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성도끼리 섬기면서 마치 종과 같이 지극히 봉사하라는 뜻인가? 그러나 [오직 사랑으로]라는 말씀이 [십자가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기에 종노릇이 과연 봉사활동일까하는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자유, 십자가 사랑이란 나를 제거하는 사랑이고, 당연히 내가 십자가를 도구삼아 다른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 [내 사랑]이기 때문이다.
종노릇이란 말의 참뜻은 십자가의 자유함과 비교함으로써 분명해 진다. 십자가의 자유함과 반대되는 것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에 여러번 기록했다. 바로 율법이다. 즉, 육체의 기회와 종노릇이라고 함은 율법적 기능이 성도의 삶에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즉, 성도가 바라보는 성도의 삶, 더 나아가, 성도가 바라본 십자가의 사랑과 자유는 오히려 율법이 되어 죄를 확인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라고 하는 것의 속성때문이다.
육체는 인정받기 위해 움직인다. 움직일 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챙긴다는 의미이다. 눈치껏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말과 행동을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교회 용어를 쓰고 회사에서는 경제 용어를 쓰며, 독서모임에서는 저자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쉽다. 이해하기 쉬운 사람은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고, 쉽게 인정받고 수용되기에 좋다.
그러나 예수 안이라는 모임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이다. 영원히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영원히 죄를 용서받고 있다는 말이다. 영원히 용서받고 있다는 말은 영원히 죄를 짓고 있다는 말이다. 영원히 죄를 짓고 있는 것에 부어지는 피와 살점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란 새로운 피조물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다. 성도는 자신의 논리나 기억 혹은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목표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동안 읽은 책이나 쓴 글은 이미 죽은 자의 기억일 뿐이다. 부르신 분이 성령이라는 말은 부르심을 입은 자가 죄인이라는 뜻이다. 죄인이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 의, 심판이라는 개념을 모두 성령에 의해 계속 지적받아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성도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그 잘못을 누가 어떻게 용서했는지 보라는 것이다. 이제 가르침은 충분하니 하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육체를 가진 성도는 계속 이것을 부정한다. 다른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우상이 되거나 율법이 되어 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 대신의 역할을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한다. 말씀에 순종했다는 몸의 증거! 그것이 바로 할례이다. 육체적인 순종의 증거물. 말씀대로 살고있다는 자랑스러운 흔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십자가의 자유함을 맛보고 있는 자들을 괴롭힌다. 이에 사도바울은 아무도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예수의 흔적, 즉 십자가 상처에서 피어난 자유는 법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때문에 생겨난 자유는 내 것이 아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자유는 주님의 살과 피로 얻어진 것이다. 그것을 [나 구원받았음]의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육체의 기회가 노리는 것이다. 내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이용해 먹기야 말로 십자가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이다. 나 구원 받았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십자가를 들먹이지 말라.
내가 들먹이는 십자가, 내가 성도라고 인정한 자들은 죄를 깨닫도록 주님께서 배치하신 율법들이며 우상들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유일한 길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나, 우리는 여전히 육체의 일에 매진함으로써 구원의 증거물을 챙긴다. 그것이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다.
성도는 성도에게 율법이다. 단지 지금 여기에서 내 감각기관에 의해 쉽게 포착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도 성도가 성도를 통하여 소망을 갖도록 하지 않는다. 성도는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고, 예수의 흔적 때문에 만사가 다 아무 소용없도록 조치하신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행하는 결과물들이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성령의 열매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며, 이러한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다. 십자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결국 육체의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들이 어떻게 예수 안으로 모여들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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