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 아니라 감사
2009-06-22 08:43:53 이름 : 이근호
감사할 대상이 없고 경배할 대상이 없다면 언제고 자기 자신에게 도로 올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어릴 적부터 강제로 교회에 나갔던 자들이 성인이 되면서 교회 비판을 핑계 삼아 교회를 발을 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외에 달리 경배하거나 감사할 상대가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을 연구하고 예수와 부처를 연구해도 자기보다 못하다. 내가 나를 사랑해주는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듯하다. 고생을 해도 본인이 했고, 괴롭고 외로울 때 자신을 달래주던 자도 결국 자기 자신 뿐임을 알았을 때, 자신만이 신앙의 대상이요 행복의 원천임을 확신한다.
이로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모두 종교인이다. 자신만을 신봉하는 종교인이다. 그리고 신자 모집에 나선다. “누가 나를 사랑해 줄 사람 없어요?” 이 신앙에 근거해서 자기 완벽에 나선다. 기름칠 하고, 헐렁한 데는 조이고, 속과 겉을 부지런히 닦아서 광나게 된다. 완벽에 완벽을 기한다. 완벽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 지 궁금해서 마실 나간다.( 마을에 나가 볼 일본다는 경상도 사투리)
일생을 이런 식으로 보낸다. 자아를 위하여 허비하다가 다 보낸다. 완벽을 자아 생각을 전제로 한다. 자아를 강하게 붙들어서 완벽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가 되면 그 순간은 자아를 잊는다. 자아를 놓쳐야 감사가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 감사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매사에 있어 자아를 놓으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완벽’을 찾는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게 되면 가짜 예수님이 보이는데 그 가짜 예수님이 실은 완벽을 기하는 자아상이다. 자아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도 안 죽고 살아 되돌아오면 큰 문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감사에 휘말려서 자아를 잊는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이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인가! 기도를 듣는 상대자가 계시고 기도를 받는 상대자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죽음조차도 이 행복을 가리지 못한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스데반 집사는 자아가 살기를 기도한 것이 아니라 계속 감사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감사가 자아를 잊게 한다. 완벽은 일시적으로 자아를 빛내지만 결국 지옥으로 데려가서 그 빛조차 부질없게 만든다. 완벽을 멀리하면 감사가 밀려온다. 완벽 때문에 설움 받던 그 감사다.
비가 온다. 나 위하여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위하여 비가 내린다. 그래서 온 대지는 감사한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9)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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