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뜬다는..톰라이트라는 성공회주교출신의,,

요즘 뜬다는..톰라이트라는 성공회주교출신의,,

톰 라이트, 바울, 한국교회  


[250호 신학좌담]


 


 이종연  [email protected]  


 


 


정모세 / 내가 만난 톰 라이트, 내가 본 톰 라이트에 대해 먼저 나눠 보자.


 


노종문 / 신약학을 전공하면서 톰 라이트의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복음주의자로서 성서학을 공부할 때 방법론적으로 내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를 고민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유대교 연구나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존했던 것 같다.


 


권연경 / 박사 과정 때 세미나 등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고, 내 논문 발표 때도 그의 질문에 답하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종종 말하지만, 우선 그는 달변가다. 언젠가 그를 초청하여 하루 동안 그가 논문 두 개를 발표하고 나머지 시간에 질문을 받고 답을 했는데, 하루 종일 막힘이 없었다. 단편적 답변들이 아니라 큰 그림의 퍼즐을 조각조각 맞추는 듯한 대화였다. 물론 전체 그림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의 대답은 일관성 있는 큰 그림을 바탕에 둔 것들이었다. 신학적으로 그는 1세기 문맥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탐구하고, 거기서 의미 있는 세계상을 그려 냄으로써 나름의 공로를 세웠다. 또 그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재주를 가졌다. 종종 그의 설명들은 숨어 있는 교리와 교리 사이의 내적인 연관성을 잘 느끼게 해 준다.


 


양희송 / 영국에서 유학할 당시, 톰 라이트의 책에서 하나의 주제를 꺼내 놓고 에세이를 써야 했는데 점수를 못 받았다.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에 관한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역사적 예수라는 맥락에서 다룰 수 있는 선이해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수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가 흥미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고 느껴서 복상에 연재하고 있던 ‘브리스톨 통신’이라는 꼭지에 그를 소개했다.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꺼리는 분위기였는데 톰 라이트가 역사적 예수 연구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고 복음주의자들이 톰 라이트의 안내를 따라 그 테마에 들어가 볼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택환 / 한국누가회 간사로 섬기고 있다. 의사들의 독서 모임에서 한 멤버의 추천으로 톰 라이트의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신학에 매료된 멤버들이 2005년에 만든 인터넷 카페가 아마도 한국 최초의 톰 라이트 관련 카페가 된 것 같다. 그 그룹은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이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등 톰 라이트의 주저를 읽고 토론하면서 계속해서 삶을 나누고 있다. 나 역시 신학교 때 배운 여러 신학적 개념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개척한 그의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할 때에 톰 라이트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고 있다.


 


정모세 / 톰 라이트는 신학적·대중적 책을 모두 잘 쓰는 작가다. 한국에서 그의 책 대부분은 이미 번역 출판 계약이 완료되었고 실제로 최근 두드러지게 많은 책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주목하지는 않는 듯해도, 가히 톰 라이트 현상이라고 할 만하다.


 


이택환 / 최근 에클레시아북스에서 톰 라이트 책을 많이 내고 있다. 특이하게도 교회에서 톰 라이트를 공부하던 청년들의 사적 관심이 출판으로까지 이어졌다.


 


노종문 / 영미권 출판계에서는 2000년대 초에 이미 톰 라이트를 존 스토트 다음으로 주목할 복음주의 저술가로 평가하였다. 그래서 한국 IVP는 적절한 시점에 그의 책을 소개하고자 관심을 계속 가졌다. IVP가 번역 출간한 책 중에서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Simply Christian)과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가 많이 읽혔다.


 


정모세 / 사실 미국에서도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이 출간되면서, 제일 먼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듯하다. 그렇다면 왜 톰 라이트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노종문 /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복음주의권에서는 성경 본문을 역사비평적으로 연구하면 자유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가 강력했다. 그러나 대학가에는 역사비평적 본문 주해가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일부 소개되고 있었고, 그들이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1999년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나는 비로소 찬찬히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배울 기회가 생겼는데, 실습을 통해 이 방법론의 유익한 면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비평적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성경을 해체하지 않고 건설적인 논의를 해 나가는 복음주의 학자들의 글을 찾아보면서 톰 라이트의 중요한 저술들을 발견했다.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유익한 부분을 수용하면서도 성경을 존중할 수 있는 연구가 가능하다. 역사비평적 방법에 의해 축적된 학자들의 성경 연구 결과물들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이것을 교회의 유익을 위해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전용하는 학문적 노력이 여전히 필요하다.


 


양희송 / 복음주의 전통이 깊은 영국은 미국보다 성서학 연구가 훨씬 개방적이다. 그래서 톰 라이트의 작업이 아주 놀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톰 라이트는 자유주의에 대한 대항마 혹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대항마로서의 느낌이 강했는데, 그렇다고 그가 자유주의를 무조건 배척하고 싫어한 게 아니라 그쪽에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논의를 한 단계 앞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본다. 또 톰 라이트는 스스로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대중의 필요를 채우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고, 학자적 성실함도 있기에 주목을 받은 듯하다.


 


정모세 / 톰 라이트가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국내외에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복음주의자들은 무척 많다. 그의 매력을 계속 말해 보자.


 


권연경 / 사람마다 다르지만 톰 라이트와 친한 리처드 헤이스 같은 학자는 그를 ‘불트만 이후로 초기 기독교에 대한 포괄적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평가한다. 신약 연구 자체가 세분화·파편화되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 않은데 어쨌든 그는 시도를 했고 학자들이 인정할 만한 결과가 나오니까 이미 하나의 영역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표면적 단계에서 그의 매력 중 하나는 ‘전달력’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구체적인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담론이 필요한데, 많은 신학 주석서는 추상적이라 전달력이 떨어진다. 반면 톰 라이트는 페이지마다 수많은 비유를 써서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비유를 쓴다는 것은 그 주제를 선명히 안다는 증거다. 또 학문적 영역에서는 역사적 일관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는 그걸 획득했다. 특히 구약과 신약이 하나의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큰 매력일 것이다.


 


노종문 / 최근 미국에서 바울 연구로 박사 학위를 하신 분이 톰 라이트를 모른다고 말씀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분이 톰 라이트가 누구냐고 물어서 <앵커 바이블 딕셔너리>(Anchor Bible Dictionary)에 여러 아티클을 기고했고, ‘뉴 인터프리터스 바이블(New Interpreters Bible)’ 주석 시리즈 중 로마서 주석을 그가 썼다고 하니 ‘그러면 봐야겠다’고 하셨다. 또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 교수님이 “톰 라이트는 신학자이지 역사가는 아니다”라고 평하는 것을 들었다. 그분의 관점에서 성서학은 역사적 접근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톰 라이트는 지나치게 신학적인 그림을 그려 낸다는 말이었다. 그분의 말에도 일면 동의하지만, 나는 성서학자가 스스로를 역사가로 보는 패러다임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역사가는 객관주의적 접근법 때문에 실존적 개입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인 성경의 진수를 평면화시켜 버리는 한계도 안고 간다.


 


     


▲ 이택환 목사(그소망교회, 한국누가회). ⓒ복음과상황 김은석


이택환 / 톰 라이트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대중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 몇 해 전 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에서 사해 문서를 들이대면서 소설을 사실처럼 얘기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헷갈렸다. 그때 톰 라이트가 등의 매체를 통해 잘 해명한 것으로 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궁금증이 있을 텐데 가령 하나님 나라나 사후 세계, 종말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나, 성찬, 예전, 교회력 등에 대해서도 그의 성서신학적 해석이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정모세 / 톰 라이트의 책을 보면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내가 말하는 것 중 20%는 틀렸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톰 라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비판적 옹호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의 생각 중 받아들일 수 없다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보는 지점이 있는가.


 


노종문 / 그는 ‘내 말이 20%는 틀렸을 것이지만, 문제는 어디가 틀린 부분인지 나도 모른다는 점’이라고 말했다.(웃음) 틀린 줄 알고도 고집하며 말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자신이 확신한 말을 하지만 자신이 무오하다고 믿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의 성경 읽기에 반대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패러다임으로 먼저 텍스트를 읽어 보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본문이 나와야 한다. 즉, 바울 서신 전체를 그가 제시한 큰 그림의 틀에서 읽고 전체 퍼즐이 맞는지 확인해야 온전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몇 개의 구절을 두고 주석이 틀렸다고 말하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자신이 어떤 큰 그림을 가지고 말하는지 제시해야 한다. 톰 라이트는 퍼즐의 비유를 들어서 말했는데, 퍼즐을 다 맞추었다고 선언하고 나서 한두 조각이 남은 것을 발견하면 전체를 제대로 맞추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모든 구절들이 해석 체계 속에 잘 자리를 잡아야 좋은 주석이지, 한두 구절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주석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속에 불만이 생길 때까지 그의 패러다임을 인정하며 성경 텍스트를 읽어 보자는 입장으로 톰 라이트와 성경을 읽고 있다.


 


권연경 / 내 책과 톰 라이트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종말론일 것이다. 톰 라이트는 ‘실현된 종말론’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미래적 관점이 초대교회 전반의 관점이었고 바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 현재적 칭의 개념은 안 나왔다. 로마서에는 칭의 개념의 시제로 봤을 때 현재와 미래가 섞여 있고, 갈라디아서는 미래적 분위기가 강하다. 물론 이런 건 주석의 차이니까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톰 라이트가 평소 종교개혁적 전통의 학자와 논쟁할 때 ‘Sola Scriptura’, 곧 성경 텍스트에 근거한 논쟁을 강조하면서, 종말론 부분에서는 2차적 추론에 의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 있다. ‘새 세대가 도래했다’는 식의 주장처럼, 성경 텍스트에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 주장을, 학자들의 추론 내지 전통적 해석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톰 라이트는 주류 흐름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전형적 학자다.


 


노종문 / 그 문제는 조직신학적 질문과도 관련이 있는데, 톰 라이트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인정한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이행득의를 인정하는 극단적 입장이라면,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권을 인정하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도 필수적이라는 중간적인 입장이다(선행은총, 견인의 교리는 부인한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가톨릭을 포함한 알미니안 계열의 교회에서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 칼뱅, 튤립(TULIP) 전통의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입장이 잘못된 것이고 좀더 선명하게 은혜와 행위의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 톰 라이트는 행위 심판을 말하면서 개혁주의 진영으로부터 반펠라기우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는다. 이에 톰 라이트는 칭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라는 부분을 인용한 후, “내가 이제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택환 /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톰 라이트는 사랑의 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대차대조표 따지듯 하시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권연경 / 펠라기우스주의냐 아니냐 라는 논쟁의 그림자가 있는 한, 선명한 논리를 얻기는 어렵다. 가령 마태복음 7장 21절에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셨다. 칼뱅도 고민하는 것처럼, 성경의 진술 중에는 이런 식의 ‘행위구원론적’ 발언이 많다. 이런 내용이 내 책에 나왔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생각을 다루지 않고 사람을 다루니까 그렇다. 우리는 아직도 확신보다는 정치적 고려에 근거해 행동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그런 점에서 톰 라이트는 전체적으로는 나의 관점과 많이 비슷하지만, 일부 모호하게 말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정모세 / 톰 라이트의 주장 중 가장 논쟁을 일으키는 것 중 하나는 ‘칭의 논쟁’인 듯하다. 한국에서도 존 파이퍼의 <칭의 논쟁>(부흥과개혁사)이 먼저 소개되었고, 그 책에서 톰 라이트를 비판하는 내용을 보고 톰 라이트의 책은 아예 들춰 보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아직 톰 라이트가 바울에 대한 주저는 저술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출간된 책들을 통해 그가 바울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나눠 보자.


 


     


▲ 권연경 교수(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복음과상황 김은석


권연경 / 그는 전체적으로 내러티브를 강조한다. 언약의 출발에서부터 완성까지를 언약의 실행 과정으로 보고 성경을 드라마로 읽자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창조-아브라함 선택-시내산 언약 모두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원행론, 즉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행동이다. 그 절정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그가 전통적인 칭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론적으로 칭의 개념을 재정의하다 보니 일반 독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은 ‘뜨악’할 수 있다. 또 하나, 존 파이퍼와의 논쟁과 관련해서 ‘의의 전가’ 개념은 민감한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차분한 주석적 논쟁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학회에서 톰 라이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그룹은 개혁주의고, 그 중 조직신학, 교회사를 전공한 분들이 제일 민감하다. 그 중에는 우리가 칼뱅의 언어로 얘기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은데, 아쉽게도 톰 라이트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톰 라이트의 성경신학적 맥락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해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노종문 /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이 꽤 많다. 영향력 있는 김세윤 교수도 그 중 한 분이다. ‘새 관점’의 출발은 유대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한다. 전통적인 바울 해석에서는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였으며, 그런 유대교에 반해 바울이 말한 기독교 복음은 은혜의 메시지를 선포했다고 보았다. 그런데 E. P. 샌더스 이후로 유대교도 은혜의 종교였다는 인식이 생기고 나니, 그럼 바울이 말한 ‘율법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메시지는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면서 ‘새 관점’이 등장한 것이다. 결국 ‘새 관점’은 유대교 이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라고 말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있는데, 권 교수님은 그 이슈의 핵심 논점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권연경 / 종교개혁 전통에 대한 충성심의 문제다. 나에게 ‘설사 성경적으로 맞는 얘기를 하더라도 종교개혁 전통에서 빗나가면 교수님이 그만두는 게 맞지 않느냐’라고 얘기한 분이 있었다. 그만큼 종교개혁 전통이 무섭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논점이 ‘오직 성경’인데, 이제는 그 전통 자체가 절대권위가 되어 버렸다.


 


노종문 / 유대교에 관한 논쟁은 어떻게 보시는가.


 


권연경 / 현실적인 종교의 형태를 고려한다면 율법주의적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겠으나 통상적 의미의 율법주의 종교는 아니었다고 본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비판한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위선이었다. 도덕적 타락을 종교적으로 덮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우리는 괜찮다’라고 착각할 수 있었던 것은 잘못된 신학적 전제 때문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택함 받은 백성이니까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함부로 노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문제의 핵심은 ‘위선’ 혹은 ‘착각’이다. 세례 요한의 첫 메시지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 3:8)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말만 하고 행치 않는 위선자로 규정하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비판했다(마 23:3~27). 바울도 유대인들이 할례받았다고 큰소리는 치지만 행하는 건 이방인과 같다고 비판했다(롬 2장, 갈 6장). 즉, 바울은 포장술의 대가들, 곧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종교적 수단으로 경건한 듯 모양을 내려 했던 이들을 비판했다는 게 내 생각이고, 그 지점에서 새 관점과 나의 해석은 다르다. 바울은 이를 성령론으로 해결하려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령과 새 생명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간단하긴 한데, 도덕주의적인 관점으로 쉽게 오해되고, 또한 유대인 학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기분 나쁠 수 있는 그런 해석인 셈이다.


 


이택환 / 가톨릭 공로주의자들과 싸운 루터는 자신을 유대교 율법주의자들과 싸운 바울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새 관점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1세기 유대교는 가톨릭 공로주의와 유사한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많은 증거들은 그것이 은혜에 기초한 언약적 율법주의였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이 ‘그러면 루터가 틀렸다는 말이냐’며 크게 반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부분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 양희송 대표기획자(청어람아카데미). ⓒ복음과상황 김은석


양희송 / 내가 불편한 지점은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자신들을 최종 심급으로 생각하고 톰 라이트를 이단시한다는 점이다. 칭의 논쟁도 마찬가지다. 톰 라이트는 칭의 개념 전체를 원천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개혁 텍스트와 성경 텍스트 사이에서 그 위상을 조정하거나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하는 이 작업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 둘 사이에 긴장을 느껴서일 거다. 성경 텍스트로 설득력 있게 논증하니까, 이 내용이 복음주의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그 사이 잘못 맞춰져 있던 것이 맞아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조급함이 과도하게 노출되고 있는데 그런 불쾌한 태도는 가라앉혀야 하지 않을까. 학문적 논쟁은 필요하지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  


 


노종문 / 톰 라이트는 칭의 교리의 역사 부분에서 알래스터 맥그라스를 의존한다. 맥그라스가 칭의 교리 역사를 연구한 최고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맥그라스는 교리사 검토를 통해 종교개혁 당시의 칭의 교리는 1세기에는 없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논증의 핵심 부분에서 맥그라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넘어간다. 어쨌든 칭의 교리의 핵심 개념인 의의 전가 즉, 하나님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된다는 선언, 그것이 루터의 칭의 개념이라면 1세기 텍스트인 성경에서는 그런 내용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럼 1세기 단어로서의 칭의는 무엇인가? 이것이 톰 라이트가 답하는 질문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 법정에서 칭의는 재판장의 의가 전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칭의는 재판정에서 ‘네가 옳다’라는 선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즉,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분투하며 살아온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최종 판결에서 그들이 옳음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1세기 단어로서의 칭의의 자연스러운 의미다. 이런 정의를 가지고 일관되게 성경 텍스트를 읽어보자는 것이 톰 라이트의 주장인데, 교리적으로 칭의를 재정의한 것처럼 간주되어 공격을 받는 것이다.


 


권연경 /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서 구원론적 흐름을 너무 강하게 부인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누가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하고 있다고 하면서 풀어 가는데, 그런 논법은 샌더스와 비슷하다. 샌더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물기 위해 율법을 지킨다고 했다. 유대인들도 들어가는 건 100%라는 것은 은혜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면 마지막 때까지 머물려는 노력이나 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안 지키면 끝이라는 점에서 실질적 차이는 없다. 그런 점에서 톰 라이트도 누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것인지 현재 확인하는 게 칭의라고 말한다. 그게 결정된 것이면 톰 라이트 말이 맞지만, 우리가 그렇게 돼야 한다는 논리를 포함하면 말이 안 된다.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의지와 관련이 있고, 따라서 ‘누가 인정되느냐’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인정되느냐’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구원론과 교회론의 구분이 허상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 책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에서 세밀하게 정리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애초에 칭의가 구원론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시도한 게 오버가 아닌가 싶다.


 


정모세 /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에서는 균형을 잡으려고(오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복음주의권의 패커나 맥그라스를 유난히 인용하고 있고, 자신이 칭의를 교회론적으로 보는 것도 우주적인 하나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기에 자기도 개혁주의에 부합하는 주장을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톰 라이트를 잘 읽으면 칭의의 부인이 아니라, 다만 ‘칭의’라는 단어 자체를 정교하게 바로 잡자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권연경 / 어느 부분은 그렇지만, 전가 개념을 부정하는 대목에서는 통상 ‘전통적’이라고 부르는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맞다. 칭의 자체가 전통적 개념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정의를 바꾼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개념을 조금 바꾼다는 게 개념을 포기하려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택환 / 나는 톰 라이트가 말한 칭의의 교회론적 설명이 설득력 있다고 본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와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망가진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에서 톰 라이트는 이를 “전 세계를 위한 - 이스라엘을 통한 -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누누이 밝히고 있다. 많은 캠퍼스 선교단체들이 학생들에게, ‘한국의 아브라함’이 되라고 말한다. 그럴 듯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으로 들어가, 아브라함의 후손,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적인 구원 개념과 다르다. 그보다는 내가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어서 새로운 구원의 일가를 차려야 한다는 식의 개별적인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이 아닌, 공시적·통시적으로 무수히 많은 아브라함들과 개별적 언약을 맺는 방식을 취하셔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에 대해 설명한 책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가를 설명한 책이라는 톰 라이트의 주장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바울의 칭의는 구원론보다 오히려 교회론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교회론은 결국 성경을 관통하는 언약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누구인지를 규정한 구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노종문 편집장(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복음과상황 김은석


노종문 / 성경을 읽을 때, 몇 가지 수준의 읽기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인 수준에서 텍스트를 읽는 것과 신학적인 수준에서 읽는 것은 다를 수 있는데,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 루터는 신학적인 질문, 즉 ‘죄인인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신학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강력한 읽기를 끌어냈다. 그 힘은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키고 수백 년간 계승될 전통을 낳았다. 그런데 맥그라스가 교리사를 논하면서 밝힌 것처럼 루터의 그 질문이 1세기 당시의 사람들이 절실하게 물었던 질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칭의’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읽으려고 한다.


 


이런 읽기 수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신학자와 성서학자가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하면 해결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톰 라이트의 ‘천동설과 지동설 비유’는 상당히 의미 있다. 과학적으로 지동설이 옳다고 밝혀졌어도, 여전히 인간의 자연적인 오감만으로는 지동설 현상을 인식할 방법이 없다. 망원경으로 별을 세밀하게 관찰해야만 비로소 천동설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동설에 근거해 쓰인 시와 노래들은 지동설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기록들은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문학적 진술들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진술들의 목적은 정확한 과학적 지식을 말하려는 데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신학이 묻고 성경을 읽는 바와 역사학적 성서학이 묻고 성경을 읽는 바 사이에 읽기 수준의 차이가 있으며, 이 수준 차이를 좀더 정교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모세 / 톰 라이트의 주장은 그저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천과 연결되는 이야기다. ‘칭의’에 대해 톰 라이트가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고 대중이 그에게 크게 호응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단지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그 동안 교회가 소위 ‘칭의 교리’로 대변되는 개인주의적 구원주의에 갇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노종문 / 복음을 이해할 때, 개인 구원의 패러다임이 만유 회복의 패러다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이 ‘이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고 루터는 그 질문에 대해 교회론적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인 대답을 했다면, 톰 라이트는 ‘예수와 바울이 선포한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 성취로부터 만유의 회복을 향해 나가는 하나님의 큰 프로젝트라는 답을 제시한다. 루터의 답과 모순될 필요는 없으나, 하나님 나라의 광대한 실재를 포용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광대한 계획에 실행자들로 부름 받았다. 이에 반하여 지난 세기 복음주의 교회의 메시지는 ‘믿고 죽어서 천국 가자’는 내세주의적·개인주의적 틀에 갇혀 있었다. 톰 라이트는 내세의 소망이 사소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그보다 더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라고 말한다. 오늘 젊은이들도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온 인류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로 초대받는다는 메시지에 더 의미 있게 반응하고 있다.


 


권연경 / 이분법적 도식을 톰 라이트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톰 라이트가 언약적 드라마로서의 그림에 지나치게 치중한 것은 루터가 그랬듯, 현재의 결손을 메워 보려는 상황적 논증의 산물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느끼는 아쉬움에 대한 답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개인 구원의 질문이 사라질까? 종교개혁은 정말 틀린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하는 질문은 1세기에도 유효했고,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다만 최근 학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에 대답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구원론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이런 노력은 좋지만, 애초에 칭의 교리는 구원론이자 교회론이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라이트 역시 이 점에서는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모세 / 톰 라이트 현상은 앞으로 어떻게 이어지겠는가. 그리고 덧붙여 각각 오늘의 두 책과 관련하여 함께 읽을 만한 책들을 이야기하고 좌담을 마무리하면 좋겠다. 나는 권연경 교수의 <로마서 산책>, <행위 없는 구원?>을 추천한다. 문제의 핵심에 있는 개인중심적·실존중심적 구원관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답변을 제시하는 책들이다.


 


이택환 / 개혁주의에 경도된 일부 신학자들은 톰 라이트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한국에서 톰 라이트가 유명해질수록 경기를 일으키는 것 같다. 정당한 신학 토론을 넘어서 불필요한 논란으로 발전하면 생각하지 못한 폐해가 생길 수도 있다. 특히 복음주의 선교단체는 초교파이기 때문에 자칫 사역자들 간에 이런 논란이 가중될 수 있다. 나는 톰 라이트의 통전적인 신학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그의 세계관 속에는 신약과 구약, 율법과 복음,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신앙과 실천에 대한 고질적인 이원론적 사고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참고할 만한 책으로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IVP)을 추천한다. 이 책은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라는 성경의 세계관을 큰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성경을 윤리 규정집으로 사용하지 않고 이러한 큰 그림 아래에서 해석한다는 점에서 톰 라이트와 맥을 같이 한다.


 


양희송 / 톰 라이트는 신학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사영리’ 말고 우리가 구원에 대한 논의를 접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 않은가? A급 학자들 사이에 진행되는 논쟁을 통해 이 문제를 깊이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은 환영할 만하다. 당분간 톰 라이트의 작업이 기독교 전체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경계하기보다는 우군으로 삼고 많은 걸 배워야 한다. 행여 톰 라이트가 교회를 해체하거나 자유주의적으로 흘러가도록 훼손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은 기우다. 출간 예정인 막스 터너의 <성령론>(새물결플러스)을 추천한다. 톰 라이트의 작업과 밀접한 관계는 없지만 큰 흐름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고 성령론 논의에 굉장히 중요한 기여를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또 핫이슈를 다루면서 논의를 진전시킨다는 점에서 랍 벨의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곧 출간될 <사랑이 이긴다>(이상 포이에마)를 추천한다. 무거운 주제를 실감나게 다루면서, 소통 능력이 좋은 랍 벨의 태도는 한국 목회자들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권연경 / 톰 라이트 현상이 어디로 튈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톰 라이트의 도전은 개혁주의 전통에 경도된, 순복음의 세례를 받은, 세상에서 말하는 ‘대박’을 축복으로 아는 우리의 세계관, 우리 속의 상징 세계를 재검토하도록 도전한다. 또한 그의 작업이 성경 텍스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차단하는 신학이 아닌, 사고하는 습관을 자극하는 효과, 우리 사고 체계가 얼마나 주관적인지 깨닫도록 돕는 수단이 되었으면 한다. 결론은 다를 수 있지만 계몽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면 좋겠다. 더불어 톰 라이트 자체를 계속 소개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달리 책을 추천하기보다는, 톰 라이트가 초기 기독교의 기원을 추적했던 대작에 관심을 기울이면 그가 하는 이야기의 문맥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노종문 / 우리가 존 파이퍼와 톰 라이트의 논쟁과 같은 논쟁을 한다면, 그 논쟁이 집안싸움이라는 걸 기억하며 논쟁해야 한다. 논쟁하다가 피를 튀기고 원수가 될 게 아니라, 우호적 논쟁을 통해 우리 자신이 내용적으로 깊어지기를 추구해야 한다. 또 한 가지, 톰 라이트는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한국교회에 가르쳐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강조하는 만큼 ‘어떻게’ 읽는지는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 성경 통독을 백 번 하더라도 잘못된 방법으로 백 번을 읽으면 잘못된 내용이 백 번 강화된다. 그런 점에서 톰 라이트는 성경을 통째로 보는 관점을 탁월하게 제시한다. 그렇게 성경의 거대 내러티브 전체를 보는 안목을 끌어올리는 차원에서 톰 라이트의 책을 활용하면 좋겠다. 특히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2부는 바울 서신을 읽는 방법을 배우려는 분에게 추천하며, 작은 책 속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전체 이야기를 보여 주는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IVP), 신약성경 책별로 나오고 있는 ‘에브리원 시리즈’를 추천한다. 역사적 예수를 다루며 신학적인 사고를 자극하는 책으로는 마커스 보그의 <예수의 의미>(한국기독교연구소)도 추천한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