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집에 갔었습니다. 영정 속에 인물이 오늘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합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살아있었다는 말인데 요즘 그 부분이 영 헷갈립니다. 분명 성경은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두 죽어있다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예수의 죽음말고 자신의 죽음을 따로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죽어있었던 분이 새삼 죽었다고 울고 불고 하는 모습이 딱합니다.
영정 속에 계신 분이 저를 위로합니다. 영정 속에 계신 분은 이제 위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죽은 존재임이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영정 속의 세계나 영정 밖의 세계나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충만하다는 증언을 이제서야 저렇게 사진 속에 들어가 앉아 소리없이 떠들고 있습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나도 저렇게 죽은 존재 맞지. 원래 죽었고 지금도 죽었고 계속 죽음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되지 않을 것을 산다고 우겨대겠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살아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짧게 살다간 영정 속의 인물을 불쌍하다고 하고 영정을 쓰다듬기도 하다가 데굴데굴 구르고 절규합니다. 난 살아있는데, 너는 왜 다른 곳에 갔냐고 원망합니다. 같은 죽음 속에 놓여 있는데 살았다고 하니 정말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영정 속의 인물이 말씀합니다. 얘야 너도 원래 죽은 자인 것이 들통날 때가 오니까 너무 생쇼하지 마라. 이곳에서 보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참 말 잘한다.
살아있다고 주장하다는 분들이 상주들을 위로하는 방법은 딱 한가지 입니다. 죽음으로부터 격리시키기! 가급적 죽음이라는 사건으로부터 멀리 상주들을 쫓아냅니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살아야 한다. 고인의 생전 업적은 참으로 찬란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 어서 툴툴 털고 일어나라. 힘내라.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위로가 아니라, 본질을 잊고 허상을 진상으로 꾸며대는 것이 바로 인간이 하는 위로입니다. 본질로부터 가급적 멀리 도망치도록 거짓말 해 주는 것을 위로라고 합니다.
그런 인간인지라 인간은 죽음의 사건까지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습니다. 생존을 더욱 치열하게 만드는 양념정도가 된 죽음인지라 어떤 경우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얼마나 떵떵 거리며 잘 살고 있는가를 자랑하는 대회 장소가 되고 맙니다. 조문화환이 몇 개 들어오고 조문객 수를 걱정하거나 부러워하고 상가집 음식을 타박하거나 장지의 위치나 빈소가 차려진 병원의 레벨이 내가 누구인지 뽑내게 해 줍니다.
세상 전체가 영정 속의 인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죽었다고 놀려대는 것처럼,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손에 의해 죽은 자이지만 산 자로 지적받고 호출받을 때가 기대됩니다. 십자가지신 예수 말고 생명은 애시당초 이 땅에 없었음이 만 천하에 드러날 그 때가 사모됩니다.
내 죽음조차 따로 챙길 수 없는 흙.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품고 태어나 죽음이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 거짓에 거짓을 덧칠했던 죄인의 괴수의 정체가 십자가 앞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탄로납니다. 덩달아 이미 용서하신 주 예수의 은혜가 더 높고 깊고 크고 넓습니다.
이 상황이 이상하게 감사합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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