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나라는 이 악명높은 므낫세가 나오기 전부터 이 산당죄로 멸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르호보암 초창기때부터 받아왔다. 유다나라에 있어서 "산당은 제하지 아니했다"라는 말은 후렴구로 진행되어져 왔다. 르호보암 때에 여호와의 노를 격발시킬 산당이 지어진다.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고 하셨다(열왕기상14:22~23). 아사 때에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왕상15:14). 여호사밧 때에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상22:43). 요아스 때에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왕하12:2~3). 아먀샤 때에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대로 다 행하였어도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14:3~4). 웃시야 때에 "아사랴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왕하15:3~4). 요담 때에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15:34~35). 아하스 때에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16:4). 아하스에 이어 므낫세, 아몬, 여호야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까지 유다는 다윗과 같이 정직하지 못한 죄악과 함께 산당을 다시 세우고 거기에 분향하는 죄악으로 바벨론에 베어버림을 당했다. 여호야하스를 향해서 여호야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왕하23:32). 여호야김을 향해서는 므낫세가 저지른 산당의 죄악을 따라 범죄함과 예루살렘에 피를 가득하게 하였다(왕하24:1~4). 여호야긴을 향해서는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하24:9). 시드기야를 향해서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기록되고 있다(왕하24:19).
그렇다면 산당의 실체란 무엇인가?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오늘날의 기도원을 떠올려보도록 합시다. 오늘날의 기도원에서 벌어지는 행태가 구약 유다에서 벌어진 산당에서의 행태였다. 산당을 지었던 동기도 오늘날 기도원을 짓는 동기와 똑같았다. 산당을 산 위와 외진 곳에 짓게 된 동기가 뭐며, 기도원을 영험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짓는 동기가 무엇인가? 그 동기는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나의 은밀하고 진정한 소원을 이루어보겠다는 것이다. 산당이라는 곳을 왜 만들어서 왜 거기에 몰래 기어 올라갑니까? 그것은 단 한가지 응답받겠다는 것이다. 속세를 떠나서 하나님과 조용히 그리고 발악을 하면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맞장을 붙어 가지고 응답을 받고 하산하겠다는 것이다. '나'부터 살고봐야 되겠으니 하나님과 단판을 지우러 올라가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소용없다. 목사의 설교도 소용없다. 성전에서 뿜어대고 있는 어린양의 피의 종교 그런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과 단절하고 산당에 오른다. 이성을 잊은지는 이미 오래다. 산당에 오를 때 이미 이성은 죽었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본성이라는 욕망한 용틀림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성전이 다 뭐며, 어린양의 희생이 다 뭡니까? 성전에서 타오르는 어린양의 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종교인으로 올라간다.
산당에 오르더라도 가장 영험하기로 이미 종교판에서 소문난 산당에 오른다. 게셀이라는 한국판 산당으로 유명한 한얼산 기도원이나 대한수도원 내지는 오산리 기도원, 또는 저도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가까운 삼각산 기도원에 오른다. 산등성이가 있는 위로 올라갈수록 좋다. 기도하다가 얼어 죽을 수 있으니 비닐 봉투를 차고서 올라간다. 투명으로 된 비닐 봉지 안에서 발악하며 울부짖는 광경은 멋있기도 하였고 웃음이 나서 혼났었다. 이렇게 산당이라는 기도원을 오르는데 그것도 밤에 올라간다. 낮에 오르면 능력이 없는 것 같고 너무나 시시하며 그리고 산당이라는 은밀성에 맞게 밤에 오르야 그 은밀함을 토로할 수 있는 것이다. 주간에는 누가 보자나요! 그렇게 밤에 올라가서 소나무 뿌리 붙잡고 너 죽고 나 죽는 식의 갈멜산에서 자행했던 바알 선지자들의 발악같은 것을 기도 형식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할소리 못할 소리 다하기 위해 올라간다. 할소리 못할소리 다하는 곳, 진정으로 산당같지 않습니까? 이곳이 산당이다. 자신의 은밀하고 거대한 본성을 만개하고 싶은 중독에 미쳐있는 곳, 이곳이 산당이며 산당이라는 기도원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산당을 만들게 하고 산당을 오르도록 하고 산당에 중독이 되도록 하는 그 근본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죄이다. 죄가 그렇게 만든다. 그러면 죄는 어떻게 정의를 내리지요. 죄는 '인간 자체'이다. 인간 자체가 죄이다. 죄를 수가지의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그렇게 표현하여 죄를 정의하는데 그 수가지의 죄가 모두 인간 자체에서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드디어 오늘의 본문 대하27:2절의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가 알려지게 된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똑같은 의미로서 왕하15:35절의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은 누가 말릴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인간자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 안에 자리잡은 인간자체라는 죄가 발휘되는 데에는 오히려 손을 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손을 쓸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다라는 뜻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산당죄로서 하나님은 성도는 살아 있는한 오히려 끊임없이, 꾸준히, 성실하게 악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쳤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도원은 여로보암 종교라는 이방 기독교에 속한 종교 행태이기에 여기서 다루는 것을 그만둔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