승인이 필요하다. 결국 인간은 육체만으로도 살아갈 수 없고 정신만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
종교인들의 심각한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 콤플렉스를 해결하는 대리 만족을 얻으려고 가는 경우다. 그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감각, 지각, 오성은 다 대상적인 의식이다. 이 대상적 의식과 자기의식이란 말은 좀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대상적 의식은 후설 식으로 표현하면 타자를 나와 같은 의식을 가진 존재, 나처럼 느끼고 지각하는 그런 존재로 보지 못하고 나만 보는 존재고 그 외 존재는 내가 보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인다는 차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안에 갇힌 자기이다. 그런 자기 의식적 단계일 때는 그럴 때는 여기에서 자기의식이 이성임에 의한다는 말은 내가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타자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각하는 이성이란 ‘내가 남들을 위해서 희생도 하고 헌신도 하고 정말 봉사정신에 입각해서 많이 노력했더니만 빌어먹을. 내 새끼는 대학도 못 가고. 야 세상이 이런 거였어? 원래가. 참. 이렇게 살 필요가 없구나. 나도 저 놈들처럼 살아야겠어. 그래 이 놈들 한 번 해보자.’라고 이렇게 계산적으로 나오는 이성이다. 철저하게 현실의 부조리를 자각하고 그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이란 이런 이성과 다른 것이다. 이성이 마지막 대립을 끝내고 완결 지점에 이른 상태의 상황을 정신이다.
개인적 양심의 단계를 넘어 보편적 양심이 되고 이게 바로 바른 종교의 이상이다. 개인주의적 측면을 공동체의 양심으로 승화시키는 단계이다. 의식은 오성 단계에서 초감성적인 것으로서 종교를 소극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자기의식에 등장하는 불행한 의식에서는 자신의 운명과 관련하여 신을 접하게 되고, 정신의 단계에서는 의무의식과 행복 사이의 부조화에서 이를 조화시키는 도덕적 종교를 접하게 된다. 각 단계마다 비극으로 산출되었던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종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를 다루게 되는데 자연종교하고 예술적 종교하고 계시종교이다.
① 자연종교: 자연 중에서 절대자를 발견하는 단계. 자연물을 신으로 만나는 단계.> 이것은 미신단계이다.
② 예술적 종교: 자연에서 전향하여 절대자를 정신 중에서 직관하는 단계.
예술적 종교라는 것은 자연에서 고개를 돌려가지고 절대자를 정신을 통해서 직관하려고 한다. 쉘링은 예술적인 어떤 천재적인 능력으로 신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③ 계시종교: 정신 자신을 신으로 바라보는 단계.
자기정신이 곧 신이다. 이성이 자기가 만개해가지고 완성된 자신을 신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자가 자아 자신 속에서 나타나고,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 바로 이 세 번째 길을 앞의 ①, ②번에서 극복해 넘어가야 될 단계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서 <신, 인간, 자연>이 하나가 된다.
그러나 신, 인간, 자연이 하나 되는데 있어 그 과정이 직관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됨이 아니다. 이 하나됨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반성을 해야 되는데 이 반성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됨의 단계에 들어간 게 이 ‘절대지’(智絶知)다. 그래서 종교에서 넘어가서 절대지로 가야된다. 그런데 이 하나됨의 단계로 가는 과정을 자연과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신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대립의 과정을 통해서 투쟁의 과정을 통해서 승인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 되는 단계로 가는 것이다.
3. 영적 인간
이 십자가 지혜가 성령 안에서 능력이 되어서 성도 안에서 들어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이미 죽은 인간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10-12)
따라서 성도는 이미 죽은 자로 판정 나 버렸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로새서 3:1-4)
이것은 곧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서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기에 그러하다고 말이다.(고린도전서 6:20)
하지만 주님 안에서 산 사람에게 ‘죽었다’는 표현은 한 번 죽는 것으로 모든 행위가 멈춰서 굳어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복적으로 자아를 계속 죽일 수 있는 대상으로 세워두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가 적용되는 것은 갈라디아서 2:20에도 나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가 죽었다고 해서 아무런 활동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뭔가 주님의 성령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바깥으로 볼 때 그렇게 표현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외부에서 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에 근거해서 활동함과 공동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가능해진 사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6:4)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떤 경우를 가지고 성도로 하여금 날마다 죽이는가? 고린도후서 4:7-9에 보면 그 한 예가 나온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즉 현재 성도에게 들이닥치는 그 어떤 환경도 성도의 힘으로 대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성도 안에서 성도를 죽이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대처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렇게 될 때 성도의 입에서는 자신의 능력 자랑 대신, 오로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이 자랑거리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4)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는 일체 영광을 받으시지 않는다. 설교를 하던지 봉사를 하던지 헌금을 하던지 간에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살아 일하심을 통해서만 영광 받는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베드로전서 4:10-11)
그것은 영광의 통로가 오직 하나로 고정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 중심성이 지상에 흔적을 남길 때는 오직 ‘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7)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으로 활동케 하시는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전면에 나선다.
그 이유는, 피 흘리심으로 인해 새언약 체결에서 유일하게 성사시킨 분(예수님)과 새언약에서 배제된 자들(죄인들=인간들)을 구분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악한 세대’(=인간들)와 그 ‘악한 세대’을 위해 몸을 ‘드리신 분’과의 차이가 영원토록 뚜렷하게 구분되게 하는데 참된 복음의 의의가 있다.(갈라디아서 1:4)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십자가 복음만이 참된 복음으로서 모든 인간이 할 말을 잊고 오직 예수님만이 주되심임을 증거 하는 환경 조성에 관여한다. 즉 예수님께서 피를 흘릴 수밖에 없게 된 그 상황을 부활 안에서 계속 반복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이다.
성도의 관심사가 더 이상 이 땅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린도전서 7:30-31)
예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이제는 성령님을 통해서 성도의 관심사로 전이된다. 성도도 세상을 종말로 보게 된다. 이 종말로 보는 능력은 영원토록 반복되는 새언약의 피에서 나온다.
이것이 종말의 특징이다. 종말에 성도는 나그네이다. 그것은 다른 층에서 살기 때문이다. 성도가 지금 이 순간 살고 있는 층이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층이다.(에베소서2 :6) 그리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층이다.(로마서 8:30) 더 이상 성도를 정죄하거나 그 누구로부터도 고소 받을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권세도 성도를 둘러싼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39)
결론
목사의 위기란, 영적 세계와 관련된 모든 성경 말씀 전체를 목회하는데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현상을 보이면서 시작이 됩니다. 무슨 성경 말씀도 오늘날에는 비현실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인 찾아가서 복이 오게 하겠다고 달래는 그것이 더 실효성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겔이 지적한대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낯선 변화를 겪으면서 결국은 '자아의 절대성' 쪽으로 나아가기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애시당초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목사들이 아무리 영적 능력을 소지하고 있는 것처럼 수 십년 행세를 해도 날이면 날마다 다가오는 낯선 변화들을 대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노출하는 쪽으로 노골화하기 마련입니다.
스데반 집사, 그 분의 운명은 오직 그 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솜씨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솜씨만이 '피'만 증거하다가 그 '피'와 함께 세상을 하직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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