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목사에 대한 비판 -김문 씨의 글
이근호 목사의 신학에 대한 비판
- “십자가를 아십니까?”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
필자는 며칠 전 평소에 존경해왔던 스승으로부터 필자 자신이 배운 개혁신학을 가지고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에 이근호 목사의 신학체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듣게 되었고, 이근호 목사의 신학체계에 대한 필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성을 느꼈다. 혹자는 이근호 목사가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그의 저술이 방대하여 일일이 다 읽어보기 힘든 상황에서 그의 신학체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서적들을 대강 훑어본 바 그의 신학적 입장은 편협되고 독선적이면서 배타적인 성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는 교회사와 신학사를 무시하며 기존의 신학체계가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체계를 수립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단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어도 그의 편협된 신학적 입장은 통합적인 시각이 아닌 어느 한 가지를 강조하면서 나머지를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 가지를 강조함으로 인한 단순성과 신학을 풀이함에 있어서의 철학적 기교는 그의 신학에 매료되게 하지만,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신학적 입장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에 그의 책 “십자가를 아십니까?”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통해 이근호 목사의 신학체계의 일부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
1. “들어가는 말”에서 보여지는 이근호 목사의 교회에 대한 탈조직화 경향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는 기성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공교회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그는 기성교회의 일체 전도 프로그램을 십자가의 원수로 간주하면서 “어수선한 전도 바자회 대신 십자가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직적인 형태를 띤 교회의 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이러한 조직을 생산해내는 인간 본질에 대해 “인간은 악마의 대리인들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인간을 과연 이렇게만 볼 것인가?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정통신학에서 인간론은 타락한 인간과 함께 창조된 인간과 구속된 인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는 이 중에서 유독 타락한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심지어 교회를 조직화하는 인간의 노력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그러한 선한 열심을 가진 교회 직분자의 교회 회원권마저 박탈하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 봉사를 전혀 안 하게 되면 어떻게 교회를 운영시킬 것인가에 걱정이 되는 목사나 장로가 있다면 그 사람들도 역시 딴 동네에 존재하는 자들이다(딴 동네라는 표현은 교회 울타리 밖이라는 의미로 사용됨).” 더 나아가서 그는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나라를 긍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늘나라를 거부하는 몸짓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근호 목사가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는 “복음이 종교단체를 죽인다.”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조직교회에 복음이 담기지 않는다면 복음은 도대체 어디에 담긴다는 말인가? 고금이래로 복음이 조직교회에 담겨져서 전수되어 왔다는 것은 교회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성경이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할 때, 이것은 바로 사도적 교훈을 전파하는 조직교회를 가리킴이다. 그리고 범죄한 교인에 대한 교회의 치리를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 18:15-17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것은 바로 치리회가 있는 조직교회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를 조직화하신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탈조직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2. “십자가와 예배”에서 보여지는 이근호 목사의 교회론과 율법관의 오류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의 교회에 대한 탈조직화 경향은 그의 예배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인데, 교회가 공동체화 되는 것을 반대하다 보니 그의 교회론은 유형교회가 아닌 무형교회로만 머무는 것이다. 그는 예배하는 성도가 집단화된 단체가 되는 것에 대해 타락한 인간의 ‘자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는 “인위적인 팀 구성은 그리스도 몸의 하나 됨을 공격하는 최후의 적인 우상”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교회공동체 예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말대로 유형교회가 무시된 무형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현실의 교회는 철저히 유형교회이며, 무형교회는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현실의 교회에는 양과 염소가 섞여 있다. 바울이 말썽 많고 불완전했던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을 아낌없이 썼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근호 목사의 교회론의 오류는 ‘무형교회’라는 용어와 관련된 신학과 교회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교회는 철저히 유형교회이며 조직화된 교회이다. ‘무형교회’라는 용어가 생기게 된 것은 유형으로 조직화된 교회였던 중세교회가 타락하여 교회의 역할을 못하고 있었지만 개혁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가 유형화되지 않았을 시점에 개혁자들의 입에서 “보이는 교회가 교회 아니라”는 말이 나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혁교회가 유형교회, 조직화된 교회가 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무형교회’라는 용어는 사라져도 될 것이다. 가령 이근호 목사가 말하는 예배 공동체(공동체라는 말 자체가 그의 주장에 있어서는 모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천상의 천사들에게서나 찾아야 할 것이다.
이근호 목사는 참된 예배의 반대 개념을 “율법적으로 드리는 예배” 혹은 “형식적인 예배”로 설정하고 있다. 그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율법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진리 안에 들어오면 더 이상 율법의 간섭과 통제와 무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한 이근호 목사의 부정적인 관점을 접할 수 있는데,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가 율법주의적으로 드려져서는 안 되지만 성경은 예배와 관련하여 탈율법이나 탈형식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통신학에 기초하여 예배학을 수강한 사람이라면 성도의 예배가 율법에 의한 형식으로서의 예배가 되어야 함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주의나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예배에는 분명히 율법과 형식에 따른 요소가 있다. 참고로 구약이 말하고 있는 성경적인 예배는 철저히 율법과 형식에 따른 예배였다. 그리고 과연 ‘율법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근호 목사는 율법의 세 가지 용법들 중에서 유독 율법의 소극적인 면에만 집착을 가지는데,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율법이 감사의 법이요 사랑의 법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개혁신학은 구약과 신약을 구원역사적으로 보기에 루터파적인 율법/복음의 구분을 극복한다. 물론 개혁파도 이런 구분을 알지만 은혜언약 안에서 약속과 요구는 동행하고 있음을 바르게 강조한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복음이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복음적인 예배는 율법과 형식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
3. “십자가와 기도”에서 보여지는 이근호 목사의 기도론의 오류에 대하여
이상에 언급된 이근호 목사의 신학적 입장에서 출발점이 되는 것은 인간이 철저히 죄인이라는 그의 인간론이다. 그는 신앙인의 기도에 대해서도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시작하여 풀어가고 있다. 그는 우선 “기도는 인간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역사에서 귀납적인 방식으로(잘못된 접근) 기도의 의미를 찾고 있다. 정통신학에 근거한 기도론은 신앙인의 기도를 구원받음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는 다르다. 그는 “기도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난 뒤에 결핍에서 고통의 표현방식이다.”라고 함으로 ‘불신자의 기도’(용어 자체가 모순)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서 ‘의인의 희생’을 요청하는 히브리민족의 부르짖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서 기도의 의미를 찾고 있다. 그리고 말세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도와 관련하여 “택한 자의 원한, 이것이 종말 시의 기도의 요건”이라고 하면서 환원적으로 기도를 탄원 기도에 제한하고 있다.
이상에 언급된바 성경 역사 속의 각 시대의 특징을 기도와 관련짓는 것은 얼핏 보기에 이근호 목사가 기도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정의하려는 노력으로 보이지만 이상의 개념은 기도를 현실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으로 배제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근호 목사는 구원 역사의 상황을 탄원 기도와 연결 지으면서도 시편에서 특정 인물인 다윗이 실제 상황에서 했던 탄원 기도에 대한 언급을 피함으로 나무를 무시한 숲을 말하고 있다. 그의 시각에서 현존하는 나무는 부정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 숲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나무를 묻어둘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기도는 구원 역사 중의 어느 한 시대의 특징과 연결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가운데 살았던 구원받은 성도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실존적인 은혜의 방편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의 기도에 대한 개념은 앞에서 언급된 교회와 예배의 개념에서처럼 실천 사항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그는 기도에 대한 성경적이고 이상적인 기도라는 막연한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기성교회의 성도의 기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한마디로 이근호 목사의 눈에 비친 유형교회에 속한 모든 요소들은(기도를 포함하여) 암울할 뿐이다. 그는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욕대로 잘못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를 ‘불신자의 부르짖음’과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는 완전히 다르다. 불신자의 기도는 아무리 바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도 기도가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있어서 기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의 기도는 아무리 정욕으로 잘못 구하더라도 분명히 기도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성화가 덜 되어 정욕 때문에 잘못 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도가 구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로마서 8:26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계속하여 보자면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기도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십자가와 헌금”에서 보여지는 이근호 목사의 그릇된 성경해석 방식과 탈의식화 경향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 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마태복음 6:24의 말씀을 헌금과 연관 지어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데, 앞뒤 문맥이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해석 방식에 따를 때, 이 말씀은 전혀 헌금과 연관 지을 수 없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20절에 의하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헌금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누가복음 12:33에 명시되어 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눅 12:33) 즉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교회에서의 헌금이 아닌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9:21에서도 이는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늘의 보화가 교회에서의 헌금이 아닌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임을 분명히 하셨다.
계속하여 이근호 목사는 부자청년이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것에 대해 “그 청년이 갖고 있는 선에 대한 인식은 돈의 노예된 상태에서 도출된 선 개념임에 틀림없다.”고 단정 지으면서 “돈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주제에 무슨 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라는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언급하였다. 그러나 문맥을 조금만 살펴본다면 이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구절임을 알 수 있다. 부자 청년은 적어도 부자의 신분으로서 늘 가난한 무리와 동행하는 예수님께 공손히 구원의 길을 여쭐 만큼 돈의 노예로 있지 않았으며, 그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과연 생계수단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될지를 고민하면서 돌아갔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헌금에 인색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질타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해 언급하셨다. 23절에 의하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이근호 목사의 말대로 이것이 헌금에 관한 말씀이었다면 헌금을 잘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도출되는 것이다.
물론 이근호 목사는 성도가 하나님께 헌금함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심이라는 보편적인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 이상의 성구들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낌없이 헌금하는 성도의 헌신에서도 문제점을 찾고 있다. 그는 십일조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이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복의 계통을 보여주는 법”이었는데(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헌금을 통한 인간의 감사 행위에 대한 언급은 왜 없을까?), 이러한 복 개념은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복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되신다.”고 함으로 맹목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으로 십일조의 율법적인 의미를 흐리게 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십일조를 철저히 할지라도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린 바리새인의 십일조가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인용하면서 본질이 빠져버린 기성교회 성도의 십일조에 대해 책망할 뿐만 아니라 더 극단적으로 율법에 따라 드리는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라는 의식 자체를 부정하신 적이 없다. 단지 본질이 빠진 의식을 질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본질과 함께 의식도 요구하셨다(눅 11:42b). 그러나 이근호 목사는 신앙의 본질이 빠져버린 십일조라는 의식을 질타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본질이 의식을 대체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가 “십일조와 헌금 행위가 복음을 망치는 짓이 된다”고 언급했듯이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복음을, 의식은 본질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누가 의식이 없이 본질을 담을 수 있으며, 율법의 행위 없이 복음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이근호 목사는 이 땅에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무형의 개념들만 골라서 말하고 있다.
5. “십자가와 주일성수”에서 보여지는 이근호 목사의 교회사와 교회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에 대하여
신앙의 의식적인 요소들과 교회의 조직적이고 유형적인 요소들을 경시하는 이근호 목사의 편향은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예수님께서 특정 날을 꼭 지켜야 한다고 계명으로 남긴 적이 있던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역사에서 고금이래로 지켜져 온 주일성수라는 시간개념 자체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일성수를 하고 있는 지상의 공교회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근거로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을 언급함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의 사역을 감당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시간 개념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출애굽기 20장의 안식일 계명은 덮어두고, 다른 설명(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관점에서)을 제시하고 있는 신명기 5장의 안식일 계명만 선별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안식일 혹은 주일이라는 시간과 날자는 이 땅에 속한 의식을 철저히 거부하는 이근호 목사에게 있어서 껄끄러운 것이기 때문이리라고 짐작된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 땅의 시간과 역사의 무상함에 대한 이근호 목사의 철학적인 기교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이근호 목사는 역사에 속해 있는 인간이 객관적으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역사에 대한 불가지론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역사란 허구이다. 오직 실재하는 것은 인간과 그리고 그들이 저질러 놓은 문화와 문명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근호 목사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 개념을 기독교인의 역사관으로 수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는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에 속한 것으로서 거듭난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가능한 것이요 실재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2-4)라고 했다. 이처럼 분명히 실재하는 것을 ‘허구’요 베일에 가려 희미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쩌면 이근호 목사가 이 땅의 유형화된 요소들을 인정하지 않는 자신의 신학적인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간주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신앙을 초역사적인 요소로 간주하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시간계를 배척하신다는 그의 주장에 근거한다(필자는 그에게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언급된 ‘시간의 철학’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근호 목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심판은 시간계를 끝내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에 대한 파산선고”이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시간계를 죽이시는 분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시간계를 인간들이 되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시간과 역사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들이 과거의 유물과 문화를 모방함으로써 계속 하나님의 인정받는 교회로 남겠다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에 기반을 두지 않는 신앙이 가능한가? 필자는 이근호 목사가 과연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의 사람인지가 의심스럽다. 성경은 역사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성경 이해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만, 이러한 성령님의 조명과 감화는 성경기록 당시의 역사와 문화적 상황을 간과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신뢰는 곧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구원적인 신앙은 반드시 역사적인 신앙을 기반으로 하게 된다.
주일성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초대교회가 주의 날을 지켰음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 역시 그의 계시록에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계 1:10).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의 의미이다. 종교개혁 당시의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는 이근호 목사와 같이 주일성수라는 단어가 성경에 문자적으로 등장하는지만 살펴보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을 최상의 권위에 두되 교회의 역사와 전통과 교부들의 문헌에서도 배워야 한다. 루터나 칼빈은 “오직 성경”의 기치를 내세웠지만 교회의 역사와 전통과 교부들의 문헌을 무시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것들을 수단으로 하여 성경의 권위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의 “오직 성경”에 대한 오해는 주일성수 개념이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언급되었는지 아닌지만 살피면 된다는 식의 오류를 빚게 되었다. 그는 “도대체 주일성수라는 율법이 나올 구석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4계명을 폐하셨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성취자로서 안식 후 첫날인 부활의 날을 주일로 지키게끔 성령을 통해 교회사에 섭리하신 것이다.
6. “십자가와 상급”에서 보여지는 이근호 목사의 그릇된 성경해석 방식과 탈의식화/탈율법화 경향에 대하여
헌금에 대해 설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급에 대해 설명함에 있어서도 이근호 목사는 성경의 역사를 열거하면서 그 속에서 상급의 의미를 찾고 있다(역사 자체를 무시하는 그에게 있어서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급에 대한 그의 개념에서 우리는 별로 문제 삼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해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들이다. 즉 가나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신명기 9:5-6이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그러나 이근호 목사는 이러한 보편적인 해석을 외면하고 가나안 전쟁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의미를 도출하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전쟁을 통해서 획득되는 전리품은 모두다 하나님의 희생의 결과이다. 거룩한 죽음 안에 있는 생명이, 기존의 생명을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땅을 누릴 자격을 갖는다. 생명의 흐름은 희생정신을 보이는 쪽으로 물꼬가 트인다.”고 하였다. 이근호 목사가 어떤 취지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성경 본문에서 이미 드러난 보편적인 교훈에 만족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은밀한 의미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고금이래로 교회는 항상 성경을 통해 보편적으로 공개된 진리를 말해왔다. 본문의 배후에 감취어진 은밀한 교훈을 추구했던 것은 항상 이단들이나 사용해왔던 방식임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근호 목사는 ‘상급’과 관련하여 창세기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 야곱이 천사와의 씨름에서 축복을 간구한 이야기에 있어서도 그는 야곱과 씨름하였던 천사가 바로 과거 벧엘에서의 꿈에서 야곱에게 내려왔던 그 천사 중 하나라고 단정 짓고 있다. 그런데 벧엘에서의 꿈을 주신 하나님과 천사와의 씨름을 통해 복을 주신 하나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게 중요하지, 왜 이 천사가 그 천사여야 하는 게 중요한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중 자신의 힘의 근원을 빼앗기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했다고 하는데, 성경을 조금만 살펴봐도 전혀 이런 내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뱀에 대한 해석인데, 이근호 목사의 표현에 의하면 “뱀은 인간세계를 선악의 체제 위에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성공을 거두었다. 선악 체제란 은혜의 체제를 붕괴시켜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의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뱀으로 등장하는 사탄은 인류에 대해 무엇인가를 시도하여 성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선악 체제라는 것의 기준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시는 것이 선하며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는 것이 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 체제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은 체제 자체를 싫어하는 이근호 목사에게 있어서는 이상한 해석이 아닐 것이다. 그는 심지어 “주님의 희생을 거부하는 자들은 계속 법을 고수하고 선악 체제를 지탱하려 한다.”는 말로 탈체제화/탈율법화의 경향을 보이기까지 하는데, 성경은 전혀 이것을 말하지 않으며, 암시하지도 않는다. 만일 선악 체제상에서 인간이 무엇이든지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의 말대로 사탄이 세워놓은 체제하에서의 자연인의 삶의 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7. “십자가와 전도”에서 보여지는 이근호 목사의 십자가 신학의 오류에 대하여
전도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의무이다. 사도행전 1:8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을 의미한다. 전도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증인인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먼저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자라야 한다. 그런데 이근호 목사는 전도의 의미를 유독 십자가의 죽음에서만 찾고 있다. 그는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도 같이 전해야 한다.
한편 이근호 목사는 오직 십자가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설명하면서 이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하여 함께 죽어야 할 요소들을 열거함에 있어서 자신의 신학에서 폄하하고 있는 교회의 조직화나 체제나 율법과 같은 것들만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요소들에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을 말함에 있어서 이근호 목사가 구원이 필요한 구체적인 인간의 본질을 말함이 없이 인간이 소속된 조직이나 체제나 율법과 같은 것을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신학에서 폄하하고 있는 유형의 조직이나 인간의 체제나 율법 같은 개념들을 십자가의 죽음 아래 십자가를 도구로 하여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십자가의 대속을 필요로 하였다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면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위치해야 할 대결구도 속에 인간의 조직을 위치시키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기존의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고 자부하는 유대교라는 조직체와 대결구조를 가졌다.” 그리고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을 죽게 한 죄는 바로 바리새파 종교단체와 같은 그 당시의 인간 조직이었다. 그는 조직에 대해 말하기를 “조직은 힘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힘을 숭상하려고 그 조직에게 경배한다.”고 했다. 심각한 것은 그가 이 ‘조직’에 기성교회의 교회조직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말씀의 세속화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조직체의 가르침으로 전환시킴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고 하였다. 이 말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조직화된 교회 자체가 세속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전도는 무엇인가?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그가 십자가를 도구로 하여 죽이려고 하는 조직체가 파괴되는 것이 곧 복음이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전도란 교회 자신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도는 무엇인가? 아니 전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전초기지로서 전도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교회가 죽는 것이 전도라고 하는 이근호 목사의 말은 칼로 자기 배를 찌르는 논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만 알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종교 조직체를 필요로하는 심보는 어디서 온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조직과 전도의 대결구도에 대해 부언설명하기를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우심을 받았지만 역시 허물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전도”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이근호 목사의 성경 해석의 오류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이지 복음(조직의 멸망을 보여주는 복음)이 아닌 것이다. 가령 이근호 목사의 교리에 빠진 사역자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사역한다면 그 사역 자체가 가능할까? 교세 확장을 탐욕으로 정죄하는 자가 과연 그리스도의 온 양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이상의 평가를 통해 볼 때, 이근호 목사는 기독교 염세주의자이며, 그가 주장하는 교리는 조직교회의 힘을 빼앗아가는 바이러스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교리는 특히 조직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선교사나 박해 가운데서 교회 조직을 갖추지 못한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미혹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교리이다. 또 신학을 풀이함에 있어서의 이근호 목사의 철학적인 기교는 누구라도 현혹시킬 수 있는 정도의 것이므로 우리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미혹되지 말라는 골로새서 2:8의 교훈을 더 한층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개혁신학의 교회론에 비춰볼 때, 이근호 목사가 이단과 같이 경계해야 할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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