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2-5 돌아서라 예수님은 베드로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마 4:19) 숫자만 어떻게든 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낚는 기준에 부합되는 사람만 건지게 하십니다. 이 기준은 예수님께서 정하신 겁니다. 베드로나 낚이는 자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구원받을 수 있게 사전 준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단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돌아서라!”그렇다면 어디에서 돌아서야 할까요? 다음에 나열된 20가지에서 돌아서라는 겁니다. 자기 사랑에서 돌아서고, 돈 사랑에서 돌아서고, 자기 긍정에서 돌아서고, 교만에서 돌아서고, 방해꾼하듯이 사는 데서 돌아서고, 부모의 말을

구원받지 못함

데살로니가후서 2:8-10 구원받지 못함구원작업은 필히 ‘구원받지 못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이 없으면 선이 무의미하고, 생명나무가 없이는 선악과나무는 영원한 죽음을 초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된 자들은 항상 ‘구원되지 못한 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기에 자기라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선악지식에 기반을 두고 출발합니다. 즉 ‘구원된 자는 복이 많다’는 공식으로 그들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재물이 넘쳐나고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

형벌의 보편성

데살로니가후서 1:8-9 형벌의 보편성 불꽃이란 하나님의 심판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타협하거나 의논하거나 협상할 의지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출 29:18/신 4:24) 형벌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 본래적 조치이십니다. 형벌, 그것도 전면적인 형벌이 없는 하나님은 구원할 능력이 없으신 신이요 우상입니다. 형벌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말해주십니다.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에게

자녀와 부모

골로새서 3:20-21 자녀와 부모 혈육적 관계는 인간의 손을 떠난 상태에서 진행됩니다. 생겨난 자식은 부모 존재의 한계를 표시해줍니다. 결코 자식은 부모의 생산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를 압박하는 요소가 지니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식을 통해서 통고받는 겁니다. 인간은 신이 아님을 자식으로 인하여 검증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이 현실 세상’이라는 것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 ‘사랑스런 감시자’가 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므로서 부모는 자식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압력을 받는 상대가 됩니다. 자식에게 있어 책잡히는 부모가 되지 말아야

겸손의 한계

골로새서 2:20-23 겸손의 한계세상은 초등학문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학문은 인간이 가치와 능력을 최대한도로 올리기 위한 학문입니다. 신을 라이벌로 여기고 그 신을 따라잡아서 유사 신으로 인간을 승격하는 것을 목표로 매진하는 학문입니다. 이 작업에 있어 신이 갖고 있을 모든 윤리적 성격마저 자기 안으로 장착하려고 합니다. ‘겸손’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겸손함을 신의 경지에 인간을 올려세우려는 도약판으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오로지 완전에 해당되는 모든 것들을 인간들은 자기 안으로 쓸어담을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인간들은 세상을 둘로 구분합니다. 고상하고 거룩한 것과 저질스럽고 더러운 것들을 구별하려 합니다.

죽음 뒤의 심판

히브리서 9:27-28 죽음 뒤의 심판인간 존재가 한 번의 죽음으로 그 의미가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두 번 죽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도 거짓 나사로도 일단은 한 번 죽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개인의 운명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공간을 보여주는 성질입니다. 즉 그들이 죽은 죽음이 아니라 이미 죽어야 하는 공간의 성격을 나타내는 죽음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이 세상은 곧 ‘죽음의 공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번 죽는 죽음’입니다. 인간은 이 죽음의 공간에 말려 들어가 있습니다. 이 죽음의 공간은

사랑이 제일이다

고린도전서 13:12-13 사랑이 제일이다.사람들은 자신에게 신기한 기적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기적이라는 것이, 타인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남들이 고대하는 기적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상관없이 즐거워할 수 있는 기적인지를 분간해야 합니다. 사랑이 사랑 아닌 것과도 비교되지만 믿음과 소망과도 비교된다 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폐기 되어야 될 것들이 믿음과 소망의 대상이 되는 식으로 그동안 이끌림을 받아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믿음과 소망과 차이나는 이유는, 예수님이 사랑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디모데후서 4:1-2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사람들이 생각하는‘신=하나님’이란 심판까지 행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인간 내부의 양심적 성향으로 온 우주의 변화를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해서 비롯된 겁니다. 인간이 노하듯이 신도 노한다는 겁니다. 이런 경향은 구약 욥기에 잘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솔하게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욥이 당한 아픔도 욥이 저지른 죄의 함량에 합당하다고 욥의 친구들은 합리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의 오류는, 평소에 본인이 본인을 늘 판정내리고 심판해서 보다 완벽한 선한 자로 확인하는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늘 의로운 자, 늘 선한 자로

그릇

디모데후서 2:20-21 그릇 그릇은 담는 기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은 당연히 비워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따라 달리 구분됩니다. 이 ‘다르다’는 것은 부활을 설명할 때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8-39) 육체도 하나의 그릇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가 크게 둘로 나뉘어 집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

헛된 나팔

고린도전서 14: 6- 9 헛된 나팔 교회가 사람들의 집단인 것을 늘 고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경쟁심과 질투심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고상하거나 경건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인다 해도 그 와중에서 자신의 가치를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 집단은 동질화를 추구하게 되고 성질이 같다면 결국 나만의 가치란 양으로 설정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라는 명분으로 시작했다가 각종 ‘권력’들이 각 구성원의 머리위에서 유혹의 연처럼 날아다니게 됩니다. 과연 교회가 ‘인간을 위한 집단’입니까? 이렇게 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사, 특히 계시와 관련된 은사입니다. 구약

죽으심을 본받아

빌립보서 3:10-12 죽으심을 본받아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모든 인간의 모든 요소가 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주장과 내세움과 활동은 모두 죽음으로 쏠립니다. 마치 싱크대에서 물을 부으면 한 구멍을 통해 다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빠지는 물은 구정물입니다. 다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더러운 겁니다. 죽음으로 쏠린다는 말은 그 어떤 것도 틀렸고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추하고 죄스러운 겁니다. 이처럼 더러운 것들끼리 놓고 서로 비교를 하면서 자신이 것이 다소 착하고 의롭고 깨끗하다고 여

갇힌 자

빌레몬서 1:1-3 갇힌 자 하나님께서 복음을 완성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세상 권력을 동원시켰습니다. 이들의 역할은 악한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악함의 실체에 모든 인간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 굴복되어져 있습니다. 권력이란 ‘인간이 노릴 수 있는 최고의 목표’입니다. 평범하게 소소한 자기 삶만 꾸려나가는 그 순간에서도 그 모든 행동들은 최고의 목표인 권력쪽으로 방향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작은 권력이란 큰 권력 요소의 일부입니다. 인류는 모두 하나의 거대 권력의 우산 밑에서 각자의 권력을 챙기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고 권력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은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입니

불신자

고린도후서 6:14-18 불신자 ‘불신자(不信者)’라는 말은 ‘신자(信者)’가 표준일 때나 성립되는 말입니다. 만약에 ‘불신자’가 기준이 된다면 ‘신자’라는 말은 ‘일반적인 사람에 불과한데 단지 남들에게 없는 요소를 더 갖고 있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즉 ‘안 가져도 무방한 것을 쓸데없이 더 갖고 있어 자진해서 생활에 불편을 유발하는 자’라는 비아냥거림이 함유된 평가입니다. 이러한 불신자의 견해가 대세를 이루는 이 세상을 형편을 ‘민주주의’라는 말도 대변할 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다수가 유익’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수가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즉 구성원들이 특정한

믿음직한 주님

디모데후서 2:13 믿음직한 주님 사람은 주변 상황에 늘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이점을 경험상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항상 정신 바짝차리고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정신 바짝차리는’ 이유가 뭐지요? 무엇을 위한 ‘정신 바짝차림’입니까? 노골적으로 말해서 ‘누구를 위한 정신 바짝차림’입니까? 신명기 6:4-5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집에 있는 강아지도 그냥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인 사람이 마음에 들도록 길들여가며 키우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룰 때에 하나님 마음에 들

하나님의 부르심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의 부르심 로마서 8:29-3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인간에게 있어 ‘구원’이란 자신의 장래가 잘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구원’이란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예수님만을 위한 사는 사람됨을 뜻합니다. ‘그 아들의 형상’으로 교체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나의 형상’이 구원되는

성령 안에서

에베소서 2:17-18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 안’은 예수님의 최종성이 강조되는 반면에 ‘성령 안’에서는 ‘둘(2)’가 강조됩니다. 예수님과 인간들로서 둘(2)이요, 또한 택함받은 백성(유대인)과 버림받은 자들(이방인)들로서 둘(2)입니다. 왜 성령을 설명하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과거를 근거로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근거로 과거의 일들이 미리 발생되어야 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복음전파의 일을 나서실 때, 철저하게 성령님의 주도하에 인도함

뜻대로 하는 근심

고린도후서 7:9-12 뜻대로 하는 근심사도가 고린도교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을 낳는 세상 근심’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전환하는 면을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사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낳습니다. 이 말은 곧 어떤 식으로도 근심없이 구원되는 길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근심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형편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 아니라 반대로 에덴동산에 추방된 곳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에게 죄를 지어 추방된 겁니다. 추방된 처지에 콩 내놔라 팥 내놔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주의 만찬의 효과

고린도전서 11:30-34 주의 만찬의 효과시장할 때 양식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느냐 하는 겁니다. 결코 왜 우리는 영원히 살게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안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면 아니됩니다. ‘당연히 죽을 자가 나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감사가 나오지 않을뿐더러 평생을 불만과 원망의 연속으로 살게 됩니다. 바로 이게 벌이며 이 벌이 찾아오도록 행사한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수상하다는 말입니다. 다시금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

예수 죽인 것

고린도후서 4:10-11 예수 죽인 것몸이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와 효용이 있다는 겁니다. 악마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자신의 효용성을 드러내는데 사용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자로 인식케 합니다. 인간들이 늘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이유는, 몸이 지닌 원래 목적과 자신이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달라서 그러합니다. 즉 자신의 욕망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겁니다. 더욱 난처한 일은 자신의 몸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분명 자기 몸이 따로 놉니다. 이는 성령 받은 성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7:1

스승

디모데전서 2:7-10 스승 사도 바울은 여자와 남자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합니다. 자신을 ‘이방인이 스승’이라고 합니다. 이 스승은 복음이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과는 차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남자는 성도다운 남성으로, 여자는 성도다운 여성으로 복음은 변하게 한다는 겁니다. 우선 세속 남성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분노와 다툼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소위 ‘조직체의 어른’은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이 몽땅 차지하다시피 한 사회이기에 사회적 유지하고 지탱해가는 이념을 제안하는데 있어 오로지 남성들만 의견을 제시할 권한이 있다고 다들 합의한 상태입니다. 남성들이 사회를 주도해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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