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하나님 가운데 가장 오해될 소지가 많은 것은 히브리 성경 초반에 나타난 하나님이다. 동방의 조그만 부족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과 반대하는 모든 족속을 잔인하게 쳐부수는 모습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원시적인 부족신(Y≫ðeae)의 모습에 불과한 것 같다. 이런 하나님으로 오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경 기사로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상식적으로 어떤 책을 잘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주관적 해석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일지나 회의록 같은 것 말고는 독자는 반드시 저자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 파악하지 않고 읽으면, 스토리만 알기 위해 눈으로 훑어 본 것에 불과하지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숙지하고 난 후에야 그 의도가 나빴다든지, 그 의도가 제대로 표현 되지 않았다든지, 의도와 달리 엉뚱한 내용이 되었다든지 비로소 그 책에 대한 올바른 비평을 할 수 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독자는 가장 먼저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정짓고 그 저자의 의도를 물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든지 인간의 저작으로 이해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결지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저자로 40여 명의 인간이 동원되었지만, 성령에 감동된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동일한 하나님의 뜻을 모든 책마다 드러냈기에 실질적인 저자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저자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려 들면, 한 마디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 못하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고 예수를 보내 십자가에 죽였는지 살렸는지 의심이 가득 찬 채로 보면 성경은 성경으로 구실을 못한다.
저자의 뜻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독서의 원칙이 성경에 한해서만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음을 본다. 이상하게도 독서를 많이 하는 지식인들의 경우에 특히 더 그렇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이 있으면 우선 저자의 의도를 먼저 물어야 하지, 단지 이해되지 않다는 것으로만 무조건 비평부터 하고 보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가만히 앉아 묵상으로 헤아리거나 기도해서 직통계시를 받아 알기는 힘들다. 대신 성경을 자세히 앞뒤를 대조해가며 읽으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성경 초반부에는 잔인한 부족신 같은 하나님이 후반부에 가서 온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바뀌면 분명히 하나님도 인간처럼 시간적 간격이 흐른 후에 미숙한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자란다는 말이 된다. 그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또 그런 하나님이 쓴 글이라면 이미 하나님의 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인간의 말이라는 뜻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비평의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비평한 결과로 하나님의 글이 인간의 글로 변하고, 혹은 그 반대가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저자라면 그 비평과 연구의 대상은 하나님이 되고 인간이 저자라면 각 책의 인간 저자가 비평과 연구의 대상이 된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이나 가나안 정복의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할 때도 이를 구분해야 한다. 저자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잘잘못을 따져야겠다고 할 수도 없다. 완전한 절대자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을 수 없다. 대신에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기에 이런 모습으로 역사하셨으며 그런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 가운데도 분명히 선하신 뜻이 있을 줄 믿고 그 뜻을 탐구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반면에 단지 모세나 여호수아의 저작으로 그치면 그들이 갖고 있는 신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잘잘못을 골라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두 이야기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나가 일반적으로 오해 되는 부분을 제거해 보기로 하자.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하나님- 출애굽 이야기
하나님이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일으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는 이야기는 성경의 문외한이라도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홍해가 가로막자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 위를 향해 내밀어 바닷물이 갈라지고 갈라진 땅을 걸어 나와 구원받지만, 따라오던 바로(애굽 왕)의 군대는 물에 수장되는 것으로 장식한다. 그래서 단지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구하고 애굽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죽음을 당하는 극도의 인종차별 정책을 썼으며, 또 바로의 마음을 계속해서 열 번씩이나 강퍅하게 만들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해놓고 엄청난 재앙을 애굽에만 내리신 기독교의 하나님은 부족신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기사를 살피면, 하나님의 전인류를 향한 사랑이 이만큼 풍성하게 드러난 기사도 드물다. 거기에 대해 논쟁을 하자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 문제를 삼은 두 가지, 인종차별의 하나님과 민족신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문제만 간단하게 지적해 보자.
먼저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고 애굽에는 벌을 내린 것을 공평하지 못하며 극도의 인종 차별하는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는데, 이는 구별(I¡U¬)과 차별(o¬U¬)의 차이를 몰라서 그렇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Distinction)한 것이지 차별(Discrimination)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이유야 어디 있던 학교는 다니지 않고 건들건들 놀고 먹으며 양아치 짓을 하는 청년이 고등학교 교무실을 찾아가, 왜 당신들은 당신 학교 학생들만 공부 가르치며 사랑으로 훈계하면서 같은 또래인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따질 수 없다. 고등학교 선생이 아무리 청년을 가르치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하더라도 자기 학생만 가르치고 학교 밖의 젊은이를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자기 학교 학생과 그렇지 않은 청년을 구별한 것이지 차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에 차별은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가? 다 같은 학생인데 단지 자기 부모가 부자이며 가끔 선생에게 돈 봉투를 건넨다는 이유만으로, 문제아를 감싸돌고 심지어 반장까지 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deal differently)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출 7: 22),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distinction)을 두리니"(출 7: 23),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distinction)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 11: 7), 성경 어디에도 차별했다는 말은 없다.
이런 일에조차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창조하고 사랑하므로 모든 인류에게 똑 같이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이다. 앞에 든 학생과 양아치의 예를 다시 들면 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도저히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갔으니까 나에게도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무시한다면 이는 선생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야간학교라도 차려서 가르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싫고 양아치 생활이 좋아 학교 앞에서 선량한 학생들을 매일 괴롭히며 돈을 뜯어먹으며 사는 자를 학생과 다른 취급을 한다고 차별한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애굽의 기사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편견이 개입된 일방적 판단으로 이스라엘과 애굽을 차별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소원했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기를), 애굽은 단 한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 적이 꿈에도 없으며(학교는 무슨 얼어죽을 학교야 내 주먹이 밥 먹여주지),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임금 한푼 주지 않고 학대했지만(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등쳐먹고 살았는데) 하나님은 400년간이나 참아 주었다. 어느 날 누워 자느라 자기 백성의 신음을 듣지도 못하고 외면하다가 갑자기 난폭한 살인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번에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열 가지 재앙을 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재앙을 열 가지나 줄 수 있는가 그것도 애굽 백성에게만?'이 아니다. 학교 앞 양아치를 불러 이제 마음 바로잡고 공부해서 착한 청년이 되라고 열 번이나 타일렀다. 그것도 양아치가 가장 잘 알아들을 만한 방법으로 하셨다. 그 양아치가 칼 쓰기를 자랑하면 칼 쓰기 대결을 해서 세상에는 네가 칼 쓰기를 최고 잘하는 자가 절대 아니며, 칼을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양아치가 몽둥이로 도전해 오면 몽둥이로, 총이면 총으로, 떼거리로 패싸움을 걸어오면 단독으로라도 상대해 정신 들게 했지만 아무리 해도 말을 못 알아 들으니까, 그 양아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장자를 죽여서라도 그 양아치를 돌이켜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성경에 대한 조금의 상식만 있어도 그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 사람이 믿었던 우상 신들과 대결한 것인 줄 금방 알 수 있다. 양아치가 공부하지 않고 얼마든지 세상에서 출세하고 있다고 믿고 의지하는 힘들을 하나씩 부숴나가는 작업을 했다. 단번에 경찰서에 넘겨 감옥에 보내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문제는 성경에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라는 표현 때문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더 굳게 만들어서 일부러 골탕먹인 것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극단적으로 문자적 해석을 한 가장 좋은 표본이다. 어디까지나 범사가 하나님의 완전한 주관하에 있었다는 말이지, 일부러 더 벌을 중하게 주려고 하나님이 그를 더 완악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완악한 자는 벌을 받을수록 더 완악해지는 것이지 수그러든다면 이미 그는 완악한 자가 아니다. 또 더 완악해지는 것이 완악한 자의 잘못이지 더 벌을 주는 자의 잘못이 아니다. 학교와 학생에 대해 분노와 독을 품고 있으며 그 학생들이 있어야 계속해서 돈을 뺏어 배불리 먹고 살려는 양아치는 아무리 선생이 두들겨 패도 말을 듣지 않는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 나타내는 반응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이 사실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뱀이 된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술객의 지팡이가 변한 뱀을 잡아먹으니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7:1)고, 성경은 분명히 바로가 강퍅해졌다고 했지 여호와가 강퍅케 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호와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1) 피 재앙: "애굽 술객도 자기 수법으로 그렇게 하니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도 관념하지 아니하였고 애굽 사람들은 하숫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출 7:22¡24). 학생을 등쳐먹던 양아치가 학교 선생에게 그날 빼앗은 돈만 압수당한 정도니까 선생한테 야단맞은 것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2) 개구리 재앙: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8:15). 훈육 선생이 일주일에 한두 번만 단속하고 나머지 날은 단속을 하지 않으니 이전보다 수입은 좀 적어졌지만 숨은 쉴 수 있으니 제 버릇을 남 주겠나?
3) 이 재앙: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출 8:19). 양아치 밑에 있는 똘마니들이 두목에게 학교에서 단속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데, 계속 이래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까 두목 체면이 있지 이 정도에서 후퇴하면 되겠는가?
4 ) 파리 재앙: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³≫°¡ ³EEn¸| º¸³≫¸?´I¡| ³E¹≪ ¸O¸?´A °¡Ao ¸≫¶o ³EEn´A ³ª¸| A§CI¿ⓒ ±aμμCI¶o¡| ¿ⓒE£¿I²²¼¡| ÆA¸?¸|¡| ¶°³ª°O CI½A´I¶o ±×·?³ª ¹U·I°¡ AI¶§¿¡μμ ¸¶A½A≫ ¿I°AE CI¿ⓒ ¹e¼ºA≫ º¸³≫Ao ¾Æ´ICI¿´´o¶o"(출 8:25, 28, 31, 32에서 발췌). 양아치 두목이 단속이 심상치 않아지자 학교 교장과 훈육주임을 찾아와서 '이제 이 짓을 그만두겠으니 단속만 거두어 주시되 이 근처에서 구두 닦는 것은 허락해주시고 내가 잘 되도록 빌어주십시오.'라고 해놓고는, 단속을 거두자 마음이 달라져 다시 제 버릇을 발동했더라.
5) 악질 재앙: "바로가 보내어 본 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출 9:7). 약속을 어긴 양아치를 학교에서 더 강력하게 단속하자 밤늦은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 단속을 피해 더 악랄하게 학생들을 괴롭혔는데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제 강화된 단속을 믿고 겁내지 않고 마음 놓고 학교를 다니는 꼴을 보니 약만 올랐더라.
6) 독종 재앙: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출 9:11, 12). 단속의 그물이 양아치들에게도 미쳐 졸개 중 몇이 경찰에도 잡혀 혼이 났지만 '좋다 이 학교 교장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사생결단 해보자'고 마음을 더 독하게 먹었더라.
성경은 여섯 번째 재앙부터 드디어 여호와가 바로를 강퍅케 했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도저히 보통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에서 항복하고 양아치 짓에서 손을 씻든지(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항복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 학교에서 떠나든지(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주든지) 해야 함이 정상인데 그렇지 아니하니까 바로가 무엇인가 영적인 힘에 붙들려 있고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그 배경에 있는가 보다는 표현이지 하나님이 벌을 더 주려고 일부러 약을 올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졸개를 잡아가는 것은 두목도 언제든지 잡아 갈 수 있으니 두목더러 항복하라고 회개의 기회를 준 것이다. 두목이 회개해야 졸개들도 전부 다 손을 씻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7) 우박 재앙: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는 그 종들과 생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러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³ª ¹Ð°u 나맥은 자라지 아니한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하게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출 9:20, 27, 32, 34 발췌). 학교에서 정식으로 경찰과 합동으로 단속을 펴오자 일부 졸개들이 동요해 뿔뿔이 숨기도 한데다, 그 학교 앞에서 떠나지 않으면 떠날 때까지 학교를 무기한 휴교하고 단속만 하겠다고 하니까 찾아가 처음으로 자기 잘못을 시인했으나, 다시 학교가 개학되고 흩어졌던 부하들도 돌아오자 또다시 그 짓을 슬슬 재개했더라. 애굽은 이전부터 나일 강변의 삼각주 평야의 풍요로운 곡창지대가 부의 원천이었다. 하나님은 일곱 번째 가서야 비로소 그 곡물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큰일났다 싶은 바로가 잠시 회개하는 척했으나 아직 자라지 않은 밀과 나맥의 싹이 온전함을 보고 당장 마음을 바꾼 것이다.
8) 메뚜기 재앙: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고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니이까.¡| ¹U·I°¡ ±×μe¿¡°O °¡¼ CI³ª´O ¿ⓒE£¿I¸| ¼¶±a·A 갈 자는 누구누구뇨¡| ³EEn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A≫AA´e ³ªAC AE¸| AI¹ø¸¸ ¿e¼CI°i ³EEn CI³ª´O ¿ⓒE£¿I²² ±¸CI¿ⓒ AI A×A½¸¸A≫ ³≫°O¼ ¶°³ª°O CI¶o¡| ±×·?³ª ¿ⓒE£¿I²²¼ ¹U·IAC ¸¶A½A≫ °ÆUAE CI¼IA¸¹C·I AI½º¶o¿¤ AU¼OA≫ º¸³≫Ao ¾Æ´ICI¿´´o¶o"(출 10:7, 8, 11, 17, 20에서 발췌).
경찰과 학생이 24시간 감시체계로 들어가 수입이 완전히 떨어지자, 드디어 자기 졸개들 중에도 서서히 반기를 드는 자들이 나타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해 학교를 찾아가서 학교 앞 반경 5km 이내에서는 철수하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학교 측으로부터 양아치 짓에서 완전히 손을 씻지 않는 한 어디서라도 단속은 계속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도리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더라. 곡식을 우박으로 상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메뚜기 떼가 절단을 내자(자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구역을 구석구석 샅샅이 뒤지고 단속해 수입이 완전 바닥에 이를 정도로 떨어지자), 할 수 없이 찾아가 빌며 회개하는 척하여 학교측에선 단속을 거두게 되었지만 그것도 잠깐 또다시 이전과 같이 설쳤더라.
9) 흑암 재앙: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출 10:24, 26, 27, 28에서 발췌). 이제는 학교 앞에만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 식당·술집에도 경관이 24시간 순찰 근무를 해, 수입의 원천이 완전 봉쇄되니까 또다시 교장을 찾아와 잘못을 빌어 단속을 풀었다. 그러나 완전히 땅에 떨어진 두목의 체면이 말이 아니고 그 동안 여러 번 교장을 찾아가 빈 것과 번번이 당한 일들을 생각하니 밤에 잠이 안 와 드디어 교장을 찾아가 '양아치 짓은 그만두겠지만, 이제 학생들이 문제가 아니라 교장 당신이 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그때는 없는 목숨인 줄 아시오.' 하고 이판사판 막가판이 되었더라.
자기 학교 앞에서 자기 학교 학생을 괴롭히는 양아치 두목을 경찰에 바로 넘기지 않고 단속만 하다가, 그에게 화해나 회개의 빛이 조금만 보여도 속는 줄 뻔히 알면서도 다시 단속을 풀고 또 풀어 준 것이 하나님이다. 인간 세상에 용서는 몇 번 정도 허용되는가? 삼세번 아니겠는가?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 두목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칠종칠금(oOðyoOÐO)이라는 숙어가 생겼다. 비록 전쟁 중에 적국의 장수를 자기 부하로 삼고 그 땅을 영지로 편입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목적이 작용했지만, 일곱 번이나 용서해주니까 아무리 강퍅한 자라도 넘어갔다. 일방적으로 열 번이나 용서해 준 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을 다같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을 용서해주라는 말씀이 실제로 구약의 역사 속에 하나님 스스로 본을 보인 것이 이 출애굽 사건이다.
급기야 바로는 하나님의 종 모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는 모세(교장)를 죽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전체(학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직접 죽이지 않으시고 장자를 대신 죽였다. 왜 그런가? 바로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도 다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둘 째 아담 곧 인류의 장자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대속 죽음으로만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과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한 그 뜻을, 자기 백성뿐 아니라 애굽 백성에게도 알리기 위해서였다. 현실적으로는 왕이 회개해야 애굽 백성 전부가 회개할 수 있고, 또 가장이 돌아 와야 집 안 식구 모두를 되 돌이킬 수 있기에 비록 어린 아들을 죽일지라도 왕과 아버지들은 살려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안에서(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믿음 안에 들어와), 인방과 설주(가로 세로로)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면), 죽음의 사자가 유월(׺eÆ-Passover, 뛰어넘겠다)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뛰어넘겠다는 것은 원래는 죽음의 사자가 그 집에도 들어가야 하지만(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오직 어린 양의 피로 구별되었기에 그 죽음을 면한 것이다. 학교에 들어와 공부하겠다는 소원만 있으면 우등생이든 열등생이든 양아치로부터 학교가 책임지고 보호하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소원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해 주신다. 눈을 씻고 성경을 샅샅이 훑어보아도 차별하는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단지 구별하시는 하나님만 있을 뿐이다.
만약에 스팔타카스의 노예 반란이 성공해 부패와 사치와 향락과 부도덕과 우상숭배의 극치를 이룬 로마제국을 무너뜨렸다면, 세속의 역사가들은 틀림없이 인류 역사 최초의 진정한 개혁이라고 찬사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400년간 한 민족 전체가 다른 나라에 식민지 지배를 당한 정도가 아니라 노예살이한 것이 과연 인류 역사에 그 유례가 있었는가? 그 노예들에게 칼과 창을 쥐어주어서 항거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양을 칠 때 쓰던 다 낡아빠진 지팡이 하나 든 80이 넘은 노인을 홀홀 단신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 앞에 서게 하고, 양보하고 또 속아 주면서 바른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한 것이 차별이란 말인가? 차별의 '차'자도 모르는 셈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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