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용서 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을 목격하…

도저히 용서 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을 목격하…


우리교회 2009년 11월 8일 주보 - 이근호



 


《 설교 요약 》                                                                                    2009년 11월 8일


〈 지난 주 설교 요약 〉


믿음 자체가 표적입니다. 표적이란 이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는 일, 즉 우리 자신이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그런 기적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적으로 인하여 구원얻을 자와 정죄받을 자가 결정됩니다. 이런 안목이 성도에게 생기는 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 성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안목이 아니라 예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번 주 설교 요약 〉


누가복음 1:1-4                                                                                        말씀의 목격자


본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보아도 기억하는 것은 다 제각각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사전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목격한 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성령받은 사람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중요해서 자신이 사라져도 무방하다고 여길 정도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전체는 인간이 대단함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단함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하여 자기 백성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백성을 기어이 건지시는 식으로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죄에게 굴복하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죄에 굴복하지 않으시면서 죄인을 의인되게 하시는 작업은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내막이 있고 비밀스러운 사전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이 일의 외부에서는 인간들끼리 상호 납득이 되는 방식의 사이비한 구원방식으로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입니다. 자기 힘대로, 자기 지혜대로 구원을 성사시켜 자신의 잘남을 뽐내겠다는 심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러한 생색내기를 거부하시고 본래의 뜻을 누가복음을 통해서 펼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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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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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강-눅1장1-4(말씀의목격자)-luk091108전체녹취
 
20091108 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누가복음1:1-4)

2009-11-08 23:15:15 이름 : 오용익

20091108 우리교회 주일설교/누가복음 1장 1-4절/부활의 목격자(이 근호목사)

(기도)

“길을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열방을 징벌하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한 것을 아시느니라.”

저희들의 귀를 만드시고 저희들의 눈을 만들어서 저희의 생사와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속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줄을 이시간도 꽤 뚫어보고 계실 줄 믿사오니 이 시간 우리 마음속에 우리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가득히 담길 수 있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장 1-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86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성경을 보면 특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가’라는 분도 그중의 하나가 됩니다. 신앙인들이 이 세상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이런 특별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인이 과연 구원이 될까, 내가 과연 천국 갈까, 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성경에 보시면 누가라든지, 마태, 요한, 예레미야, 이사야, 아브라함, 이런 여러 특별한 사람들과 자기와 한번 견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 특별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본인들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천국 가는 사람들이라고 확인하고 싶다면, 그들과 같이 특별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고 있다는 그것, 그 공통점을 찾아봐야 됩니다.

천국 가는 사람이 특별하다면, 나도 천국가야 된다면, 나도 역시 특별한 사람일 것이고, 옛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하게 다루었다면 그 동일한 특별한 다루심이 오늘날 우리를 특별하게 다루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다루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다루는 것과 그분들을 다룬 것과 같은 다룸, 같은 관리냐, 비교해 보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반갑고 놀라워야 되고 때로는 충격을 받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들이 흔히 우리가 거리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만나는, 신문지상에서나 방송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야 될 것은 지금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도 우리가 우리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해요.

그냥 대충 살고 싶어 하고 아무렇게나 살고 싶어 하고 내 몸이 땡기는 대로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남들 찜질방에 가면 나도 찜질방에 가고 싶어 하고 남들 노래방에 가면 나도 노래방에 가고 싶어 하고, 그저 남과 비슷비슷하게 살고 싶어요.

튀지도 않고 너무 후지지도 않고 그냥 어떤 무리, 집단에 섞여서 들키지 않을 정도로, 무슨 짓을 해도 안 들킬 정도로 그냥 탁류에 휩쓸려 가듯이, 언제 이렇게 세월이 갔지, 할 정도로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은데. 여기 성경에 나와 있는 누가, 마태, 마가, 예레미야, 이사야, 아브라함, 노아, 모세,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냥 쉽게, 쉽게 살고 싶은데 주께서 특별하게 다루었습니다.

그 다루심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다루시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어떻게 다루는가? 우리는 공통점을 찾으면 되겠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이 누가라는 사람은 목격자노릇을 하겠다는 겁니다. 누구의 목격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일어난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남들은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쳐 버렸는지 모르지만 누가 본인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왔다는 그 사실. 남들 눈에는 그저 교회나 기독교나 예배당에서 가끔 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누가’ 이 사람은 ‘나는 그렇게 되기 싫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알고 있고 목격한 것을, 내가 들은 것을, 내 손으로 남들 앞에 예수님의 목격자로 나서야 되겠다는 겁니다.

이 공통점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다룬다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다뤄져야 천국 가는 사람인데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까? 이런 공통점은 누가만 그런 것이 아니고 누가 이전의 구약 이스라엘집단 전체가 다 목격자였습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내부에서 읽어내야 될 사명을 딛고 태어난 국가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 바깥에는 남들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사건, 사건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바깥에 일어나는 것이 그 배후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계셔서 그 하나님이 저 이스라엘을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백성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의 연속들로 그렇게 읽혀지는 겁니다. 그걸 두자로 언약이라 하지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된 바에 의해서 그들은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기적의 덩어리로서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세가 인도했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더 길게 목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1장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서의 한 살 두 살 때의 일을 기억 못해요. 기껏 기억나는 것은 세 살 때부터의 일인데 그것도 충격적인 사건, 예를 들어서 잠자고 일어나니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다든지, 하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들로부터 기억을 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특별히 다루어서 인간들이 사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계시로 주셔서 천지창조부터 모세를 통하여 기록이 되었으니 그것이 창세기요, 출애굽기요, 레위기요, 민수기요, 신명기였습니다.

그 창세기, 하나님만 알 수밖에 없는, 하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일체 모르게 되어 있는 그 천기의 누설, 천지를 창조했던 그 비밀, 모세는 40일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안 먹고 피자나 자장면 배달도 안하고, 시내산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독대해서 거기서 천기의 누설, 천지창조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내려와서 다 적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세상에는 시작이 있다’ 는 겁니다. ‘시작, 시작이 있다’ 하는 겁니다. 보통 인간의 시작은 기껏해야 3살, 4살, 7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 그때 충격을 받아서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저 같은 경우에는 7살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대구 비산동의 대성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첫날부터, 그 당시 나라에서 쇠 필통을 나눠줬어요.

그때 한반이 60명인데 제가 제일 끝에 지금 권사님 앉아계신 그 자리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나눠줄 때 나부터 나눠주면 되는데 저쪽부터 나눠주는 바람에 60명인데 필통은 딱 59개밖에 없어서 한 개가 딱 모자라는데 내가 못 받은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국가가 나눠준 그 쇠 필통 똑같은 것을 사달라고 울었어요.

그런데 문방구에 가도 그게 있어야 말이죠. 똑 같은 것을 안파니까요. 그 때 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러나 창세기하고 아무 상관없는, 나, 사적인 이 몸,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완전히 토막 난 시작밖에 몰라요. 일반가정에서 기껏 자기가정을 이야기하지만, 고조할아버지까지는 안가고 보통 증조할아버지, 죽은 아버지, 이렇게 제사를 드리게 되면 그 시작이 토막 난 시작이에요.

우리 가문은 경주이씨에 산수공파가 어쩌고저쩌고, 전부 시작자체가 다 반칙입니다. 그전에 어떤 인과성, 어떤 원인과 결과 때문에 그러한 경주이씨가 되었는지 그것도 몰라요. 신당동 떡볶이 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몰라요. 그저 자기가 시조가 되었어요. 뭐가 진리입니까? 진리에 대해서 뭘 알아요? 개 코를 알아요. 자기 몸, 몸의 시작밖에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다루는 사람은 자기 몸에서 있는 시작을, 그것을 자기의 바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길게 깔아준 그 바탕을 자기의 새로운 바탕으로 교체를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다루심입니다. 우리의 바탕을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자기 집안이야기로 시작해서 자기집안이야기로 끝내는 그런 시작이 아닙니다.

여기 주보에 바뀐 것이 있지요. 전에는 우리교회 개척을 언제 했는지 그게 있었는데 없앴어요. 교회시작은 창세전부터인데 교회가 몇 년도에 시작했다는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이걸 없앴다는 것이 굳이 중요한 의미도 없습니다만 기분 나빠서 없앴어요. 교회의 시작이 어떻게 8년입니까? 창세전인데, 그리스도 몸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탕을 바꿔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처음에 창세기부터 시작하면서, 그 창세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시작이 되면서 댐 터지듯이 위에서 물이, 그 시작과 더불어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바탕이 죽죽 이어지면서 그 원리가 그 위에 완전히 흘러내려옵니다.

그 흘러내려오는 성경의 대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나무, 어린양의 보좌가 있고 거기서 뭐가 흘러나와요. 뭐가 흘러 나오냐 하면, 생명수 강이 흘러 나와서 모든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을 두루 두루 흥건히 적심으로 강이 되고 그 강 주위에 가로수가 생명나무 가로수가 있는데, 그 가로수에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과실이 주렁주렁 맺혀 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적인 몸의 시작 말고, 원래부터 있었던 그 시작은, 그 시작만 할 뿐 아니라 거기에다가 만물을 살리는 그 원리가 주르륵 타고 내려와요. 어디까지? 마지막 마무리까지, 끝까지, 천국까지 그 물이 흥건히 흘러서 그 보를 적시듯이 죽 흘러 내려옵니다. 그걸 모세가 봤다 아닙니까? 그걸 모세가 본 거예요. 그걸 엘리야가 본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이 본 거예요.

그걸 누가가 봤기 때문에 그는 이 일에 대해서 입을 못 다물겠다는 겁니다. 나는 목격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듣고 있는 저희들이 이제는 제 2의 누가, 제 3의 누가가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일반적이고 사적인 자기 몸, 자기 태어난 자기가문, 이것부터 자기시작을 출발한다면 그 사람은 뭐든지 바깥을 관찰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구약성경 전체에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 원리를 듬뿍 듬뿍 담아서, 그것도 팥빙수처럼 가득가득 담아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죽 흘려 보내주면 어떤 차이, 어떤 변화가 있느냐? 세상 사람들은 신을 찾아가는 거지만,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이 이스라엘에게 질문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은 이렇다’고 하고 ‘이런 하나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라고 물음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근호야,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어요. 하나님이 묻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를 몰라요.

이사야 45장에 보면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에요. 숨바꼭질해요. 찾아도 찾아지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찾아지지 않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자기 사람 회수하겠다고, 자기사람 찾아내겠다고 직접 이 땅에 뛰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 이스라엘, 하나님의 원리, 시작을 해놓고 이 천지창조를 살리는 원리 또는 죽이는 원리가 가득 담겨 있는 이 세상 이스라엘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이사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했습니다.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진짜 하나님 만난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하는 백성중의 한 사람이 되었구나.’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온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망할 집단인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이것은 저주성입니다. ‘아, 저주받아야 되겠구나. 저주 받는 것이 합당하겠구나.’ 이걸 알게 된 게 진짜 하나님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날 때, 너무 놀라서 말에서 떨어졌지요. 완전히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다른 사람은 ‘이 양반이? 여기 아무도 없는데 지금 이 사람이 헛소리를 하고 있네. 여기 누가 있다고? 여기 누가 있다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너는 모르지? 나는 안다. 주여,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은 자기의 시작, 자기가 자기의 바탕이 되어서,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고, 자기바탕에 인생의 모든 세상을 다 쓸어 담아서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천국이고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규정을 지어 놓았는데, 막상 주님이 나타나서 그게 완전히 다 뒤집어져버렸어요.

자기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말이고 그 순간 자기는 죄인중의 괴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된 것을.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고, 자신은 진짜 거룩한 분 앞에서 전혀 속물이고 더럽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비로소 나는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작에 의해서 결국 인간이란 뭐냐? 인간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있어서 우선은 전 세계를 타작마당으로 만드는 거예요. 필드, 공간, 하나의 전체를 공간으로 만든 겁니다.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이유가 뭐냐 하면, ‘심은 대로 거둔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미 그 타작마당이라는 그 마당에서 주님이 계속 뭔가 흩뿌리듯이 뿌려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 뿌리는 씨앗 중에 하나가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그리고 그 뿌리는 씨앗들이 뭐냐 하면 가라지고, 피고, 쭉정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작마당을 만드시고 쭉정이도 뿌리고 천국 들어가야 될 하나님의 알곡의 씨도 뿌려놓고 그래놓고 그 타작마당을 계속해서 운영해 오신 겁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감당 못한다. 너희들 나보고 시비를 거는데 왜 자꾸 나만 미워하고 그래. 나보고 시비 걸지 마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은 감당 못할 분이다.’ 그분은 죽인다, 이 말이죠.

손에 뭘 들고 있단 말이지요. 뭘? 타작할 때 쓰는 키, 손에 키를 들고 오시는 분인데…, 주님께서 빈손 들고 오시는 줄 알았지요. 아닙니다. 몽둥이 들고 왔어요. 그분은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정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분류하시느냐 하면,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기 위해서 타작마당을 심판의 마당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손에 키를 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사실을 우리가 받았을 때, 그동안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시작을 사적인 내 몸, 내가 출생했다는 데서부터 시작했던, 그래서 내가 나의 인생의 바탕으로 간주했던 이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인식이고 사고방식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일방적인지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 거예요. 개 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생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과학을 논하고 세상을 논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런 소리를 한 겁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타작마당이라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뭘 로 바꾸어 놓느냐 하면 우리를 주체가 아니고 하나의 흐름으로 바꾸어놔요. 과정으로 바꾸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 내용을 하는데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굉장히 난색을 표하고 있어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존재가 아니고 과정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울산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중간에 그렇게 물으셨어요. ‘사람이 존재가 아니고 과정이다’ 라는 말이 너무 압축이 되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흐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액체가 되어서 죽 부우면 줄줄 흘러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흘러내려간다는 것은 방향만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주면 그냥 그 방향 따라서 죽 가게 되어 있어요.

말이 참 어렵다! 쉽게 갑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이 구분되어 있는데, 여자 화장실에 가서 남자가 있는 가 찾아보세요. 없지요. 그러면 여자화장실에 가서 아주머니한테 물어보세요. 왜 당신은 남자화장실에 가지 않고 여자화장실에 갑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분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에이, 꺼져라’ 할 겁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자화장실에 가고 남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자 화장실에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자연스럽다는 것은 내가 나를 생각한 이 전부터 나를 결정짓는 것,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 나 여자로 태어날래. 엄마, 나 남자로 태어날래.’ 이렇게 건의해서 ‘가만있어봐라. 내가 네 아버지께 물어보고 알아서 남자든 여자든 결정할게.’ 그래서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법이 없어요.

남자와 여자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화장실에 가고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주체라고 하지만 본인의 결정권, 주체는 없다 이 말입니다. 없고, 판을 죽 내리면 중력이 당겨 가는대로 골이 생기는 대로 그냥 죽죽 자기 자리를 찾아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흐름이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4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어떤 때는 설교를 한 11시 30분에 시작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이 한 번 되풀이 하면 됩니다. 처음에 모든 것이 시작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은 내 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내 몸이 있는 것도 줄줄 흘리면 그냥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으로서 날 만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나는 자연스럽게 어디서부터 어디로 흘러갑니까?’ 이렇게 물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나는 전도했습니다. 나는 헌금했습니다. 나는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이렇게 나는, 나는, 하지 말라, 이 말이지요. 자꾸 물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관찰하면 안 되고, 주님이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여, 저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흘러갑니까?’ 라고 물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나는 주체가 아니고, 주체는 따로 있고 나는 주체에 의해서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고 액체에 불과하고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 3절, 4절의 말씀이에요. ‘만물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는 거예요.

참 쉽지요. 저도 이것 아는데 수 십년 걸렸는데 쉽기는 뭐가 쉬워요. 요한복음 1장 3절에 나와 있는데, 이걸 나와 결부해서 생각을 안 하고, ‘예수님이 아마 그럴 거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 성경말씀이 이 말씀대로 나를 다루겠다는 것인데, 우리는 나를 터치하지 마세요, 해 놓고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세요. 나는 나대로 살 겁니다.’ 이러니까 성경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 누구도 포함시켜야 하느냐 하면 바로 나 자신을 포함을 시켜야 돼요. 포함을 시킬 때는 나는 여기 있다, 하지 말고 나를 마늘 부수는 데 있지요, 아니면 참기름 짜는데 가서 나를 거기에 집어넣으세요. 집어넣어서 아예 바수든지 아예 물길을 내든지 해서 아예 나, 라는 이 딱딱한 쇠 덩어리를, 차돌 같은 덩어리를 하나의 참기름 같은 흐름으로 만들어버리라, 이 말이지요.

주여, 오늘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고, 내일되면 또 내일은 어디로 흘러가야 됩니까? 다음에 또 누구를 만나야 됩니까, 라고 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 흐름가운데서 주께서 타작하는 타작마당의 원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축복했는데 축복만 한 것이 아니고, 그 축복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주를 반드시 이야기 한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했지요. 다윗 같은 경우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죄인으로 태어났군요.’ 우리는 어떤 참기름이냐 하면, 시커먼 죄인이라는 참기름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됩니다.

죄인이라는 참기름으로 태어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죄를 드러내는데 이 죄가 어떤 죄냐 하면, 시작을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부터 시작하는, ‘하나님, 저리 꺼져! 하나님, 저리 가! 나는 뭐든지 나부터 시작 하겠어’ 라고 자기부터 시작하는 그런 경향을 죄라는 이름으로 내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나부터 시작하게 되면 그 때부터 뭘 끄집어 내느냐 하면, 내 몸을 편하게 하면 그걸 축복이라고 하고, 내 몸을 불편하게 하면 그걸 저주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여기 내 몸이 있으면 그 때부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데 그 역사가 뭐냐 하면, 내가 축복받는 역사, 그리고 나를 해코지 하는 놈은 저주받는 역사, 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기서 기어 나와요.

그렇다면 바탕이 되는 것은 주님의 타작마당인데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우리도 하나님 비스무리 하게 되어서 내가 독단적으로 나만의 마당을 따로 만들어요. 이것은 내 마당이고 내 왕국이고 내 천국이고 나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나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일방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누가 결정하느냐?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왜 오느냐 하면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복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와서 신에게 따지는 거예요.

‘지난주에 복을 달라고 했는데 왜 기도응답 안 해줍니까? 귀머거리입니까? 하나님, 똑바로 하세요. 하나님답게.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나에게 축복을 달란 말이에요. 돈 좀 더 달라고? 돈 밝히기는! 더 줄게요자, 이제 복 주세요. 복 달란 말이에요.’

앞으로 일주일 안에 수능이 있잖아요. 수능 시험이 있다고요. 고 3 엄마들 전부 다 비상입니다. 생전 고 3 애한테 신경도 안 쓰다가 그 때 되면 신경 쓰는 척 하면서 지금 붙들고 있어요. 온 집안 조용히 해야 돼요. 복 달라는 겁니다.

‘내 위주로 복 다오. 만약에 나한테 이런 복을 안주면 하나님은 나에게 저주를 준 게 됩니다. 그런 저주를 주는 하나님을 나는 발길 끊겠습니다. 당신하고 상대 안하겠습니다. 나한테 복주는 하나님을 찾아서 다른 교회 가겠습니다’ 라고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자기위주의 복과 저주 때문에 오늘 누가 복음에 보면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생명 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 내려왔는데, 와보니까 뭐가 다르냐 하면, 인간들 각자 나름대로의 자기가 요구하는 축복이 있고 자기가 요구하는 저주를 각자 따로 따로 다 꼬불치고 있는 거예요. 각자 전부 다 있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결국 망해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서 발생되는 겁니다. 이스라엘나라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가 뭘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이제 우리에게 복이 오겠지’ 라고 복이 온다고 예상을 했는데, 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지가 드러나니까, 이제는 그들이 복주는 신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버리고, 이름은 여호와인데 알맹이는 바알과 자기에게 복주는, 자기존재를 크게 만드는 그런 신, 바알 신을 섬기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망하고 난 뒤에 유대민족이 그 짓을 또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직접 천지를 만드신 분과, 인간과 딱 만나게 해주니까 거기서 십자가죽음이라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다른 나라보다 자기들이 축복받았다고,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우겼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을, 이 성경책을 준 것은 …, 인간들은 자기가 흐름인데 자기 자신을 흐름인줄 모르고 딱딱한 주체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법을 주니까 ‘아, 이 법 지키면 복 받고 이 법 안 지키면 저주받으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이 법을 지킬 테니까 축복을 내 놓으라’ 고 이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석을 했는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 해석이 거꾸로 된 해석이라는 겁니다. 그 해석은 반대로 해석해야 된다는 겁니다.

법을 줬다는 그 자체가 너 자신도 모르는 ‘너는 저주 받아야 마땅함’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법을 준 거예요.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는 이 성경대로 살면 구원받겠지’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 성경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짐작도 못할 정도로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한, 축복이 합당한 사람이 아니고 저주가 합당한 사람인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와서 뭘 달라고요? 복을 달라고? ‘저 사람들은 갓 바위를 섬기는데 우리는 교회 왔으니까 저 사람과 달리 복 달라’는 거예요. 내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죽어서 천국가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네 주제를 파악하라’ 고 주신 성경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바탕자체가 복을 달라할 수 있는 권한이나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예수님께서 피를 가지고 구원한다는 말은 ‘내가 조물락조물락 거리면서 성경을 지키고 뭘 함으로써, 그래서 남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 되어서, 그래서 이걸 근거로 해서 복 얻어서 구원받는 그런 처지에 아예 있지 않고,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주여,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는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질문 형식으로 찾아온 거예요.

‘아담아, 너, 저주받아야 된데이’ 라는 식으로 먼저 말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죽은 자로서 산 자를 규정하시겠다는 겁니다. 십자가로 말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목격자로 누가가 나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말, 이것이 여러분에게 굉장히 슬픈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왜? 모든 천국 가는 사람은 이 과정과 절차를 통과해야 됩니다. 잃어버린 양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 못 받는 양입니다. 잃어버려야 돼요. 우리는 잃어버린 양이 되어야 됩니다. 잃어버린 양이 될 때, 바로 저주받아 합당하는 것, 이 저주받아 합당한 내가 그동안 멋도 모르고, 진짜 개 코도 모르고, 내가 축복을 논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내 좋으라고 하는 것인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너는 이런 인간’이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는 곁눈질 해가면서 다른 사람 보는 것으로 비슷하게 살아가다 보니까, 너도 나 누군지 모르고 나도 너 누군지 모르잖아요.

모르고 대충 대충 열심히 하면 구원되는 줄 알았지요. 십자가 피를 직접 대해 보니까, 창 자국 못 자국 직접 대해 보니까, 사람이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직접 ‘너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비로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죽은 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우리 인간이 어떤 인간이지 확정된 채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만든 역사라는 것, 그리고 주님이 만든 역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죽은 자가 됩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죽은 자가 되고, 우리가 보기에 예수님은 떠밀어서 죽여 버리고. 나보고 예수님이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 소리 했다고, 나 살고 싶어서 예수님을 떠밀어 버렸습니다.

그 소리가 맞는 소리인데, 그 소리가 우리의 진짜 모습인데.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는 기사 보고, 엑스레이 사진에 갈빗대 나온다고, ‘당신이 내 250만원 짜리 양복을 뭘 로 보고 이걸 제대로 안 찍고…’ 하면서 귀때기 때립니까? ‘어이, 기사! 여기 내가 입은 양복이 안 나오는데요? 사진 잘못 찍었으니까 새로 찍어. 포샵을 해!’ 이럽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래서 너는 저주받아야 마땅해’ 라는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십자가로 들이대는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최초로 처음의 시작을 갖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야, 나의 시작은 축복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나의 시작은 내가 저주받아야 된다는 이것부터 주께서 시작하셨구나.’

우리가 저주받는 존재라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될 때,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축복 아닌 것이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라.’ 축복 아닌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몸이 아픈 것도 축복이고 몸이 해체되는 것도 축복이고 죽는 것도 축복이고 죽는 것도 잠자는 것에 불과하고.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편입이 되니까 그 때부터 우리는 십자가 안에 합류케 되고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그분의 못자국과 손자국을 보게 되고, ‘그 예수님 못 자국 누구 때문에? 저 창자국은 누구 때문에?’ 물으면 우리는 ‘너 때문에’라고 이야기 하고 그렇게 주고받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부터 내려왔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나무 생명을 우리에게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축복을 축복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철저하게 저주 받아 합당하다는 것을 만들어서, 저주받아 합당한 존재로 태어나야만 하는 거예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로 태어나서 예수님 피 덕분에 축복으로 전환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을 목격하고 증언하라고 부름받은 우리가 복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나부터 출발하니까, 우리 가정부터 출발하고, 우리 교회부터 출발하고, 우리나라부터 출발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전부 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남보다 더 뛰어나면 된다고 해가지고 ‘주여, 부끄럽지 않도록 남 보란 듯이 축복해 주옵소서’ 라고 축복의 교회들을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은 만날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교회로 가야 되는데 만날 절로 간다고. 교회 안가고 만날 절로, 절로 간다고. 여러분, 교회 다녀도 이단입니다. 교회 안 다녀도 이단이고. 교회 다녀도 저주받는 사람이고 안다녀도 저주받는 사람인데, 그래도 주께서 흐름으로 교회 다니게 하신 것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나서 ‘교회 다녀도 저주 받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진짜 교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교회 다니는 것부터 벗어나야 돼요. 아예 교회 다니지 마시고 교회가 되어서 교회에 나타나시기 바랍니다. 집에 있어도 교회, 교회와도 교회, 교회 어떤 때 안 나와도 교회, 그럴 때 여러분 속에는 여러분이 시작이 아니고, 여러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 중에 있는, 여러분들이 시작가운데 있는, 시작속의 하나의 흐름으로 여러분들이 관여하다가 주께서 한 90년 살게 하다가 부름 받을 때, 그 흐름은 이제는 주님 안에서 흘러가 버리는 흐름이 될 것입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시체놀이 하는 겁니다. 시체놀이. 정말 죽어 마땅한데 오늘도 힘주셔서 은혜 주셔서, 저주받아야 될 이 사람 은혜 주셔서 이렇게 있습니다, 라고 시체놀이 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이야기 할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 있어서 서로 마주보고 이런 것도 이게 언제까지 흐름일지 모릅니다.

주께서 이렇게 기울여 버리면, 우리교회를 이렇게 기울여 버리면 다음 주 되면 저 뒤에 앉아계신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 2일장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앞으로 죽 기울여버리면 애 하나 임신해서 어느새 애 안고 올수도 있고. 이 모든 것,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한 물컹물컹한 흐름에서 그리스도께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준 사람들의 시체들의 집합,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의 시작이 우리 자신부터 우리 가정부터 하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사람은 출생부터, 어떤 사람은 결혼부터, 어떤 사람은 취직한 것부터, 어떤 사람은 주택 장만 한 것부터 인생을 새로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작과 끝은 우리에게 남아 있을 수가 없고, 우리는 주께서 흘러가게 하신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하나의 흐름인 것을, 주께서 살아계시는 흐름인 것을, 주께서 하신 사건을 증거 하는 흐름인 것을 저희들이 맘 편하게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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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격 자 (성령의 공동집단 언어)


2009/11/04 13:41 in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김대식



성령의 유일한 언어 = 심판의 보편성인 십자가의 죽음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으심)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전 2:2, 개역)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령(공동의 집단)의 시선과 사적인 (선악) 시선



솔로몬의 지혜에 나타난 아이를 둘로 갈라서 저 쪽도 주고 이 쪽도 주라고 했을때에
이 공동의 분배라는 영의 시선에 아주 지극히 우발적으로 사적인 시선이 답변을 한다.


맞습니다. 옳으신 재판입니다. 이 쪽도 가지지 말게 하시고 저 쪽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선악을 없애 버리고 공동화 시키니 선악이 도리어 불쑥 튀어나온다. 껍데기로 포장된 법이라고 우기는 거룩을 벗겨보니 거룩이 아닌 선악의 시선이 소복히 담겨져 있다.


아이의 죽음은 처음자리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원래 없었습니다. 그 없었다 라는 처음자리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없었는데 있게 하신 분을 말하기 위한 처음자리인 빈터 곧 영의 자리 공동 집단인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은혜로 용서받은 자리인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솔로몬 왕의 재판에 나타난 지혜를 인간은 넙쭉 흡수하고 빨아들여서 자기유익으로 땡겨버리는 선악과 나무로 따먹어버립니다. 아니 따먹혀 버립니다.


맞습니다. 옳으신 재판입니다. 이 쪽도 가지지 말게 하시고 저 쪽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인간의 목적은 이것이다. 사적인 자아를 자살할때도 이 목적 뿐이다. 신에게도 못 맡기고 마귀에게도 줄 수 없는 자아만의 고유영역 그것만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재판도 심판도 심지어 구원도 성화도 천국도 자기가 자기에게 행한다.)


인간은 이 재판(지혜)에 아멘이라고 할 자격이 있는줄 착각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자격이 있는 줄 착각한다.
또 남을 판단하고 재판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는 줄 착각한다.


이 영의 일에 육이 비로소 들통난다. 참여할수 있다고 여기는 육이 드러난다.
바로 영은 그 육을 십자가에 못박아 공동 집단화 해 버립니다. 즉 삭제요 심판이다.


십자가는 바로 솔로몬의 재판의 제대로된 실행이 된, 두 어미에게만 펼쳐진 또는 유대인들에게만 나타난 지혜가 아닌 우주적으로 보편화 해 버린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시킨 통일성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갈기갈기 찢은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해
오직 그 하나님의 믿음에 참예를 한 냥 떠벌린다.
“잘했습니다. 옳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을 갈기 갈기 찢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해주시는 그 구원이 참으로 옳습니다 라고
창세전의 처음자리만 없으면 모두가 공평케 됩니다.
누가 지옥가고 누가 천국가는 그런 편파적인 불공평은 없게 골고루 보편화 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기쁘심이 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는 특권은 없어야지 하나님의 사랑이 골고루 모두다 혜택을 누릴수 있는 겁니다.
법이란 그래서 있는 공평분배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왕권수립은 바로 이런 공동분배의 정치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이 그래서 이도 가지지 말고 저도 가지지 마는 공동보편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셉에게 주어진 이스라엘의 편파적인 편애는 상대적인 10명의 야곱의 아들들 속에서 펼쳐질때는 지독한 미움으로 보편화 된다.


하늘의 편애성은 이 땅에서는 싫어버린바가 되며
하늘의 구조에서의 이미 미움받기로 작정된 자는 이 땅에서는 특정 편애의 선민과 같은 구원이나 예정된 선택처럼 또 그것을 묵시화 된 것처럼 영웅화(신화화) 된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인터넷 다음 사이트의 지식검색을 보니 지혜이긴 커녕 어리석다 라는 평가가 일반인(보편성)의 평가이다. 인간은 이 솔로몬의 지혜가 전혀 지혜롭지 않은데 성경만 우길 뿐이다.


맞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매함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상대적인 그런 인간의 보편성(보편진리화된 인간의 바벨탑의 하나됨=일치성 일방성)을 깨뜨린다.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열왕기상 4장에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단독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뭐뭐 보다 라고 차이성으로 표현된다.


(왕상 4:29, 개역)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왕상 4:30, 개역)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왕상 4:31, 개역)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왕상 4:34, 개역)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뭐뭐 보다 더 낫다] 라는 반드시 지혜는 상대적으로 지혜다 라고 자처하는 지혜 비스무리한 이미 대중(권력, 보편성, 다수, 힘, 하나됨의 일치성)에게 먹혀든 유사지혜를 동원하면서 그 속에서 독보적으로 차별화로 나타난 차이성으로써 더 나은 지혜이다.


누구 보다 더 낫고 또 누구 보다 더 나은


제사 드리는 열심에 그 제사 보다 순종이 낫고 라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진리보편성을 가지고서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혁격한 차이로써 월등하게 더 낫다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한 쪽은 안색이 아니 변하고서는 안되는 안색이 변함이 아주 마땅함이 벌어지고
또 한 쪽은 더더욱 그 간격을 벌려버리는 바로 삭제당함 곧 죽음이라는 진짜 보편성이 저쪽으로 인해서 살인을 유발케 되는 방식이 된다.


향유를 깨뜨려 값비싼 향유를 아무 가치 없이 삭제 허비 시키는 그 여인의 무모함에
일제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노를 표출한다.
보편적진리를 거슬렸고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있는 자리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이 생생하게 펄펄 살아있는 그 현장인 법의 자리 코 앞에서 펼쳐졌다.


모두다 버럭 의로운 분노로써 법의 짱돌을 들고 우르르 달려든다.


이건 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용서 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발가벗겨버리고 까버린다.
집단적으로 확 달려들어서 삿대질 한다.


똥 - 덩 - 어 - 리


강마에의 독선 보다 더 날썬 검으로 두 조각 짤라버린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정도의 위치에 선 모양이다.


똥덩어리 어떤 구석에서도 낯짝들지 못하도록 그녀가 한 행동을 제대로 밟아버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보다 더 뛰어난 나은 행동 있으면 나와봐? 라고 뻔뻔스럽게 뭐뭐 보다 낫다 라고 하신다.


(마 26:1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뭐 보다 낫길래?
온 천하 보다 낫단다.


솔로몬의 지혜를 어리석다 라는 현대인간의 주장에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을 이 여인에게 까지 심으셔서 양보없이 절대 한치의 양보없이 펼치신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참예한 행동이다. 이것 보다 더 영적인 언어가 어디 있으랴? 어떤 인간의 육의 언어에도 해석불가인 이 여인의 행동이 어디 있으랴? 솔로몬의 지혜? 해석불가이다. 심지어 유대인들 조차도 해석이 안되는 그 간격을 예수님 덕분에 좁혀지기는커녕 더더욱 그 개입이 지옥과 천국 사이에 건널수 없는 강처럼 벌어진 해석불가이다.


가룟유다의 가난한자를 위한 생각 보다 더 나은 향유를 깨뜨린 행동이 영원히 기념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결국 가난한자를 위한 죽음이다.


제자들의 가난한자에 대한 생각 보다 더 월등하게 나은 가난한자에 대한 남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의 십자가 죽음의 보편성을 인간이 되도 않는 보편성은 가로막는 방해만 될 뿐이다.


인간의 이웃 용서? 가난한자에 대한 이웃 실천? 다 악마적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에 왜 꼭 어리석다 라는 의미가 왜 붙는지 모른다.


뭐뭐 보다 낫기 때문이다.
결국 낫다고 여기는 것을 인간들은 다 끌어모을 수밖에 없는 그 열심들을 유발케 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바로 이런 보편성을 일방적인 불공평인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로 그것도 유대인 선민이 아닌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더러운 똥덩어리 부정한 인간 중에 부정한 인간들만 골르고 골라서 그런 불가능한 용서를 개같은 이방인을 통해서 인간 속에 하나됨으로 이루어진 보편적진리성 곧 인간 자체라는 바벨탑을 뻥뻥뻥 구멍 뚫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해방이라고 한다.


구멍을 뻥뻥 뚫어서 빛의 아들들의 보다 더 나은 지혜를 종말이라는 다미리로 쭈우욱 펼치는 공평성이 도리어 첫째아들에게 불공평스럽게 다가올 정도로 너무 너무 공평하게 불질러 다리미질로 지워버리고 삭제해 버린다.(불의한 청지기는 바로 이 공동집단적 세계인 성령의 세계 불의 세계 심판의 세계 종말의 세계를 미리 앞당겨 대비하는 지혜를 펼친 종말의 대비이지만 정작 빛의 아들이라는 자들은 종말을 볼 줄 모르는 헛 똑똑이 였던 것이다.)


세상에 저런 놈도 용서 받았다니 말이 돼?
말이 안되니까 은혜이지 땡 잡은 것이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외칠 수밖에 없다. 저런 원수도 종말의 심판 속에서 건져졌다고 아이고 부러워라 라고, 죽음이라는 보편성 속에 지옥의 불이라는 보편성 속에서 건짐 받았다면 다 받은 것이다. 이제 왜 누가 건졌는지? 누가 대신 지옥 불구덩이 속에 있는 나에게 뛰어들었는지?
그 외부인을 보도록만 눈뜬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요 성령의 언어인 성경이다. 사적인 구원 사적인 성화 자체를 챙길수 없는 오로지 나 아니요 그분에 대해서만 증거하는 집단의 공동 언어요 찬양이다.)


오 해피 데이 구원의 날이요 해방이요 은혜의 날인 희년이다. 온 몸에 퍼진 종기를 또 암덩어리를 감당할 길이 없었는데 아니 아예 사로잡혀 버렸는데 누가 와서 흰눈 같이 희게 다리미질로 쭈욱 펴버리게 되니 울퉁불퉁한 종기가 뻥뻥뻥 뚫혀버리니 먹보다도 더 검은 죄가 흰눈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말도 안된다 말도, 심각한 어두운 공포 영화를 누가 채널을 휙 돌려버려서 갑자기 감사와 기쁨 뿐인 감동의 영화로 채널을 돌려버린 것이다.


슬픔 대신 화관(축하드립니다 합격이시네요)을
재(불에 다 타버린 찌꺼기 흙먼지) 대신 희락(휴 타 죽을뻔 했네)을
근심대신 찬송 찬양(노래 부르는 군대 - 사적인 노래가 일체 없는)의 옷을 입히시는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평준화 공동화 해 버리는 뚫어버리는 구원의 뿔의 등장이다.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전쟁이요 넉넉한 이겼음을 확인하는 희년이다.


(사 61:1, 개역)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개역)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4, 개역)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 61:5, 개역)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사 61:6, 개역)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사 61:7, 개역)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사 61:8, 개역)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예수님은 이 희년을 전쟁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희년을 선언하고 승리를 선언하고 들어가신다. 이겼다 라고 완료로서 선포하시고 적진으로 뛰어드신다.


이 승리에 더 이상의 미흡함이나? 더 보탤것이나 더 첨가시킬것이 아예 없이 완료 그 자체만을 증식 시킨다.
손댈 필요 조차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용서하셨다. 그야말로 값없는 은혜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인위적인 성형수술을 성화론이라는 정당성으로 추구한다. 자꾸 손댄다. 자꾸 얼굴을 천사처럼 흑인을 백인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인위적으로 손대며 조작한다. 천사도 흠모하는 이미 신부인데 자꾸 신부 보다 천사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성형수술 하는 가면을 위선적으로 갖출려고 한다.)


이제 확인 할 것은 매일 매일 박살나는 것들만 보면 됩니다.
(아이구 내 속에 이런 죄도 숨어 있었구만 하며 박살나는 현장을 목격하는 용서 받는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 처음자리 빈터 뿐이다.)


주인공이 지나가는 자리에 그런 흔적을 목격하게 된다. 뭔가가 지나가는 자리에 영화 품행제로에 나오는 장면처럼 유도부 집단이 그 골목길 집 주변의 집 지붕위에 덩치큰 놈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말도 안된다.


맞다 말도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확인 작업에 동원이 된다. 우리 자신도 나가 떨어지는 추풍낙엽이 되는 신세가 되어 허리 뿌라져 절뚝절뚝 거리며 얍복강가의 야곱처럼 확인을 당할 수밖에 없는 빼도박도 못한 입장에 놓인 것이다. 구원의 뿔에 뻥뻥뻥 뚫혀버리도록 되어 있다.


비로소 그 틈 사이로 이 눈에 보이지 않던 실상을 보게 된다. 믿음이다.
믿음이 사적인 아닌 예수님의 세계 집단 세계로써 덮쳐서 하늘의 구조를 보게 된다.
우리는 비로소 옆으로 서서 뭔가가 통가하는 통로 가스배관이 된다.
이 공동의 언어인 성령의 언어만 냅따 실어 나르는 배달관일 뿐이다.


가스배달하는 자를 이 세상은 미워하지 않는다. 이 땅에 침투한 독가스, 십자가 가스, 성령의 불 까스를 이 땅은 미워한다.


아니 가스가 이 땅이 가스를 미워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 통로를 짜르고 단절 시키면 오히려 두 줄기가 되어 더욱더 확장 된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손해다. 통로가 분절이 되어 두 통로가 생겨서 확장 증식되기 때문이다. 몇배로 몇배로 증식만 부추길 뿐이다. 죽음에 넘기우면 넘기울수록 더 창조가 드러난다.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하나된 자아 곧 사적인 하늘의 문인 요새 캐슬 철벽성전을 삭제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로 그 원수의 성문을 열어재껴서 인간들이 막아 놓은 심판의 문을 활짝 열어
그 뜨거운 용암의 화산으로 인간들이 정성껏 갖춘 그 사적이고 개별적인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고 평준화 시킨다.


종말에 부어 주는 그 약속한 성령 (원수의 성문만 골라 찾아간다.)


차별없이 개인차이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부자나 가난뱅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안 따진다.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욜 2:28-32)
불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안 따진다. 심판은 목사라고 안 비켜간다.
오히려 은사란 목사이기에 더 밟아 버린다. 남들 보란듯이
불은 안 가린다는 것을 더욱더 잘 보여주는 먼저 매 맞는 특권이 바로 은사다.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만 빠져버리고 (빛의 아들들)
도리어 불의하기 짝이 없는 청지기가 먼저 매 맞는 특권을 누렸고 왜? 저들이 싫어버려 차버려서 그 처음자리(고아 과부 나그네의 첫사랑)가 넘어간 것이다.
또 향유를 깨뜨리는 여인이 먼저 매 맞는 특권을 또 누렸고
원가지는 짤려지고 죽은가지들이 접붙임 당하게 되었다.


원가지들인 우리가 안 도와 주면 하나님도 안 움직일 것이다는 그 편견을 무너뜨린 것이다.


차라리 돌들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도끼를 나무 위에 두는 것이다. 종말이요 이미 완료인데 건방지게 이 완료를 더더욱 완료 답게 해야 한다는 둥 보충하겠다는 둥 그 딴 소리를 못하게 단절성으로 심판성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도리어 삭제 안당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끝났는데 철거를 안 당하는 것이 이상하다. 남아서 교회 하겠단다? ㅋㅋㅋ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어서 재가 안되는 것이 더 이상하다. 더욱더 활활 타올라서 모조리 삭제한다. 먹보다 검은 죄도 삭제하고, 예수님이여 예수님이여 제가 이런 계명을 지켰다고 이웃사랑 실천하고 7 곱하고 70 인 안식을 완료하는 평강을 외치고 용서를 실천했다 라는 것 조차 모두 불에 집어 넣는다. 과연 불 속에서도 안 타는지 타는지? 다 홀라당 탈것 같으면 가짜요 우상이다.


진짜 기념되는 것은 예수님의 장사함에 뛰어든 여인만 불에 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가짜인지 진짜인지 정금인지 도금인지 알려면 긁어보자


불에 집어 넣어보자 공동적인 것이 나오면 성령의 것으로 난 것이고
불에 집어 넣어보니 사적인 것으로 나오면 아무리 하나되자? 공동보편적 진리를 갖추고 행했다 라고 우겨도 성령의 것으로 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 훼방자 이다.


우리 또한 우리 스스로 불 속에 늘 당하는 일 뿐이다.
사적인 것이 불 태워지고 진짜 정금만 소복히 남는 그 남아 있는 것만 쳐다 보면 된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이 보물만 중요하기에 마음 놓고 솔로몬은 두 패로 갈라버린다.
가르면 양쪽 부모가 튀어나온다.
두 배후 세력이 나온다.


긍휼의 사랑인지 완악한 법인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에게 뛰어드는 자신을 삭제하는 내어주는 사귐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행악자에게 뛰어드는 심판(대신 저주 받으심) 이다.


열매란 나무의 드러낸다.
앞으로 이런 이런 열매가 되어가면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나무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있다.


그래서 불에 열매를 미끼로 던지면 도저히 가려낼수 없는
해석불가인 숨은 정체, 누가 이 열매의 나무인지 인간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풀수 없는
하늘에서 매인 매듭을 하늘이 집적 그 불 속에 뛰어들어서 푼다.
숨어있던 나무의 정체가 누가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드러났음에도 부정해 버리는 그 숨어 있는 정체가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악마는 벗겨진줄도 모르는 가면을 여전히 쓴줄로 알고
법의 공의성에 동참하며 얼쑤 훈수를 뜨기 시작한다.


(왕상 3:16, 개역)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왕상 3:17, 개역)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왕상 3:18, 개역)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왕상 3:19, 개역)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왕상 3:20, 개역)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왕상 3:21, 개역)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왕상 3:22, 개역)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매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상 3:23, 개역)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왕상 3:24, 개역)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상 3:25, 개역)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왕상 3:26, 개역)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상 3:27, 개역)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왕상 3:28, 개역)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성령의 공동 언어에 마치 정의인냥 공의인냥 거들어 나서는 사적인 언어를 펼치는 육의 언어가 반드시 그 차이를 드러낸다.


도리어 공동언어인 성령이 임한 자는 마음이 불붙는 듯 하여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심판 의 불 앞에 무능함을 보는 것인데


육은 그러하지 못하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바로 이 육의 언어를 파하고
성령의 언어로 이미 심판 받은 죄인을 찾는 것이다.
고아 과부 나그네인 첫사랑 처음자리 빈터를 찾는다.


아니 이미 승리했고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연속적으로 증식하는
다시 흩뿌려서 숨박꼭질의 사랑의 넉넉함으로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것이다.


놀랍게도 엉뚱한 자들이 자녀라고 했고
도리어 자녀는 나 자녀 될 자격 조차도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런 고백이 솔로몬이 구한 그 십자가의 긍휼이 바로 주의 마음에 어쩜 그리 딱 맞는 성령의 언어 공동집단적 언어이다. 사적인 언어가 아무리 조직화 하여 공동보편적으로 하나로 갖추어도 그 사적인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상 3:10, 개역)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개역)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 3:12, 개역)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 3:13, 개역)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 3:14, 개역)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 3:15, 개역)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바로 이 지혜에 솔로몬이 아닌 예수님이 직접 올인하고 뛰어드신다.(솔로몬 숙제가 아니다 솔로몬 조차도 소외이다. 도리어 누가 뛰어들었는지에 대한 목격자의 위치요 뛰어드신분 때문에 건짐받음 당할 건지시는 분의 목격자일 뿐이다.)


(왕상 3:4, 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 3:5, 개역)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 3:6, 개역)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개역)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개역)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개역)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이다.


이제 이 십자가에서 피 외에 어떤 것도 용납이 되지 않는 양보없는 성령의 소욕을
육의 소욕과 대립시켜서 그 차이성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이미 완료된 넉넉한 승리의 전리품인 성령의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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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 중에 솔로몬의 지혜가 정말로 최고인가?]


인터넷 다음 지식검색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FC001&qid=3SLFn&q=%BC%D6%B7%CE%B8%F3%C0%C7+%C0%E7%C6%C7&srchid=NKS3SLF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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