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됨의 증거들

고린도후서 11:22-27 사도됨의 증거들 고생 많이 했다고 사도로 쳐주지는 않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사는 것 자체가 고생이요 저주입니다. 육체의 고통의 양을 놓고서도 사도보다 고생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고생의 원인과 이유가 어디서 비롯되느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고생합니다. 즉 ‘내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인하여 고생을 기억합니다. 고생이 유발되는 이유는, 자신의 소망과 자기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도와주어서 고생인 겁니다. 이럴 때 인간들은, “나는 마땅히 고생이 없이 지내야

새 사람과 새 몸

에베소서 2:15-16 새 사람과 새 몸몸을 만들어 낸 분은 부모라고 알고들 있습니다. 만약에 육신의 부모가 몸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의 몸은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부모가 우리의 몸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사실상 부모의 몸과 우리 몸은 이미 딴 몸으로 각자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은, 그 몸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갖는 몸이 아니라 만드신 분과 더불어 함께 있는 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몸을 갖게 되셨고 그 몸이 예수님의 영광된 몸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된 몸 속에는 죄인들의 몸과 같이 거하실 수 있는 몸이 됩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몸이 지닌 기능의

에녹의 믿음

히브리서 11:5 에녹의 믿음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14)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의 족보는, ‘죽음’을 실어나르는 자들이 ‘죽은 아벨의 후손’ 곧 ‘하나님의 약속 계통의 자손들’이라는 말입니다. “죽었더라+죽었더라+죽었더라=다 멸망했더라”를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즉 ‘인간은 죽고 멸망되기 위해서 나타났다’라는 사실을 다시 시대에 전달하기 위해서 출현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의 예언’입니다. 에녹 시대에 있어 사람들에게 있어 소망은 바로 ‘수만의 거룩한

함께 하지 말라

에베소서 5:5-7 함께 하지 말라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에 둘러싸여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분리하시는 몫은 주님이십니다. 아무리 같이 하고 싶어도 같이하지 못하게 조정하십니다. 성도의 처지에서 이 세상에 ‘산다’, 혹은 ‘살아남았다’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할 자는 필히 함께 해야 하고,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자는 필히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존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등장된 겁니다. 이 결정은 주님의 복음이 내립니다. 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어도 그 자체를 ‘함께 함’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께

사도의 편지

빌립보서 1:1-2 사도의 편지 신앙이 주관적일까요 객관적일까요? 주관적이 되면 미신이 되고 객관적이기 되면 주관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사도의 편지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인간이 되었든 자연이 되었든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임을 통보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믿는 것도 거짓되고, 믿음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도 다 거짓입니다. 거짓 것을 믿는다고 해서 거짓이 아니라 아니 믿는 것도 거짓이며,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거짓입니다. 인간은 주관에서 벗어난 판단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편지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얼마든지 예수님의 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랑

다수와 한 분

히브리서 7:23-25 다수와 한 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주님의 패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패배한 것만큼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많고 많은 사람이 있어도 모두들 죽음을 슬퍼합니다. 슬퍼하는 이유는 죽음을 패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패배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위치가 저주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패배당하기 싫어서 온갖 성공 사례 같은 들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냅니다. 위대한 문명의 발전상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자기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할 용납된 자유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온갖 거룩과 경건과 성스러움으로

타이밍

빌립보서 3:15-16 타이밍생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게 됩니다. 무엇으로 그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까? 시간은 인간이 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고 싶다고 해서 그 시간이 쪼르르 대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에서 초월해야 합니다. 바로 그 상태가 ‘온전히 이룬 자’들의 세계입니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말은 본인들이 시간을 조정할 권한이 없음을 알고 주어진 시간에 맞추어서 본인을 재조정하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16절에 나오는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시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는 겁니다. 즉 ‘무엇을 위하여 이 시간을 제공하셨는가?’ 혹은 ‘이

남자와 여자

고린도전서 11:2-6 남자와 여자 몸의 활용도가 복음 이외의 기능으로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다 비복음적 사용으로 인해 음행과 더불어 같은 성질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와 구분지어 창조하신 것은 복음의 성격을 남녀 사이의 간격을 통해 세상에 나타내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몸은 ‘그리스도 몸’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낡아지는 세계

히브리서 1:10-14 낡아지는 세상 하늘에서는 천사와 비교되시는 하나님 아드님께서 주님으로 등극되며 이제 전체 피조세계는 필히 망해야 합니다. 피조세계가 점차 낡아진다는 것은 점차 주님의 나라가 점차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완료된 세계가 공개되면서 더는 이 피조세계에 기대 걸 이유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가 실은 예수님에 대해서 대적하는 의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무너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에 대해서 인간 세계가 전체적으로 반발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으라고 인간을 부추긴 그

주님의 의미

골로새서 2:6-7 주님의 의미‘주인’이 있다면 ‘종’도 있게 마련입니다. 주인과 종이 한 조를 이루어 서로의 개념 자리를 구성합니다. 주인 없는 종없고, 종 없는 주인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주인은 주인이 되어야 하고 종은 종이 되어야 할까요? 모든 것의 시작이요 모든 것을 먼저 제공하는 쪽이 주인이요 종은 그 주인의 생산물이고 주인의 주인됨을 알리기 위해 종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3:5-6에 보면,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하나님의 예정

에베소서 1:3-4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께서 예정했다고 해서 인간의 활동이 위축받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로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는 인간은 아예 없습니다. 있지도 않는 인간을 상대로 ‘예정’을 논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예정된 사실’에 대한 지식은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예정된 당사자가 전혀 예정된 내용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25:37에 보면,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일

성령을 저버림

데살로나가전서 4:7-8 성령을 저버림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죽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이 자기를 위한 세상인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세상 돌아가는 하나하나 자기 마음에 들어야합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눈에 띄면서 가차없이 죽이고 싶어합니다. 결국 육신이 저지르는 비-거룩, 속된 것, 더러운 것은 타인에 대한 공격 형태로 외부로 영향력을 발산하는 것으로 봅이다. 즉 인간의 죄가 인간 세게 전반에 걸쳐 확산된다는 겁니다. 이 확산을 막는 방법을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세상을 심판하는 방식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마저 그럴 수

절대 기준

고린도후서 10:9-13 절대 기준사도 바울을 고린도교인들이 우습게 봤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을 보았던 그 때 유대사람들이 예수님을 외모로 시시하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외형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들이 평소에 그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체험면에서의 한계인 동시에 복음 밖의 세계가 갖는 본성입니다. 온갖 것을 빠짐없이 제대로 체험한다고 해서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들끼리 자신도 모르는 채 단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체험해도 다른 인간들이 인정해주는 그 범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세상 속에서의 성도

디모데전서 6:7-8 세상 속에서의 성도하나님의 뜻은 세계 자체가 몽땅 없애려는 겁니다. 그 속에 죄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노아 홍수 당시의 조치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물로서 심판했지만 지금은 불로서 뜨겁게 소멸시키십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불의 온도 측정이나 불꽃 모습의 아름다움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생각을 못하지요. 그냥 낭패이지요. 나의 세계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낭패입니다. 절망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없앰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

십자가의 원수

갈라디아서 5:11-12 십자가의 원수십자가로 인하여 거쳐지는 인생이라면 십자가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질풍노도의 인생을 꿈꿔도 무방한 인생이라는 말이겠지요. 앞 길에 거칠 것이 없는 인생이기를 사람들은 예상하고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이고 정상적이라고 믿고 삽니다. 차 운전하면서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피해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짜증냅니다. 자기 삶에 신경 쓰이는 요소가 출몰한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세상 보는 안목을 근원적으로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나’라는 인간, 편하게 살라고 만든 세상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되지 않습니까? 즉 이 세상의

빛의 열매

에베소서 5:9-10 빛의 열매자기 것을 사례로 들면 빈 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타인으로부터 얼마든지 공격당할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 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 실천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 나올 열매는 모두 조각조각난 변명들이 될 공산이 큽니다. “어쩔 수 없는 가운데서도 나름 최선을 다했노라”고 변명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온전히 빈틈이 커버 되겠습니까? 아니됩니다. 자신의 작은 실수가 타인에게 큰 손해를 낳게 했을 때, “나는 몰랐다. 그런 식으로 파장이 클지를…”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야, 의인 났다. 빛의 자녀다”

진정한 환란

데살로니가후서 1:6-7 진정한 환란시험, 악마의 유혹 중의 하나는 ‘복음에 몰입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노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괴로워서 자청해서 만사를 잃고 ‘복음으로 사는 즐거움에 탐닉하려는 것’도 실은 악마의 시험입니다. ‘복음 폐인 현상’은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이 세상 일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과오에서 비롯된 겁니다. 사람은 힘들면 그 사태를 피히려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시도에 도망치는 식으로 여전히 자신이 그다지 악한 자가 아님을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환란’이란 말씀대로 완전히 일치될 때나 나타나는 상황

선한 싸움

디모데전서 1:18-20 선한 싸움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꾸만 바뀌게 됩니다. 한결같은 복음에 비해서 인간은 한결같이 않기에 복음이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수정해 나갑니다. 하지만 본인이 바꾸어져야 하는데 반대로 본인은 달라지지 않겠다고 버티게 되면 복음 쪽에 문제가 있다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둘 다 본인은 바뀌지 않고 복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인물입니다. 후메네오라는 사람은 디모데후서 2:17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암이 퍼져나가는 식으로 다른 복음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으니 다

하나님의 본체

히브리서 1:3 하나님의 본체전부를 다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파생되었는지를 아는 겁니다. 즉 다수가 아니라 궁극적인 하나를 발견하는 겁니다. 모든 많은 것들이 오직 하나에서부터 출발되어서 나온 것이 된다면 세상의 질서를 한꺼번에 파악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의 의미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단언하십니다.“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그 강하게 표현한다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으니라”입니다. (요 1:3) 이로서 모든 다수들, 각자의 가치는 당사자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당사자들이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

환란과 위로

고린도후서 1:3-4 환란과 위로환란 없이는 위로도 없습니다. 위로는 ‘원상회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낯섦으로 인해 기존의 것에 대한 미련을 철회하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미련을 두고 삽니다. 자기에게 미안하고, 자기에게 최선을 다해 돌보아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복음 현실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의 유일한 대책은 다른 배에 옮겨 타는 것 외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같은 종류의 배를 보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배와 함께 망하므로서 모든 종류의 배가 해결책을 지니고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